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글을 텍스트로 삼아 쓴다. ([SIWFF]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 질투는 나의 힘/ 슈퍼 에이트 시절,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98160682)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많이 들어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닌가요?
모두 다 아시는가요? 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질투>, <연인>, <애인>의 작가인 최연지가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의 저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어 있는 이런 문단이…
“불행한 여자가 작가가 되어서 비로소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불행한 여자가 글을 쓰면서 행복해지고
그렇게 행복해진 여자가 비로소 작가가 된다.
눈을 씻고 봐도
……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 아니었고. 아니었다. 나는 이 문단, 이 책의 제목에 반만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전폭적(?)으로 동의했던 부분은 ‘사랑’과
‘효도’에 대한 잠언들이었다. 읽는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 자세히 쓰지 않겠지만, 특히 ‘효’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책보다도 확실하고 화끈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는 부모가 부모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내게 잘해줘서
부모를 좋아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뜻의 문장이었던 듯싶다. 보상으로서의 효도, 보험으로서의
자식을 넘어서서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 책은
말한다. 무조건적인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서 최대한 신의
사랑에 가까운 그런 사랑. 나는 그런 사랑을 받았고(팩트이자
역사) 또 그런 사랑을 주고 싶다(바램).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자식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폐부를 찌른다. 귀한
자식이며 과잉보호 엄마인 내게는 그랬다.
글 쓰는 불행한 여자에게로 돌아와 친구의 글을 다시 읽는다.
[그림 같은 여행지에서.
잘생기고 부유한 남편과 아름다운 두 아이와. 육아를 거들어주는 엄마와 함께 살며 안정적인
자기 직업까지 있는 이 젊은 여성이. 심지어 오랜기간 마음 먹어왔던 소설을 써내고 그것으로 인정까지
받은 상황에서. 누군가 찾아와 당신만큼은 행복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당위처럼 따져 물어도 할말이 없을
판국에.
영상 속 그녀는 어색해 보였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어정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우울해 보였다.]
나는 <슈퍼 에이트 시절(2022)>를
보지 못했는데 아니 에르노가 어떠했을지, 그녀의 심정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얼어붙은 여자>에서
충분히 써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고 여러 번 다른 페이퍼에서 언급했지만 정작 그 책에 대한 리뷰는
쓰지 못했다. 쓸 말이 없었다. 모두 다 내 말 같았고, 그녀의 절망이 모두 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어서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며 또 기다렸던 그 순간의 느낌이
내게는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느꼈던 절망을, 내가 느꼈던 무력감을요?
아니 에르노. 잘생긴 남편과 아름다운 아이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 속에서도 도대체 만족할 수 없는 혹은 만족할 줄 모르는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베티 프린단이 말했던
그대로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의자 커버를 씌우면서, 아이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이들을 소년단과 소녀단으로 태우고 다니면서, 그리고 밤에 남편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이 조용한 물음 –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 를
자신에게조차 던지기 두려워했다. (<여성성의 신화>, 54쪽)
가사 노동은 인간 생활의 필수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독특한 노동 형태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고, ‘엄마의 역할’과 중첩되면 가공할 만한 ‘24시간 풀타임’ 노동의 지옥문이 가차 없이 열린다. 주로 혼자 일하고 일의 명령자와 실행자가 (주로) 자기 자신인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만 괴로운 일이 아님은 ‘전업 주부’로 일하는 남성들이 ‘주부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끝없이 반복되고(오늘 밥
먹고 내일도 밥 먹다), 성과가 비가시적이고(치우면 모르고, 안 치우면 모두 다 안다), 성취의 범위가 한정되지 않는다(오늘 맛있게 먹은 떡볶이가 내일도 맛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에서
가사 노동은 여전히 특별한 노동 형태다.
굳이 강조하자면, 가사 활동과 노동을 즐겁게 하는 분들도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말이다. 집을 깨끗이 치웠을 때 기분이 상쾌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을 때 행복하고, 다림질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안일’에 내재된 폐쇄성이나 무한 반복성을 오래오래 즐겁게 누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이 아닌 주부, 내가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경험과 이런 가사노동의
특성이 결합했을 때, 여성이 느끼는 고립감은 상당하다. 사회적
존재로서 작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열정과 실력과 성취와 성공을 ‘집안일/살림’에서만 찾고자 했을 때, 혹은 그 인정을 가족 구성원에게서 ‘확인’하려 했으나 응답받지 못할 때,
직업이 ‘주부’인 여성의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자주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숨길
수 없으니, 표정에서 드러난다.
가정 내에서 여성,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뭔가 빠진 것 같다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나는 고립된 여성, 성역할을 요구받는 여성의 우울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고독과 고립, 혹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인간 실존의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마리 루티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 공허함을 '무nothingness’ 라고 불렀고 라캉은 '결핍lack’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버드 사랑학 수업>, 306/573)
인간 본연의 허전함, 외로움, 그리움, 공허함, 결핍의 인식을 마리 루티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른다. 결론을 서둘러 말하자면, 나는 아니 에르노 혹은 모든 불행한 여자의
글쓰기가 가정 성역할로 인한 좌절과 낙담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 본연의 불안함과 고독, 허무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생긴 남편, 아름다운 아이들,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황이면 모든 여자가 행복한가. 어떤 여자들은 분명 이런 상황을 꿈꾸고 그런 상황에서 마음껏
행복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행복해하는
사람도 평생 한결같이 행복한 것은 아닐 테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의 진지한 물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기 형식으로라도 자신의 고통과 아픔에 직면하고자 했을 때, 얼마간의 훈련과 연습이 당연히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배우고, 운동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요리를 배우고, 새로운 모임에 나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한편, 인간 내면의 허무와 빈자리가 기타 여러 가지 ‘활동’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신의 영혼(신의 호흡, 생기)을 나눠 받은 인간의 그 빈자리는 신만이 채워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인을 외부에만 두었을 때의 한계에
대해서, 나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외로움과 불안은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깊은 새벽,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걱정과 불안, 슬픔과 외로움을, 모든 사람은
지고 간다. 인생의 가치를 외부에만 두었을 때, 그것이 조금만
흔들려도 금방 삶 자체가 ‘붕괴’되는 슬픈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는 흔하디흔하다. 사랑에만 매몰된 인생은 떠나 버린 사랑에 엉망진창이 되고, 권력의 추종자들은 이 세상 모든 끈이 떨어져 버린 후 불행한 노년을 맞기 마련이다. 자식 키우는데, 자기 인생을 다 바쳤노라 공언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불효자식(?)들을 원망하고,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만 아는 사람은 갑자기 퇴사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쓸모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성취, 성공과
출세와 입신양명을 이루어 냈다 할지라도, 혹 여기에 아름다운 사랑과 다복한 가정이 더해진다 해도,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슬픔은 얼마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은 채로 여기가 바로 빈 자리, 공허한 그 자리임을 드러낸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에 반만큼 동의한다.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라고 쓸 때, 그 문장이 선사하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길어졌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는데 나는 불행한 여자인가. 너무 길게 썼다. 마이쮸 사과맛 2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썼다. 맛있어서 행복하다. 일단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