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뿌리 (신약) - 그리스.인도사상과 신약성서
민희식 외 지음 / 블루리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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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는 동지가 지난 직후 1225일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는 결혼식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였으며,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는 성찬 의식 내지는 영성체 의식을 행하였으며, 최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게 신약 성서의 복음서 부분 줄거리를 요약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그리스부터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던 고대 신들의 공통된 줄거리라고 한다. 구약의 시대 유대인들이 고대의 타민족 신들의 이야기를 참조해 자신들의 이야기로 날조한 것을 [성서의 뿌리 구약편]을 보며 알 수 있었는데, 기독교는 그보다 더해 존재 자체가 사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저작이 본서이기도 하다.

 

미트라 신의 일화와 그리스 신화 중 디오니소스 신화, 이집트 신화들이 짜깁기되어있는 것이 신약의 복음서 내용에 다름 아니었다. 예수의 모든 이야기가 타민족 신들의 신화 내용에서 도용한 것이고 예수 생일이 1225일이 아니라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고대 미트라 신을 위시한 일본의 아마테라스 여신까지 태양을 근거한 전 세계 모든 신들의 탄생일이 1225일로 기념된다고 한다. 1222일이 동지인데 동지까지 해가 짧아져서 상징적으로 태양이 죽는 것을 상징하고, 1225일쯤부터 해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해서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날이 되기에, 태양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신들의 생일이 1225일이라고 한다. 예수 사후 몇백 년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생일은 16일로 기념되다가 예수가 신격화되기 시작하며 미트라 신의 신화 내용을 도용하여 태양신의 생일까지 뺏어오게 되어 크리스마스가 1225일이 된 것이다. (아직도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는 16일을 예수 탄신일로 기념하고 있다) 미트라 신의 영향은 그 밖에도 적지 않아서 현재도 카톨릭 사제인 교황이 의식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관 같은 모자를 미트라 관이라 부른다. 교황을 Papa, Pape, Pope라고 부르는 것도 미트라 사제를 부르던 호칭에서 유례했다고 하니 기독교의 빼앗고 베끼는 신공 하나는 초절정 고수의 풍격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예수는 부활도 하지 않았다는 게 논리적 사고를 떠나서 사료적으로 복음서가 쓰여지고도 초창기에는 예수 부활의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활 대목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며 기록된 바대로라고 주장하는데 그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되는 해당 구절을 구약에서 동정녀 내지는 처녀로 한글 번역을 하는 걸 원문으로 찾아보면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가 임신한다는 내용으로 쓰여있어서 성 경험이 없는 처녀(동정녀)를 뜻하는 원어와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한마디로 동정녀에게서 (구약 당시의 기준에서) 미래의 구세주가 태어난다고 하는 기록적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씨에서 구세주가 난다는 내용도 구약에는 없으며 구약에서는 다윗 자체를 구세주(기름부음 받은 자)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다윗의 씨에서 구세주가 난다고 억지를 부린다 해도 성령 잉태되었다는 예수가 요셉의 계보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기 크리스천 시대에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아서 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인간이라고 받아들이던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 중에 왕권의 온전한 강화를 추구하던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종교 중 하나로 공인한 이후) 325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투표로 아리우스파를 제거하고 예수를 신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성서 편찬이 시작되어 예수의 인성을 보여주는 경전들은 외경과 위경으로 몰려 대부분 소각해 버리고 신약 성서를 첨삭하고 변개해 지정했으며 그 외의 경전들은 지금 일부만 남아있다.

 

이 신약의 첨삭과 변개는 대대적으로 일어나 히브리 성서와 랍비들의 문헌, 타 종교의 신화들을 짜깁기해 예수의 복음서와 그 외 신약 성서의 내용을 만든 것이다. 애초에도 처음 쓰여질 때부터 이런 짜깁기로 완성된 것이 신약이라는 것이다. 마태는 특히나 소설가적인 창의성과 표절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그가 날조한 대목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산상수훈과 예수의 계보까지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날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교종교학자 등 전문학자들은 기독교를 뻐꾸기 종교라 부른다고 하는데 뻐꾸기가 다른 종의 새의 둥지에 알을 몰래 낳고 가면 그 알에서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숙주가 되는 새의 알과 다른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모두 몰아내서 떨어뜨려 죽여버린 후 먹이를 독점하는 생태를 빗대어 기독교를 비판하는 말이다.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타종교의 신화들을 훔쳤고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요셉의 계보도 조작했으며 (그 계보는 구약의 기록과 맞지 않는 것은 물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상충한다) 산상수훈부터 예수의 가르침 전반이 기존 유대교의 기록들과 탈무드를 변개한 내용일 뿐이다. 신약의 내용들 전반인 서간문들에서의 구약 인용도,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조작이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오로지 예수를 구세주로 만들기 위해 기존 히브리 성서의 내용과 탈무드 등 히브리의 지혜를 변조해서 날조하고 있다고 하는데 유대교 랍비들은 그래서 유대교의 지혜를 도둑 맞았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무엇보다 다윗 왕과 바사의 고레스(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를 구세주로 칭송하는 내용들을, 교묘히 편집하고 조작해 예수에게 대입하며 예수를 신격화하고 있고, 유일신의 독생자를 참칭하고 있어서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성모 마리아도 성령 잉태했다는 설을 말도 안 되게 보고 있는데 같은 원류인 유대교, 이슬람 모두에서 한결같이 말하는 바는 여호와 신에게 아들을 따로 낳을 이유도 낳을 필요도 없으며 유일신이 굳이 성령 잉태를 왜 하게 하겠냐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예수 시대에도 예수가 혼외정사로 태어났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며, 그로 인해 예수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건 신약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빌라도가 예수를 살리려 도둑놈과 예수 중 누구를 살려주랴하는 물음에 유대인들은 모두 예수가 아닌 도둑놈을 살려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예수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 저자들은 예수 시대에 예수가 보였다는 기적들이 실제 했다면 당시 로마나 이집트, 근동 여러 나라에 기록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며 성서의 주장을 근거 없다고 한다. 또한 예수가 탄생한 당시의 예수 탄생 시 유아 살해 등과 그로 인한 예수의 이동 경로 등이 마태와 누가 두 기록에서 모두 다르며 마태만이 유일하게 예수 탄생 직후의 헤롯 왕의 유아 살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와 마태 두 기록에서의 예수 탄생 시기는 (당시 역사 문헌들을 근거하면) 12년의 차이가 난다. 예수 사후 그리 긴 세월이 아닌 초창기에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신앙하고 기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수의 탄생 시기가 다른 것이다. 누가는 예수 탄생 직후 헤롯왕의 유아 살해를 기록하고 있지도 않고 누가복음에서는 헤롯왕 시절에 예수가 태어난 것도 아니다. 역사 문헌상으로는 헤롯왕 시절에는 유대인을 위한 제도들이 많았으며 오히려 유대인들의 눈치를 많이 보던 왕이었다고 한다. 또한 동방박사 이야기도 마태와 누가 중 한 사람은 기록하고 다른 한 사람의 기록에는 등장하지도 않고 있다. 그리 방대한 살육이 있었고 예수의 부모가 그를 피해 피신할 정도의 중요한 내용이었는데, 또 동방박사 이야기는 예수의 특별함을 지지하는 내용인데 기록자 중 한 명은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왜 기록이 다를까 하는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본서를 보면 마리아의 성령 잉태, 예수의 출생, 출생 이후의 기록, 공생활 중의 기록, 사후 부활의 기록 등 무엇 하나 날조가 아닌 것이 없으며 예수가 과연 실존했는지도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실제 했더라도 문맹률이 높고 지역 간 이동에 한계가 크던 (문맹이자 지역적 문화적 한계를 안고 있는) 당시 사람들을 통제하고 홀리기 위해 날조한 내용이 더 많다는 감상이 인다. 이런 대중 통제의 의도는 초기에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기독교가 공인 된 이후에는 왕권 강화뿐 아니라 교황과 사제들의 권한 강화를 위해 더해졌으며, 시대를 거쳐 대중 통제의 효과를 실감하던 위정자들의 의도와 목적을 통해 기독교는 확산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학자들이 종교학과 역사학과 고고학, 인류학 등 총체적인 연구와 추적을 할 수 있는 시대이다 보니 이런 막가파식 종교의 횡행이 막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이 시대에 상식을 가진 누가 성령 잉태를 믿을까, 신의 화현과 신의 아들에 등장과 재림을 믿을까 싶지만, 아직도 인간은 미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로 인한 혹세무민과 범죄 행각들은 그쳐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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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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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형식이 당시 기존의 형식과 달리 참신하고 혁신적이라 부조리극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모양이다. 주제전달 방식은 부조리하다기보다 너무도 정연하게 조리있다. 전혀 어렵거나 무겁기만한 희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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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뿌리 (구약) - 오리엔트 문명과 구약성서
민희식.이진우.이원일 지음 / 블루리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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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 성격이 어떤 책인지 다소의 정보는 지니고 독서를 시작했는데도 저작의 서술 성향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다 읽고 나서 떠올랐는데 이미 과거에 한 차례 읽어본 책이었다. 그런데도 내용의 90%가 기억에 없어서 독서를 마치기 전까지는 처음 읽는 책인 줄 알았다. 어쨌건 기억나지 않은 내용이라 처음 읽은 것과 다름없다. 저자의 서술 성향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는 이유는, 성서 그 중 구약을 비판하는 조의 책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비판을 넘어 비아냥과 조롱에 가까운 서술을 하고 있어서다. 저자가 기독교도와 기독교의 신에게 감정이 다소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저자가 창세기, 출애굽기부터 시작해 모세5경 전체와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모두를 비판한 것은 학자적인 연구의 결과를 근거로 한 것이라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이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되었다. 여호와를 흡혈귀라고 한다거나 마귀에 다름없다고 표현한 대목을 보고는 도대체 이 책에 어떻게 장로교 목사들의 추천평이 있는 건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해외 성서 연구가들이나 고고학자와 문화인류학자의 평이 좋은 것은 이 저작의 학술적인 근거들이 탄탄하기에 그렇다고 이해는 하지만 목사가 추천평을 한다는 건 이해가 쉽지 않다.

 

저자는 성서에서 케루빔은 이교도의 신들을 유입한 결과이고 여호와가 하나님의 회중에 나서서 재판한다는 대목을 히브리어 성서와 공동 번역 성서를 동원해 다신교적 해석을 내보이며 당시 가나안과 근동의 여러신들 중에서 여호와를 내세우기 위한 서술이었다는 대목도 이해는 가지만 저자가 그 전후로 여호와를 비아냥 거리는 대목들은 개인적인 감정이 다소 있어 보이기도 했다.

 

사사기 11:30~31 민수기 31:17~41 레위기 27:28~29 의 내용들을 근거로 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가 철회한 대목까지 포함해 여호와가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받는) 인신공희의 신이었다는 대목은 구약을 읽으며 몇몇 대목에서는 나 역시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했고 어느 대목에서는 문제의식 없이 넘기기도 했었다. 저자의 표현은 과격하지만 아주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거룩한 진멸이라는 대목은 성경을 읽으며 가장 문제적인 대목이라고 생각되던 부분이기도 했어서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공감이 갔다. 여호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공격해서 성노예로 삼을 남자 경험이 없는 어린 여자만 남겨두고 그 외의 남자와 여자는 남녀노소 할 것 모조리 죽이는 것을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성경에 보면 그리 살려둔 성노예들 중에도 여호와에게 바치는 여자가 30명 이상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인신공희의 제물이 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런 지시를 했다는 여호와는 사탄이나 마귀와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호와가 만물의 창조자라기보다 유대민족의 민족신이기만 했다는 데는 더더군다나 전적으로 공감이 과거부터 갔던 바이다.

 

저자는 여호와라는 신이 이집트의 아톤 신과 조로아스터교의 신에 대한 상을 빌어 완성된 신의 상이라는 것이 최종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해 모세5경에서부터 예언서까지 모든 구약 성서가 타민족들, 타국가들의 신화와 전승을 짜집기해 만들어졌다는 걸 사료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들을 바탕으로 증거하고 있다. 사실 나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지적 한계상에서도 구약과 신약은 비판할 여지가 많았는데 학자가 작심하고 성경을 비판하니 학문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온전한 비판서가 나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궤만 하더라고 고고학적 유물 발굴로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귀족들과 왕가의 궤를 유대인들이 그대로 표절한데다가 베낀 주제에도 더 조악한 모조품을 만든 거란 걸 본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고고학적 발굴로는 성서의 근본적인 인물들과 역사들이 하나 같이 위작이며 조작인 것이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도 드러나 있다. 유대인들이 장정만 60만 명,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하면 20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이집트에 거주했거나 탈출했다는 사료적 근거도 고고학적 유물도 흔적도 없다는 게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이스라엘 랍비도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심지어 이스라엘 교육부 장관까지도 성서는 민족 설화집이며 역사서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근거에 입각한 진정한 이스라엘 역사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나서는데 기독교 신앙인들만이 모든 성서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현실이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기도 했다.

 

본서를 읽어보면 그간 성서는 신화라던 주장들이 이 시대까지 보편적 지식이 되지 않는 게 의아해질 지경이다. 홀린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일독이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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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07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희식 선생이 저자 가운데 한 명이네요. 깜짝 놀랐습니다. ^^

이하라 2023-09-07 20:30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는 저자분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라 어떤 저작들이 있는지 잘 모르는데 유명하신 분인가 보군요.^^

yamoo 2023-09-0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성경 비판서라서 땡기는데 거기다가 민희식 선생이 저자로 있으니 구매할 가치가 충분한 책인듯합니다. 좋은 책 리뷰 갑사합니다!!ㅎㅎ

이하라 2023-09-08 11:16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을 소개해 드리게 된 듯해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의미 있는 독서 되세요.^^

서니데이 2023-09-09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3-09-09 09: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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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곡이 부조리극의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부조리하다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조리있게 다가왔다. 그 시대에는 기존 희곡의 형식을 탈피했다고 하니 부조리극으로 불렸는지 모르겠으나 주제의 전달에 있어서 상당히 일목요연해 보인다.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창작자 자신이 나서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걸 내가 알았다면 작품에 바로 썼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니까 말이다. 작가는 기대로든 희망으로든 구원으로든 구세주로든 신으로든 각자가 정의하기를 시도하도록 바란 게 아닐까 싶다.

 

모자와 구두로 영 또는 지성과 육 또는 행위나 미천함 등을 상징하려 한 건 일차원적인 상징이기도 하고 기다림과 나무(상징하는 바는 모든 걸 끝내는 것일 수도 구원일 수도 있다), 포조와 럭키(계층이나 지배와 피지배일 수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관계성일 수도 있다), 소년(가장 중의적이며 함의가 큰 상징 같다) 등 상징체계들이 고도라는 대상에게서 그리고 그를 기다린다는 상징 속에서 비단 기대와 희망으로 상징되는 그 이상을 그려내 보고자 시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사의 반복 등으로 그저 부조리만으로 다인 이야기를 전하려 한 희곡이 아니라는 감상이 들었다.

 

삶에서 세상의 눈물이 일정해 누군가가 울면 누군가가 웃고 누군가가 웃으면 누군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되지만 우리는 다음 순간 나는 눈이 멀고 타자는 귀가 먼 순간이 같지만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잊어버린다. 고작 어제 만난 서로에 대해서도 희미할 뿐이다. 그렇게 고작 어제 일이 희미할 정도로 우리는 고단하고 막막하게 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희망하고 기대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엇인지 어떤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듯, 모른 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누구나가, 오늘이 처음 만나는 거고 처음 말하는 거라며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오신다고 했다는 메시지를 전하듯, 그렇게 우리에게 낯설게 희망을 품게 한다. 우리는 모든 걸 오늘 끝장낼 수도 있지만 기다림의 결실을 기대하며 끝낼 순간을 미룬다. 막연한 기대만으로 막막한 삶을 억지스럽게 감당하고 있는 거다. 고도가 신이건 구세주건 기대건 희망이건 간에 우리는 그 또는 그것이 무언지 알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수염이 하얗다는 말을 듣고 놀라리만치, 그는 미지의 대상일 뿐이다. 그 미지의 대상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매정하고 가혹하며 서로에게 의지한다. 타자가 없으면 서운하면서도 좋다는 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타인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바람하는 것에서도 엿보이는 성향일 것이다. 타인은 필요악이면서 동시에 지옥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희곡을 정의하면 '부조리극이다' '의미보다 대사의 반복이다'는 말들이 많던데 대사의 반복에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그런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반복들을 행하고 경험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말이다.

 

이 희곡은 부조리극의 효시였다지만 읽으며 느낀 건 너무도 정연하게 조리있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마 다시 읽는다면 다른 감상이 더 깊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희곡이다. 극이 주는 감상과는 다르게 또 하나 기대하며 오늘도 이 삶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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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전기다 - 인간 몸의 생체전기에 관한 새로운 과학
샐리 에이디 지음, 고현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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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무협물을 많이 봐서인지 무술 수련을 나름 해서인지 내공 수행을 좋아했고 중학 1학년 때부터 뚜렷한 계기가 없었던 것 같은 데도 몰두하게 됐습니다. (1부터는 몇 년 간 텀이 생겼지만 다시 수행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에 관한 서적을 중학 시절부터 탐독했고 로버트 베커와 게리 셀든이 공저한 [생명과 전기]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는 생체전기가 기()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열의를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체전기에 대해 알게 된 최초의 책이기는 했으나 어린 나이다 보니 생체전기의 발견과 연구 과정에 관한 내용은 재밌었지만,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독서를 포기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자라서도 기공과 생체전기의 상관성을 짐작하며 생체전기 관련서들을 읽어볼까도 싶었지만, 관련 전문서들은 고가이기도 했고 전문적인 내용 같아서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러다 본서의 출간 소식을 알게 되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생체전기는 영화나 애니 등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 등장한 맥스(제이미 폭스), 인간을 배터리로 쓰는 [매트릭스],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프랑켄슈타인(1995)]에서 본서에 등장하는 내용과 유사한 설정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서는 생체전기의 역사부터 발전 과정을 인물사처럼 전개하기도 하고 분야별로 서술하기도 합니다. 갈바니의 생체전기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부터, 생물학적인 접근을 하는 갈바니와 대립하며 화학적으로 물질의 전위차가 전기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라 주장하던 볼타와의 대립을 그리기도 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갈바니의 이론으로 시작해 역사를 거치며 심전도와 뇌파측정이 발전해 나가며 신경과 뇌에서의 전기 흐름을 알게 되고 시대를 거쳐 뇌와 신경 작용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이어가 상처와 절단 회복과 암 연구, 그리고 뇌 기능의 확장에까지 이르르고 있습니다.

 

생체의 회복만이 아니라 세포의 분극도 탈분극도 전기작용으로 제어할 수 있으니, 상처나 절단된 신체만이 아니라, 세포로부터 생명체로 완성되기까지 전기의 작용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포 막의 전위차가 어떤 세포로 분화할지 결정하고, 암세포 역시 이런 막 전위차를 보이기에 생체전기를 제어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체로 분화하거나 비정상적인 생체로 분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병의 확산과 치유 양 측면을 통제하는 작용을 합니다. 장애를 지닐지 아닐지와 암으로 죽을지 나을지마저 결정하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뇌 신경에 작용하는 전기는 우울증 등 정신과적 질환과 다양한 신체적 질환의 지속과 치유에도 작용합니다. 최근까지 임플란트 시술로 치유 효과를 누려왔고 갖은 고비 끝에 FDA 인증도 통과했으나 임플란트 시술은 부작용이나 작용 기간의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뇌 임플란트는 신경과 세포에 또 혈액-뇌 장벽에까지 미치는 악영향이 커서 그간 일런 머스크의 뉴럴링크가 뇌 임플란트를 FDA에서 허가받는 데도 난항을 겪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서술을 보면 최근까지 젤라틴, 콜라겐, 케라틴 등의 자연 물질과 산호라는 생물 그대로를 사용하거나 인공 전도체인 특정 폴리머 등을 개발해내며 이러한 난항을 극복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본서를 통해 의식의 변혁을 경험하게 된 대목은 그간 유전자학이 생체 분야의 혁신인 듯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어왔지만, 실제 DNA 구성인자들은 홀로 결합하고 분열하는 기능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전기의 작용이 없이는 이들 구성인자들이 있다 해도 어떠한 세포 구성원으로서의 작용을 할 결합을 하지 못한다네요. 이 내용을 알게 되고는 생명의 본질에 다가서는 한 막이 시작되는 경로를 우리는 맞이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체전기가 인류 아니 생명체 진화의 항로를 열어주는 큰 바람이자 지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저작입니다. 가장 정교한 3D 프린터만 갖춰진다면 유전자학과 생체전기학이 만난 것은 이제 생물진화의 획기적 전환점이 열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호모데우스를 믿지 않고 데우스 마키나를 믿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신을 창조해내고 그 기계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생체전기학도 앞서 말한 세 가지가 더해진다면 생명 존중이 사라질 시대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예측하는 미래상이 올지 더 나은 시대가 펼쳐질지는 아직 알 수 없기에 먼 미래를 두고 걱정하느니 근미래의 질병을 정복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시대를 기대하며 미소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SF영화에서 그려내던 시대가 점점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모르고 시대가 닥쳐온다면 우리가 짐작하는 것 보다 금세 우리는 당황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늦지 않게 미래를 예측해 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보가 재미 속에서 전달되어 오는 책이니 부담 없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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