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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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네 계집질도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이 이상은 세상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강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으나, 호리키에게 그런 말을 듣고 문득

세상이라는 건 자네가 아닐까?”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싫어서, 말을 삼켰습니다.-

 

요조는 흔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서투르고 세심하고 여린 자신을 숨기려 익살스런 가면을 썼지만 그는 능란한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심스러운 삶에서 고교 시절 호리키를 만나고 그는 일탈을 알게 되고 예기치 않은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되었고 자살방조죄로 갇히게 되며 가정에서 축출됩니다. 물론 하숙이랄까 위탁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 대개의 동양 사람들이 그렇듯 떨어져 있더라도 가정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신세였을 테니까 그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은 축출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머물던 집의 넙치라는 인물은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오델로의 이아고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요조에게 적선을 하는 듯 위장하고 그의 가정으로부터 오는 지원금을 마치 자신이 내주는 듯하면서 그래도 대학은 가기를 바라는 그의 부모의 뜻을 마치 자신이 도와주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학비를 걱정하는 요조가 대학 생활과 그 이후의 삶의 경로라는 기회비용에서 멀어지고 끝내 막장의 인생경로를 향하도록 했으니까요.

 

넙치가 자신이 선심을 쓰는 듯 가장하지 않고 요조의 가정에서 학비는 선뜻 내주려 한다고 솔직히 토로했다면 학비를 걱정하며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인생 항로를 요조는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한순간의 다른 이가 주는 혼선으로 요조의 삶은 막장을 향해 흘러갑니다. 동거나 술집 여성과의 관계, 장애인 미망인 약사와의 관계 등이 그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그를 이후 술집 여성이 떠올리며 그는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으로 보아도 요조 자신이 보는 자학어린 자신에 대한 평가와 외부의 평가는 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래에 그는 정신병원과 약물 중독자가 되는 말로를 맞이하지만 당시 그는 겨우 27세였을 뿐입니다. 생의 몇 막과 몇 장을 암연을 연기했더라도 다른 막을 그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 실격]은 작가가 요조라는 인물의 수기를 입수해 책으로 출간한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가가 그는 죽었냐는 물음에 지인인 술집 여성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쩌면 이후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열린 결말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여리고 민감해서 연약해서 세심한 정서라서 삶의 많은 대목에서 부대끼고 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끝내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전후 일본 국민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이 시대 상황과 닮아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시절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자살하는 많은 이들이 어쩌면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의 닮은 꼴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만으로 세상에 대적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그림자에 희망과 꿈이라는 빛을 비출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감상이 담기는 소설이었습니다.

 

붓다는 무상(無常)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 세상의 무거움과 짓누름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는 벗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말일 겁니다. 짙고 치명적인 트라우마도 적절한 대응과 노력으로 끝내 나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괴로움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은 하나의 터널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못 벗어날 것 같아도 결국 벗어나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자신의 터널에서 끝내 못 벗어나리라 스스로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다른 터널이 또 올 테지만 다음번에는 면역력이 작용할지도 모르고요. 모른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어떤 감상을 남길지는 극이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곧 지나갑니다. 어떻든 어쨌든 말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무아(無我)와 공(空)을 이야기했지요. 어느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절대적인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겁니다. 시절시절마다의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달랐습니다. 유년기의 나와 취학 아동인 시절의 나와 청소년기의 나와 청년기의 나와 직장인인 나가 언제나 일관되기만 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느 시절의 아련한 자신을 그리워 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요. 가정에서의 나와 사회에서의 나와 이웃으로의 나와 갈등과 충돌 상황에서의 나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한 시절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이 모든 걸 끝내 버리겠노라 판단할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한 시절 자신의 모습은 다음 시절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착은 집착의 말로는 헛헛함일 겁니다. 나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이런 나를 끝내겠다는 집착도 지나고 나면 헛헛함 이상일 수 없습니다. 모든 건 결국 지나갑니다. 어떻든 어쨋든...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세계에 있어서.

단 하나, 진리처럼 느껴진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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