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말하지마 - 단편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읽고 "요시나가 후미"한테 반했다.
다음 작품은 어떤걸 읽을까 하다가, 일단 단편집을 하나 더 읽어보기로 하고 <더 이상 말하지마>를 샀다.

설날에 놀러온 고등학생 사촌동생들이 만화책을 빌려읽지 왜 돈아깝게 사냐고 물어봤다.
왜냐면....동네에 만화가게가 없다. 단 하나도....
다른 동네에 가서 만화책 빌리고, 반납 늦어서 만화가게에서 독촉전화 받느니....가끔 읽는거 그냥 사서 본다.
또, "요시나가 후미" 정도면, 작품들을 소장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더 이상 말하지마>를 어제 퇴근길에 좌석버스에서 읽었다.
5편의 단편 중 4편이 동성애- 남자들의 사랑-를 다룬 만화다.
참고로 표현이 적나라하다.노출 강도나 섹스장면이 장난이 아니다.
옆에 40대 중반의 아줌마가 앉아있었는데, 내가 만화책을 넘길 때 마다 자꾸 눈길을 주는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하지만...끝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다.

<더 이상 말하지마>에 표현된 "동성애"는 작가의 고민이 부족한 듯이 보인다. "소재"로서 동성애를 빌려왔는데, 현실감은 어디에다 다 흘려버리고 피사체의 멋스러움만 가지고 왔다.
즉,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 성적 소수자로서의 현실적 문제 이런건 다 빠뜨리고,
동성애를 서정적으로만 표현했다.

동성애의 사회적 맥락, 건드리기 힘든 문제에는 눈 감아 버리고,
동성애를 순박할 만큼 서정적으로 이해하고, 보기 좋은 피사체로서 그리고 있는 것 같아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시나가 후미의 "유연함"이 넘넘 부럽다.
요가 선생님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어제 렌즈를 사러 회사 지하 아케이드에 있는 안경가게에 들렀다.
아저씨가 아큐브에서 "원데이 써클렌즈"가 새로 나왔다며 샘플을 주셨다.

아저씨 : 지금 한번 끼어봐요!
눈이 훨씬 커 보인다니까...
수선 : (렌즈를 낀다)
아저씨 : (같이 간 후배를 가르키며) 남자친구한테 눈좀 보여줘!
(후배를 쳐다보며) 훨씬 이쁘지 않아요?
수선 : 남자친구 아니예요!
저 보다 세살이나 어려요!
아저씨 :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해놓고 아차했다.
그래....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세살이 어리건 열살이 어리건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 별일 아닌 사건에서 난 내가 너무 많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걸 느꼈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는 고정관념, 사회적 평균, "해야된다/하면 안된다" 가 내겐 너무 많다.
정말....촌스럽다.


1년 전, Massachusetts 주의회에서 "same sex marriage"를 합법으로 인정한 후, 기쁨에 찬 레즈비언 커플이 결혼식을 하는 사진이다.

국어사전의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에서 바껴야 한다. 더 이상 이성만이 결혼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관습,고정관념, 사회적 상식, 평균의 폭력을 몽땅 적용시키고 있다.

어제 렌즈사건과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는 내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난 너무....촌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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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2-12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말했잖아요. 너 자신을 알라고. 자기가 얼마나 촌스러운지 아시는 수선님, 그리고 그런 걸 글로 멋지게 표현하는 수선님의 힘은 '드러내 보이기 어려운 것을 멋들어지게 돌려서 드러내는 능력'에 있는 것 같군요. 주말 잘 보내세요. ^^

LAYLA 2005-02-13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도 페이지 넘기다가 혼자 움찔 놀랬죠 주위사람들이 혹시 볼까봐..-//////-

드팀전 2005-02-13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는 지속적이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의식의 진보가 생활의 진보가 되기까지는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생활의 진보가 이루어진 부러운 자들도 있지만- 하여간 깨고 또 깨는 길 밖에 없겠네요. 그러고 보니 제 의식 속엔 성적,사회적 소수자가 많지만 제 주변에는 그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사실 그들과 완전 유리된 중산층의 삶에 적당히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봐야하는 단층부입니다. 동성애친구(저는 이성애자지만) 하나쯤 있을법도 한데...주변에 없네.
짜식이 나 좋다고 좇아다니면 귀찮아지니까 그런가^^ 제가 한 매력하거든요.

kleinsusun 2005-02-1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사회적 "평균의 잣대"를 갑갑해 하고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그 잣대를 적용하고 그 잣대를 무의식적으로 이용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거든요."깬다"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Layla님, 님이 쓴 <더이상 말하지 마> 리뷰 즐겁게 읽었어요. 책 값이 안 아깝다구요, 종이 질도 좋고....맞아요. 요시나가 후미 작품들은 소장할 가치가 충분한 것 같아요.
드팀전님, 제 주변에는 성적 소수자들이 있답니다.그들과 가끔 어울리면서도 제 자신에게는 그냥 사회적 평균, 고정관념, 관습 이런거 몽땅 적용시켜 버리거든요. 의식은 열려있고 싶어하지만, 제 본능은 안전한 삶 속에 웅크리고 싶어 하나봐요.
어제 오랫만에 드팀전님 서재에 들렀었는데, 지승호님이 직접 남긴 댓글이 있더군요. 닉이 넘 재미있어서 한참 웃었어요."시비돌이" 우하하하.

로드무비 2005-02-1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가끔 엉뚱한 말을 내뱉는 자신에게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잖아요.
수선님의 솔직함은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kleinsusun 2005-02-1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제가 좀 솔직하긴 하죠.부끄부끄...
"저보다 세살이나 어려요." 그 말하고 깜짝 놀랐어요.
사실 그 후배가 저한테 관심이 많거든요. 애도 참 괜찮고...
그 후배 왈 "이 기회에 선배님 남친하면 안될까요? " 우하하하.

moonnight 2005-02-1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많이 촌스러운 사람이랍니다. 그치만 요즘 세상에 세 살 정도야.. ^^;; 게다가 수선님이 동안이시잖아요. 후배분도 좋으신 분이라면 상당히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용^^ 화이팅!(뜬금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