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기술 -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방황은 죄일까? 기술일까? 이러한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할 수 있다. 가령,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과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 사실상 이것은 경주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거북이가 약자(弱者)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거북이 먼저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면 100미터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 거북이는 몇 미터 갔다. 다시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고 해도 거북이는 그만큼 다른 지점에 있다. 이렇듯 논리적일 때는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어떤가? 사람이 거북이를 얼마든지 추월할 수 있다. 때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이 호기심 있고 매력적인 이유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은 우리를 낯선 세계에 초대하면서 한계 상황에 도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어에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약(藥)이자 동시에 독(毒)을 말한다. 예측 불가능이 삶의 방향을 찾는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방향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우리는 방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굳이 불안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방황은 불안 그 자체다. 방황은 불안한 사람에게 죄라는 그림자를 따라붙게 만든다.

 


그러나『방황의 기술』의 저자 레버카 라인하르트는 우리의 생각과 낯설다. 저자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의 기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에게 방황은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멋진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철학자 강신주는 방황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행인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10쪽)

 


이 책에서 말하는 방황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방황을 가로 막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황을 위한 도구다. 방황을 가로 막는 것에는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나르키소스 2.0,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방황을 위한 도구에는 ‘지름길 이해하기, 경계 넘나들기, 연속성 느끼기, 죽음 만나기, 기계 전원 끄기,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일상 철학자 되기’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분주하다. 이런 저런 퍼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기계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공허하고 부조리해진다. 무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인하르트는 시시포스에 답을 찾고 있다. 시시포스는 불손(hybris)의 죄를 졌다. 불신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오만을 말한다. 그래서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여기서 벌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바위는 도로 굴러 떨어져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시포스에 대하여 절망하는 동안 카뮈는『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의 결정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 하나하나가 오직 그것만으로 그에게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의 사유는 놀랍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한다거나 권태롭게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시포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시시포스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자신이 고통을 초래했던 지식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시포스’는 행복한 상상력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행한 시시포스가 아니다.

 


두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지름길 이탈하기다. 지름길 이탈하기에서는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방향감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험이다. 어느 정도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따라 방향은 바뀌기도 한다. 방향은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방향이 안개에 가려질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혼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식인 괴물 폴리페모스에게 벗어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마음껏 취한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우데이스Udeis)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아무도 아닌 자’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영웅이 된 것일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신화적 인물이 아닌 ‘계몽된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즉,

 


신화적 운명, 숙명은 입으로 나온 말과 하나였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 꾀다. 사람들은 사물을 바꾸기 위해 말에 매달린다. (…)우데이스라는 이름이 ‘영웅’과 ‘아무도 아니다’ 둘 다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데이스는 이름이라는 마력을 부술 수 있다. (…)그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라지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구한다.

 


『방황의 기술』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방황의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방황은 ‘자발적 여행’이라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 여행은 쓸데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타율적인 여행만 하는 것은 허무하다. 이런 허무함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을 알게 된다. 니체는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고 했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낯설게 깨닫게 된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정상적인 두 가지 문명 때문에 삶이 안정되고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자발적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방황은 여전히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은 없을까?『방황의 기술』의 통찰은 아주 유효하다. 방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있다. 그것도 용기와 호기심으로 과감히 선택하라고 한다. 그래야 노발리스가 말했듯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나이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발적 여행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낯선 만큼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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