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
무라카미 류 지음, 김춘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류 아저씨 책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몇년 전에 [In the Miso Soup]을 읽은 후로 단 한권도 읽지 않았다.

[In the Miso Soup]은 읽은 후로도 며칠간 불쾌함이 남는,
찝찝한 공포영화 같은 소설이었다.
영화 [8mm]를 봤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8mm]는 여태까지 내가 본 최악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거의 한달간 지나가다가 극장에 걸려있는 그 영화
간판, 포스터만 봐도 오바이트가 쏠리는 것 같았다.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은 무라카미 류의 "연애론"이라기에,
여자의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기에 한번 읽어봤다.
최소한 에세이니까 끔찍한 내용은 없을꺼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 책의 원제는 [誰にでもできる恋愛].
그대로 번역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
이 제목은 무라카미 류 연애론의 핵심이다.
왜냐면 내용 자체가 연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책 제목은 이런 내용의 "반어적 표현"이라고 수차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웅진에서 이 책 제목을 왜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가 제목 자체로도 더 도발적이고,
본문에서 계속 제목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글 번역본 제목은 뜬금 없이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이니....
사실 번역 소설들 제목 이상한거 너무 많다.

이 책...참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무라카미 류가 "재수 없게"보이기도 한다.
텍스트 내용과 별 관계 없이
나는 지금 이탈리아 어디에 있다,
나는 지금 쿠바 어디에 있다 하며
별 다섯개 짜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고
비싼 와인을 마시고,유명한 사람을 만난다는 자랑이 계속 된다.

만약 뭐 하나 건질 것 없이 허접한 책인데
이런 자랑만 계속된다면
이 책을 확 집어던질 수도 있겠다.

몇년 전에는 "여자의 경제적 자립"이 연애의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이 참신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이제는 상식적인 얘기가 되어 버렸고
무라키미 류의 연애론이 관심을 끌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 같은 건 없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마찬가지다.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인간,즉 홀로 설 수 있는 남녀에게만 연애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p13)

이런 말 한두번 들어보나?
그리고....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의존적인 사랑은 서로를 피곤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건,
이 책에 "개인이 없는" 일본 사회에 대한 조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하시모토 류타로" 얘기다.

어제 TV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봤다.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영국 버밍검에서 G8 서밋(summit)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선진국 수뇌회담 얘기이다.

회의에서도 하시모토는 전혀 주체성을 발휘하는 일 없이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기뻐요'라고
흐뭇해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영국의 블레어 수상이 주최한
콘서트의 영상을 봤을 때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콘서트장은 훌륭한 극장 같은 곳이었다.2층의 칸을 막은 귀빈석 같은 장소에 클린턴이랑 블레어랑 하시모토가 있었다.곡은 비틀즈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이었고,그 뉴스 영상으로는 누가 연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영국에는 유명한 아티스트가 많으니까 누가 연주했는가는 이 글하고는 관계가 없다.클린턴은 자기 자신이 섹스폰을 불 정도니까 힐러리 부인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블레어는 나하고 동갑인 비틀즈 세대니까 자연스럽게 즐거운 듯이 손을 두들기며 춤추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의 하시모토 류타로다.
하시모토는 아마도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몰랐으리라고 생각한다.모르니까 흥얼거릴 수는 물론 없다.그렇다면 얌전하게 잠자코 즐거운 듯이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하시모토 류타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양손은 일본의 여름 축제 때 추는 윤무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고,몸은 일본 춤을 출 때처럼 흐느적흐느적 구불거리고 있었다.끔찍한 악몽 같은 움직임이었다.
(p103~104)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하하하하하하.

하시모토 류타로가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어떻게 흐느적 거리며 음악과 따로 노는 춤을 췄을지....

그 순간의 하시모토 류타로가 불쌍한 생각도 든다.
옆에 있는 클린턴이랑 블레어가 춤을 추니까
"나도 춰야 되지 않을까...나만 안 추면 이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큰맘 먹고 춤을 춘다는게 그런 망신이었을 테고....

하시모토 류타로는 춤을 출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되고,
연주가 끝나면 박수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하시모토 류타로는 왜 춤을 췄을까?
그건....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중심이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남들이 추니까 나도 춰야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남들 다 결혼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남들 다 대학가니까 나도 가야 한다.

이런 "남들 다 하니까 나도..."가 한국, 일본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 자기 자신의 가치관 보다는 이런 사회의 급류에 휩쓸려 가는게 한국이고, 또 그 옆나라 일본 아닐까?

무라카미 류가 일본 사회를 조롱하는 얘기를 읽고 있자니 정말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았다.
개인이 없는 나라.다 함께 휩쓸려 가는 나라.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일본적 시스템은 개인을 억압한다기보다는 개인이라고 하는 개념이 애당초 상실되어 있다.모두가 어딘가 집단에 소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자기의 기술이나 재능보다도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의해 주위의 평가가 정해져 버린다.(p161)

아....."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어?" 하며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05-08-2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군요.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참 힘든 나라. ㅠㅠ 옛날에 읽은 책인데도 수선님의 리뷰를 읽으니 새록새록한데요. 다시 한 번 펴봐야겠어요. ^^

marine 2005-08-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8mm 생각하면 토할 것 같아요 전 8mm가 단편 영화 만드는 그런 건 줄 알고 비디오방에서 봤는데, 보는 내내 어찌나 불편하던지...

kleinsusun 2005-08-2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이 책 읽으셨군요.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나라....
그래서 그렇게 다들 "왜 결혼 안하세요?" 물어보나봐여.ㅋㅋ 핀란드 언제 가세요?

나나님, 8mm보셨구나....단편영화 만드는건지 알고 보셨다면 더더욱 놀라셨겠어요.정말 제가 본 최악의 영화였어요.으윽...

로드무비 2005-08-2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mm 전 재밌게 봤는데......;;;
며칠 전 이 책에 별점 두 개 준 리뷰(punk님)를 읽었어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같은 책도 이렇게 다른 리뷰가 나오는군요.^^

kleinsusun 2005-08-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8mm 재미있게 보셨다구요? 전 너무 잔인해서....
저도 punk님 리뷰 읽었어요. 무라카미 류가 하도 잘난체를 많이 해서 거기 focus를 맞추면 그냥 확 집어 던지고 싶은 책이예요. 근데...전 일본 얘기가 재미있어서요.
무라카미 류는 잘난척쟁이래요.^^

2005-08-27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