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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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숨이 찼습니다. 덕혜옹주의 슬픈 이야기는 허공을 향하여 울부짖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참함으로 얼룩진 인생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명이 권비영 작가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이 늙은 눈물을 흘리게 했을 때 한 여자로서의 슬픔은 어떤 눈물일까요? 이제까지 나는 덕혜옹주를 안타까워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경술국치라는 분노를 삭이며 술잔에 영혼을 적셨던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처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덕혜옹주』를 읽으면서 마음의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문학은 자유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권비영이『덕혜옹주』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은 교과서에 씌어 있는 역사적 지식들이 때로는 허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이면(裏面)을 파고드는 소설적 허구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 소설에 나오듯 고종(高宗)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이라는 가장 평범한 사실조차도 식민지 상황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 언제까지 불평불만만 무의미하게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품은 여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러한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덕혜옹주에 대한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치 진실처럼 굳어진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봤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문에 대해 작가는 반감을 느끼면서도 소문에는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보다 더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문은 떠돌다 사라지겠지만 진실은 덕혜옹주를 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덕혜옹주에게 가혹했던 삶이 더욱 절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1912년 덕수궁의 꽃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이름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13세에 덕혜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에 황족의 일원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그때부터 덕혜옹주는 창덕궁을 그리워하면서도 조선의 황녀라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일본인들을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19세에 대마도 백작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그녀의 우울증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딸 정혜와 평행선을 달리는 불협화음은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원의 그늘에 발을 들이밀게 했습니다. 그 순간 덕혜옹주는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깨끗이 접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그래서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말라가는 작은 꽃잎’이지 않았을까요?

덕혜옹주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무력해보였습니다. 망국의 운명과 함께 했던 신산스런 삶은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운명과 다른 길을 가게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셀 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받았습니다. 무릎에 피멍이 든다고 한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식민지 사람이라는 차별을 견뎌내야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메마른 땅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죽음의 길이 삶보다 편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덕혜옹주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딸 정혜와의 특별하고도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를 낳아도 될까?’라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섞여 혼란했지만 순명(順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운명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겠다는 다짐에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감정의 고뇌가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정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등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혜에게 조선말과 조선식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언젠가는 창덕궁 비선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인 동시에 자신의 치욕을 씻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간격은 멀어졌습니다. 정혜가 일본 이름인 ‘마사에’라는 이라는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덕혜옹주는 무기력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끝내 정혜가 “엄마, 나는 일본인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덕혜옹주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으로 ‘아아, 정혜야. 일본인이라니, 정혜라고 부르지 말라니. 안 된다, 애야. 너는 내 딸이다, 너는 조선인이다. 나의 정혜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엄마 따라 조선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너는 엄마 딸이야”라고 하자 “조선은 이제 없어! 망해서 없어진 나라라고! 대 일본 제국의 식민지란 말이야!”라고 매몰차게 대꾸했습니다. 정녕 정혜로부터 저 소리를 들으려고 질긴 목숨을 버텨왔단 말인가? 덕혜옹주의 가슴 한 구석이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저 소리를…저 무례한 말을….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덕혜옹주의 불행이 단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는 없는 일 같아서 마음이 더욱 을씨년스러웠습니다.

2010년 2월 초『덕혜옹주』라는 낯선 제목의 책을 선뜻 집어 들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덕혜옹주’라는 이름에 있었습니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고 보면 100년 동안 우리는 덕혜옹주를 모른 체 살아온 셈입니다. 그만큼 무심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승자(勝者)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했을 때 덕혜옹주는 패자(敗者)였습니다. 일본에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일본이 패망하고도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를 외면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현실에서 덕혜옹주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이 터져라 창덕궁 낙선재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상한 덕혜옹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심하게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덕혜옹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덕혜옹주에 무관심한 우리라면 정신 병원에 갇혀야만 했던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식민지라는 국가의 정치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딸이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덕혜옹주의 개인사는 그것은 그대로 또 한 시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다한 시대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부끄러운 역사가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김구는『백범일지』에서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고 고친 것은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들이 자신을 몽우리돌이라고 달리 부르는 것에 격분하였습니다. 뭉우리돌은 석회질이 많은 탓에 쉽게 물컹거렸습니다. 이로 인해 김구는 뭉우리돌이 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경술국치 100년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나라사랑은 어떤가요? 백범이 말한 대로 ‘뭉우리돌’을 닮은 것 같아 두고두고 한(恨)은 아닐 런지요? 많은 사람들이 조국이 독립되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경술국치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는 게 아닌가, 라고 후련하면서 편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가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경술국치의 콤플렉스'를 다음과 같이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하네. 낯선 땅에서 핍박 받으며 견뎠던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들이 이 땅에서 흘렸던 피눈물까지 모두 거두어가야 하네. 그걸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립도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리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념이 무엇인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네 나라를 세워 우리 민족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는 것 아니었나? 옹주마마는 그 시작에 불과하네” 이었습니다.

작가 말대로 떳떳한 나라를 세우는데 덕혜옹주가 그 시작이라는 데 무척이나 공감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오늘에야 비로소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삶이 거센 바람으로 휘몰아쳤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힘이 생겨났습니다. 덕혜옹주가 슬픈 운명을 피하지 않았듯이 우리들 또한 결코 밀리거나 비켜서지 않기를 새삼 느꼈습니다. 그녀를 위한 진혼곡인『덕혜옹주』를 읽으면서 100년이라는 삶의 흔적에서 민족의식이 얼마만큼 오래되었는지 문제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것을 진정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보다 불운했던 황녀의 진심이 더 깊이 읽어지기를, 좀 더 깊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는 작가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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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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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데올로기는 우파, 좌파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다. 그래서 인문학적으로 좌파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자본론』같은 불온서적(不穩書籍)을 읽는 것이다. 반면에 인문학적으로 우파라고 한다면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책을 탐독하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이택광은『인문좌파를 이론 가이드』에서 ‘인문좌파’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인문좌파란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주체’였다. 즉 인문좌파는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였다. 또한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란 다름 아닌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드러나듯 ‘이론가이드’라는 것은 저자가 다년간 이론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그는 ‘이론은 근육이다’라고 말하면서 왜곡되었거나 편향된 이론의 진면목을 정의하였다. 보기 좋은 근육이 아니라 힘을 쓰기에 좋은 근육이라고 했다. 이론이 쓸모 있는 근육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개념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으로 받아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에 대해 유념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창조라는 것이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이론은 없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우발적인 필연성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탈정초주의(post-foundationalism)다. 탈정초주의는 토대나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한 것을 우발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마르크스를 죽여? 살려?’로 시작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인데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의 근대화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제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공산주의의 선언』에 대한 단순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젝이 말한 ‘이데올로기의 판타지’다. 가령, 근대화 이후의 한국성과 유교는 거의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은 유교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이론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면서 ‘문화이론’의 반작용이 나타났다. ‘마르크스로 돌아가라’는 것은 페리 핸더슨이 제시하는 것처럼 ‘역사발전에 관한 이론(역사이론)’으로 볼 수 있다. 역사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의 이론’이 되는 메타이론이 되었다. 그리고 라캉주의 좌파에서는 ‘정치적 기획’을 제시한다. 라캉주의 좌파에서 정치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위상학에서 현실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라캉의 주이상스에 관련하여 빼놓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만보자를 새로운 지식 생산자로 봤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진리내용과 물질내용 그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 자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리는 의도성의 죽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융의 의식성을 문제시하는데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증법적 사유는 역사적 각성의 기관이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앎은 곧 기존의 지식을 부수는 새로운 것’이었다. 저자는 이 문제가 모든 좌파이론의 핵심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밖에도 이 책은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이론으로 여겼던 알튀세르를 조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을 무의식이라는 과학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이데올로기 또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해석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이념이나 신념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재현들의 체계’ 곧 구조로 봤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상상적 관계로 설정했다. 상상적 관계란 큰 주체에 작은 주체들이 귀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고 했다. 반면에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구조가 아니라 ‘구조와 주체의 틈새에서 작동하는 판타지’라고 했다.

다음으로 저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예술을 여전히 반자본주의적’인 것에 주목한다. 즉 예술의 ‘창조적 상상력’을 반자본주의적 정치의 원동력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네그리는 예술가를 ‘해방을 향한 물질적 욕망에 내재한 구성적 힘의 화신’이라고 하면서 ‘다중’이라는 존재로 규정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과 ‘혁명적인 것’은 같다. 이로 인해 모더니즘을 병든 예술, 리얼리즘을 건강한 예술이라고 했던 루카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끝으로 철학의 복원 문제에 있어 알랭 바디우의 ‘탈봉합’을 제시하고 있다. 바디우에게 있어 철학은 진리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디우은 기존의 철학은 진리적 철차들을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어느 한 가지를 우월한 지위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진리 생산이 다른 진리의 생산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봉합’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결국 봉합이라는 것은 ‘진리 생산의 절차를 배타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면에 탈봉합은 ‘다양한 진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론이 쓸모 있는 근육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단순한 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론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론의 역할이다. 그런 면에서 랑시에르가 파악했던 ‘정치적인 것은 언제나 미학적인 차원을 통해 출몰한다’는 것이 뚜렷해진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결정하는 아프리오리(a priori: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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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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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1995년 서울 강남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느 누구에게는 운이 없는 날이었다. 만약 운이 좋았다면『장자』「제물 편」에 나오는 나비 꿈(胡蝶夢)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엄연히 장주였다. 그래서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分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만물의 조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분별은 차별(差別)과는 다른 것이다. 

 
황 석영의『강남몽』은 차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다루고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차별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강남(江南)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온 몸으로 맞서고 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황석영은 보기 드물게 ‘몽(夢)’이라고 했다. 몽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현란하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을수록 몽에 대한 환상은 그야말로 한바탕 몽에 불과하다. 황석영은 몽의 애매함을 살짝 추구하면서 ‘다큐 소설’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소설은 더욱 현실적이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이 소설의 묘한 매력은 작가의 비범한 거대 담론(談論)에 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작가는 ‘광복 반 세기식의 대하소설로 쓸 수는 없고 그런 접근은 낡은 방식’이라고 고백했다. 흔히 역사학을 ‘디테일에 대한 사랑(love of detail)'이라고들 한다. 가령,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역겨운 화약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스케일(scales)'도 빼놓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강남몽』이라는 책 한 권을 읽으면 마치 10권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남몽』에서 작가는 1995년 서울을 주목하고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끔찍할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남 형성사’의 총체적인 모순을 말해주는 지표였다. 일제시대와 광복, 그리고 분단이라는 정치적 후유증으로 얼룩진 5.16 쿠테다와 남서울 개발 계획의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질곡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 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 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였다.

이 소설은 삼풍백화점을 연상시키는 대성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조각난 씨멘트 덩이에 깔린 서로 다른 꿈의 몰락과 아픔을 쫒아가고 있다. 대성백화점 참사는 인재(人災)에서 비롯되었다. 부실공사에 따른 건물의 안전도가 위협받았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최소한의 양심마저 반쪽이 되고 말았다. 문을 닫느냐, 마느냐는 정작 영업 이익 때문에 휴업하지 못했다. 대성백화점은 여름 정기세일이라는 좋은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비정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문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대성백화점에서 인생의 끝이며 무덤이 될 줄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박선녀와 임정아는 다행히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자 생사를 오가는 참다함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차라리 이것마저 꿈이길 바랐으나 자꾸만 아픈 곳에 손이 가는 것마저 버거웠다.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체념은 아직도 그녀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삶과 죽음이 마치 종이 한 장의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 숨 가쁘게 살아온 과거가 아픈 속살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박선녀는 대성백화점 회장인 김진의 둘째부인이고 임정아는 대성백화점 아동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은 시멘트 덩이에 깔려 있다. 단단한 시멘트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것은 사악한 인간의 욕망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잠시 실종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다섯 명이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박선녀와 임정아의 평탄하지 못했던 삶의 멍에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박선녀는 이름과 달리 나쁜 권력에 편승하면서 강남 귀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 진희였는데 이는 ‘요술쟁이 지니’의 발음만 따서 지었다. 그녀의 요술은 술장사를 시작으로 하여 땅장사를 거쳐 몸장사를 했다. 술장사에 있어서는 깡패 홍양태가 있었고 땅장사에 있어서는 부동산 투기업자 심남수가 있었다. 그리고 40대에도 불구하고 탄력전인 몸매를 간직했던 것은 재벌가 김진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공 가도에는 미모, 주먹, 권력이라는 트라이앵글이 매순간 불가사의한 능력을 드러냈다. 생활고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를 걱정했던 풋풋함은 세월과 함께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핸드백 하나에 1,000만원이 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러한 우문은 ‘생존만으로 충분치 않았다’는 김진에게도 당연했다. 김진이 누군가? 강남의 재벌가이면서도 굳이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 세상에 좋다는 것 다가졌으면서도 남산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향수(鄕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산 집은 그의 애국(愛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일제시대 생명의 위협보다 더 악착같았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조선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없었던 그는 일본 헌병의 개인 밀정이 되면서부터 급변했다. 그의 애국은 매국이었으며 광복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는 ‘반공’으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군사정권에서는 ‘중앙정보국’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있었던 탓에 남산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힘을 가졌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두려운 것은 군사정권 이후 산업화에 따른 개발논리에 파묻혀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대의 조직력으로 사회와 국가를 개조할 수 있다는 단순명쾌한 명제’를 지닌 박정희로서는 개발이 하나의 목표였다. 이로 인해 친일파 세력들은 그들만의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면서 사상을 통제하고 탄압했다. 그들이 강북이 아닌 강남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나마 안전했기 때문이다. 올해로 개통 40주년을 맞이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강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의 가치는 보다 분명해졌다. 강남이 대한민국 부의 1번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작용했다. 그 순간 모든 불나방들이 서열화되었다. 즉 얼마만큼,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해졌다.

박선녀와 김진이 불우한 시대의 반인반수(伴人半獸)라고 한다면 임정아는 반인(伴人)이었다. 대성백화점에서 일하며 하루 세끼 밥먹으며 아무 걱정없이 사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비록 자기의 월급보다 많은 수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에게 해 끼치고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좋은 차에 널찍한 집에 사는 부자들이 부러웠던 반면에 별로 잘살지 못한다고 여겼다. 백화점이 붕괴되고 난 후 씨멘트 틈 사이에서 박선녀가 버티지 못하고 “나 이제부터…잘 거야…”라고 하면서 깊은 잠에 빠질 때 임정아는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박선녀가 더 이상의 요술을 부리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세월과 함께 소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대성백화점이 붕괴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무질서한 것이 자멸하는 환영(幻影)이었다. 이러한 환영에 대해 임정아는 목이 찢어지도록 “여기 사람 있어요…” 라고 울부짖었다.

『강남몽』은 운명이었다. 거장 황석영은 디테일과 스케일을 아우르며 삼풍백화점의 참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그저 흘러가버린 과거라고 하기에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강남형성사의 비극에는 자본주의의 사기극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황석영은 삼풍백화점의 비극 앞에서 인간들의 너절한 양심을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남의 꿈을 쫓는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인형 혹은 희극같았던 부끄러운 자화상은 불식간에 허를 찔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닌 나비 꿈(胡蝶夢)이어야 더 이상의 '강남몽'은 없지 않을까?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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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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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P. 스노우는 『두 문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2라는 수는 매우 위험한 숫자이다. 변증법이 위험한 방법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둘로 나누려는 생각에는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개선해보려고 오랫동안 생각한 바 있지만 결국 중지하기로 하였다. 내가 찾고자 한 것은 문화의 구별까지는 안 간다고 해도 위풍당당한 은유(metaphor) 이상의 그 무엇이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는 두 문화로서 충분할 듯하고 그 이상으로 세분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이점보다는 결점이 더 많은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두 문화를 대표하는 지식인은 바로 인문학자 진중권과 과학자 정재승이다. 다시 말하면 진중권은 철학적 지식인(C. P. 스노우의 문학적 지식인과 같다고 했을 때)이며 정재승은 과학적 지식인이다. 그들이『크로스』 에서 문화 키워드 21개를 통해 앞서 말한 위풍당당한 은유를 펼치고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 개념적으로 접근하다보면 정작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느 틈에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스티브 잡스가 말한 “다르게 생각하라.”는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이 책은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우리의 전전두엽을 지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이 책의 흥미롭고 진지한 통찰력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영화「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정재승은 21세기 예방과학에 대한 우화로 설명했다. 21세기 테크놀로지가 가속화되면서 예측과 예방으로 시스템으로 범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 모두 잠재적 범죄자다. 또한 미리 운명을 알게 된 자의 고통과 몸부림에 있다. 이를 통해 정재승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과관계의 뫼비우수의 띠에 정면 도전한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진중권은 ‘창의적이지 못한 기술은 기능’으로 전락한다고 했다. 이 영화가 구현하려한 미래 현실 즉 허황되지 않은 매우 현실적인 상상은 이미 기술적 일상이 되었거나 기술적 상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이 예술로 흘러들어가는 흐름이 있다면, 반대로 예술이 기술로 흘러 들어가는 흐름’도 있다고 하면서 미디어 아티스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둘째, ‘헬로 키티’라는 고양이의 매력에 대해 진중권은 일본 사회의 가와이(귀여운) 문화를 말했다. 키티의 분홍색이 상징하는 소녀 취향이 ‘무국적성’이라는 일본 대중문화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미국의 바비 인형은 철저하게 백인 여성의 미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키티의 매력에 대해 정재승은 입이 없어 감정이입이 쉽고 자유롭다는 것, 이야기 없이 순수한 캐릭터로 탄생됐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특히 캐릭터 마케팅의 핵심을 정재승은 의인화와 동일시로 보고 있다.

셋째, 레고(LEGO)에 대해 정재승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유물이라고 했다. 생명체가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이라는 네 가지 DNA 블록이라면 레고 왕국은 빨간색(R), 초록색(G), 파란색(B), 노란색(Y)의 플라스틱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고블록을 통해 어린이들은 ‘창조자의 절대권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중권은 레고조립은 건축과는 다르고 했다. 즉 건축에서는 개념화와 실현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레고 건축가는 그런 분리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고는 컴퓨터 게임을 닮은 실시간 ‘인터랙션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무한 상상력 즉 위풍당당한 은유를 새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더라도 스티브 잡스를 보는 방법은 차이가 있다. 정재승은 ‘개성적인 통찰력’으로 진중권은 ‘현실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학문 간의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라 통섭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생활 세계의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 즉 “크로스”임을 탄탄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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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쇼 -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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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윈은『종의 기원』에서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동물로 진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다윈 비판론자들은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 될 수도 있겠다면 반박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면 왜 아직도 원숭이가 살아있는가?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가 하면 만약 이러한 진화가 사실이라면 왜 ‘원숭이인간’이라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가? 라고 강한 부정을 거듭 주장하며 진화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창조론자 혹은 설계론자들의 질문 공세에 20세기 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는『지상 최대의 쇼』에서 궁극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먼저 진화는 ‘그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에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사실의 사전적 정의는 ‘실제 관찰이나 진짜 증언을 통해서 알려진 어떤 진실로, 그저 추출된 내용이나 추측이나 허구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은 ‘어떤 사상들이나 진술들의 체계’다. 그래서 다윈의 진화가 사실이라면 자연선택은 이론이 되는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진화라는 사실 자체는 반박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자연선택은 진화의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지 유일한 추진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간 화석의 문제는 화석기록의 빈틈(gap in the fossil record)을 말한다. 이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고 하는데 인간과 다른 영장류를 이어주는 화석 증거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에서 보면 인간은 고등 동물이며 원숭이는 하등 동물이다. 하등 동물이 고등 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과정에서 연결고리를 다루는 것은 오히려 반진화적인 개념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이유인즉 인간은 원숭이에서 유래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인간은 원숭이와 공통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생종들은 선조를 공유하는 친척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저자는 화석의 빈틈은 존재한다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펼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화석은 필요 없다. 화석 없이도 진화에 대한 변론은 물 샐 틈 없이 확실하다.’고 했다. 즉 화석이 하나도 없더라도 다른 분야의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히 진화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방대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앞서 말한 다른 분야의 증거들이며 책 제목에 나와 있듯 ‘지상 최대의 쇼’ 그 자체였다. 이 모두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친절한 진화론 입문서’것을 알게 된다. 그런가하면 ‘명쾌한 창조론 반박서’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무기경쟁과 신정론]을 다룬 12장이 가장 첨예하게 창조론의 허술함을 포착하고 있다. 창조론자에게 지구가 젊다고 한다면 진화론자에게는 늙은 지구다. 젊은 지구에서 신정론(神正論)을 모면 무기경쟁(armament race)이 발생하지 않는다. 설계된 경제라고 한다면 자연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존재로부터 이득을 얻는 공진화(供進化)다. 하지만 자연은 포식자와 사냥감에서 보듯 사악하며 무도덕적이다. 이런 공진화가 바로 무기경쟁이다.

돌 이켜보면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다.’라는 자연선택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곧 다윈이 말했던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윈의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고 했다. 오히려 자연선택을 혐오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음울한 논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저자는 진화를 부정하는 40퍼센트의 사람들 즉, 역사 부인주의자들에게 진화의 증거를 인정하고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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