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글을 텍스트로 삼아 쓴다. ([SIWFF]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 질투는 나의 힘/ 슈퍼 에이트 시절,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98160682)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많이 들어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닌가요? 모두 다 아시는가요? 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질투>, <연인>, <애인>의 작가인 최연지가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의 저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어 있는 이런 문단이



불행한 여자가 작가가 되어서 비로소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불행한 여자가 글을 쓰면서 행복해지고

그렇게 행복해진 여자가 비로소 작가가 된다.

눈을 씻고 봐도


……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었고. 아니었다. 나는 이 문단, 이 책의 제목에 반만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전폭적(?)으로 동의했던 부분은 사랑효도에 대한 잠언들이었다. 읽는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 자세히 쓰지 않겠지만, 특히 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책보다도 확실하고 화끈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는 부모가 부모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내게 잘해줘서 부모를 좋아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뜻의 문장이었던 듯싶다. 보상으로서의 효도, 보험으로서의 자식을 넘어서서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 책은 말한다. 무조건적인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서 최대한 신의 사랑에 가까운 그런 사랑. 나는 그런 사랑을 받았고(팩트이자 역사) 또 그런 사랑을 주고 싶다(바램).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자식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폐부를 찌른다. 귀한 자식이며 과잉보호 엄마인 내게는 그랬다.

 



글 쓰는 불행한 여자에게로 돌아와 친구의 글을 다시 읽는다.


[그림 같은 여행지에서. 잘생기고 부유한 남편과 아름다운 두 아이와. 육아를 거들어주는 엄마와 함께 살며 안정적인 자기 직업까지 있는 이 젊은 여성이. 심지어 오랜기간 마음 먹어왔던 소설을 써내고 그것으로 인정까지 받은 상황에서. 누군가 찾아와 당신만큼은 행복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당위처럼 따져 물어도 할말이 없을 판국에.


영상 속 그녀는 어색해 보였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어정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우울해 보였다.]  


















나는 <슈퍼 에이트 시절(2022)>를 보지 못했는데 아니 에르노가 어떠했을지, 그녀의 심정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얼어붙은 여자>에서 충분히 써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고 여러 번 다른 페이퍼에서 언급했지만 정작 그 책에 대한 리뷰는 쓰지 못했다. 쓸 말이 없었다. 모두 다 내 말 같았고, 그녀의 절망이 모두 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어서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며 또 기다렸던 그 순간의 느낌이 내게는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느꼈던 절망을, 내가 느꼈던 무력감을요?



아니 에르노. 잘생긴 남편과 아름다운 아이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 속에서도 도대체 만족할 수 없는 혹은 만족할 줄 모르는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베티 프린단이 말했던 그대로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의자 커버를 씌우면서, 아이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이들을 소년단과 소녀단으로 태우고 다니면서, 그리고 밤에 남편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이 조용한 물음 –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 를 자신에게조차 던지기 두려워했다. (<여성성의 신화>, 54)



가사 노동은 인간 생활의 필수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독특한 노동 형태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고, ‘엄마의 역할과 중첩되면 가공할 만한 ‘24시간 풀타임노동의 지옥문이 가차 없이 열린다. 주로 혼자 일하고 일의 명령자와 실행자가 (주로) 자기 자신인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만 괴로운 일이 아님은 전업 주부로 일하는 남성들이 주부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끝없이 반복되고(오늘 밥 먹고 내일도 밥 먹다), 성과가 비가시적이고(치우면 모르고, 안 치우면 모두 다 안다), 성취의 범위가 한정되지 않는다(오늘 맛있게 먹은 떡볶이가 내일도 맛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에서 가사 노동은 여전히 특별한 노동 형태다.



굳이 강조하자면, 가사 활동과 노동을 즐겁게 하는 분들도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말이다. 집을 깨끗이 치웠을 때 기분이 상쾌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을 때 행복하고, 다림질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안일에 내재된 폐쇄성이나 무한 반복성을 오래오래 즐겁게 누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이 아닌 주부, 내가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경험과 이런 가사노동의 특성이 결합했을 때, 여성이 느끼는 고립감은 상당하다. 사회적 존재로서 작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열정과 실력과 성취와 성공을 집안일/살림에서만 찾고자 했을 때, 혹은 그 인정을 가족 구성원에게서 확인하려 했으나 응답받지 못할 때, 직업이 주부인 여성의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자주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숨길 수 없으니, 표정에서 드러난다.




가정 내에서 여성,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뭔가 빠진 것 같다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나는 고립된 여성, 성역할을 요구받는 여성의 우울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고독과 고립, 혹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인간 실존의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마리 루티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 공허함을 'nothingness’ 라고 불렀고 라캉은 '결핍lack’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버드 사랑학 수업>, 306/573)




인간 본연의 허전함, 외로움, 그리움, 공허함, 결핍의 인식을 마리 루티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른다. 결론을 서둘러 말하자면, 나는 아니 에르노 혹은 모든 불행한 여자의 글쓰기가 가정  성역할로 인한 좌절과 낙담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 본연의 불안함과 고독, 허무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생긴 남편, 아름다운 아이들,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황이면 모든 여자가 행복한가. 어떤 여자들은 분명 이런 상황을 꿈꾸고 그런 상황에서 마음껏 행복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행복해하는 사람도 평생 한결같이 행복한 것은 아닐 테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의 진지한 물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기 형식으로라도 자신의 고통과 아픔에 직면하고자 했을 때, 얼마간의 훈련과 연습이 당연히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배우고, 운동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요리를 배우고, 새로운 모임에 나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한편, 인간 내면의 허무와 빈자리가 기타 여러 가지 활동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신의 영혼(신의 호흡, 생기)을 나눠 받은 인간의 그 빈자리는 신만이 채워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인을 외부에만 두었을 때의 한계에 대해서, 나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외로움과 불안은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깊은 새벽,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걱정과 불안, 슬픔과 외로움을, 모든 사람은 지고 간다. 인생의 가치를 외부에만 두었을 때, 그것이 조금만 흔들려도 금방 삶 자체가 붕괴되는 슬픈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는 흔하디흔하다. 사랑에만 매몰된 인생은 떠나 버린 사랑에 엉망진창이 되고, 권력의 추종자들은 이 세상 모든 끈이 떨어져 버린 후 불행한 노년을 맞기 마련이다. 자식 키우는데, 자기 인생을 다 바쳤노라 공언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불효자식(?)들을 원망하고,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만 아는 사람은 갑자기 퇴사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쓸모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성취, 성공과 출세와 입신양명을 이루어 냈다 할지라도, 혹 여기에 아름다운 사랑과 다복한 가정이 더해진다 해도,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슬픔은 얼마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은 채로 여기가 바로 빈 자리, 공허한 그 자리임을 드러낸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에 반만큼 동의한다.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라고 쓸 때, 그 문장이 선사하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길어졌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는데 나는 불행한 여자인가. 너무 길게 썼다. 마이쮸 사과맛 2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썼다. 맛있어서 행복하다. 일단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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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WFF]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질투는 나의 힘/ 슈퍼 에이트 시절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0-14 14:10 
    반백수는 하던 일을 중간에 내려놓고 평일 낮부터 영화 세 편을 연타로 때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올해로 3년 째 꾸준히 참석(?) 중인데, 생각지 못한 영화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 매년 우산 들고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도 다르지 않아 영화 세편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그쳤더군.글 쓰는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들 위주로 골랐다.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아니 에르노. 중간에 <질투는 나의 힘>은 동명의 시를 떠
 
 
서곡 2023-09-0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이 책 읽었습니다 제목에 끌려서 ㅋㅋ 두 번이나 읽으셨군요! 제 기억엔 행복한 여자는 글을 안 쓰고 돈을 쓴다고 ㅎㅎ

단발머리 2023-09-28 17:21   좋아요 1 | URL
에궁.... 제가 놓쳐서 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늦어서 죄송요 ㅠㅠㅠ
서곡님도 읽으셨다니 역시 ㅋㅋㅋㅋㅋㅋ 이 책 좋은 책 같아요, 그죠?
서곡님, 행복하고 여유로운 추석 되시길요! 맛난 것도 많이 드시구요^^

독서괭 2023-09-08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단발님. 이 글 왜이리 좋은가요? 한문장 한문장 콕콕 박힙니다. 내 마음이 그 마음인데 나는 왜 이렇게 못 쓰는겨..
그나저나 그 빈자리는 뭘로 채울 수 있을까요? 영영 안 채워지는 걸까요?

독서괭 2023-09-08 20:04   좋아요 3 | URL
문득 든 생각인데, 구멍을 어떤 하나의 대상으로, 영구적으로 채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다만 구멍을 가득 채우는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은 후에도 빈자리를 볼 때 충만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는 거 아닌지.. 그런 충만함을 경험하는 건 나이가 들수록 어려우므로 유년기에 충만함을 많이 느끼게 해주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기사에 어린이 우울증이 많이 늘었다고 해서 슬프더라고요 ㅠㅠ

단발머리 2023-09-28 17:55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에구 제가 놓쳐서 이제야 댓글 답니다. 늦어서 죄송요 ㅠㅠ
저는 그 빈자리, 결여에 대한 감각은 원칙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독서괭님 말씀처럼 유년기의 충만한 경험이 그 허허한 감각을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의 영역, 종교의 자리‘가 그 ‘구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온 가족 다 모이셨나요? ㅎㅎ 행복하고 여유로운 추석 명절이 되시길, 많이 바쁘지 않으시길 바래봅니다^^


공쟝쟝 2023-09-08 2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 본연의 실존적인 결여는 본디 있는 것일진대…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받으면 그게 채워진다고 생각하는 게 여성에(여기서 여성은 인간이 아님) 대한 남성의 시선(대상화)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좀 해봅니다. 욕망과 결여마저도 남성(주인)이 정해줘야하는. 그게 이중으로의 억압이었겠죠. 남자도 여자를 모르지만 여자야 말로 여자를 모르게 되어버리는 그 지점. (요즘 저의 질문은 여기를 좀 지나버렸는 데, 그래도 현실에서는 너무도 유효한.) 어렴풋이 에르노는 그것을 쓰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아요.

결여는 조건이자 자유이며 불안인데요, 결여에 대한 인정/응시만 똑바로 해도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게 있긴 하거든요. (다른 것을 도구화하지 않음?) 욕망의 추구와 몰두 이전에 똑똑히 보아야할 무엇인데, 이미 그거 아니라도 불안한 현대인들에겐 그 응시의 겨를이 주어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응시자체를 억압하며, 타자들의 욕망에 일단은 몰두하며 점점 본인의 기질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하고… 마리 루티 나온 차에 생각해보았어요.

이제 어엿하게 겨를을 만끽하는 주체(ㅋㅋㅋ)인 저는 단발님의 마음 같았던 <얼어붙은 여자>를 읽기로 해봅니당🖤

수이 2023-09-15 09:10   좋아요 1 | URL
불안해지니까 그걸 더 응시해야하는데 자꾸 나도 모르게 고개를 외로 틀고 보기가 싫은 거겠죠. 그 불안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짐의 무게도 될 수 있고 동시에 주변에 가장 가까운 이들(친정엄마, 친한 기혼자 친구들, 친한 동네 아줌마들, 시엄마, 남편)이 그 욕망과 결여를 정하고 정리를 한다는 게 참 웃긴 일이긴 하죠. 저는 좀 그랬던 거 같아요, 속으로 혼잣말을 되게 많이 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을 엄청 했는데 이게 스스로도 말할 선을 정해야 하고 그 선 너머를 말하고 싶은데 그 선 너머의 것들을 말할 수 없을 때, 그냥 침묵하고 말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떠든다, 하고 속으로 혼잣말하면서 무덤덤하게 듣고만 있고 그랬었네요. 왜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지 그걸 물어보니까 네 인생인데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잖아, 였고 그럼 그냥 제가 참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이니까 부족한대로 살아볼게요, 이 말이 스스럼 없이 나올 때 와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쟝님 말씀대로 결여는 조건이자 자유이며 불안이 맞습니다. 근데 그 결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요. 저는 이제 선 너머에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지만 선 안에 있던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또 그 결여를 너무 삐딱하게만 바라봤던 거 같아요. 그리고 세상은 또 주인처럼 조언하고 그러니까. 내가 널 잘 알아서 하는 소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따지고 보면 이런 소리에 너무 휘둘렸던 거 같고. 응, 그래, 이제 그만 나를 알도록 해, 응, 그래, 이제 나를 아끼지 말아, 응, 그래, 이제 우리 각자 자유롭게 잘 살자, 응, 그래, 이제 나는 자유야. 얼마 전에 친정엄마가 그러시더라구요. 너 곧 쉰이야. 쉰이 어떤 나이인지 알아. 다들 노후 준비를 한다고 가장 단단하게 서있어야 할 때인데 이렇게 흔들리면 어떻게 해, 그 말씀 하신 게 도쿄 가기 전이었는데 그때도 응, 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또 이 말 하고 나 쉰인 거 알아. 엄마, 그래서 내가 이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거야. 곧 주름 자글자글해지고 뼈 달그락달그락 내는 소리를 들을 텐데 응, 엄마, 그래서 이제 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보게 내버려둬, 내가 아직까지 열두살 먹은 꼬마처럼 보여? 하니까 응, 너 아직 열두살 먹은 꼬마처럼 보여! 해서 둘이 한참 웃었네 후훗

공쟝쟝 2023-09-15 09:25   좋아요 1 | URL
이제 나는 자유야 🫶🏻자유가 결여이자 불안과 동의어라는 걸 아는 자유. 심오하지만 12살의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어떤 인생도 단단하지 않으며 단단한 시멘트에선 무엇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딱딱한 저는 열심히 수련해서 축축한 땅이 되겠어요~!

수이 2023-09-15 09:43   좋아요 1 | URL
쟝님은 촉촉하고 축축하기 그지 없는데 무슨.......



쓸데없는 페미니즘 책 좀 그만 사고 그만 읽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페미니즘을 아직도 읽냐.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쥐구멍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래도 내게는 쓸모가 있는데.......


이후

쓸데없는 페미니즘을 뭐 하러 아직도 읽냐. 내다 팔아.

야, 너한테나 쓸모없지. 나한테는 쓸모있어. 그리고 이제 내가 읽을 책은 내가 정해. 니가 정해주지 않아도 돼. 넌 평생 페미니즘 읽지 말고 너 생긴대로 살아. 나는 너 뭐 읽는지 관심도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읽는 거 관심두지 마. 우린 이제 남남이야.

와, 이 말을 하는데 얼마나 속이 시원해지던지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9-15 10:09   좋아요 0 | URL
책이 아프지요 ㅠ 제대로 읽는 책은 본디 아픈 법… 페미니즘이 쓸데 없다니… 남자한텐 쓸데 없것지…

수이 2023-09-15 0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여자가 글을 쓸 수 없는 까닭은 그 행복에 취해서 다른 것들을 배려할 시간과 마음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 하나, 잘 생긴, 돈 잘 벌어오는 남편과 아름답고 충만하게 커가는 아이들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여자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까닭은 뭐 한동네에 사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 남편이 어마무시한 생활비를 안겨주고 덕분에 밥을 안 해도 되고 친목모임을 하고난 후에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런저런 배달음식이나 먹거리를 챙겨가고 혹은 외식을 하고 열심히 친목모임 중간중간 운동을 하며 몸과 정신을 단련시키고 취미생활을 한두 개 정도 더 하고 그러면서 내 인생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일이 주는 것들은 또 있긴 있는듯. 물론 그 안에 내 모습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베티 프리단 언니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그 질문이 안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기가 힘드니, 아니 에르노 언니만 봐도 그렇고. 저도 만일 저 책, 저 문장을 읽지 않았더라면 저 책을 읽었던 그날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다른 선택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시간의 이르고 뒤늦음과 무관하게 저 질문이 안에서 계속 뭉실뭉실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른다면 아마 인생에 다른 선택을 하게 될듯도. 여러 가지 상황들과 겹쳐서.

단발머리 2023-09-28 18:22   좋아요 0 | URL
전 이럴 때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첫번째는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라고 물었을 때.... 그래, 난 행복해... 라고 여기는 경우요. 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해요. 가정 생활만으로 행복하고 충족한 느낌을 받는다면, 본인이 그에 만족한다면, 그런 삶 역시 그런 삶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이들이 자라 부모를 떠나고 그리고 더 나이가 들었을 때도 그런 느낌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고 보구요.
인생에 대해 반드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쉽게 감사하는 사람이라, 전 그래서 그런가 봐요.

두번째는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라고 물었을 때, 잠들지 못한 밤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또 다른 선택의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위의 쓴 것처럼 그게 반드시 독립이나 공적 활동이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보이지 않으면서도 정교하게 직조된 가부장제의 그물을 떨쳐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계속 뒤척이는 사람이라면.... 결국에는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어디쯤 계시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평안하고 또 평안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쟝쟝 2023-10-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