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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평점 :
이 책『메두사의 시선』의 저자인 김용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자인 그가 다름 아닌 철학 에세이를 쓴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개성적인 사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저자 말대로 철학 에세이는 지식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은 곤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화-과학-철학을 연계하는 저자의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했다. 같은 지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역사가 아닌 ‘상상력의 역사’라고 말했던 저자의 명랑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인‘메두사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시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메두사의 눈초리는 이중적이다. 즉 변화하는 것들의 뒤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을 붙잡아 두는 과학의 시선인 반면에 그런 과업에 몰두하는 과학자에게‘업보’로 돌아갈 시선이다. 이로 인해 메두사의 시선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며‘과학적 패러다임은 메두사의 시선이 화석화된 법칙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갈릴레오에 대한 지지를 “지구가 수정 구슬로 바뀐 뒤에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메두사의 눈초리에 의하여 다이아몬드의 조각상으로 변화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자연법칙의 조각상이란 단순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메두사의 시선이 확장되면 진리의 빛이 대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사유는 엉뚱하다. 그렇다고 해서 엉뚱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엉뚱함이 제기하는 의혹에서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한 논증이야말로 철학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령,「피그말리온의 타자성」를 보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상(像)이 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피그말리온이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지독한 이기주의자 혹은 자기중심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까닭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탓이다. 진화의 종점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저자가 우려하고 바는 타자에 대한 불필요성에 있다. 인간이 근원적인 자기반성과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탐색을「디오니소스와 포도주의 인식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니체도 그랬지만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한계는 주신(酒神)만을 다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예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세 가지로 활동을 들었다. 즉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연적이지 않으며 발효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도주는 포도와는 달리 문화이며 이것이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는“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즉 한때는 네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두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작 어린 아이도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핑크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시선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관심과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