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방콕 출장.

출장 결과는...다행히 좋았다.
월요일에 출장 보고서를 떳떳하게 제출했다.
(오랫만에 칭찬도 받았다.^^)

출장 일정은 금요일 밤에 한국에 오는거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방콕의 유혹으로
하루 더 머물었다.

토요일. 12시가 넘어서, 1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신경을 많이 쓴 금요일 미팅 때문인지,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지
늘어지게 잤는데도 피곤했다.

더 자고 싶었지만 호텔에서 check out을 하고 나와야 했기에
굼뜬 동작으로 샤워를 하고
건들건들 짐을 싸서 나왔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작은 핸드백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와서
Sukhumvit을 목적 없이 걸었다.

40도가 약간 넘는 날.
정말 더웠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혼자서 Sukhumvit을 목적 없이 걸어본게 처음인 것 같다.
혼자서, 아무 계획 없이 Sukhumvit을 걸으니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보였다.

Landmark, Westin 등 온갖 특급호텔들이 늘어서 있는 Sukhumvit의 길은 아주 비좁다.
그 비좁은 길에 행상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코코넛에 빨대를 꽂아서 파는 난닝구 차림의 아저씨,
"BANGKOK" 이라고 큼직하게 써있는 허접한 면티들을 파는 아줌마,
액자에 넣은 나비 박제를 팔면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여자,
당첨되면 돈을 정말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한, 토너 닳은 프린터로 인쇄한 것 같은 로또를 팔면서 콧구멍을 후비고 있는 아저씨....

비좁은 거리,
빽빽히 늘어선 행상들,
활개를 치며 걷는 뚱뚱한 유럽 사람들,

그 비좁고 복잡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동전을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있다.

10개월도 안된 것 같은 애를 안고 널부러져 앉아 있는 여자,
헐렁한 어른 난닝구를 입고 그 땡볕 밑에서 곤히 자고 있는 어린 아이,
발에 병이 걸렸는지 세개뿐인 발가락이 퉁퉁 부어있는 아저씨,
엄마도 없이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다섯살도 안된 삐쩍 마른 여자애......

그 삐쩍 마른 여자애랑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씽긋 웃었다.
아....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해야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걸으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도저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그 땡볕 밑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나도 특급호텔에서 자고 나온,
방콕 물가 싸다고 좋아 하는,
활개를 치며 걷는 외국인 중 한명이라는 사실에
마구 죄책감이 느껴졌다.
더위 속에 걸었더니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가장 가까운 맥주집에 들어갔다.
Singha를 한병 시켰다.
쭉~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배가 툭 튀어 나온,
허리둘레가 38도 넘을 것 같은,
60살이 다 된 대머리 독일아저씨가
이제 갓 20살이 넘은 것 같은 태국 여자애랑
포켓볼을 치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방콕에 그런 유럽 아저씨, 할아버지들 부지기수로 많다.)

난 Singha를 한병 더 시켜서 쭉 들이켰고,
게임을 마친 배뽈록이 아저씨는 하이네켄을 마셨고,
어린 여자애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그 아저씨는 썰렁한 얘기를 하며
어린 여자애의 손을 만지작 만지작 했다.
여자애는 그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기나 하는지
말만 하면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아....정말 다행이다.
만약 그 더운 날에 독한 술을 마셨던지,
맥주를 몇병 더 마셨다면
그 아저씨 머리통에 빈병을 던져 버렸을 것 같다.
물론....내가 워낙 던지기를 못하니까
그 아저씨의 커다란 머릿통을 여유있게 비켜갔을 지도 모르지만...

6시쯤 되었을 때,
일을 마친 친구 Joy가 왔다.
(Joy는 한국에 오면 우리집에서 지내는 친한 태국인 친구다.)

Joy의 non-stop 수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한참 빠져있던 Sukhumvit 단상에서 빠져나와
누가 말을 많이 하나 경진대회를 하는 것 같이 수다를 떨었다.

<수다가 사람 살려> 그런 책도 있던데,
실컷 수다를 떨었더니 우울했던 기분이 배시시 풀렸다.

어린이날인 오늘,
"날아라 새들아~우리들 세상"이 울러 퍼지는 오늘,
Sukhumvit의 그 땡볕 아래서 어른 난닝구를 입고
곤히 자고 있던 어린애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애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그 애들도 어린이날에 선물을 사달라고 땡깡을 부릴 수 있으면 좋겠다.

- 어린이날 떠올리는 Sukhumvit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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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5-05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네요. 출장 가신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좋으시겠어요. ^^ 그리고... 그런 롤리타콤플렉스에 빠진 추잡한 영감들은 다 추방시켜버려야 되는데.

kleinsusun 2005-05-06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안녕하세요.자다가...깨버렸어요.
방콕에 그런 영감들 넘 많아요. 돈이란게...참 위력적이죠?

코마개 2005-05-0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셨군요..방콕에 그런 사람 정말 많죠. 허연 인간들이 방콕의 여자들 하나씩 달고 다니는...허연 인간이 다 경멸스러워지게 되죠. 나이트 클럽에서 허연애들 꼬셔볼라고 죽치는 여자들 보면서 화도 나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콕은 정말 매력적인 도시예요. 그쵸??
책 중에 '일회용 인간'이란 책이 있는데 현대의 노예제에 관한 얘기죠. 거기 태국도 나와요. 그 섹스산업에 대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노예제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죠.
전에 팟퐁에 가서 바에 앉아술을 마시는데 옆에 한국 아저씨들이 와서는 아가씨들 슬슬 만지면서 사이 사이 앉혀 놓고 수작을 부리더라구요. 한참 보다가...일부러 큰 소리로 "야 가자! 이제 가서 그만 자자"그랬더니 갑자기 들리는 한국말에 당황해서는 동작그만! 손을 후다닥 수습하더군요. 그렇게 떳떳하지 못한 짓은 왜 하는지...

2005-05-06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5-05-0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회용 인간> 읽어봐야 겠네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도 노예제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짝....
정말로....진정...방콕은 매력적인 도시예요.
콕 눌러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방콕에 살 수 있을까요? ^^

kleinsusun 2005-05-0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제가 정말 던지기를 못하거든요.
고등학교 때 체력고사에 던지기 있쟎아요. 0점이었던 것 같아요.^^
상상속에선 적중인데...ㅋㅋ

2005-05-0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5-05-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콕은 못 가봤으니 한번 가보고 싶네요. 어린이날이 없을 것 같은 나라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 참. 수선님. 뗑깡은 일본말로, 간질, 지랄병이란 뜻이래요~~~

kleinsusun 2005-05-07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정말요? "땡깡부린다" 할 때의 땡깡이 그렇게 심한 뜻이라고요???
우와....앞으로 쓰면 안되겠어요. 가르켜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