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예전에는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그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몹시 시렸는데 지금은 죽음의 유혹이라고 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는 것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박한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더 이상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고백, 즉 자살을 하게 되지 않을까?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뛰어내리기 직전 상황’에 주목하면서 죽음이 ‘없음’이라고 한다면 자유죽음은 ‘없음을 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유죽음은 자기부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썸네일그런데 알베르 카뮈(1913~1960)는 반항한다. 카뮈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실존주의 작가 중 한 명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눈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 들어온다. 이렇게까지 자신만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드물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인지 카뮈 탄생100년이 지날 즈음 최근에 『이방인』을 읽으면서 비로소 카뮈를 주목하게 된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이방인』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라는 카뮈의 깊이 있는 성찰 덕분에『시지프 신화』를 연달아 읽었다. 뭐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판단과 통찰이 어느 순간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게 되어 죽기 전에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살아가면서 꼭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시니컬하고 신랄할 비판이 차고 넘칠 정도다. 이 모두가 부조리한 감정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살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뜻밖의 절박한 문제다. 이유인즉,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자살이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否定)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시지프 신화』중에서

 

희망,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일이 있다는 것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 내일은 인생의 빈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삶이 오늘에 끝나지 않을 거라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틀리지 않지만 이러한 사실에는 일종의 삶의 모순이 있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絶緣)’이 곧 부조리다. 삶이 부조리하다는 차가운 현실에서 이방인(異邦人)이 된 그는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으로 인생이 부식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적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자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그가 자살한다고 해서 현세의 부조리함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 그 너머 에도 부조리함이 있다. 자살과 부조리함이 서로 적절하게 타협한다고 해서 자살이 부조리를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조리함을 견뎌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자살은 궁극적인 답썸네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가 바라는 대로 통속적으로 살아야 할까? 이러한 권태로움에 카뮈는 또 따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바로 절망의 깊이에 빠진 우리를 ‘시지프 신화’로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에 굴러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졌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그렇다고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닌 시지프의 고통!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시지프의 끔직한 삶을 생각하면 삶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카뮈는 달랐다. 부조리한 인간에서 부조리한 영웅의 반전(反轉)! 그의 생각은 단단해서 구원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불행한 시지프 이후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카뮈의 ‘행복한 시지프’는 정말이지 바위보다 더 옹골차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불행하다. 때로는 부조리함에 맞서 술과 노래로 자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행복한 시지프에게 부조리하다. 우리가 부조리라는 낯선 감정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은 상상이나 비약 같은 비논리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럴수록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행복한 시지프는 아주 논리적인 사고로 맞서며 불행에 매몰되지 않았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반항’이다. 즉 시지프는 반항 때문에 더 인간적이며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반항의 역설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다. 자살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끝내는 것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투신(投身)이 아니라 자신(自身)있게 사는 것! 거듭 말하지만 자살한다고 해서 부조리함이 끝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반항은 죽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반항적인 인간은 최대한 반항하면서 최대한 많이 산다. 반항은 자신의 열정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에서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의 디테일을 찾아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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