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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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서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싶은 책을 무료로 대출(1인 3권)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바지런하면 금방 나온 신간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읽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남의 손때가 묻지 않는 맨얼굴의 책은 언제나 첫사랑 같은 떨림이 있다. 그러나 빌려보는 것 못지않게 사야만 하는 책이 있다. 단순히 책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장정일이 독서일기인『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말한 것처럼 ‘책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 길을 찾는 이 책을 들여다보면 장정일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듣기 좋게 말하는 책 속의 길을 거부했다. 주례사처럼 들려서 가슴이 먹먹해서 그랬다. 그래서 그는 흔하디흔한 책 속의 길에 메스를 들이댔다. 굳이 메스를 가한 까닭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 자리 사이로 난 길’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가 말한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 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먼저 그는 속독 대신에 천천히 읽기를 권하고 있다. 책을 건성건성 많이 읽는 것보다는 제대로 읽어야 사고의 땔감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자신의 정상적인 속도에 따라 하는 것이 실질적인 이점이 된다. 정상적인 속도에 있어 속도보다는 천천히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유인즉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인생관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마무라 오사무가『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말한 대로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있다고 저자는 우리의 권태로운 눈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는 독서 천황이라고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 예찬과는 다른 패턴을 지향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속독의 대가답게 300쪽 책을 단 10여분 만에 읽을 수 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한결같이 멋지다는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은 직업적인 선택에 따른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그를 흉내 낸다면 ‘불행한 독자’가 되는 것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무엇보다도 ‘책의 죽음’에 대한 악영향이 커다란 문제였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독서의 속도에 일반화를 언급하는 것은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치바나의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다치바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력대 출력의 비율이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문학이 주인이라고 한다면 논픽션은 문학의 서자라고 여기는 풍토에 따끔한 충고다. 그러나 그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은 다름 아닌 논픽션이라고 했다. 저자 또한 논픽션을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한 사회가 희망이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교양이란 폭이 넓은 세계다.

일찍이 셔먼 영은『책은 죽었다』에서 책을 인쇄 문화와 책 문화로 나눴다. 전자가 단순히 종이에 뭔가를 인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이상의 존재를 말한다. 즉 전자가 전단지 같이 인간의 내적 활동을 촉발시키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깊은 사고를 통해 깊은 대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anti book=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눴다. 기능적인 책이 교과서나 여행서를 가리킨다면 안티 책은 상업적인 책이며 인쇄 문화였다. 바로 여기에서 책의 죽음이 나온다. 책이 사상이 아닌 물건처럼 팔릴 때다. 책의 매몰비용만을 추구한다면 사상은 죽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엄마를 부탁해』 같은 베스트셀러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주저 없이 밝히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당대의 지표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단순히 사람의 오감만을 어루만지며 눈물샘을 자극하고 그것이 마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엄마를 부탁해』와 같이 엄마의 외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더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가 ‘귀신의 궁시렁’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엄마를 부탁해』가 베스트셀러여서 마치 수준 높은 문학 작품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위조술에 지나치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독설(讀說)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책 읽는 일은 도(道)가 아니라 현실로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라고 해도 무방하다. 콜린 윌슨은『아웃사이더』에서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했다. 즉 아웃사이더는 ‘진리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전복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진리와 만나는 방법에 있어 데카르트의 순간은 상식적이다. 이것은 곧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 인식 보다는 ‘자기 배려’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기 인식이 자기 수련이라는 점진적 변화가 없는 반면에 자기 배려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이며 더 나아가 공공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독서 일기인 이 책은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독서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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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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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뭘까? 이러한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하는 것이 ‘의식주’다. 돌이켜보면 의식주에 대한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갈수록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보다 더 좋은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돈의 지배를 달갑지 않게 받고 있다. 의식주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다고 한다면 하루하루를 돈을 벌기 위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의식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돈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어야 한다.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승자는 당연히 돈이다. 돈만 주면 다 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니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의식주는 돈의 위조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프리코노미’(freeconomy)운동을 벌이고 있는 마크 보일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돈의 문명에 대해 빛과 소금을 선물해주고 있다. 그의『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우리들 눈으로 허구 같지만 사실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과 더불어 펼쳐지고 있다. 정말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가 가능할까? 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한다. 돈이 이 세상을 접수하고 말았다, 라는 저자의 충고를 깊이 있게 받아 들여야 했다. 더구나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평등과 환경파괴와 인간에 대한 경멸을 추진하는 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지구의 위기다. 신용경색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조지 몬비오트가 ‘자연경색’(nature crunch)은 구제 받을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이 책을 보면 자연경색은 우리들이 돈과 수많은 갈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말한 ‘돈이 곧 빚이다’라는 은유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그래서 저자는 ‘응용 영성’(applied spirituality)을 실천하고자 했다. 응용 영성이란 나의 믿음들을 물질적인 세계에적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과 손 사이에 모순이 적을수록 정직한 삶에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돈 없이 사는 삶에서 비(非)물질적인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누군가의 삶을 더욱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아낌없이 준다면 그 행위는 유대와 우정을 돈독하고 그 결과 밝은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충돌이 아니라 공동체를 투쟁이 아니라 우정을 그리고 지구의 모든 종(種)들과 화합하는 것을 원했다.


저자는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했다. 먼저 ‘노 머니’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지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상’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나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겠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전기를 켠다고 해서 그 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재능의 하나였다. 셋째,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에 관한 원칙이다. ‘다음 사람에게 베풀기’(pay it forward)는 무조건적이 베풂이다. 넷째, 타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원칙이다. 다른 사람의 희망을 존중해준다면 그 사람도 당신의 생활방식을 존경해줄 것이다. 다섯째, ‘화석연료 반대’에 대한 원칙이다. 국경을 넘는 것처럼 걸어서나 자전거로 불가능한 여행일 경우만 히치하이킹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경비 선(先)지급 불가에 관한 원칙이다. 평소 예상할 수 있는 청구서에 대해 돈을 미리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체험을 다양하게 공감할 수 이었다. 저자 말대로 돈을 포기한 삶의 구석구석은 황량했다. 그것은 그 삶 자체가 힘들어서 아니라 현대 서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안락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비지상주의가 우리의 행복을 비틀거리게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소비지상주의는 아마도 정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만족할 줄 모르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 있다. 그래서 저자가 지향하는 ‘슬로우 라이프’는 아주 소중한 삶의 지혜다. 단순히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경이로움이거나 환겨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과 더욱 가까워질수록 감사의 마음이 더욱 커지는 덕분에 있다.


일찍이 E. 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의 가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돈의 지배에 대한 비판 의식과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를 직접 부대끼며 느낀 실존적 고민은 다름 아닌 ‘베풂의 정신’이었다. 즉 아무런 보답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베풀면 당신도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의 유기적 흐름이며 마법의 댄스다. 그래서 우리가 마법의 댄스와 함께 여럿이 춤을 추면서 돈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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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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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언어의 향연’이 안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조어법(造語法)을 빌리자면 ‘언어안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말해 줄 사람은 없으리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안한 길을 오직 ‘나’만이 언어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 작가에게 루마니아의 독재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고받은 말들은 간결하면서도 어둡게 부서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특한 은유(隱喩)라는 간절함이 삶의 메마름을 적셨다. 이번『마음짐승』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짐승’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가지고 작가는 ‘마음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정작 그녀의 언어는 시적이며 은유적이라 우리는 남몰래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다. 

『마음짐승』을 찬찬히 펼치면 루마니아 독채 치하에서 대학생 롤라의 죽음이 있고 죽음을 전후로 작중화자인 ‘나’와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라는 세 남자와의 얽히고설킨 굵직하게 아픈 시간들이 있다. 얼굴에 빈곤한 지방을 가졌던 롤라는 자신이 살던 메마른(굶주림)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메마름이 모든 것을 먹어치웠지만 롤라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곧 ‘내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맹목적인 증오가 있었다. 맹목적인 증오란 구내식당에서 접시 위의 고기를 먹는데 숟가락만 먹는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쓸 수 있으면 그녀가 굳이 짐승처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처럼 먹어야 했다. 

만약 롤라가 ‘내 사랑’을 하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자살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4년 뒤에 내 사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사랑은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와 달랐다. 내 사랑은 하얀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남자다. 반면에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는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다. 그러나 독재 치하에서 그녀의 맹목적인 증오는 더 이상 숨 쉴 구멍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빨간 수첩을 가진 당원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녀를 경멸했고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이유인즉 그녀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자살로 끝나지 않고 침묵을 남겼다. 그녀의 친구 에드가의 말대로 ‘침묵하면 불편했지만’ 오히려 침묵으로도 많은 것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묵…그럴 것이다. 삶의 소중한 것을 침묵으로 무겁게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에서 보듯 ‘마음짐승’을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짐승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생쥐’일 수 있다. 털을 벗어놓고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노래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얻는다. 그녀가 그를 갖고자 하므로 그가 아닌, 그의 들판을. 그리고 그녀는 그를 소유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인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문득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나무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무인간처럼 지루한 삶을 버티며 살 수 있을까? 나무인간이 독재자들이 만든 하나의 허영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우리는 흉측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짐승과 달리 묘지를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묘지는 독재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청춘들은 묘지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다. 단지 이 세상에서 ‘걷고, 먹고, 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해서 묘지를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독재자의 오류보다도 더 가장 큰 오류였다. 이 소설에서 ‘나’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와 같다고 했다. 그 자루에는 허리띠, 창문, 호두와 노끈이 들어 있다. 자루에 든 네 가지는 곧 맹목적인 눈물과 같다. 

이중에서 호두와 관련된 테레자의 죽음은 남다르다. 사람들은 벼락출세한 자, 자기를 기만한 자, 양심불량자를 ‘자두 처먹은 놈’일고 불렀다. 또한 독재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테레자의 겨드랑이 아래에 죽음의 덩어리인 호두가 있었다. ‘나’에게 그녀의 호두가 문제인 것은 ‘호두는 우리에게 대항했으며 모든 사랑에 대항해 자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누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우정을 갉아 먹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증오인지 불분명했으나 사랑이 풀과 지푸라기처럼 섞여 자라나길 바랐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식물이 되고 말았다. 

『마음짐승』을 쓴 헤르타 뮐러는「문학이 증인이 될 수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꽃잎과 나뭇잎을 먹었다. 그들과 내 혀가 친척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비슷해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아니었다.’ 그들(식물)은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우리 사는 곳이 지옥이며 더욱 더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조리한 권력의 생리 때문일까? 부패한 권력 앞에서 사랑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좀 더 불안하게, 좀 더 하찮게… 작가에 따르면 하찮음은 상실이 이미 습관이 되었을 때의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1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욕망의 바벨탑이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는『세계사적 고찰』에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어느 한 순간 영리해지기 보다는 영원히 지혜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헤르타 뮐러를 통해 우리는 루마니아의 참다한 역사를 새로운 서사구조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작가와 루마니아의 역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정권하에서 하루하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작가는 생의 의지를 깨달았다. 작가가 말하는 생의 의지는『마음짐승』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말한 ‘이유 없는 불안’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재하의 이유 없는 불안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실존의 물음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짐승』은 불행하다. 겉보기에는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내면에는 타살의 흔적들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살, 타살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피부’다. 폴 발레리는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마음짐승』에서 빈곤한 지방을 가진 얼굴이며 이발사와 손톱가위는 피부를 억압한다. 그러보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피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인간이 된다면 피부는 부서지기 쉬우며 감정의 호르몬은 더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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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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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였다. 예전에 나의 알람은 새벽 5시에 울렸다. 새벽 5시는 깜깜한 창문 밖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잠자던 태양이 이제 막 일어나는 시간과 같다는 오랜 생각때문이었다. 더구나 4자에 대한 트라우마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2009~2010년 사이에 하루키 신드룸을 일으킨 장편소설 [1Q84](전 3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Q84](1,2권)을 읽고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속편 [1Q84](3권)이 나왔다. 하지만 [1Q84](전 3권)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같은 고민을 해봤다. 얼마든지[1Q84](4권)이 가능했다. 새벽 4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의[1Q84](전4권)은 우연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1Q84](전 3권)의 시가 여행은 놀랍게도 직선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1Q84](전 3권)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쉽게 떠올렸다. 조지오웰이 1949년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를 발표했다. 조지 오웰에게 시간은 직선적이었다. 이로 인해 [1Q84](전 3권)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간에 있어 직선의 형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래고 다른 하나는 과거다.[1Q84](전 3권)에서 전공투가 나오고 옴진리교 종교 집단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이 소설의 세계는 과거다. 하지만 밤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대목에서 시간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때로는 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미래일 수도 있다. 그래서[1Q84](전 3권)의 시간은 이 소설에 나오는 덴고의 말처럼 꽈배기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덴고 이외에도 아오마메가 나온다. 아오마메는 청부살인을 하는 비즈니스 우먼이다. 그녀는 세상을 자기 멋대로 사는 남자들을 살해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고 만다. 그들에게 편한 죽음은 용서할 수 없으나 어디까지나 타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이런 그녀가 선구라는 종교 집단의 리더를 살해하고 나서 어떤 운명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 뿐만이 아니라 덴고도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덴고는 후키에리의 [공기 번데기]를 새로 쓰면서 평범하지 않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즉 그들은 1984년을 살면서 어느 순간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데 다름 아닌 1Q84였다.1Q84에서 Q는 quetion마크인데 이 소설에서는 리틀 피플이 나오고 달이 두 개 뜬다는 의문과 만나게 된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세계가 이상해진 건지' 혼란스럽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세계의 중심(重心)이 가벼워진 것일까? 즉 어디까지가 현실 세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상의 세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까? 아오마메와 덴고가 살던 1984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님의 왕국'이었다. 주님의 왕국은 '우리의 수 많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에 당신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아멘'이라는 구원의 왕국이다. 하지만 구원의 왕국을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상의 세계인 1Q84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Q84는 [공기 번데기]에 나오는 리틀 피플이 말하는 것처럼 마더와 도터의 왕국이다. 사람들에게 마더와 도터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다. 다만 도터는 어디까지나 마더의 마음의 그림자다. 결국 마더와 도터가 되면서 달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터가 된다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가 상실'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까? 달이 두 개가 되는 1Q84의 왕국은 우울하다. 리틀 피플이 예전과 달리 표면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1984년의 현실이 남긴 상처였다. 모든 것이 상실되고 있는 참다한 상황에서 1984와 1Q84은 겉모습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1Q84에서 아오마메가 덴고가 리틀 피플을 지각하고자 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또 다른 구원의 메시지였으며 결국에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다고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4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 하지만 1Q84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가치가 있었다. 

하루키는 [1Q84](전 3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과 함께 1984년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1Q84](전 3권) 에서 서로의 손을 잡은 것은 단순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온기였다. 우리가 온기를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은 정말이지 1Q84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이 위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 이하로 떨어지는 것도 안 된다. [1Q84] (3권)가 끝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1984년이 아닌 오늘을 사는 진정한 삶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나름의 수 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수 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 없이 더듬어 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기꺼이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 4시 달, 여전히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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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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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資本)이 뭘까? 자본이라는 말은 아주 익숙하게 들리지만 자본이 뭘까? 라는 질문은 아주 오랜 만에 듣는다. 자본이 곧 돈이라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고 있듯 자본이라는 단어는 그리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홍기빈이『자본주의』에서 지적하고 있듯 자본은 하나의 수수께끼며 모호한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본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굳이 알려고 하더라도 개념이 다양하고 방대한 탓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식자층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이 자본을 운운하는 것은 자칫 반사회적인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홍기빈은『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땅한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론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를 세 가지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생산, 화폐, 권력이다. 이것을 다시 생산, 화폐를 경제적인 측면으로, 권력을 정신적으로 측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생산, 화폐가 순수 경제 논리인 반면에 권력은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 원인과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 이행’이다. 자본주의 이행은 중세의 장원(莊園)에서 시작되었다. 장원은 폐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단위이며 노동 분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중세 유럽문명은 11~16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 완전히 새로운 문명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하나가 다름 아닌 ‘시장 혹은 화폐 경제’다. 그러나 금전에 욕구만으로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저자가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울타리치기(Enclosures)’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화폐를 척도로 하는 생산성의 향상’이 전면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은 화폐적 이윤이 좌우했다. 가령, 오늘날 개선이라는 improvement의 어원은 ‘이윤을 낳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말이 19세기를 통과하면서 ‘더 좋게 만들다(make better)’라는 의미로 확장되는 데 이것은 곧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게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윤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이윤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산업에서는 다양한 생산 투입물들이 소비재가 아니라 다시 투입하기 위해 저축하여 쌓아놓은 ‘자재(stock)’이다. 그래서 이윤이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아니라 ‘자재의 생산성에 나온 대가’가 되었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면서 ‘고전적 자본주의 이론들’을 앞서 말한 생산, 화폐, 권력의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생산으로서의 저본은 리카도와 마르크스의 견해다. 산업혁명을 전후로 하여 기계라는 자본은 생산과정의 주요한 주역이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 사회적 관계는 모두 돈만 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동원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칼 폴라니가 말한 ‘허구적 상품’의 개념이다. 이에 대해 리카도는 ‘불변자본’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파악했다.

둘째, 화폐로서의 자본에서는 좀바르트와 베버의 견해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한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정신적인 태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 조직’과 ‘경제 체제’를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계산적 합리성은 단지 몇몇 직종이나 경제 조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원들에게서 그리고 체제 전체의 조직 및 작동 원리에 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 또한 자본주의가 단순한 화폐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고 했다. 베버는 ‘합리적인 이윤 추구’를 주장했다.

셋째, 권력으로서의 자본에서는 브로델과 베블런의 견해다. 브로델은 문명의 경제생활을 유명한 ‘삼층 구조’로 파악했다. 1층은 물질생활, 2층은 시장과 교환의 질서 그리고 3층은 자본주의다. 그는 자본을 시장 경제에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독점하거나 뜻대로 바꾸어 그것으로 큰 액수의 화폐를 벌어들일 수 있는 권력으로 봤다. 그런가 하면 베블런은 ‘투자의 자연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계기들을 자산으로 만들어 소유하는 권력으로 봤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았다. 일찍이 브로델은 “사건은 먼지”라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너무 많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변화해 왔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개념은 먼지처럼 불투명하다. 투명하기 위해서는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자본주의』라는 개념사를 통해 먼지가 가라앉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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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타 악비타 시리즈,, 사회과학 시리즈치고는 개념에 대한 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이 책 참 좋은거 같에요. <자본주의>편도 한 번 읽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