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학자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 강신주다. 일찍이 그는 인간의 본성을 ‘벌너러빌리티(vulnerability)’, 즉 ‘상처받기 쉬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인문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생겨난다고 하면 우리는 참다운 인문정신을 통해 현실의 맨얼굴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제자백가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일까? 제자백가라고 한다면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사상가들이거나 서양철학에 맞서는 동양 인문정신쯤 간과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저자는 <제자백가의 귀환>을 총 12권으로 기획하면서 강한 지적 희열을 역설하고 있다. 제자백가는 패권을 다투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전쟁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찬란한 사유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즉 ‘제자백가의 사상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결과’이며 그들의 생생한 통찰력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되지 않았던가?

이번에 나온『철학의 시대』는 시리즈 1권이다. 간단하게 보면 제자백가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자의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기존의 방식이 한 갈래의 직선의 논리였다면 저자의 방식은 여러 갈래의 곡선의 논리다. 전자가 단편적이고 구조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면 후자는 사상적이고 문화적 맥락으로 역사와 소통하는 것이다. 곡선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그런 사실이 생겨났는지? 주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곡선의 논리, 즉 ‘우회로’를 선택하면서 제자백가를 둘러싼 임의적 해석에 대한 허(虛)를 파고든다. 만약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 가령, 위민(爲民)의 실체다. 위민은 ‘백성(百姓)을 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백성은 성씨(姓氏)를 가진 지배계층이었다. 반면에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계층이었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민이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옹호하는데 이용한 수사학에 불과했던 것’이며 민중의 삶 자체를 배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민을 놓고 두 가지 정치체계가 있는데 ‘동’(同)과 ‘화’(和)다. 동이 군주 일인 지배체계라고 하면 화는 군신 상호 견제 체제를 말한다. 공자는 화의 논리를 토대로 자신의 사유를 펼쳤는데 화의 논리에 반대하고 동의 논리를 추종하는 사상가를 ‘소인’(小人)이라고 폄하하였다. 공자는 군주와 기득권 세력 사이의 분권 체계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그러니 관중(管仲)과 같은 동을 지향했던 현실주의적 사상가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제자백가라는 분류의 계보학이다. 흔히 유가, 묵가, 도가, 법가라는 학파 구분은 제자백가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 제국의 역사가들에 이루어졌다. 한 제국 초기에는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여 태평성태를 이루었는데 공신 관료나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방분권적 이념을 도가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당시의 도가사상은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말하는데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인 황제(黃帝)와 도가 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를 말한다. 특히 노자의 무위(无爲)는 최고 통치자가 관료나 제후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武帝)는 동중서의「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는 상소문을 통해 중앙집권 정책을 정당화한다. 중앙집권 정책은 유위(有爲)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제는 유가들을 기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무제의 개혁 정책이 승리하면서 유가는 중국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진(秦)나라 여불위의『여씨춘추』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제1의 철학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즉 사마담이 제가백가를 논한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에서는 유가가 ‘학설은 없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고 한 반면에 도가는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고 했다.

사마담은「논육가요지」을 통해 유가보다는 도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은 달랐다. 표면적으로 사마담의 견해를 따르는 것 같지만『사기』의 편재를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노자를「노자한비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공자는「공자세가」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고의 『한서』「예문지」에서 유가의 학설은 ‘다양한 학설들 중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사기』와『한서』의 제자백가를 분류하는 방법 ‘유가 학파’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문제는『회남자』와 달리 역사성이나 사상성이 배제된 ‘구조적인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의 시대』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든 것은 제대로 된 배경하에 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법’을 새삼 확인했다. 공자는『시경』300여 편에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낯 뜨거운 남녀 간의 애정사가 실린 것을 보고도 그랬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공자는 이것을 군주와 신하 사이의 메타포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제가백가의 사상을 유가, 묵가, 도가 등으로 압축하는 것은 단지 명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관중의 사상,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등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각각 ‘고유명사’로 이해하길 바란다. 이것이 제가백가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으로 귀환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