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연인/⑪크레이스너와 폴락
생산적인 연애는 극히 드물다. 가령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테일러 부인과 밀, 그리고 샤틀레 부인과 볼테르의 관계는 장삼이사의 것이 아니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치명적인 낭비, 그것이 연애의 본질이다. 그만큼 연애는 워낙 비(非)자본주의적인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련만, (미셸 페쇠처럼 말하자면) 20세기의 연애는 그저 반(反)자본주의적으로 노골화한 자본주의일 뿐이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가수 김윤아)라는 노랫말 그대로, 시정의 필부필부가 아는 것처럼 그것은 생산이라기보다는 사치며 낭비다. 연애의 진실은 무엇보다도 그같은 ‘비용’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지르되게 증명하곤 한다. 바르트도 ‘말의 사치’라는 프리즘 속에서 사랑의 이모저모를 까부른다. 혹은 보부아르 식으로 고쳐 풀자면, 사랑은 나르시스나 종교와 함께 사치와 낭비의 본령을 이룬다. 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을 조금 남용하자면, 연애는 온통 도착증이라는 낭비 투성이다. 기다리기와 만지기, 애태우기와 속끓이기, 시간의 지체와 변죽울리기, 연애에 특징적인 이 모든 행태는 그 자체로 도착적이며, 따라서 사랑의 낭비와 그 비생산성을 극적으로 증명한다.
1941년의 어느 날, 크레이스너(Lee Krasner, 1908-1984)는 팜플렛에 적힌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이라는 낯선 이름의 화가에 이끌려 무작정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그의 작품에 배어 든 창조적 기력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은폐된 천재성을 단번에 인정한다. 이들의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연애와 혼인(1945)의 관계는 둘 모두의 예술적 창의력과 생산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술에 찌든 폴락의 천재성이 현실적, 제도적 길을 얻게 된 것, 그리고 마침내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위명에 이르게 된 것은 크레이스너와의 연애와 혼인으로 가능해진 어떤 삶의 양식을 빼놓고선 생각할 수 없다. 더불어 크레이스너 역시 폴락의 작품 세계를 접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근본적으로 재성찰하게 되는데, 폴락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스승 호프만(Hans Hofmann)을 통해서 배운 큐비즘을 점차 지양하게 된다.
둘의 만남은 이른바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 융이 프로이트를 만난 사건,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만난 사건, 추사가 초정을, 초정이 연암을 만난 사건, 그리고 조영래가 전태일을 만난 사건과 같은 수없이 많은 외상적 충격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는 한 사람의 사유와 태도를 뒤흔드는 바람같은 진실의 흔적이 지극한 환대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레이스너와 폴락이 만난 사건 속에서 잉태된 진실은 예술적 창의와 생산으로 승화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할 중요한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그 사건에의 충실성’(A. 바디우)으로써 시간과 물질을 거슬러 그 진실을 구체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폴락의 ‘술버릇’이 개입한다.) 흔히 그 진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말거나, 기껏해야 기존 지식의 체계 속에 거세된 채 안정화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사랑에 결부되었을 때, 흔히 그 사건 속의 진실은 사랑이라는 혼동과 낭비 속에서 그 생산적 충실성을 잃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크레이스너와 폴락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자신의 작품에조차도 신랄하게 비판적이었던 크레이스너는 폴락과의 조우를 통해 스스로의 작풍을 새롭게 변형시킬 수 있었고, 그 비판적 신랄함은 술독에서 빠져나온 폴락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창의적으로 조형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잣대로 기능했다.
연인간의 사랑이 창조적 생산성의 채널 속으로 피드백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인정’이다. 비록 사랑의 관계라고 해도, 인정은 그저 마시는 공짜술이 아니다. 실제 인정의 과정은 매우 광범위한 문명사적 함의를 지닌 ‘투쟁’(헤겔)이기도 하다. 현명한 연인들이 운마저 좋다면, 사랑의 관계와 인정의 관계는 호혜적으로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의 호혜와 창의성을 향한 과정은 종종 사랑의 관계 그 자체를 허물어버릴 만큼의 큰 비용을 요구한다. 사랑의 행태는 이미 그 자체가 낭비와 사치일 뿐 아니라, 사랑의 자장에 휩쓸려든 다른 열정들마저 걷잡을 수 없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나는 재기(才氣)와 근기(根氣)를 갉아먹는 사랑의 열정을 수없이 목격했다. 인정투쟁을 악용하면서 허영과 탐욕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랑은 또 얼마나 흔한가? 그러나 생산적 상호인정은 연인간의 사랑이 창조적 열정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와 같다. 그것은 욕망만도, 애착만도, 제도만도 아닌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초석이며, 연인이 동무와 겹치면서 이드거니 함께 걷도록 돕는 길이기도 하다. 하버마스-호네트(A. Honneth)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맹목의 동력을 상호인정의 호혜적 의사소통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길이다.
크레이스너와 폴락의 애정이 둘 사이의 예술적 창의성이나 생산성과 호혜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은 상호인정이라는 제 3의 매개일 것이다. 마치 감성과 오성을 매개하는 상상력처럼, 인정은 사랑과 생산성을 매개한다. 그리고 인정과 실천적 공감(Anteilnahme)이 없는 애정이 짧은 애착으로 빠지거나 이해관계로 변질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쓸쓸하게 목도한다. ‘열정을 이해관계적으로 분배하고 조율하라’(A. 허쉬만)는 친자본주의적 권면이 쓸모있는 구석도 있겠다. 그러나,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아, 아직 폴락의 술버릇을 언급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