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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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으로 어떻게 하면 낙타형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탈바꿈할 수 있을까?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형 인간은 ‘짐깨나 지는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낙타는 사막에서 훌륭한 짐꾼이다. 낙타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낙타는 짐이 무겁다고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이보다 힘겨운 노동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문제는 이것이 낙타의 강인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낙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묵묵히 ‘예’라고 하면서 거부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무료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타의 어리석음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에 감탄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 덕분에 우리는 불을 인간답게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을 보면서 깨닫는다. 불은 어둠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면서 타오른다는 것을. 그래서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 사람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스테판 에셀이라는 불꽃같은 혁명가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분노하라』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삶의 부조리 앞에서 침묵해온 지 오랜 탓이다. 그래서 분노하라는 메시지는 잠든 영혼을 깨울 정도로 강렬하였다. 하지만 분노가 분노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지 싶다. 진정한 분노라고 하면 뭔가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그가『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자서전(自敍傳)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스테판 에셀이 죽었다.”라는 짧은 부음(訃音)에는 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안타까움 못지않게 완벽한 믿음에 대한 찬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비록 그는 저 세상에 있지만 완벽한 믿음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더 타올랐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확신한다. 루소의『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가? 우리는 거꾸로 사슬에 묶여 있는 체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면서 태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제어’가 요구된다. 자기 제어는 오만의 반대말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법에 반하는 꿈을 종결짓는 다시 말해 ‘법률에 의한 욕망의 제어장치’라는 것이다. 더구나 양심에 의한 자기 제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세계인권선언문에 참여하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법 앞에서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존엄성과 법이 같은 운명체라고 역설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행복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행복이 끊임없는 패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조화롭게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이 개인만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한 하는 사회적 소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즉, 행복은 우리가 상호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그를 행복한 혁명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3단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한다. 먼저 1단계는 앞서 말한대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단계는 ‘희망하라’는 것이다. 희망은 혼란에 맞서 다시 도약하는 ‘용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회복 탄련성’에 있다. 그리고 3단계는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을 감탄하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사랑하고 감탄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탈바꿈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잡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시(詩)를 낭송했다. 그의 애송시 중 하나가 페르난두 페소아의『뱀의 길』이다.

 

진실을 진실로서 인정하는 것, 동시에 실수를 인정하는 것, 순응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살아가는 것, 모든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일은 결국 모든 것에 지성을 갖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의 정상에 우뚝 섰을 때, 그는 모든 정상들로부터 자유롭다. 마치 하늘의 한 점에 모인 모든 정상들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늘의 한 점에 모이지 않는다. 모든 정상에 서 있는 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시를 낭송하면서 타인과 소통하였고 더 나아가 삶을 찬미할 줄 알았으며 행복을 전파했다. 이 책을 옮긴 목수정의 말대로 그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 행복에 대한 변함없는 취향을 이 지닌 사내’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인생’을 살았다.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쌓아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인생의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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