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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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로 맘먹은 것은 ‘아웃라이어’라는 제목만큼이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의 비결은 모두 틀렸다!’라는 것이 마음을 움직였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꿈(dream)과 도전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자기 몸집에 턱없이 부족한 날개를 가진 꿀벌이 날아다닐 수 있는 비결은 날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다. 그래서 꿀벌은 1초에 250번을 움직인다. 그런가하면 백열구를 만든 에디슨은 “나는 백열구를 만들기 위한 2천 번의 실험을 거쳤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티핑 포인트』, 『블링크』를 통해 성공의 뒷모습을 명료하게 파헤졌던 말콤 글래드웰이 이번『아웃라이어』에서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들려주고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 그대로 성공하기 위한 매직넘버다. 순수한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꿀벌의 1초에 250번, 에디슨의 2천 번의 실험 그리고 아웃라이어들의 1만 시간의 법칙은 최고의 아이디어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말대로 최고 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말콤 글래드웰은 ‘이 모두가 틀렸다!’라고 거침없이 반박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성공한 사람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 이렇게 성공을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이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갈릴레오적 관점이다. 이는 성공을 상황(situation)으로 보는 것이다. 즉 성공의 주된 원인을 사람 그 자체보다는 관계의 측면에서 성공의 뒤집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계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저자는 캐나다 하키팀을 지배하는 철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캐나다 하키팀 선수들의 생일을 보면 1월, 2월, 3월에 월등히 많다. 이유인즉 캐나다에서는 1월1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며 연령대를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분류하고 집중적으로 교육시킨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즉 같은 연령대에서도 생일이 늦은 사람들보다 더 몇 달간 더 숙달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로버트 머튼의 ‘자기실현적 예언’대로 재능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관계가 보다 사회적 맥락으로 확대된 것이 문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벼농사와 수학 실력의 놀라운 상관관계를 분석하면서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두 나라의 속담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와 중국이다. 러시아 속담은 “하느님이 키우지 않으시면 땅에서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 속담은 “1년 내내 해 뜨기 전에 일어날 수 있다면 어찌 부자가 못 되리”였다. 두 나라의 속담의 차이는 땀 흘려 일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있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인들이 수학을 더 잘하는 이유는 실력이 아니라 노력과 끈기라는 태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문화적 비밀은 비행기 추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고는 대개 일곱 가지의 실수가 결합한 작용이며 결과다. 우리에게 단순히 지연된 비행기 사고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의사소통에 있었다. 비상상태에서 완곡어법(mitigated speech)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어투에 불과할 뿐이다. 완곡어법이란 전달 내용을 부드럽게하거나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화법이다. 이러한 완곡어법은 홉스테드가 말한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권력 간격 지수란 특정한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완곡어법 때문에 비행기 추락이라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21세기형 성공의 비결을 예감할 수 있게 된다. 그 비결이란 간단하다. 열심히 일만 한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일만 한다면 오히려 성공의 부담감만 백배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의 작은 차이는 성공을 즐기는 마음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아웃라이어의 비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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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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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메두사의 시선』의 저자인 김용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자인 그가 다름 아닌 철학 에세이를 쓴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개성적인 사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저자 말대로 철학 에세이는 지식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은 곤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화-과학-철학을 연계하는 저자의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했다. 같은 지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역사가 아닌 ‘상상력의 역사’라고 말했던 저자의 명랑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인‘메두사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시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메두사의 눈초리는 이중적이다. 즉 변화하는 것들의 뒤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을 붙잡아 두는 과학의 시선인 반면에 그런 과업에 몰두하는 과학자에게‘업보’로 돌아갈 시선이다. 이로 인해 메두사의 시선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며‘과학적 패러다임은 메두사의 시선이 화석화된 법칙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갈릴레오에 대한 지지를 “지구가 수정 구슬로 바뀐 뒤에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메두사의 눈초리에 의하여 다이아몬드의 조각상으로 변화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자연법칙의 조각상이란 단순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메두사의 시선이 확장되면 진리의 빛이 대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사유는 엉뚱하다. 그렇다고 해서 엉뚱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엉뚱함이 제기하는 의혹에서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한 논증이야말로 철학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령,「피그말리온의 타자성」를 보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상(像)이 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피그말리온이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지독한 이기주의자 혹은 자기중심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까닭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탓이다. 진화의 종점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저자가 우려하고 바는 타자에 대한 불필요성에 있다. 인간이 근원적인 자기반성과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탐색을「디오니소스와 포도주의 인식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니체도 그랬지만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한계는 주신(酒神)만을 다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예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세 가지로 활동을 들었다. 즉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연적이지 않으며 발효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도주는 포도와는 달리 문화이며 이것이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는“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즉 한때는 네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두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작 어린 아이도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핑크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시선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관심과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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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0-03-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두 가지 수학진리를 대한수학회의 부당업무 관련 죄인, combacsa(그네고치기), melotopia(snowall), Pomp On Math & Puzzle(박부성) 등은 권위만을 앞세워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최미나 010-7919-8020.
 
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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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강의에 출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제가 두 학생에게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 spooks이란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통례적이고 본래적인 의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겁니다. 저는 spooks이란 단어가 이따금씩 흑인들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쩌면 한 오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제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중에서




“전기는 불입니까?”
어느 날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대교인 두 명의 율법학도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자 유대교 율법에서는 토요일(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학적인 현상인 전기와 불은 서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으키는 스파크 현상이 얼마든지 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전기는 불이다, 아니다? 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파인만은 “전기는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필립 로스는『휴먼 스테인』에서 “SPOOKS"가 일으키는 아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spooks라는 말이 당사자의 마음과 삐끗 어긋났습니다.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었는데 뜻밖의 말실수가 되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아 난처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놀람뿐이겠습니까? 살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을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말대로 ‘관습을 거스르는 대담함’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 변화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단독성이란 우리(we)가 아니라 나(i)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콜먼은 보통 이상의 남성입니다. 보통 이상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런 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테나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5주가 지나도록 출석하지 않는 2명의 학생에 대해 유령들(spooks)"이라고 한 마디 던졌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평범하게 툭 던진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명의 학생이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SPOOKS의 또 다른 의미인 검둥이가 ‘더러운 것, 나쁜 것’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종차별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콜먼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델핀 루 학장은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델핀 루는 콜먼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학장이었습니다. 전임 학장이었던 콜먼은 대학의 품질혁명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로 인해 후임 학장 델핀 루를 비롯한 교수들은 콜먼을 불신하는 반작용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콜먼이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SPOOKS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인종차별자라는 불명예를 덮었습니다. 말하자면 추한 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콜먼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주커먼에게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콜먼에게 주커먼은 남의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주커먼은 콜먼의 얼굴을 보면서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금 누르스름한 피부색의 심한 곱슬머리 유태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주커먼의 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작가말대로 콜먼은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호한 분위기 탓에 콜먼은 오랜 세월을 거짓 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콜먼이 자신의 운명을 백인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흑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의 인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콜먼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노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구멍이 한순간 뻥 터질 때가 있습니다. 노년의 교수 콜먼에게 불어 닥친 시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콜먼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는지, 어떻게 삶의 탈진현상(burnout)을 극복해나가는지 은근슬쩍 우리의 내면을 건드렸습니다. 삶의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콜먼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선과 편견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며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해 작가는 위험한 과거를 지닌 여자인 포니아를 등장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삼십사 년을 사는 동안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한 서른넷의 포니아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일흔 살의 콜먼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콜먼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대받고 문맹인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사랑의 실수 즉 섹스라는 가속페달을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들의 만족과 당당함을 위해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스릴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고 거창한 토론도 아니었습니다. 콜먼이 고백하듯 스릴같은 사랑은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에서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삶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작가는 인생에서 정말 난해한 변화가 생길 때는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몰라’라고 말할 때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사회에서 불행한 이유는 유럽 문학이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휴먼 스테인』을 읽으면서 인간의 오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닌 듯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민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실하고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의 모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텅 빈 감정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야만적 농담이라는 생각……이것이 필립 로스가 던지는 또 하나의 오점이었습니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고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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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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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오주석은『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원칙은 옛 그림을 보는 문외한(門外漢)에게도 간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늠하기란 어렵다는 아쉬움이 매번 맴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헤아렸는지 오주석은 어느 그림이든지 작품 크기의 대각선을 그었을 때 대략 그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 정도에서 감상하기를 권했습니다.

박철상의『세한도』는 여러모로 의미가 뜻 깊었습니다.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타이틀에 걸 맞는 것은 물론 <세한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습니다. 앞서 오주석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 또한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에서 <세한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한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또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알면 알수록 어느 순간 안복(眼福), 심복(心福)으로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한도>에 얽힌 김정희의 사연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선비로서의 교양과 인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김정희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세한도>에서 세한(歲寒)은『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사랑했던 송백을 추사 또한 사랑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송백 같은 사람은 우선 이상적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우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마음은 일시적인 답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림에 쓰여 있는 제사(題詞)를 보면 제주도 유배 생활하는 추사에게 이상적은 연경의 책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세상 인삼이라는 것이 권세에 휩쓸리는 잡초(雜草) 같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적의 단단한 삶은 사시사철 푸르른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움을 완곡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추사의 석교(石交)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에 있습니다. <세한도>에는 4개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습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입니다. 인장은 관례적으로 자신의 자호(字號)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장무상망은 인장,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장(閑章)이었습니다. 한장은 자신은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합니다. 장무상망을 풀이하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적에게 특별했던 교감의 너머에는 자신의 상처와 송백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감동 깊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한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또 다른 까닭은 무엇보다도 김정희의 학문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세한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본 동양학자이자 김정희 연구의 대가(大家)인 후지츠카 지카시는 “청조학(淸朝學)의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흔히 청조학이라고 하면 실학이라고 하여 경세치용의 측면 만을 강조한 탓에 정작 고증학(考證學)의 가치는 뒷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고증학의 치열한 정신이 조선 시대 파편화된 삶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정희가 말한 대로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요체’가 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김정희는 시론의 문경을 두보(杜甫)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도 추사는 두보를 배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두보의 시를 배운다고 해서 두보의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두보에 이르는 문경을 따라가면서 차근차근 공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당대의 대가들을 배운 다음 명나라, 원나라를 거쳐 비로소 당나라에 이르러 두보의 시를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사는 문경이라는 학문하는 법에 따라 조선 사회에 명실상부한 문인화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여 그림을 잡기(雜技)로 매몰차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추사에게 그림은 사부기(士夫氣)였습니다. 사부기를 그리는 데 있어 추사는 황솔(荒率)한 느낌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를 늘 몰두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솔한 느낌은 장경(張庚)의 영향으로 ‘냉일(冷逸:쓸쓸함)하고 고요한 의취’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좀 더 말하면 ‘거칠고 간략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잎이 다 져버린 고목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세한도>의 발문에서는 추사체(秋史體)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씨에 대해 ‘해서가 분명하지만, 우리가 늘 보던 깔끔한 형태의 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홍준은『완당평전 1』에서 추사체의 본질과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한도』를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내면적 풍경이 되살아났습니다. 덕분에 선인들의 은은한 삶의 향기를 맡으며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에 얽힌 사연과 즐겁게 노닐면서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를 비로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권기(書卷氣)에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추사는 “가슴 속에 책 만권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백호당(百號當)이라고 불렸던 추사의 <세한도>를 보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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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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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부터 대설(大雪)이 내렸다. 하루아침에 별천지(別天地)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설국(雪國)은 아름다움을 물씬 빚어냈다. 그래서 인지,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이태백(李太白)의 시가 절묘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무릉도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으로 불린다는 사전적인 정보 수준이었다. 그래서 무릉도원의 실체에 대해 시종(始終)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일찍이『논어』에서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곰곰이 반추해보면 즐기는 데 있어 앞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서신혜의『조선인의 유토피아』는 이런 지적 호기심에「몽유도원도」로 답하고 있다. 이 책은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라는 소책(小冊)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 또는 한 장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일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은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한국문화의 진면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는 어땠을까? 책을 펼치면 안견의「몽유도원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치면 안평대군의「몽유도원기」가 나온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桃源)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몽유도원기」을 보면 ‘골짜기에 들어서자 안이 넓게 트여 2~3리는 될 듯하였다. 사방으로 산이 벽처럼 둘러서 있는 가운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가깝고 먼 복숭아나무 숲에 햇살이 비치어 마치 노을이 지는 듯했다(…) 앞 내에 조각배만 물결을 따라 떠다닐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했다.’라고 하면서 도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 도원이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상징했던 것은 도연명의「도화원기」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몽유도원도」와「도화원기」에서 속세와 단절된 별세계 즉 무릉도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꾼 후 “내 몸은 궁궐에 매여 밤낮으로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 꿈에서 산림에 이를 수가 있었을까? 또 어떻게 하여 도원을 갈 수가 있었을까?”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반면에『도화원기」는 무릉이라는 사람이 길을 잃어 도원에 가서는 그곳 사람이 말하길 “선대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곳으로 온 후 다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과 교제가 끊겼지요.”라는 놀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무릉도원이 조선인의 마음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동천(洞天), 부산(釜山), 청학동(靑鶴洞), 판미동(板尾洞)이라는 지명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동천은 신선이 사는 땅으로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보고 조용한 공간을 말한다. 부산은 물자가 풍부하여 가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청학동은 푸른 학이 사는 곳이다. 무릉도원이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것과 달리 자기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곧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이 되고자 염원했던 것이다.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며「몽유도원도」의 세계를 두루 산책하며 감상(鑑賞)할 수 있었다. 옛 그림에 얽힌 다양한 시선과 상징하는 바를 보면서 덕분에 우리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는 오주석 선생의 따끔한 충고가 소중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진실은 더 말할 나위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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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8-3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안견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좋은 그림이 일본에 있다는게 무척 아쉬울 따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