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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옛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오주석은『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원칙은 옛 그림을 보는 문외한(門外漢)에게도 간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늠하기란 어렵다는 아쉬움이 매번 맴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헤아렸는지 오주석은 어느 그림이든지 작품 크기의 대각선을 그었을 때 대략 그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 정도에서 감상하기를 권했습니다.
박철상의『세한도』는 여러모로 의미가 뜻 깊었습니다.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타이틀에 걸 맞는 것은 물론 <세한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습니다. 앞서 오주석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 또한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에서 <세한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한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또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알면 알수록 어느 순간 안복(眼福), 심복(心福)으로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한도>에 얽힌 김정희의 사연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선비로서의 교양과 인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김정희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세한도>에서 세한(歲寒)은『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사랑했던 송백을 추사 또한 사랑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송백 같은 사람은 우선 이상적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우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마음은 일시적인 답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림에 쓰여 있는 제사(題詞)를 보면 제주도 유배 생활하는 추사에게 이상적은 연경의 책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세상 인삼이라는 것이 권세에 휩쓸리는 잡초(雜草) 같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적의 단단한 삶은 사시사철 푸르른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움을 완곡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추사의 석교(石交)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에 있습니다. <세한도>에는 4개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습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입니다. 인장은 관례적으로 자신의 자호(字號)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장무상망은 인장,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장(閑章)이었습니다. 한장은 자신은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합니다. 장무상망을 풀이하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적에게 특별했던 교감의 너머에는 자신의 상처와 송백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감동 깊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한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또 다른 까닭은 무엇보다도 김정희의 학문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세한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본 동양학자이자 김정희 연구의 대가(大家)인 후지츠카 지카시는 “청조학(淸朝學)의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흔히 청조학이라고 하면 실학이라고 하여 경세치용의 측면 만을 강조한 탓에 정작 고증학(考證學)의 가치는 뒷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고증학의 치열한 정신이 조선 시대 파편화된 삶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정희가 말한 대로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요체’가 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김정희는 시론의 문경을 두보(杜甫)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도 추사는 두보를 배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두보의 시를 배운다고 해서 두보의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두보에 이르는 문경을 따라가면서 차근차근 공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당대의 대가들을 배운 다음 명나라, 원나라를 거쳐 비로소 당나라에 이르러 두보의 시를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사는 문경이라는 학문하는 법에 따라 조선 사회에 명실상부한 문인화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여 그림을 잡기(雜技)로 매몰차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추사에게 그림은 사부기(士夫氣)였습니다. 사부기를 그리는 데 있어 추사는 황솔(荒率)한 느낌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를 늘 몰두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솔한 느낌은 장경(張庚)의 영향으로 ‘냉일(冷逸:쓸쓸함)하고 고요한 의취’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좀 더 말하면 ‘거칠고 간략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잎이 다 져버린 고목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세한도>의 발문에서는 추사체(秋史體)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씨에 대해 ‘해서가 분명하지만, 우리가 늘 보던 깔끔한 형태의 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홍준은『완당평전 1』에서 추사체의 본질과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한도』를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내면적 풍경이 되살아났습니다. 덕분에 선인들의 은은한 삶의 향기를 맡으며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에 얽힌 사연과 즐겁게 노닐면서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를 비로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권기(書卷氣)에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추사는 “가슴 속에 책 만권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백호당(百號當)이라고 불렸던 추사의 <세한도>를 보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