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창비세계문학 44
다자이 오사무 지음, 신현선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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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단편과 중단편 10가지가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나로서는 딱히 인상적인 소설이 없었다. 지난 월요일에 다 읽은 책인데 읽는 동안 제법 괜찮았던 건 등롱’, ‘피부와 마음’, ‘비용의 아내’, ‘사양’, ‘향응 부인정도다. 그런데 읽고 나서는 벌써 등롱의 내용을 잊었다.

 

이 소설집은 다자이 오사무가 여성 화자가 되어 풀어낸 이야기를 일관되게 싣고 있다. 그런데 다소 억지스러운 건 그렇다고 다자이 오사무가 페미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젓이 소설집 말미에 작품 해설이라고 여성,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나다라고 다자이 오사무를 연구해온 역자가 해석해 주고 있다. 나로서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소설 속 여성 화자들이 진취적이라거나 여성 권익을 주장한다거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보다 낫게 해주는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에게 의지하거나 권위와 세상의 보이지 않는 강압에 수긍하는 편인 여성들이다. 그러다 역자가 혁명으로 해석한 대목들은 세상의 관습에서 일탈하는 정도(비용의 아내)거나 도덕적 문화적 전통을 깨뜨리는 수준(사양)도 있지만, 그들은 전혀 남성의 권위에는 도전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바를 중시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수준까지 타자를 또는 남성을 자신보다 중시하는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보는 듯했다. 그러한 (다자이 오사무가 보여주는 바로 해석할 때) 전통적이고 기품있는 여성상에 일탈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상을 그 시대에 새로운 여성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이라 정의하고 있는 듯했다.

 

다자이 오사무가 생존한 시대적 제한과 그 자신의 유소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모성의 결핍으로 의식의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지만, 겨우 그런 여성관을 가진 이의 작품을 들어 페미라거나 여성을 잘 이해한다거나 나은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는 자체가 우습게 느껴진다. 다자이 오사무는 여성도 아니고 권할 만한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권위와 관습에 억압되어 있으면서 정숙한 부인이 접대를 하거나 빛을 잃은 귀족 여인이 한 번 본 남자의 첩이 되어 생계를 이어가려하다가 여의치 않자 그의 아기를 가졌다며 일탈적인 결론을 맞이한다고 그게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여성상인지 의아스럽다. 물론 의존만 하려던 여성이 자신의 힘으로 아기와 자신을 책임지려 하는 의식의 전환을 가진 것은 다자이 오사무에게도 내적 치유의 의미가 될 수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여성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버지니아 울프일 수도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저 화자를 여성으로 가정한다고 자신이 상상해낸 여성상을 잘 묘사해낸다고 페미적인 인물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이 시대의 여성이 보고 귀감이 되거나 배우는 바가 있는 인물이라도 그렸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여성이 나서서 예찬하는 상황을 수긍할 수 있었겠다.

 

게다가 여학생이란 작품은 본 소설집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다른 번역서의 작품에서 본 내용에 의하면 진짜 여학생인 소설가 지망생이 다자이 오사무에게 어떤지 평가를 바라고 보낸 작품을 그가 그대로 베껴서 여학생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보자, 고은 시인은 성추행을 이유로 그의 작품이 실린 교과서들에서 퇴출되었다. 그런데 성추행이 나쁘다고 여성의 노력과 성취를 모조리 빼앗는 행위보다 더 나쁠까? 여성의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과 그 결과인 성취를 수작으로 가로채는 바가 언어나 시선이나 접촉으로 행하는 성추행(도 분명 나쁘지만)보다 과연 가벼운 범죄인가 말이다. 회사에서 학계와 과학계에서 성추행하는 인물이 있다면 처벌하면 되겠지만, 여성의 노력과 성취의 결과를 술수로 가로채는 경우 과연 여성들은 그런 남성을 감당하고 싶은가? 여성이 자신의 노력을 다자이 오사무에게 도둑질당한 현실을 보고도 그가 페미라고 생각하는가? 여성의 권익을 위해 그가 노력해온 바도 없는데 지나친 대우가 아닌가 싶다. 그를 페미라고 언급한 역자와 이 시대의 문학 비평가들이 나로서는 향응 부인처럼 보인다. 향응 부인을 헌신과 인간의 고결함으로 해석하는 바가 나로서는 우습기만 하다. 향응 부인 같은 여성상을 여성이 여성에게 권한다면 미친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으로서도 닮아야 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인간 실격]이 다소 인상적이라 그의 대표작이라는 사양이 담긴 이 책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받았던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을 지켜나가기엔 너무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으로서는 어떤지 몰라도 나은 인식을 주는 소설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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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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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네 계집질도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이 이상은 세상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강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으나, 호리키에게 그런 말을 듣고 문득

세상이라는 건 자네가 아닐까?”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싫어서, 말을 삼켰습니다.-

 

요조는 흔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서투르고 세심하고 여린 자신을 숨기려 익살스런 가면을 썼지만 그는 능란한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심스러운 삶에서 고교 시절 호리키를 만나고 그는 일탈을 알게 되고 예기치 않은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되었고 자살방조죄로 갇히게 되며 가정에서 축출됩니다. 물론 하숙이랄까 위탁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 대개의 동양 사람들이 그렇듯 떨어져 있더라도 가정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신세였을 테니까 그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은 축출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머물던 집의 넙치라는 인물은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오델로의 이아고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요조에게 적선을 하는 듯 위장하고 그의 가정으로부터 오는 지원금을 마치 자신이 내주는 듯하면서 그래도 대학은 가기를 바라는 그의 부모의 뜻을 마치 자신이 도와주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학비를 걱정하는 요조가 대학 생활과 그 이후의 삶의 경로라는 기회비용에서 멀어지고 끝내 막장의 인생경로를 향하도록 했으니까요.

 

넙치가 자신이 선심을 쓰는 듯 가장하지 않고 요조의 가정에서 학비는 선뜻 내주려 한다고 솔직히 토로했다면 학비를 걱정하며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인생 항로를 요조는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한순간의 다른 이가 주는 혼선으로 요조의 삶은 막장을 향해 흘러갑니다. 동거나 술집 여성과의 관계, 장애인 미망인 약사와의 관계 등이 그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그를 이후 술집 여성이 떠올리며 그는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으로 보아도 요조 자신이 보는 자학어린 자신에 대한 평가와 외부의 평가는 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래에 그는 정신병원과 약물 중독자가 되는 말로를 맞이하지만 당시 그는 겨우 27세였을 뿐입니다. 생의 몇 막과 몇 장을 암연을 연기했더라도 다른 막을 그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 실격]은 작가가 요조라는 인물의 수기를 입수해 책으로 출간한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가가 그는 죽었냐는 물음에 지인인 술집 여성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쩌면 이후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열린 결말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여리고 민감해서 연약해서 세심한 정서라서 삶의 많은 대목에서 부대끼고 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끝내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전후 일본 국민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이 시대 상황과 닮아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시절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자살하는 많은 이들이 어쩌면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의 닮은 꼴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만으로 세상에 대적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그림자에 희망과 꿈이라는 빛을 비출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감상이 담기는 소설이었습니다.

 

붓다는 무상(無常)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 세상의 무거움과 짓누름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는 벗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말일 겁니다. 짙고 치명적인 트라우마도 적절한 대응과 노력으로 끝내 나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괴로움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은 하나의 터널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못 벗어날 것 같아도 결국 벗어나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자신의 터널에서 끝내 못 벗어나리라 스스로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다른 터널이 또 올 테지만 다음번에는 면역력이 작용할지도 모르고요. 모른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어떤 감상을 남길지는 극이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곧 지나갑니다. 어떻든 어쨌든 말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무아(無我)와 공(空)을 이야기했지요. 어느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절대적인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겁니다. 시절시절마다의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달랐습니다. 유년기의 나와 취학 아동인 시절의 나와 청소년기의 나와 청년기의 나와 직장인인 나가 언제나 일관되기만 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느 시절의 아련한 자신을 그리워 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요. 가정에서의 나와 사회에서의 나와 이웃으로의 나와 갈등과 충돌 상황에서의 나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한 시절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이 모든 걸 끝내 버리겠노라 판단할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한 시절 자신의 모습은 다음 시절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착은 집착의 말로는 헛헛함일 겁니다. 나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이런 나를 끝내겠다는 집착도 지나고 나면 헛헛함 이상일 수 없습니다. 모든 건 결국 지나갑니다. 어떻든 어쨋든...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세계에 있어서.

단 하나, 진리처럼 느껴진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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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테크닉 - 내 몸으로 부터의 혁명
백희숙 외 지음 / 네츄로메디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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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과거에 소장했었던 것 같은데 2008년쯤 신변 정리를 할 때 함께 처분한 책 중 하나인 것 같다. 대출을 통해 읽었는데 부록의 영문판본을 제외하면 172쪽 정도라 금세 읽었다.

 

우선적인 감상이라면 무척이나 도가적이기도 하고 동양의 수행체계에서 받은 영감과 서양의 의지적 문화체계가 크로스오버한 가르침 같다는 거다.

 

Primary control (기본적인 몸 사용법)에서 말하는 머리와 척추의 관계를 주의하고 균형 감각을 재인식하는 걸 중시하며 이들을 이미지 연상을 통해 바로잡는 바는 형의권이나 태극권에서 몸의 동작 이전에 자세의 체계를 다시 주지하게 하는 방식과 다름없었다.

 

Inhibition (자제심)은 불균형과 습성화된 자세와 관념을 자제하는 걸 이르는 데 이것은 요가의 YAMA(금계)가 떠올랐다. 요가에서는 금계가 Yama이고 권계가 Niyama이다. 금계가 먼저이고 금하지 않는 계율이라는 말이 권하는 계율이 되는 것이다. 어떤 자세나 태도를 하지 말라는 권유는 그 자체가 금계(Yama)’적이나 이는 금지하는 바라기보다 권하는 바이다. 몸과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거나 방해하는 요소는 인식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 억제나 금지라고 인식하기 이전에 권유일 것이다. 부정으로 받아 들이기 이전에 우선적인 권유로 받아들여야 할 원리이다.

 

End-gaining (목적의식)Means-whereby (진행과정)은 이 과정을 통한 얻음과 이 과정 자체에서의 순조로움을 즐기는 바를 이야기한다고 보는데, 이 대목에서 서양의 의지적 체계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양 무술에서도 기본적인 가르침의 과정이다.

 

Non-doing, Doing-less (행하지 않음)을 저자는 무()로 새기고 있던데 무 자체라기 보다는 무위(無爲)를 이야기한다고 생각되었다. 동작을 하는 자체, 내적 외적 행위를 하는 자체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 억지스러움을 배제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더 깊고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그런 해석은 너무 나간 거라고 본다. 알렉산더 테크닉을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본 체계는 몸의 머묾과 감으로 포섭될 수 있는 동작 전체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태극권, 팔괘장을 철학적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분명 두 무예는 몸으로 구현되는 공부(功夫)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근본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론은 지나친 거라고 생각된다.

 

Non-judgment (판단-결정-하지 않음)에서 도가적 색채를 심하게 느꼈다. 서양인이 동작을 취하며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말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서양 전통 체계에서는 유럽 신비주의가 현재에는 단절된 마당에 서양의 주류적인 사고체계가 아니라고 보인다. 알렉산더 테크닉의 창시자인 F.M. 알렉산더 씨가 동양의 가르침에 심취했었지 않은가 추측되는 지점이다.

 

알렉산더 테크닉이 창시된 이야기는 대부분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텐데 창시자가 연극 배우였으며 어긋난 자세로 통증과 발성에 문제를 느끼다가 창안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 기법이 배우, 미술가, 무용가 등 예술인들에게 더 강한 기세의 주류적인 가르침이 된 것이 어색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척추나 골반 등의 손상이나 부상을 입었다가 회복하는 과정에도 분명 효과가 있기에 일반인들에게도 유효한 기법임에도 분명하다.

 

1. 목의 긴장을 풀어, 머리의 위치를 앞과 위로 향하게 한다.

2. 척추를 전체적으로 늘리면서 펴준다.

3. 다리와 척추를 서로 분리시킨다.

4. 어깨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4 가지 지시어는 동양의 어느 무술 지침의 한 부분에 대입해도 어색함이 없을 지경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알렉산더 테크닉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이라고 했는데 도가적인 느낌을 흠씬 풍기는 이 가르침은 그 정의를 ()’라고 한다해도 어색함이 없을 듯했다.

 

기본원리와 지시어를 인식하며 알렉산더 테크닉 연습 부분을 따라해본 결과 상당한 심적 안정도 갖게 되는 듯했다. 관행처럼 타성에 젖어버린 功夫 수련에서도 이 기법의 흐름을 따라가며 신선한 기쁨을 되찾고 싶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동양적인 느낌을 강렬히 받은 대목은 ‘Back and Up’이라는 용어이기도 했다. ‘필요한 지혜를 터득한 후엔 놔 버리고, Back(본래의 자리)으로 돌아와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의천도룡기에서 장삼봉 조사에게 태극권을 가르침 받으며 장무기가 잊었습니다” “더 잊었습니다” “이제 완전히 다 잊었습니다를 반복하던 대목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도 본서의 가르침을 매주 한두 차례씩 수행해보며 조금씩 잊어 보려 한다. “잊은 자에게 무슨 걸림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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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법칙 (리커버)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51가지 심리학
폴커 키츠.마누엘 투쉬 지음, 김희상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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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법칙은 흔한 심리학 법칙을 나열한 책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두 명의 심리학자가 내담한 환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51가지 문제를 심리학 법칙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데 차별성이 있는 저작 같다. 심리학 법칙만 해도 무수히 많고 이미 심리학 법칙을 나열한 책들은 꾸준히 출간되어 왔기 때문에 본서에 데자부를 느끼는 듯한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나 고민, 걱정에 대해 본서의 각 장에서 대답을 찾는 듯한 분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 같다. 꼭 장문의 심리상담 같은 책이 아니더라도 화두에 대한 통찰이 일어나듯 일깨움을 얻는 이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두 편의 리뷰랄까 독서 흔적을 남기는데 이 책은 이미 13일에 다 읽고 우선 짧은 감상을 블로그에 남겼는데 아무래도 리뷰라기 보다 나의 일상과의 접점을 찾은 글이다 보니 새로 다시 독서 흔적을 남긴다. 이 글도 리뷰라기 보다 흔적 남기기다.^^;

 

마음의 법칙은 마음의 작동 방식을 이해 함으로써 대인과 업무와 일상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의도한 책이라 생각되었다. 마음을 이해하는 길은 바로 자신을 이해하는 길이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당장 모든 변화의 시작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현실에 대한 수긍이나 자성, 변화의 의지를 가져다주기는 할 것이다. 대인이나 업무까지 의지만으로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가 깨어나면 시행착오를 거치며 더 나은 길을 찾을 가능성도 열리는 거라 생각한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자신에게서만이라거나, 자신의 마음이 모든 것에 시작이자 끝이란 생각도 수행자의 대오만이자 자만이라는 건 깨우쳤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통제력이나 통제권이 있다고 믿는 동안에야 실천의 여지를 갖기에 그런 착각도 얼마 간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이 들어선 상황을 변화시키겠노라 마음먹었다면 이 책 [마음의 법칙] 같은 심리학서들을 가볍게 읽고 일상에서 적용하는 노력 정도는 이어가 주어야 할 것이다.

 

본서는 변화를 위해 무언가 나름의 노력을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이해의 장이다. 치유의 장일지 일기토의 장일지는 각자에게 달린 걸 테지만, 평화로운 변화의 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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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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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소개평과 리뷰와 한줄평들이 하나 같이 극찬 일색이다시피 해서 자못 기대하고 독서한 책이다. 다 읽은 감상은 도대체 이 책이 왜 이렇게까지 절정의 평들을 듣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이 책의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관찰과 노력이 필요하니 신중하라이게 다다.

 

[티핑포인트]를 읽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단언은 못하겠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저작(중 내용을 기억하는 책으로는)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유명세가 대단해서 그의 저작인 이 책에 대한 기대가 과했는데 과한 만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 판단 신중하게 하라외에 탁월한 통찰이나 남다른 제시 무엇 하나 없는 이런 책이 그토록 유별난 평가를 받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다만 수록된 실례들과 서술 자체가 몰입하게 하는 면은 뛰어나긴 하다. 400쪽에 이르는 책을 순식간에 다 읽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몰입하며 읽은 이유는 무언가가 더 있겠지” “결론에서는 남다른 통찰이나 제안이 있을 거야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허무하다. 나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제시된 예들 외에 주제와 결론은 이미 초중딩 사이에 스스로 내린 결론과 다를 바 없었는데 뭐하러 읽었을까. “내 시간 돌려다오

 

아마 이 리뷰를 읽고나면 정말 별 통찰이 없는데 유명세만 뛰어난 책인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넋두리는 거짓이고 정말 좋은 책이라고. “이런 젠X! 나만 당할 순 없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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