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거의 출근한지 30분이 채 안되어서 박살이 났다.

뭐가?
컴퓨터가? mp3가? 핸드폰이?
아니다. 다 아니다.
뭐가 박살이 났냐면...

바로 내가 박살이 났다.

콩글리시로 표현을 하자면,
" I was attacked by my big boss."

"박살"과 필이 통하는 영어단어를 여러 개 생각해 보았으나,
"attack" 정도 밖에 적당한 게 없다. "strike"는 너무 심하고...

1월 예상실적을 검토하다가
대노(大怒)하신 상무님께서 성대리를 호출,소리를 지르셨다.
사무실이 떠나가게.
밀림의 타잔 보다 더 큰 소리로.
작게 말씀하셔도 들리는데....

이른 아침에(출근 시간 : 8시)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더니
하루 종일 힘들다.
멍하다. 모니터 앞의 유령이라고나 할까?
답장을 기다리는 세계 각국의 고객들이 보낸 메일들이 가득한데
나는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 보고 있다.

아침부터 부대껴서 좀 혼자 있고 싶었다.
학교 선배와 점심약속이 있었는데,
약속을 연기하려고 11시쯤 전화를 했다.

수선 : 오빠! 우리 담 주에 보자.
선배 : 나 오늘 아니면 계속 바쁜데. 그냥 지금 갈께.
수선 : 그럼 오늘 저녁도 안 돼?
선배 : 응.그냥 지금 갈께.
수선 : 알았어.

이렇게 해서 회사 지하 아케이드에 있는 식당가에서 선배를 만났다. 서로 이런 저런 안부를 챙기다가 선배에게 물었다.

수선 : 여자 친구는 생겼어?
선배 : (씩 웃으며) 참....말하기 창피한데....
나 결혼해.
수선 : 정말? 언제?
선배 : 모레.
전화로 말할까 하다가, 오랜만에 얼굴도 볼겸 왔어.
청첩장도 안 찍었거든.

선배는 2년 전에 이혼을 했다. 결혼 생각이 없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래도 속으로는 좀... 쓸쓸했다.
도대체 내 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처음하는 결혼이 아니라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소수 정예 100명만 초대했다고 한다.
아주 친한 사람만...
친척도 아주 가까운 친척들만....
100명 중에 나를 끼워 줘서 고맙다.
그런데....왜 이런 좋은 소식을 하필 오늘 전해주는 걸까?

아침의 여파가 크다.
아까 외근 나간 Bruce 대리가 들어와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중계방송 했더니
진정을 찾아가던 가슴이 다시 마구마구 뛴다.
우황청심환이 생각날 정도로...

회사원들은 "내공"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사가 막 소리를 지르고 마구 화를 낼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미동하지 않는 자세, 평정(平靜)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
금방 싹 잊어버리고는 미소를 짓는 능력.
더 나아가 "나 바보예요." 하는,
마구 깨져도 그게 기분 나쁜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가공할 능력.

이런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회사원들은 말한다.
"내공이 대단하시네요."

나의 내공은 거의 빵점이다.
어찌 이리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는게 없는지...

아직도....가슴이 뛴다.
이렇게 좌충우돌 성대리의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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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05-01-2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하루가 이제 저물어 갑니다. 그렇지요, 그런 날이 있더군요. 또, 어떤 날을 아침부터활짝 웃는 날이 있듯이 말이지요. 내공은 시간과 비례한 듯 하면서도, 또한 개인차가 많아 길들여지기 힘든 부분이기도 할테고요. 그냥, 마음이 안쓰러워서 토닥토닥, 하고 싶었습니다. 힘 내세요. 그래도 내일은 또 태양이 뜬다잖아요. 저녁 식사 든든히 하시길요-

kleinsusun 2005-01-2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근데...정곡을 찌르셨어요.
정말 길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예요. 제게 조직생활에서의 "내공"이란...
어쩜 이렇게 물렁물렁한지...
이를 악물고 무거운 헬스기계를 들어올려 근육을 만들 듯,
내공을 쌓아야 하는 걸까요?

mannerist 2005-01-20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학생. 소리 들을 날도 딱 열흘 남은 매너입니다. 이제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뭐 전공 그대로 살리는 회사생활이고 제 일만 잘하면 욕은 안먹는다지만 이제 수선누나가 이악물고 버티시는 일을 저도 겪고, 또 속으로 가라앉혀야겠죠. 누나의 what happen today를 다시 읽으며, 미리 내공단련을 해야겠어요. 누나의 글, 괜찮은 아령 맞죠?

넋두리_흠. 이런 콩글리쉬는 어떨까요?
가장 먼저 생각난 건 "I was grinded ~"흠. 이건 뒷담화 당하는 거에 가까운 거 같고... "I was beated ~"나 "I got a fatal blow~ (너무 살벌한가요? ㅋㅋ)" 정도면 '박살'에 나름대로 가깝지 않을까요?

kleinsusun 2005-01-2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 I was beated. 웃기기도 하고....막 슬프기도 하네.
매너!10일 후부터 일하는거야? 일단 축하를!
즐겁고 행복하게 시작하길 바래! 매너,홧팅!

2005-01-20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5-01-2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전경린/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中)

직장 내공은 낮을지 몰라도 서재질 내공은 이미 최고수의 반열에 오르신 수선님,어떤 경우에도 씩씩하고 행복하시길. 화이티잉~~~ ↖^^↗

플레져 2005-01-2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야클님의 요 이모티콘 너무 이뻐서 복사했습니다 ^^
수선님, 제가 수선님께 뵈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포즈에요.
수선님, 그래도 홧팅~!

kleinsusun 2005-01-2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산이신님, "홧팅" 외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신다면 잔뜩 받아 가세용!
야클님, <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읽었는데, 이런 멋진 말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맞아요. 상무 아저씨와 상관 없이 행복하기!칭찬해 줄 때도 넘 좋아하지 말 것이며, 소리지를 때도 넘 신경쓰지 말기! 홧팅 홧팅!
플레져님, 감사합니다.큰소리로 "홧팅!"

로드무비 2005-01-2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경린 씨 책 중에 저 말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아무튼 오늘 무지 마음고생하신 수선님.
저도 파이팅 외쳐드립니다.
(전 부끄러워서 '홧팅'이라고 못 써요.^^;;;)

kleinsusun 2005-01-2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 까먹으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ㅋㅋ 어제 일에 대해 "기억상실"을 하려 합니다. 로드무비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