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이었을 때,
나와 내 가장 친한 동기 J는 회사가 대학원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원은 비싼 등록금과 책값을 내고 다니지만
회사는 월급을 받고 다니니까,
공부를 하면서도 돈을 받는
대학원 보다 월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회사가 대학원이라고 생각했기에,
월급을 덤처럼 생각했기에,
우리는 저축에 목숨 걸지 않고 실컷 술을 마셨다.

우리는 대학원을 다니는 것 보다
회사에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역학과 대학원에서 하품하며 앉아서 강의 듣고,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시험 준비를 하는 대신에
처참하게 깨지면서 일을 배웠다.
우리는 힘들 때 마다,
우리는 자꾸만 더 강해지고 있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첫 출장을 갈 때 우리는 정말 기뻤다.
내 첫 출장지는 Sydney였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였는데,
딸래미가 이제 다 커서 혼자서 출장을 가는게 신기했던지
아빠, 엄마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너무 들뜬 바람에 일주일 출장을 가면서 이민 가는 것처럼 두서 없이 짐을 많이도 들고 갔다.

회사가 대학원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으로 힘든 회사 생활을 버텼고,
첫 출장에 그토록 기뻐했던,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웠던 J와 나.

회사가 정말 대학원이라면
우리는 이제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가 되었다.

어제, 그러니까 12월 첫째주의 일요일,
텅 빈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나랑 J가 신입사원이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첫 출장에 그토록 기뻐하던 우리는
여권에 도장 찍을 자리가 부족할 만큼 출장을 다녔고
이제 웬만하면 출장을 피하며 몸을 사린다.

회사를 대학원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설레임을 느끼던 우리는
이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긴장하던 해외 거래선과의 미팅 자리에서
이젠 농담 따먹기를 한다.
우리는..... 늙었다.

그 동안 인천 공항이 생겼고,
KTX가 생겨 대전까지 50분이 걸리고,
핸드백에 깜찍하게 들어 있던 삐삐는 추억의 물건으로 사라졌고,
띠리띠리 울리던 핸드폰 소리는 64화음 오케스트라가 되어 울러 퍼진다.

이소라의 노래 <처음 느낌 그대로>.
아직도 회사를 대학원이라 생각하는 初心을 간직한다면,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사실에 설레여 한다면,
서로 '우리는 매일 매일 더 강해지고 있어' 라고 격려해 준다면,
보다 회사생활이 즐겁지 않을까?

初心을 잃지 않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감정도 그렇고,
소중한 것을 대하는 마음도 그렇고,
기다려 왔던 꿈이 이루어 졌을 때도 그렇다.

처음 느낌 그대로 뭔가를 대할 수 있다면,
작은 일에도 설레여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훨씬 반짝거리겠지.
작을 일에도 행복해 하면서....

회사를 대학원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04년을 25일 남겨 두고
우리의 일상이 조금 더 반짝거리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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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2-0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지난 몇 년간이 듬뿍 담겨 있군요.

회사를 대학원이라고 생각했던 초심이 희망차 보여요.

점점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변질되거나 변하는 모습은

조금 쓸쓸하구요... 일상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인생의 틈이네요...

로드무비 2004-12-06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가 대학원이 아니듯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생에서 박사 학위를 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아줌마는 해외출장을 미루는 수선님이 조금 부럽네요.^^;;;

야클 2004-12-0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느꼈지만 우리가(아니 나만?) 그냥 스쳐보내는 일상을 이런 글로 표현해 내시는 재주가 참 놀랍고 부럽습니다. 처음 느낌 그대로라....별 생각 없던 이소라의 노래제목도 새삼 새롭게 느껴지고.

그런데 참 우습네요. 전 대학원을 회사처럼 생각하고 다닌 적이 있는데. *^^*

kleinsusun 2004-12-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절판된 앨범을 애써 구해다 주는 남편이 있고, 조기축구 사건으로 깜짝 해프닝을 벌이면서 꼬마만두국을 만드는, 사랑이 듬뿍 배어나는 글을 쓰는 로드무비님이 부러운걸요. 건강은 다 회복되신거예요?

kleinsusun 2004-12-0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회사를 대학원이라 생각하고 다니고,야클님은 대학원을 회사라 생각하고 다니고.... 우하하하..... 교수들이 팀장 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요?

릴케 현상 2004-12-0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대학원이라고까지는 생각 안하고 그냥 타대에 학사편입 한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