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여자의 글쓰기와 마음의 구멍

반백수는 하던 일을 중간에 내려놓고 평일 낮부터 영화 세 편을 연타로 때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올해로 3년 째 꾸준히 참석(?) 중인데, 생각지 못한 영화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 매년 우산 들고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도 다르지 않아 영화 세편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그쳤더군.


글 쓰는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들 위주로 골랐다.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아니 에르노. 중간에 <질투는 나의 힘>은 동명의 시를 떠올리며. 세 편의 영화 각각 다른 의미로 만족스러웠는 데, 까먹기 전에 쓱쓱 써볼까 싶어 노트북을 켰다. 긴 글을 예상합니다.



1.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2023)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7431



- 아니 그러니까, 어…언니 잠깐만요… 하…. (나의 한줄 평)

전후 독일 문학계의 독보적인 여성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연애 실패담을 다루고 있는 영화. 친구가 좋아하는 여성 작가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봤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지금도 안 외워지지만. 영화는 한번 더 보고 싶다. 시인이 이별이 가져다준 앎을 통찰해 낼 때!!! 사랑을 누가 말리는가 했다. 여튼 잉게 온냐. 제가 책 다 찾아 읽을 거임😘


개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에 이름 붙인 것을 ‘사랑’이라고 하자​​. 어디서 베낀(읽은) 것 이 분명하긴 한데, 출처가 기억나지 않으니 공쟝쟝 임의의 편집 각주다. 그렇다 사랑. 사랑은 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요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하는 데(사랑을 하고 있다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성애, 모성애, 팬덤, 신앙을 포함해.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겉잡을 수 없어지는 가.랄까. 


자신이 부족하게 느끼는 부분(그것은 결핍, 취약함, 부족 지점, 감추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당장은 없다는 지점에서 어쨌든 ⊖의 성질을 띤 것 같다)을 가지고 있는 타자를 마주쳤을 때 화르륵 타오르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사랑의 시작은 투사다. 민감한 작가들은 이 심리학 개념을 몰라도 그 역동과 진실을 안다. 실제로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부족하다는 것은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나 자신의 대단히 강렬한 변화에의 의지. 그 원료가 없다면 촉발되지 않는다.


내게 일어났던 사랑이란 그랬다. 


결국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으로의 성장과 변화이겠지만. 내게 필요하다는 그 인식을 주체 스스로 셀프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인간은 그런 특징(스스로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을 가지고 있다라고 추측함. 추측만 함. 


때문에 ⊖(결여)가 아주 크거나, 변화의 의지가 아주 클 때. 사랑의 체험이란 치명적이고 강렬해지는 것 아닐까. 모든 변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으니…. 욕망, 그건 고통과 함께하는 일종의 열락. 변화란 본질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 기투. 


사족 붙이기. 육중한 내 몸을 사랑에 던지고 하기에 본인은 근육과 기력이 없으므로… 코어도 없고요… (오늘도 필테쌤이 때찌때찌 쟝쟝님쟝쟝님쟝쟝님 내 이름만 천 번 부름.) 나의 기투는 몸을 극도로 사리는 정신적 기투로서(몸을 사린다고 하지만 책은 몸으로 읽는 것 입니닼ㅋ) 기왕이면 *이미 죽은, 책을 쓰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하였는 데… 이는 현실 사랑에 상처받거나 파멸하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어 전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꺄륵. 


재능 있는 두 여남 작가의 (그렇다 작가의 사랑이다!!!) 치명적인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천자를 할애하였다😮‍💨. 영화가 보여준 사랑의 시작은 그런 모습이었기에. 


시인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스위스의 극작가 막스 프리슈를 만나 사랑에 뿅 빠져버린다. 친구는 그녀를 말리지만 그녀도 막스도 막무가내다. 당신의 시를 다 외웠어요. 너 없으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어. 짐 싸서 살림을 합치고.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끝내주게 충만한 날들이… 



얼마 못 간다 ㅋㅋㅋㅋㅋㅋ


아침 마다 두개골을 울려대는 그의 타자 소리.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이 출중한 여자 시인은 심지어 박사(검색 결과: 바흐만 언니 하이데거랑 비트겐슈타인으로 논문 쓴 사람)에 당시로는 드문 비혼주의자 여성였음에도. 이국에서 고립되어 남자에게 기를 쪽쪽 빨린다. 시를 쓸 수가 없어!!!


헤어지는 방법을 모르겠는 연인은 왜 그렇게 싸울 때 똑같은 모습일까. 영화를 보면서 현타가 오지게 왔다. 


자기보다 똑똑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 열등감과 독점욕. 남자는 사랑을 미끼로 지배하려들고 길들이려 하고, 여자는 사랑받고 싶어 참다가 반항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다 그로 인해 포기된/한 것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던 그/녀는 이제 없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작가와 작가가 만나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이 주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생각해 볼 요량이라 더 적지는 않도록 한다). 또 그와 열정을 나누다가 그의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게 되어버린 넘치는 재능에 걸려 넘어지고만 숱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잉게 언니는. 막스의 영감으로만 머무르기엔 너무 잘난 여성이시다.


인상 깊었던 장면 1. 자신을 철저하게 대상화한 그의 (숨겨진) 일기를 읽으며 그녀가 비분강개하는 장면. (막스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지못미…)


재현 윤리에 관한 두 작가의 언쟁이 이어졌는 데, 대단히 철학적이며 젠더적이었다.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연출과 각본일테지만, 작품세계와 인물들에 대한 공부와 이해가 근간이었을 듯. 자기가 뭘 쓰는 지 모르고 막 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바흐만은 시인 이전에 철학을 공부하는 여성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뭘쓰고자 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를 정확하게 다루고자 했던 이이의 책들을 찾아 읽어봐야지 마음 먹음.


장면2. 그녀가 이별 후 보게된 지독한 사랑에 대한 뼈 아픈 인식을 동행자에게 들려주는 장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토록 치열한 종류의 앎을 내게 준다면, 사랑. 해볼만한 것이지 않을까. 어쨌든 바흐만은 전후 독일의 시인이다. 무슨 말이냐면, 파시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대략 이런 종류의 대사였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지금부터는 내 뇌피셜주의) 


“파시즘이 무엇인지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고 난 여기는 데. 최초로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였을거예요. 아마.” 


대체 어떤 지독한 사랑을 해버렸기에 거기서 파시즘을???🫢이 아니다.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떠올리긴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랄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멀리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면 되는 거라고. 만약 그것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현실의 아우슈비츠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에, 또 너무 심오해지네. ㅋㅋㅋ 그리고 또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장면은. (지금부터 스포주의) 바흐만이 프리슈와 헤어지고 아주 심한 트라우마 상황을 타개하고자 사막으로 떠나서… 


나를 이용하고 길들이려하고 가스라이팅한 유럽 부르주아 지식인 중년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모래바람 맞으며 자유야!!!(실제로 이런 대사ㅋㅋ) 외치는 일에 꼭 필요했던 것은 함께 떠나줄 젊은 남자…인 것 나 이해한다. 


그런데, 굳이 거기서. 


아니 그러니까, 어…언니 잠깐만요… 하… 젊은 남자 세 명과 한 침대를 꼭… (두명은 사막에서 만난 아랍계) 그 것은 영화적 설정인가 실화인가. 실화든 픽션이든 중요하지 않다. 내 안의 유교걸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으으… 하…!!! 이거 성별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나를 상처준 나쁜 년을 잊기 위해 중년 남자 작가가 팬이라며 접근한 젊은 여자 애인을 데리고 멀리 동양까지 떠나 현지에서 맘에 드는 여성 두 명. 총 세명의 여성에게 한 침대에서 서비스를 받으면…. 



써지지 않던 시가 써지는가요? 🤷🏻‍♀️


그렇지만 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여/남을 떠나서 성립이 안되는 게ㅋㅋㅋ 그리고 가부장제란 인류 보편의 억압인게(정말 파시즘의 원형답다) 이 젊은 남자 아랍인들은 금발의 그녀랑 자고 싶어 드릉드릉 플러팅 함. 난 남자가 너무 좋아. 젊은 남자를 사랑해!!를 숨기지 않는 잉게언니는 이때다 하면서 너 콜? 나 콜! 잤잤잤!! ㅋㅋㅋ 그렇다. 이 장면은 서비스를 받았다(?)기 보단 좋은 교환(?)이었던 것! 


아. 섹스란 무엇인가. 여남사이에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사랑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나는 글을 써댈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좀 해!! 라는 언니들의 말이 멀리서 메아리 치듯. 들려온다. 



2.

질투는 나의 힘 (2002) 

박찬옥 감독



박해일 예쁘다. 근데 이게 왜 여성 영화? (나의 한줄 평)

진짜 왜 여성 영화제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감독이 여자라서? 배종옥이 주체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하는 여성이라?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남자 영화(알탕이라고까진 못하겠지만)다.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을 때 느낀 그런 기시감이 들었는 데…ㅋㅋㅋ 여기서 박해일이 사랑하는 것은 배종옥이나 서영희가 아니다. 박해일은 질투의 대상인 문성근(편집장)을 사랑한다. 이건 내 과도한 해석이 아니라 리얼 참 트루다. 


화제의 장면(?)이 있다면 아마 “누나, 나도 잘해요.”하면서 하는 장면 일텐데. 그러니까 박해일은 누구랑 섹스를 하는 거냐. 누나랑? 아니지. 편집장한테 바람맞고 홧김에 순진한 처자(서영희)랑 자는 것도 그래. 나는 묻고 싶다. 얌마. 너는 누구랑 하는 거냐. (박하사탕도 그렇고 2천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한계다. 상처받은 남자 위로해주는 건 그 옆의 기구한 팔자의 여자.)


그러니까. 인간은. 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지어는 착취하는 권력에게(일수록)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하는 걸까. 앞의 주장(?)과 일맥 상통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말로 내게 있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박해일이 사랑하는 것은 그 자신을 멋대로 부릴 수 있는 문성근의 권력이고 거기서 나오는 매력이다. 편집장 곁을 서성이며 편집장의 여자들에게 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느냐 괴로워할 게 아니라 걍 편집장에게 가서 사랑해달라고 하세요. 제발. (그리고… 영화는… 결국…)


(미모에 묻히지만 <살인>부터 <헤.결>까지 박해일은 한남 그 잡채들을 연기해왔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ㅋㅋㅋ)


내가 이입이 되었던 사람은 당연히 박해일이 먹버한 K-장녀 서영희 였는 데.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가족. 사랑하지만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 그녀가 사랑한 것은 박해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구원이었겠지. 원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의. 오랫동안 많은 여성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방법이지만. 그런 종류의 구원(특히 결혼)은 환상이다. 인류가 한쪽 성별에게 5천년 동안이나 가스라이팅해 온 구원 서사인데, 신자유주의 덕분에 파탄나고 있는. 이제는 로맨스에서도 안써먹는 진부하고 재미없는 결말. 


2020년대의 대한민국, 서열 경쟁에서 탈락된(진입할 의지조차 상실한) 대다수의 젊은 남성들은 더 이상 여자에게서 위로와 우쭈쭈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구원서사 폐기하고 어디 한번 제대로 능력으로 경쟁해 보자는 여자들만 득시글. 천만명이 1인 가구, 그 중 절반이 빈곤층이라는 한국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지 못함을 불가피하게 알아차린 여남들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발명해내지 않으면 천천히 멸종할 것이다. 


3.

슈퍼 에이트 시절 (2022) 

아니 에르노, 다비드 에르노-브리오 감독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1370


- 아니!! 에르노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잘생겨지기만 한다... (나의 한줄 평)

30대의 아니 에르노(아직 작가로 데뷔하기 전 ~ 두편의 소설을 낸 후)의 가족 생활이 담긴 홈 비디오다. 남편이 10년간 찍었고, 이혼하면서 남기고(버리고) 간 필름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들이 편집하고 에르노가 코멘트를 달아 나레이션 했다.


인상 깊었던 대사는 “책 하나로는 인생이 바라는 만큼 달라지지 않는다”


와, 이 대작 <빈 옷장>(요즘 읽고 있음)을 출간하고 에르노 성림이 쓰셨다는 일기의 문장 되시겠다. 하… 대가 답다!!! 역시 사람이 야망이 있어야 한다. 종의 복수 정도는 염두하고😤 책 출간 정도는 뭐 걍. 그게 인생의 목표일 순 없지. 암요. 그래도… 책 쓰는 거 아무나 못하는 건데🥹 그럼 몇 권을 써야 인생이 달라지나요… 구질구질 내 인생도 달라지는가?


화질이 좋지 않은 70년대의 필름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어린 아들들의 깨발랄한 장면과 대비되는 아니 에르노의 표정들인데. 모든 장면에서 (행복했다는 나레이션을 덧붙이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우울해 보였다. 소설을 쓰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불만을 품게 되는 그 문장.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내가 언제나 반목하게 되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절반의 문장.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는. 


그림같은 여행지에서. 잘생기고 부유한 남편과 아름다운 두 아이와. 육아를 거들어주는 엄마와 함께 살며 안정적인 자기 직업까지 있는 이 젊은 여성이. 심지어 오랜기간 마음 먹어왔던 소설을 써내고 그것으로 인정까지 받은 상황에서. 누군가 찾아와 당신만큼은 행복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당위처럼 따져 물어도 할말이 없을 판국에.


영상 속 그녀는 어색해 보였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어정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우울해 보였다. 


오랫동안 나는 글을 쓰기를 주저했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 문장 때문에.

그러다가 나는 썼다. 글을 안써도 행복하지 않아서. 

그리고 이제는 쓴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문장을 부수고 싶어서.


행복은 무엇인지.

여자는 누구인지.

글이란 어떤 건지. 

쓴다는 것은?

하나하나. 집요하게. 따지고. 물어가면서. 


나는 글을 쓸 때 행복하다. 




누군가가 행복이라고 정해놓은 문법들 속에 정확하게 들어있는 한 여성. <얼어 붙은 (그) 여자>는 행복하지 않았기에 글을 썼을 것이고, 글을 쓰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게된 것은 아닌가 되물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썼다. 


나는 이 영화에서 글을 쓰는 30대의 어떤 여자를 보았다. 행복을 느껴야할 곳에서 행복하지 않은. 영광은 아주아주 멀리 있고, 삶은 아주아주 가까이 있고, 써야만 하는 것은 써야할 테고, 쓰는 것이 사랑하는 것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기로 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써야만 한다고 느꼈던. 아름다운 이국의 여행지에서는 서랍에 있는 원고를 떠올리며,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순간에 멀찍이 서서 좀 처럼 신나하지 못하는 한 여자. 



사랑한다. 필름 속 그녀의 멜랑꼴리를. 행복에 적응할 수 없음을. 사색 중인 딱딱한 표정을. 

써야 하는 자신 안의 소명을 따랐던. 마침내 승리하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용기를 내서 이런 문장을 쓴다.

써야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쓰는지 당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영화 속의 아니 에르노 처럼. 


덧, 억압의 표징들이 명확한, 이제는 사라진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실제 풍광에서 당시 느꼈던 바들에 대한 회고도 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와 영화는 일관되다. 그녀는 정말로 그녀가 쓸 수 있는 것을 썼다.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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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낫을 든 자웅동체 아메바의 9월 책 쇼핑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0-14 14:20 
    왜 때문에 오늘이 연휴의 마지막 날인 것인가. 보다 놀라운 것은 뭐 했다고 벌써 시월인가. 징글징글한 가족들과 딱 붙어 지내다가 (중간에 두 번 다퉜음) 서울에 올라오니 아, 이제 진짜 가을인가. 안되겠다. 뭐라도 써야겠다. 뭐라도 쓰자.“(40) 삼십 대 후반, 굉장히 가슴 아프고 특별하게 쓸쓸한 사연을 겪은 이후 나는 자웅동체 아메바처럼 혼자 씩씩하게 살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 <잘 돼가? 무엇이든> 이경미새벽 기차를 함께 타
 
 
단발머리 2023-10-14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대해서는 나는 엮인 글을 썼지롱 ㅋㅋㅋㅋㅋ 물론 에르노에 대해서만 썼지만요. 암튼....


그렇지만 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여/남을 떠나서 성립이 안되는 게ㅋㅋㅋ 그리고 가부장제란 인류 보편의 억압인게(정말 파시즘의 원형답다) 이 젊은 남자 아랍인들은 금발의 그녀랑 자고 싶어 드릉드릉 플러팅 함. 난 남자가 너무 좋아. 젊은 남자를 사랑해!!를 숨기지 않는 잉게언니는 이때다 하면서 너 콜? 나 콜! 잤잤잤!! ㅋㅋㅋ 그렇다. 이 장면은 서비스를 받았다(?)기 보단 좋은 교환(?)이었던 것!


요 부분 읽다 생각난 거는 이 지구상이요. 우주 말고 지구상에서는 ‘금발의 파란눈의 유럽 여자만‘ 가지는 위치성이 있잖아요. 그니까 여성으로서 최상품? 그래서 이게 가능한 거 아닐까요. 흑인 포함 우리 유색인(우리가 무슨 색연필이냐, 아무튼)에게는 불가능하다. 한편으로 저는 여성,을 마지막까지 억압할 부분은 ‘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에 대한 불안. 두려움. 잉 언니는 그걸 타파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러는 거 사실...... 엄청 피곤한데.....

공쟝쟝 2023-10-16 20:45   좋아요 1 | URL
그 엮인 글이 넘나 아까워서 부러 가지고 왔어요ㅋㅋ!!!

여성으로서 최상품......... ㅜㅜ 그러네요. 으잉 정말 그러네... 뭐라고 말로 표현을 못하겠는 데요, 사실 입에 담기가 걸끄러운 진실인 것 같아요. 적절한 예시일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설리와 구하라의 죽음이 참 너무 컸는데요, 되게 미안했거든요. 실은 나 조차도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대상화했던 것 같은 마음. 저렇게 이쁘고 사람들이 다 사랑해주는 데도 힘들구나.. 뭐 이런?!? 근데 그런 거 아니잖아요. ..... 정말로 정말로 아니잖아요. 억압은 달콤한 부분도 있죠. 정말은.

성적 해방. 잉언니도 아니 에르노 언니도 그걸 타파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근데 그 타파 좋은데.... 현실적으로 섹스가 그렇게 풍족한 자원이 아니라서.. 게다가 이젠 목숨도 걸어야하고요 ㅋㅋㅋ 아, 그러니까 저는 정말로 공쟝쟝의 섹탐(하다가 맘)을 지적인 의미로다가... 하다가 이걸 내가 왜 읽고 있냐(현타가 와서) 일시 중단 상태이지만, 연구해야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억압할 부분, 성. 그리고 여성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나타났죠. 최초의 최후의 식민지 맞습니다.

단발님...그러나 여성+여성 또한 사회입니다. 레즈비언 정치경제학을 이민경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틴델피를 만났더라고요.<꼬리를 문뱀>참고. 그리고.. 저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까지는 아니지만 경제적 이해 관계를 함께 꾸리는 것도 정말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섹스는 바깥(?)에서 하고 와도 경제적 자원은 여자들안에서 나누는 나름의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델피를 더 읽어야겠어요.

그게 되면 언젠가는 여남사이의 섹스도 해방되겠죠. (와...... 이상주의 쩐다)

서곡 2023-10-14 14: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잉에(게) 역 배우, 이 영화는 못 봤지만 출연작 몇 개 봤어요 페이퍼 쓸까말까 하던 영화가 전부터 있었는데 쟝쟝님으로부터 기 받아서 이 달 안에 써 봐야겠습니다 ㅎㅎㅎ

공쟝쟝 2023-10-14 15:04   좋아요 1 | URL
서곡님의 예술 레퍼런스는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영화도 이제야 이해하면서 쪼매 볼것들만 추천작 중심으로 챙겨봐서 (너무 좋음), 배우 연기 좋았어요.! 그리고 이 감독이 <한나 아렌트> 감독이라고 하더라고요. 여성서사 전문 ㅋㅋ 아 오늘 한나 아렌트 봐야할 것 같고.. 근데 저는 알라딘 하느라 오전을 다 날렸고 ㅋㅋㅋ

서곡 2023-10-14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뉴 저먼 시네마의 이른바 ‘홍일점‘이시죠 로자룩셈부르크 영화도 만드셨고요 전에는 저도 영화제 영화관 자주 다니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냥 집구석 ott로 자족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3-10-14 15:18   좋아요 1 | URL
서곡님. 저는 ........ 영화를 <방구석1열>로 배운 그런 여자입니다! 부비적. 그래도 김혜리랑 이동진 정성일 책은 읽었어요. 영화는 안보고요!! 책을 읽었어요. ..... 저는 시도... 평론으로 읽어야 이해해요,...(푸하하하)
그래서 뉴 저먼 시네마! 하시는데 너무 멋지다. 서곡님. 로자 룩셈부르크 영화도 만들었다고요?
방금 주연 배우 필모 찾아봤는데, <청년 마르크스>에서 예니로 나오신 분이네요. 인상적이었는데... 연기 잘하는게 아니라 작품선택 너무 철학적이네... 멋져... 나의 지적 여정은 이제 독일시네마로까지 넓어지는가..(그만햇!!)

서곡 2023-10-14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럼요 모든 게 다 책으로 가능하지 않습니까 ㅋㅋ 한나 아렌트와 도나 해러웨이 다큐영화도 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했었죠 영화제에 가야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어서 가끔은 여전히 가고 싶긴 합니다 ㅎㅎ

공쟝쟝 2023-10-14 15:40   좋아요 1 | URL
우와…. 서곡님💛😆😆🩷🥹🩷🧐 오늘의 발견이다! 시네필 서곡님의 여성영화 사랑과 아렌트의 생일!

은오 2023-10-14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님은 이제 서재부터 챙겨라!

공쟝쟝 2023-10-14 15:39   좋아요 1 | URL
서재에 좋은 선생님들 너무 많다!! 🥹

독서괭 2023-10-14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어도 없고.. 에서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 코어근육 키우기 위해 몇달째 홈트 중인 독서괭💪
잉게보르트, 아니에르노 보면서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가 생각나네요. 그렇다고 굳이 남자 세명과?? 는 저도 유교걸 반응하지만 ㅋㅋㅋㅋ

공쟝쟝 2023-10-16 20:06   좋아요 0 | URL
홈트로 만약 코어와 복근이 생긴다면 … 제게 꼭 알려주세요 괭님 😻😍😭🥹~ <방해자>는 언젠가 꼭 읽고 싶당!!
 
라캉이 땡기는 토요일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를 찾아가는 라캉의 정신분석
가타오카 이치타케 지음, 임창석 옮김 / 이학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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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물론 증상에는 고유한 고통이 있으며, 증상으로 고통받는 현상을 “그것이 당신답게 사는 방식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완전히 긍정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불만족스럽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안고 있기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건강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자신만의 ‘사는 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부담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증상을 제거하여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사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정신분석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 자체를 멀리하고 경시하는 문화가 싫다. 삶에서 오는 만족감(자신에게 집중하기)을 경험하기 힘든 사회적 조건에서 고통마저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대상화하는 것만큼이나 포르노화하는 것만큼이나 억압적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는 시구처럼.


지금 당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과 그래야 하므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선뜻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온몸으로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만족에 대한 질량/진정성을 구분할 재간은 없다. 나는 안괜찮으므로 종종 괜찮아?라고 묻게되고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다고 말한다. 곰곰 사실은 아니, 나도 좀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좋다. 


그건 내가 아픈 사람이어서인가? 하고 의심했다. 


아니다.


아프다는 것. 자신의 고통을 인식할 만큼까지 스스로를 굳히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살려고 하는 희미한 내 안의 흐느낌을 듣는다는 것이고. 미약한 흐느낌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능성이다. 가능성이기에 취약해 보이고 희미하며 어설퍼 보일 테지만.


도약에는 단절이 필요하다. 아니 단절이 필수다. 애벌레와 번데기와 나비 사이에는 도약이전에 명확한 단절이 있다. 내가 번데기인지 애벌레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비가 되어봐야 안다. 나비가 아닐 수도 있다. 나방, 쥐며느리, 개똥벌레 혹은 매미일 수도 있다. 뭐든 자신이 되면 된다.


희미한 목소리에 집중(그것을 내 안의 신호로 인지하기로 결단한)하는 사람은, 이물감과 당혹스러움, 무력감을 괴로움으로 감지하기도 하며, 찬찬히 들여다 보기 위해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야 함을 느낀다. 스스로는 알테다. 너무도 연약하지만 명료한 상태. 나를 구성해오던 내 안의 목소리와 분리되는 기분.  


요는 자유와 불안, 고통과 나다움에는 어떤 함수가 있다는 것. 솔닛의 말대로 고통은 자아의 경계이기도 하다. (물론 라캉의 정신분석은 자아가 아닌 주체[무의식적]를 대상으로 하며 자아개념은 탈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없앨 수 없으며 ‘증상’은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통은 고통이기에 대체로 무의식의 영역에 묶여있다. (타자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인식할 수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안과 바깥은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내 안은 내 바깥이다. 목구멍부터 똥구멍까지 어쩌면 인간은 하나의 구멍이므로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도 오만같다.


주절주절 써대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라캉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 책의 미덕은 “(7)과도한 도식화를 두려워하지 않음”이므로 책을 추천합니다. 물론 본인의 무의식이 두려운 사람은 안보겠지만 ㅋㅋㅋ


나는 내 무의식에 치열한 편이고… (알기 싫은 것을 모르고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요하거나 긁어파는 성격(이 없는 건 아님)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나를 살지 않은 탓으로 고통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건강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임을 수월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거나 사회의 인정이나 열악한 위치(대체 그것을 누가 평가하는가?) 때문 만은 아니다. 혹자는 스스로 알아서 ‘사는 방식’을 터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자신이 완전체라면… 대체 왜 사는 거지?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다!) 


제 나름의 고유한 사는 방식은 누구도 완벽히 알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는 모른다는 것. 모른다는 것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태어나버린 이상 누구나 자신의 ‘사는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는. 당위로서의 행복/건강/정상의 추구가 아니라 나를 사는 방식. 그것이 증상, 고통의 보다 분명한 존재 이유라는 것을 나는 이제사 아주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느낀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고통. 그것을 질환, 병, 박멸해야 할 해충처럼 다루며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지구를 타자화한 현시점의 인류가 바로보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일지도.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

감정(몸의 반응)에는 분명 까닭이 있다.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발견해낸 ‘사는 방식’이라면 사는 방식일 것이다. 

그것들을 내쳐온, 보려 하지 않은, 내 안의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음이 정말은 내 무의미한 고통의 의미였음을. 


의미의 절단.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 라캉과 관련한 글들을 읽을 때 나는 깊이 위로받는다. 지금의 ‘사는 방식’을 옹호받는 느낌이라 그러하다. 장난처럼 나는 생라캉이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의 사상이 퍽 마음에 든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저런 현상들 중에 내가 가장 못마땅한 것은 인간 저마다에게 있는 고유한 감정이나 심리적인 숙제들에 라벨링을 붙여 질환으로 여기는 언어의 생산인데… 


나 조차도 실은 그런 언어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을 벼려나가 보마 한다. 


나의 불행에 대한 처방이 나의 안정일 수는 없다.

같은 밀도로 나의 행복에 대한 처방이 나의 안정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 언어들은 애초에 같은 언어였겠지.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안정이다. 불안정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미세한 지점.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나로 사는 방식은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 많이 휘청거리는 것은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 가장 안정적인 상태는 누워있는 상태지. (물리적으로 나는 오래 누워있는 편이다.) 스우파 2를 동생들과 종종 본다. 아름답고 멋진 춤은 불안정의 안정이다. 


- 내가 나한테 너무 미안해요.


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타인들의 언어로 나를 괴롭힌 나를. 


나의 언어 세계는 통증이 인식의 조건이며 가능성이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상처가 곧 사랑이다. 과정에서 오는 성장의 기쁨을 알아가는 중이다. 

2023-09-27

정신분석은 주체의 진리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이는 환자의 "문제 행동"을 소멸시키거나 환경에 대한 적응을 통해 자아를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오늘날의 이른바 "마음의 치료"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지배되는 지식의 체계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주체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정신분석의 길입니다.

달리 말하면 정신분석이란 표면적인 제 증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주체가 "사는 방식"의 핵심을 파고 들어가는 실천입니다. 문제는 진리가 드러나는 단면을 "잘라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영역을 넘어선 무의식의 영역이 드러나게 됩니다.
-😀 정신분석의 목적 - P6

무의식이 시니피앙으로 구성되는 한 무의식은 시니피앙의 ‘법’에 따라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은 "문법"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결국 무의식은 그저 혼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구조를 가지며, 그곳에서는 어떤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무의식을 혼돈으로 파악하는 자아 심리학과 라캉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는 무의식을 억압하고, 이러한 ‘법’을 못 본 척합니다. 나아가 자아는 상상적 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목적은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법’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환자를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적인 구조를 가진다. - P151

라캉은 그런 본능론을 일축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것을하나의 ‘체험’으로 상정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물’의 체험입니다. 향락의 기원은 ‘사물’의 체험에서 유래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우리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바로 ‘사물’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원초적인 체험을 한 후에 우리는 죽음 충동에 이끌려 향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물’의 체험이란 원초적인 만족 체험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 😀 사물의 체험, Ruti 식으로 말하면 큰 사물the Thing의 울림인 듯. - P240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① 자신이 어떤 형태로 향락을 얻을 것인가라는 점이며, 또한 ② 욕망에 의한 변화를 만들려면 어떤 ‘여백’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점으로 이러한 점들이 인생의 의미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환상이란 바로 향락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며, 또한 욕망의 지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환상이 지시하는 이러한 규정이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셈입니다.
환상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환상이란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종교는 인생의 지향점을 제시해줍니다.

​- 😀 아... 정말 도식화 너무 심하게 해서 라캉 다 이해해버린 듯 ㅋ - P263

351
다양한 고통은 결국 모든 인간이 대타자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중략)원래 대타자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의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타자는 그 구조상 결코 ‘최고의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중략) 이러한 실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대타자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에 의지 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이성"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 😀 내 말로 풀자면 정신분석 최후의 표적은 대타자에게 찔끔찔끔 반항하는 삶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이거(아무도 안시킨 돈도 안되는 공부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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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29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 너무 예뻐요. 쟝쟝님!
책은.... (먼 산) 나도 이 책은 읽어보고 싶어요. 파란색이 너무 예뻐서요.
그러나 읽어야 하는 책은 <라캉, 사랑, 바디우>라는 점을..... 굳이 강조합니다. (핑크색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29 12:03   좋아요 1 | URL
글씨 객관적으로다가 안이뿌다!!! 그 책 폈다가… 드라마로 퇴각… 🤣🤣🤣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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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집중력은 약간 어려운 것을 목적 없이 해야 생긴다고 한다. 내게 그것은 글쓰기(주로 독후감)이다. 쓰다 보면 재밌게 쓰고 있다. 그리고 몰두하게 되지. 친구가 글 쓰다가 과집중해버린 사연을 말해주었다. 내게 글 효율이 가장 좋을 때는 일하기 싫을 때이다.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니까. 


강조점은 ‘목적 없이’에 찍힌다. 친구도 그랬던 건 아닐까? 혹시 일하기 싫으셨던 건 아닐까요?


취미로 하는 활동을 SNS에 올려서 수익화하라는 조언들이 넘쳐나는 시절이다. 그 일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목적이 없기(쓸데 없었기)’ 때문이라는 최신 신경과학의 권위에 기댄다면, 그런 식의 (생산성의 외피를 쓴) 조언들이 얼마나 유해한지 알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 도입한 목적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기를. 당신의 몰입은, 집중력은 중요하다. 모든 것을 생산성으로 치환하지 않을 것. 그것이 개인의 삶을 식민화하지 않는 유효한 투쟁 방법이라고 현시점의 나는 생각한다. 


요즘 집중력이 엉망이라서, 오늘부터 ‘집중’해서 밀린 독후감을 써댈(?) 생각이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기록들을 모아와야 하는 데, 어제 야당 지도자의 체포 동의안 가결(이 나라의 정치 무슨 일인가)을 적어두며. 7월 초에 읽은 <제노사이드>부터 쓰려고 한다. 


소설 자체는 재밌어서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못 놓고 세 번에 나눠서 읽었다. 


세번의 기록들  갈무리.  



1 .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스스로 고심해 결단하는, 

선택을 하는 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고독한 남자들이 보인다.


라는 메모. (10년 전 소설인데)


주인공 ‘예거’ 중령이 네메시스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일할 때 처지지 않기 위해 도파민용(얼굴을 보면 기분이 조크든여)으로 차은우가 나오는 <여신강림> 드라마를 밥 먹는 시간대를 이용해 감상하고 있었는 데, 옆의 메모도 함께 읽어야 더 재밌다. 


드라마 속 남주만 여주인공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준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착한’… 

2023년에 이 무슨 개떡같은 시나리오인가


가부장제 하의 여성(이라고 쓰고 바로 나)의 의존성이 어떤 식으로 장려되는지 보려면 메이크 오버 장르의 로맨스 드라마를 보라! 


드라마가 내는 결론 : 얼굴만 예쁘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차은우는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볼 수 있으니깐여. 차은우 정도의 알파남을 가지려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꼭 간직해야죠. 아무에게나 빼앗길 수 없는. 차은우. (또 그 얼굴이 좋다고 보고 있는 나…ㅋㅋㅋㅋ) 나의 본모습을 알아봐주는 남자를 위해서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이중의 노동을 해야만하는 여성은 타인의 시선을 처리하느라 고독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나란 여자란 또 예쁜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시각에 약함) 결국 드라마 <여신강림>을 통틀어 가장 관심이 간 것은 처음 알게 된 배우 문가영의 프로필인데. (나무 위키를 열심히 읽은 결과)



아니 배우 문가영님, 자크 라캉 왜 읽어요? 내면+외면+지성미, 반칙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지성미 나 응원하고요, 그 옆의 배우 차은우님은 혹시라도 설마 라캉은 읽지 말고요, 당신은 머리에 뭐 채우지 않아도 된다. 그건 내가 채울...(누나가 요즘 라캉 입문서 읽는...중인데....ㅋㅋ) 


교차 편집된 서스펜스가 매력적인 소설은 영화처럼 재밌고, 주인공 남자들은 목숨을 걸고 인류를 구하는 결단들을 스스로 내리며 분투하는데. 클리셰 폭발 로맨스 드라마 속 못생긴 여자 주인공은 화장으로 스스로의 자존감을 구하며, 그 과정에서 알파남을 얻는다! 


두달 전, 두 작품을 함께 보는 나는 그게 못마땅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내게 아프리카 오지에서 생고생하며 인류를 구할래, 화장하고 차은우를 구할래?라고 물어보면 인류보단 역시 차은우를. 벋 문가영처럼 매일 매일 화장하는 건 이제는 정말 못하겠고요. 세안도 열심히 해야하고... 후... 물도 아깝고… 그냥 인류도, 은우도 싫고. 나는 나나 잘 구하렵니다. 

 


2.


<제노사이드>에서는 제노사이드가 왜 일어나는 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생각들이 각종 심리학에 능통한 두뇌파 등장인물 루벤스의 입으로 구구절절 나열 되는 데, 대략 이런 대사들이다. 


"(55) 그러면 수십 만 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전쟁을 지시하는 국가 지도자의 잔학성은 보통 사람과 같을까? 아니면 역시 그들은 이상한 사람이며, 남들과 벗어난 공격성을 사교적인 미소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일까? 루벤스는 후자일 거라고 추론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모든 정치적 투쟁을 승리한 인간은 정상의 범위에서 이탈한 호전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인간을 리더로 선출하는 시스템이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뽑힌 사람이야말로 집단의 의사를 체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심리학은 권력자의 심리학이라고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사람은 어째서 전쟁을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명령하는 인간의 정신 병리를 먼저 해명해야 했다.

(258) 그가 특히 주시한 점은 국가나 군산복합체 같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국가의 인격이란 의사 결정권자의 인격, 바로 그 자체였다.

(259)

루벤스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번즈 대통령이라는 사람 자체였다. 그의 발언 내용을 보면 이라크 독재자를 깊이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지만 어째서 죽일 정도로 미워하는지 석연치 않았다. 거기에는 국익이라거나 군산복합체로 이익을 유도하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번즈 본인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동기가 잠재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루벤스는 제한된 매스컴 정보로부터 대통령의 살아온 이력을 더듬어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가정에서 독재적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라크 독재자와 겹쳐 보고 타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루벤스 본인조차 데이터 부족에서 오는 단편적인 분석이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만약 그것이 진짜 핵심이라면 무서운 일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한 남자의 부자 관계 때문에 10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 되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적을 때려 부순 뒤에 번즈는 허무함을 느낄 터였다. 애초에 그가 싸울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인 것은 자신의 심층 심리가 낳은 허구의 적에 지나지 않았다."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자신의 심층 심리가 낳은 허구의 적에 밑줄. (제가 또 푸코 읽기 전까지는 심리학 많이 읽었다 아닙니까 ㅋㅋㅋ) 그래서 국가 지도자의 내면세계가 이렇게나 중요한데, 국가의 인격이란 의사 결정권자의 인격인데, 어쩌다가 내 나라의 대통령은 서울대 출신의 한남 검사인가. (K-하늘 아래 발에 채이듯 보이는 게 윤석열스러운 인격이긴 함…) 


내가 나라에 잘못한 게 무엇인가. 내가 애 안낳는 거 빼고는 세금도 잘내는 데, 왜 나까지 매도되어야 하는 가. 나는 아니다, 나는 윤석열과 같은 인격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항변해 보아도. 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2찍 바보! 이래봤자, 2찍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금내는 국민이 할 일은 2찍에 대한 비난과(을 하지 말자고 쓰려다가 차마 내가 못하겠음. 윤석열 싫어!!!!~!!!) 동시에 어쩌다가 윤석열이 나왔는 지에 대한 보다 풍부한 해석이지 않을까. (딱 잘라내진 어떤 단선적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저는 분석하기로 했습니다. 2찍이 아닌 1찍의 멘탈을. 


승리자 혹은 자수성가한 자들은 자아도취를 경계해야 하는 데, 결국 자.적.자(😲자기 적은 자기라는 뜻으로 사용했음을 밝힙니닼ㅋㅋㅋㅋ)라고, 변화의 시기에 효과를 본 방식만을 계속해서 고집하면 포트폴리오가 망가지는 것 같다.


내 생각에 민주당의 패착은 방식의 혁신 없음(권력 도취 + 도덕적 우월감/만족감 + 피해의식 => 같은 편은 모르겠고… 옆에서 보기엔 비호감, 꼴비기 싫음) 거기에 있다. 그러고 보면 계속해서 혁신하는 기업가(자본가) 정신이 권력 나누느라 바쁜 우리 편 힘줘! 정치를 이기는 것도 말은 된다.


민주화와 산업화 모두에 성공해버린 한국의 정치는 1/2찍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국민의 멘탈리티(정신 건강)를 가지고 싸우는 거다. 국민을 사랑해서 하는 정치라면, 제발 한국인의 피폐해져가는 심리상태를 똑바로 보라!! 걱정스럽지 않나?


소설에 나온 권력자들의 모습과 현실 정치를 연결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좀 있었는 데, 오늘의 페이퍼에서 내가 기억해두고자 하는 것은 이 개념. 


사후확증편향 (유튜브 하나 가져옵니다) https://youtu.be/Sy6sFrZVONA



(심리학) 행동 경제학의 개념이고(여러분 저는 경영학도 였습니다ㅋㅋㅋ)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애써 외면하는 무의식, 즉 자기 정당화)이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의 무의식에는 심각한 사후 확증편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분단이라는 조건에 의해 오랜 시간 구조화되어 왔으며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가 갱신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지 없이를 여지 없이 해버려서 편향이 강화만 된다. 흠🤫 어쩌면 정치가 먼저 바뀌어야하는 데, 이걸 정치가 부추기고 있다. 대의제의 한계를 봉합하던 광장을 포함. 정치가 아무런 효능감을 주지 못할 때. 한국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탈정치화되는 것 같기도 해.


인간의 뇌는 익숙한 걸 좋아한다. 익숙한 관계, 익숙한 방식, 익숙한 맛, 익숙한 마음과 정서. 불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래서 (정치적) 진보가 어려운 것이고. 


문제는 인간이 약 15년 전에 새로 만들어낸 이 스마트 기계(+SNS)의 알고리즘이 그러한 인지 왜곡을 더 강화시키는 방식(익숙한 것에만 노출)으로 설계되었다는 거다. 이걸 다 집어던질 수는 없을 테지만, 우리 자신의 무엇을 바꾸는지는 알고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24시간 떨어져 있지 않은 기기가 인간 무의식이 가진 편향들을 계속해서 더 가속화 시킬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채면, 의식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훈련해야 하는 거구나 하게 된다. 자기갱신.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역시 속담이 최고여.)


몸뿐만 아니라 지식의 섭취만큼은 그래야겠다고 다시 한번 맘을 먹는다. 앎비앎. 내가 옳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읽으려 들지 말자. 다름을, 불편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지적인 불편함.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의심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소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인류를 구하기 위한 그 자신들의 싸움을 각각 떠안은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생각하지 않음. 넘겨 짚지 않음. 듣고 싶은 말만 듣지 않음. 자신을 끝까지 의심함. 우리 편이라고 마음 놓지 않음. 이들이 극도의 위기의 순간에 하는 결단은 의외로 멈춰서 다른 의견들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걸 기준으로 숙고하는 것이었다. 


반면 신중한 주인공들이 싸우는 이들은 권력에 도취된 확증편향의 정치가들이고. 


3.

마지막 이 책 <제노사이드>에 대한 나의 총평이다.


서양남 일본남 아프리카남 심지어 피그미족남에 한남까지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여성은 엄마, 부인, 임산부… 말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민첩한 액션을 강조해야 하는 서사 구조상 알탕일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관심 없어도 너무 없고 있어봐야 후지다. 여성은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재생산을 위해 쓰이거나, 강간을 당하거나,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역할이 배정되어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만 기능한다고 보면 됨. ​


나는 이게 일본 책의 폐해ㅋㅋㅋㅋ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일본보다 한국이 차라리 낫다. 


실제로도 핵 단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권한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생물학적 여성이 오른 적은 아마 없다. 인간은 똑똑한 여성(힐러리 로댐)을 그 자리에 앉히느니 도람푸를 앉힌다. 엄밀히 말하면 그게 이 지구의 수준인 것이지. 인간의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지. 나의 수준에 창피함을 느꼈다. 

여자도 인간이니까. 인간들아 잘 좀 하자.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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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3-10-14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글 너무 좋네요. 공장쟝 님 팬이 될 것 같아요. ^^ 저도 외칩니다: 인간들아 잘 좀 하자.

공쟝쟝 2023-10-14 14:11   좋아요 1 | URL
잘좀하자! 나도 하자! 블루욘더님 안녕하세요!~ <세계 그 잡채>저도 이 책을 샀습니다! ㅋㅋ (읽지는 못하고..)

잠자냥 2023-10-14 13: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쳐 ㅋㅋㅋㅋ 소설 읽고 철핫 금지.

공쟝쟝 2023-10-14 14:12   좋아요 1 | URL
철학 아니고 ㅋㅋㅋ 페미니즘 섞인, 정치 비!평! (훌륭해라!)

단발머리 2023-10-14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우리나라와 같은 극단의 이분법은 분단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지 싶어요. 보수는 또 부끄러워할 판이다. 진짜, 차라리 이명박이 낫다, 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

앞모습 옆모습이 다 이쁘군요, 차은우는...........

공쟝쟝 2023-10-14 15:35   좋아요 0 | URL
동원캉이랑 비교 많이 되던데.. 차가 탱탱하니 더 이쁩디다 제겐 ㅋㅋ

잠자냥 2023-10-14 15:37   좋아요 1 | URL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사진 보니 뒷모습도 이쁘더군요. 저는 물론 그 사진 속 강쥐 세 마리가 더 이뻤습니다만….

공쟝쟝 2023-10-14 15:42   좋아요 1 | URL
잠자냥이 차은우 뒤통수 예쁘다고 하는데 왜 나 속상해? 안돼 잠자냥만큼은 차은우에게 넘어가면 안돼요!!ㅋㅋ 일루오지마!!! ㅋㅋㅋ 그러다가 막 나처럼 임영웅 노래 들으며 효도하고 싶어지는 그런 감성에 몸부림 친다!! 남연예인에 흔들리지 말아주세요!

잠자냥 2023-10-14 15:49   좋아요 0 | URL
웅 나 안 좋아해 ㅋㅋㅋㅋㅋㅋ 좋아하는 여자들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봤으나 강쥐가 더 이쁘더라능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14 15:52   좋아요 0 | URL
나도 은우를 예뻐하지 좋아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건 프랑스고양이잠자냥의 두뇌입니다 ❤️ 뇌성애자💘

은오 2023-10-14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은 글이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14 15:36   좋아요 2 | URL
쉿 .😽🧐

잠자냥 2023-10-14 15:50   좋아요 2 | URL
다 읽은글이구먼22222

은오 2023-10-14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은우는 놀기 바쁜 것 같던데.... 평생 라캉 읽을 일은 없을 듯합니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14 15:38   좋아요 1 | URL
우리 은우도 연기 잘하려면 인간 심연도 좀 들여다 보고 그래야하는데, 누나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니란다. 네게서 그런 걸 원했다면 여신강림을 봣겠니? 연기 잘하지 않아도 난 이해해. 내가 너라도 그랫을거야! 진정한 팬의 자세라고나 할까.
 
아니 에르노 - 이브토로 돌아가다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사람의집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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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하며 도서관 배경으로.



그가 무엇을 *어떻게* 쓰고 싶어했는지를 알고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실제로 어떻게를 구현했다는 걸 읽을 수 있게되면 그냥 읽을 수가 없어진다. 나는 이해한다. 어떤 이에게는 쓴다는 것 자체가 내부의 이민이며 계급의 탈주라는 걸. 


“(43)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아는 것, 좋아요, 그 문제의 경우 제가 처음은 아니죠. 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는 엄청난 질문입니다. (중략) 제가, 이를테면 내부로부터의 이민자인 제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저는 한쪽에 자리한 문학적 언어, 배우고 사랑했던 그 언어,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자리한 출신 언어, 집에서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 피지배자들의 언어, 그 뒤 제가 부끄럽게 여기지만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을 언어, 이 두 언어 사이의 긴장 속에, 심지어 찢김 속에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이거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나의 출신 세계를 배반하지 않을 것 인가?


사회 계층이 어느 정도는 굳어진 프랑스의 계급 탈주자들은 어떤 수치감을 명확히 보는 것 같다. 한국은? 자수성가한 자들일수록 수치를 모르고 자신의 출신 세계를 혐오한다. 올라오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고 다음 성과에 몰두한다. 


도통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 힘든 자아들은 기꺼이 성공 주문에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고, 너를 그곳에서 꺼내는 건 오로지 너야. 성공을 팔아 성공하는 마케팅에서 성공한 이들은 세계와 글쓰기에 대해 성공을 자격삼아 말을 하고 책을 쓰고 감히 잘 사는 팁을 알려주겠노라. 좋아요. 구독.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다니.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깊은 자기 이해에 가닿지 못한채로 세계를 통찰한다? 어불성설이다.


이런 시절에 삶의 균열을 경험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균열을 봉합하지 않고 드러내는 용기있는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감히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 믿는 오만하고 강박적인 세계관에 대한 복수이며 투쟁이다. (라고 내 멋대로 의미를 부여해본다.)


탈출하고 싶다. 탈주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이것이 나 임을 인정할 수 없다. 현실에 그대로 만족되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내가 가진 것은 (여느 비평가들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적 욕망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어딘가에서는 붙잡혀지고 흐느껴진다. 

성공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도, 가혹하게 버리고 떠나 왔다 하더라도. 


나는 조금 단호하다. 자신을 산다는 것은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단절과 비약은 있으되, 우연과 무의미의 카오스가 정말로 진실이라도. 그것을 엮어쓰는 것은 나. 의미의 실에 매듭을 짓는 것은 나. 엉켜있는 대로의 미감을 똑똑히 보는 나. 는 그것들을 그것들대로 인정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벼락같은 화해를 안다. 내가 안다.


그 인정이란 투항이 아니라 투쟁의 시작이라는 것도.


그리하여,

나는 끝내 지지 않았으니,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준비. 아니 에르노. 


<책 117페이지 질의 응답>


질문 언제부터 출신 환경, 부모의 환경과 화해했다고 느꼈는지 알고 싶습니다.

A. 에르노 그저 글을 쓰면서였어요.

질문 글을 쓰면서라면, 초기부터요?

A. 에르노 1970년대 초반에 집필을 마치고 나서 <빈 옷장>이라고 제목을 붙이게 될 책을 기획하면서부터 그 랬습니다. 몇몇독자들은 그 책을 읽으면서 제 부모가 헐뜯기고 부정적 시각으로 비춰진다고 분개했어요.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 드니즈 르쉬르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떠올릴 뿐만 아니라 해석하는 대로의 모습으로 그 시기들이 다뤄진다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취학하기 전 몇 년간의 어린 시절은 그저 천국으로 그려지죠. 사탕도, 커피까지도 있는 식료품점이라는 천국으로. 그러다가 학교, 책을 접하면서 드니즈는 그 세계가 <훌륭하지않다>는 것을 차츰차츰 깨닫고, 학교와 지배하는 자들의 시선이 <훌륭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자신의 부모가 부합하지 않는다고 부모를 원망합니다. 이 모든 것을 성찰해 보지 않고서, 우리 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위계에 따라 분리된 사회와 그 사회를 작동시키고 서민 계층 출신의 아이에게서 부모에 대한 수치를 촉발하는 가치와 코드라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런 모든 이야기를 쓸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그 첫 작품의 기원에는 -훗날 제가 <자리>에서 말했듯이- 엄청난 죄책감과 부모에 대한 <별개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어조가 격렬해, 심층에서는 그럭저럭 나와 부모의 분리 과정의 인지 및 규명이 어우러져 일어나는데, 이 측면이 가려졌던 모양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첫 소설 <빈 옷장>을 다 읽고 이 회고록을 읽었는 데, 질문자는 놀라지만 나는 <빈 옷장>이 화해 직후 혹은 화해하는 중에 쓴 글임을 알아보았다. (독후감 나중에 쓸 예정… 대체 언제…?ㅋㅋ)


자신의 수치를 돌보지 못한 채 다음의 성공에 대한 약속만이 가능성으로 제시되는 닫혀버린 세계에서. 공부하지 않고 쓰는 글은 나쁘다. 안 쓰는 게 낫다. (그것들을 결단코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닫힌 나르시시즘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도.)


2023-09-11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아는 것, 좋아요, 그 문제의 경우 제가 처음은 아니죠. 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는 엄청난 질문입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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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14 1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계급 의식에 요즘 빙의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니 에르노에 더 진정으로 빙의하려면 섹스도 그녀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밥은 먹고 다니냐 쟝?
손목이 더 얇아졌네.

공쟝쟝 2023-10-14 14:13   좋아요 2 | URL
하... 나의 섹슈얼리티의 억압 역사를 쓰기 위해서 섹슈얼리티 해방시켜야 합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진정한 해방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지 않을 자유. 언제든지 그만둘 자유입니다. 진정한 욕망은 언제나 그만 둘 수 있는 힘 입니다.
!!!!!!!!!!!!!!!!!!!!!!!
아니 에르노여!!

- 이제 잘 챙겨먹어서 알라딘 돌아왔어요!!

단발머리 2023-10-14 14:49   좋아요 0 | URL
밥은 먹었는데....
손목은 내가 더 얇아요. 잠자냥님? 듣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10-14 15:05   좋아요 3 | URL
단발머리님 잘 챙겨먹고 손목도 굵어지고 건강하기로 해요!

단발머리 2023-10-14 14:58   좋아요 2 | URL
역시 내 생각 해주는 건 건수하님 뿐이에요! 아니구나……
다들…. 이구나 😳😳😳😳😳

건수하 2023-10-14 15:05   좋아요 0 | URL
다시 보실까요? ㅋㅋ

단발머리 2023-10-14 15:08   좋아요 1 | URL
역시 내 생각 해주는 건 건수하님 뿐이에요!! 😘😍🥰

공쟝쟝 2023-10-14 15:10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손목이 굵어지시기를 저도 바랍니다! 수하님 마음과 함께 🤪

책읽는나무 2023-10-15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책보다 쟝님 손목부터 봤어요.
손이 왜 저번보다 못해진 걸까? 하면서..ㅋㅋ
진짜 밥 잘 먹고 다니는 거 맞죠?^^
책은 일단 담아갑니다.

공쟝쟝 2023-10-16 20:05   좋아요 1 | URL
정말 잘 먹고 다닙니다!!! ㅋㅋㅋㅋ 걱정마세요 나무님 찡긋 😫😫😝
 

친구는 나에게 매번 왤케 착하냐고 하지만 나는 착하지 않다. 착한 척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내 안의 신랄한 공격성을 나는 알고, 어쩌면 나만 알지. 집-일-도서관(혹은 카페)이 일상이고 전부인 내가, 유일한 낙이었던 습관성 알콜마저 책 읽으려고 줄여버린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주의자(?)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난 딱히 바른 생활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규율이나 규칙을 지키고 예의를 차리는 쪽에 가깝다. 음. 🤔 확실히 자신과의 약속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체면 차리는 사람이다, 난. 그러기 싫은 데도 이미 내면화 되어있음. 덧붙여 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소심함도 있다. (소심하지만 발작 버튼 눌리면 어려웠던 것까지 포함해서 더 심각하게 쏟아냄 -> 그런 모습의 내가 싫어서 점점 더 주장이 어려워짐 -> 차라리 글을 씀) 


이런 내가 사회의 정상성/규범을 문제시하며 한계경험(동성애, 마약, bdsm…?)이라는 것을 좇는 푸코를 좋아하는 까닭은 뭘까 나 자신도 궁금했다. 특별히 어떤 금지의 위반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지적 모험에서 용감해지고자 하는 것이 내(완고한 불복종의?) 성향이라면 성향일 텐데… 


나의 그런 부분(착하지 않아서 공부하는)을 알려준 문장들을 읽었기에, 잊지 않으려고 끄적끄적 해본다. 



<푸꼬의 수난 2>를 읽다가 이런 단어를 발견했다. 푸코 아니고 푸코가 사랑한 니체에 대한 설명들인데.


“(23) 철학자만이 갖는 고유한 잔인성” 

“(24) 니체의 앎의 의지에는 ‘살인과 같은 것, 인간의 행복과 모순되는 무언가’가 있다.”

(내게 있는 잔인함은 내가 공부하게 하는 동력이다.)


니체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동물성(잔인함, 잔학함, 포악함)이 탄핵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표출되지 못한 동물성(충동/권력—니체曰: 잔인함을 실행하는 것은 최고의 권력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무런 금지 없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잔인해지는 것이 된다—)을 자신 내부에서 전개시키게 되었으며, 그걸 ‘영혼’을 개발했다!라고 설명하는 데. (이것은 내가 이해한 바에 대한 거친 정리이며, 인간의 영혼이 곧 인간의 동물성은 아니다. 니체 잘 알 님 덜, 만약 심각한 오독이라면 지적 바랍니다~ 아니면 냅둬주시구랴 클클)


여기서 영혼 어쩌고 할 것은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나는 인간이 유기체이기에 갖는 어떤 동물성, 포악함, 잔인함을 긍정/부정도 하지 않고 그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니체에 동의한다. 그것을 잘 처리해야~한다~라는 당위로 설명할 생각이 거의 없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음.) 잔인함. 폭력성. 혹은 권력 의지. 그건 나에게도 있다. 나는 내가 죽이고 싶은 인간을 죽이고 싶지도 않다. 죽는 건 편한 일이니까. 그가 처절하게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쳤으면 좋겠다. 온 땀구멍에서 수치감을 흘렸으면 좋겠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랜덤으로 노출시키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고 싶다. 사회 속에서 사회적으로 고통받으라! 나는 착하지 않다. 나에게도 나 스스로가 제어하기 힘든 어떤 충동들이 있다. 악랄한 저주, 깊숙한 우울, 무엇보다 분노. 가끔 방향을 못 찾아 나를 공격하기도 하는 분노가 있다.


자, 그렇다면. 예술이나 범죄, 악플 달기나 몰래 하는 일탈이 아니라 어떻게 철학함(혹은 공부함/사회가 인정해 주는 일반적인 공부는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하고 있는 내 수준에서 해내는 이런저런 읽고 쓰기들…)이 잔인함(혹은 내 경우 어떤 동물성의 표출) 일 수 있단 말이지?


난 여기서 니체의 천재성에 탄복하고 마는데. 


철학자가 앎의 의지를 추구해 가면서 그것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면해 나가다 보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23) 진리라는 관념이 그 자체 허구의 일종”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정직성은 허무주의로 끝날 위험이 있다”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내에서 가정에서와 같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규칙들, 전제들, 확신들을 파괴시키는 철학자들의 앎의 의지는 ‘일종의 숭고한 사악함’이다”



네, 저는 앎의 의지 주체 못하고 페미니즘 읽다가 심연을 봐버렸습니다. 결혼제도 및 가족제도와 재생산과 관습적 이성애와… 뭐 여타의 모든 것을 포기. 꼭 그렇게 살아야 해?라고 물으신다면. 이제 포기가 되었기에 원하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꼭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은 아님. 제도로서의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인데. 또 심오해지는데요, 나의 권력 의지를 포함한 감정과 실존을 제도가 주는 편안함에 의탁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를 살겠다. 나에게 끝까지 물어보겠다는 결단에 가깝죠. 제도를 거스르겠다 거부한다는 아님. 나, 히피 아님.  


사실 포기하기 싫기도 했고, 적막한 혼자가 될까봐 두렵고, 괴로웠는 데. 쭉— 나의 의존성을 직면하고 헤아리면서 포기시키고 나니 다른 의미로 홀가분해지고 원하는 만큼까지 명랑해졌다. 


하. 참으로 괴로운 시간들이었구려. 마침내, 붕괴, 되었던. 내가 믿어온 모든 것들을 다 허물어야 하는. 앞으로도 기약은 없지만 이제 정말 상관없다. 


비비언 고닉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58) 예지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200년 동안 갖고 있던 통찰이 내게 찾아왔다. 내 삶을 지배하는 힘은 오직 나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해내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생각을 통제하고, 확장하고, 내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법을. 그러나 실패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또 실패했다. 

(60) 내게 있어 페미니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힘겨운 진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힘겨운 진실을 추구한다. 

(61)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나는 세 차례나 구원 같았던 로맨스의 상실을 견뎌냈다. 사랑이라는 환상, 공동체라는 환상, 일이라는 환상의 상실이 그것이었다.  …

(62)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심한다. 내 단단한 마음을, 그리고 또 다른 인간 존재를 동시에 사랑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일을 한다. 매일의 노력은 여전히 몹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노력하는 한, 나는 로맨스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로맨스에 저항할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페미니즘은 내 안에 살아있다”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가부장제라는 진실을 정말로 알고자 하면서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제도와 규칙들에 환멸을 느끼는 나를, 그걸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로맨스라는 환상을 부여잡고 내 실존을 타인에게 의탁하고 싶어라 하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의 폭력적인 신랄함, 예사롭지 않은 가학성(m이 분명해ㅋㅋ) 니체 말대로 일종의 동물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내가 싫어하는 그들이 아닌 바로 내 안에. 그렇게까지 강렬한 분노와 포장된 자기애, 폐허 같은 허무주의, 타자혐오 약자혐오, 한남못지 않은 열패감이 있을 거라고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규율 권력을 내면화한 정도가 강해서 (성실하고 열심이었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으며.


어쨌든 어떤 독서란 확실히 “인간의 행복과는 모순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재밌기만 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런 쾌락은 넷플릭스가 훨씬 유효하다.) 이러한 모순의 읽고 쓰기에서 어떤 압력—을 견디고 나니, 또 이상하리만치 나 자신이 견딜만한 존재로 변했음을 느낀다. 물론 그건 한 번 딱하고 끝나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난 이젠 정말로 내가 좋다. 


내 안의 동물성을 동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충분히 보존하면서 적당량 꺼내서 쓸 수 있어질 때까지. 그것에 익숙해질 때 까지. 내가 해야 하는 것. 매일의 책상 앞에서 생각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할 때까지 패배하기. 나는 나의 사악함을 숭고하게 써보고자 합니다. 하하. 


음. 또 쓰다 보니 길어졌네. 두 줄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자니 난~ 여자라~~~ 나를 요카 쥐는 마~~~😫

내 안의 니체적 잔인함 = 내 공부(읽고 쓰기)의 동력


“(24) 잔인성으로 특징짓는 동물적 본성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이들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을 부여하는 데서 원초적 즐거움을 발견한다”  - 미셸 푸꼬의 수난2

2023-08-22 

잔인성으로 특징짓는 동물적 본성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이들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을 부여하는 데서 원초적 즐거움을 발견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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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14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동물성애자를 좋아하더라니.

공쟝쟝 2023-10-14 14:15   좋아요 0 | URL
동물성애를 하는 것이랑 동물성애자를 읽는 것은 다르다 말입니다. 잠자냥은 버섯 구하기 중단하시고요 ㅋㅋ -니체녀-

은오 2023-10-1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하지 않다고 하신다면....
일단 쟝님은 귀여운건 확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