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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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살,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다. 누군가 열일곱 살에 대해 묻는다면 위로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떠들어대도 정작 열일곱 살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위험한 폭발물이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시선은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은희경은『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오늘날 열일곱 살이 겪고 있는 열등감을 파괴하지 않았다. 작가 말대로 열일곱 살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열일곱 살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자 속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이것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상자를 내던지는 부주의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했다.

 

작가에게는 열일곱 살이 이미 지나간 생(生)이겠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나가야 할 생이었다. 지나감은 지나가야 함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그것은 하나의 생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에서 열일곱 살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를 자극했던 그 미묘함은 ‘카프카의 책’들이었다. 작가는 마치 열일곱 살을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으며 카프카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카프카는 빠지지 않았다. 만약 카프카가 없다면『변신』도 없으며 결국에는 열일곱 살은 지루함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 ‘변신’의 도화선은 열일곱 살 연우였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변신』에 나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았다. 그곳에서 연우는 자신의 방에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이전에 살던 방의 주인이 누구일까? 두려웠다. 자신의 거울과 똑같은 길이와 너비를 가졌던 사람을 상상하는 것도 만남이라고 하면 만남일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몸을 숨긴 채 바라봐야 했던 것도 낯선 만남에서 오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을 둘러싼 수수께끼에서 정작 연우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다만 거울 속 두 개의 얼굴은 전혀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국 청소년 독고태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열일곱 살의 상처들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소년 시절에 연우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그의 소년 시절은 곪아버렸다. 그때부터 연우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다워야 한다는’ 말이 열일곱 살이 된 지금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것은 곧 연우의 생활을 하나하나 조각냈다. 그러나 독고태수는 달랐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미스터 심드렁’이라고 다짜고짜 내뱉는 말투도 그렇고 힙합 스타일의 헐렁한 반바지도 그렇고 알듯 모를 듯한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도 그렇고 완전히 비호감이었다. 자신에게 곤란하고 귀찮은 ‘긴팔원숭이’로 여겨졌던 독고태수였지만 그의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한 순간 전율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심장이 마구 뛸 줄이야…….

 

<소년을 위로해줘>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울 수 있어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글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 말야

 

무엇다워햐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우리는 진짜보다 더 강한 척해야 하므로

 

남자스러움? 연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가령, 중학생이었던 연우는 육교 아래에서 돈을 뜯겼을 때 자신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엄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육교 아래로 끌려갔을 때 내 주머니에는 이천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뺏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치사함, 그리고 그런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후진 세상이라니.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정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만만한 데에 화풀이를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한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힙합이 연우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연우가 열일곱 살 때문이었을까? 클래식과 발라드보다는 힙합이 열일곱 살 세대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며 꿈과 희망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힙합이 가지고 있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사람의 모든 DNA에 내재된 리듬 때문일까? 이를 증명하듯 이혼한 엄마의 애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 재욱 형에 ‘힙합의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선율이 차지하는 절대적인데 힙합은 선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막강한 선율을 배제해버린 채 음악의 완성을 추구하는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힙합의 혁명성을 깨닫는 순간 연우는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더 이상 비겁해질 필요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위로했다.



한편, 거울 속 또 다른 얼굴이었던 민기훈이 거울의 맞은편 벽에다 낙서한 흔적을 알게 된 연우는 무심코 그림을 완성해보았다. 그러자 날개를 활짝 핀 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이 거울을 보자 마치 자신의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는 듯 했다. 민기훈이 그렸던 동물은 다름아닌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와 발톱 그리고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란다. 황금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그리핀! 무엇보다도 독고태수로부터 들었던 <소년을 위로해줘>를 부른 사람이 ‘G-그리핀’와 얽히면서 연우는 민기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이었던 민기훈이 정통 음악이 아닌 마이너나 언더를 즐겼다는 것을. 이러한 의문은 채영을 만나면서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기훈과 채영 사이에서 제 삼자에 불과한 연우였다. 채영은 연우를 보면서 기훈을 언제가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연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우가 카프카를 닮았으며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힙합, 카프카는 ‘소년의 감수성’이다. 다시 말하면 열일곱 살의 어두운 저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이편과 저편은 힙합이 이전 음악과 구별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팝이든 포크든 록이든, 블루스든 주어가 나인 노랫말은 무수히 많다. 바람, 구름, 들꽃을 노래해도 거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긴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이나 브람스의 애잔한 선율에도 나의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힙합은 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토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 실패한 연애 이야기 등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서열화된 교육제도의 모순,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까지, 꾸밈없이, 솔직하게, 거침없이, 때로는 생경하고 과격하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달린다.’에 있었다. 요즘 같은 문명인들에게 달린다는 것은 원시인으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냥 걷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달려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것이 ‘절제’때문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절제란 재미있어도 그만둘 줄 아는 힘, 귀찮아도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다. 연우는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통제하지 못해 마구 달리고 싶었다. 몸속에서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문제아로 찍혔던 태수는 빨간 불이라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이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빨간 불을 모조리 파란 불로 바꾸면서 말이다.


 

은희경의『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 있듯 연우, 태수라는 소년들이다. 그리고 채영이라는 소녀도 있다. 이들 모두는 열일곱 살이기 때문에 그들의 연령대를 위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년의 감수성’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과 아웃사이더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에는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폭력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살갗에 와 닿았다. ‘인생은 내 안의 freedom. It’s twisted 난 나로서 움직여.’ 만약 문제가 안 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소설을 ‘사랑이 식은 힘’으로 섰다고 고백했다. 사랑이 식는다고 외면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은 위로받아야 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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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채찍 - 목표로 유인하는 강력한 행동전략
이언 에어즈 지음, 이종호.김인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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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과(apple)만큼 우리의 선택에 끼친 과일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善惡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황금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다. 그리고 최근 경제학 분야에 있어 리처드 탈러의 사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과 선택 문제를 냈다.

첫 번째 선택은 다음과 같다.
(A) 일 년 후에 사과 1개 받기
(B) 일 년이 지난 바로 다음날 사과 2개 받기

두 번째 선택은 다음과 같다.
(C) 오늘 사과 1개 받기
(D) 내일 사과 2개 받기

그는 선택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면 (B)와 (D)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B)와 (C)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언 에이즈의『당근과 채찍』을 보면 리처드 탈러의 사과 선택 실험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Hyperbolic discounting)이다. 즉 사람들은 보상이 눈앞에 가까워질수록 작더라도 더 빨리 받는 쪽을 선택한다. 반면에 보상이 지연되면 상대적으로 가치를 덜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당장은 사과 1개를 선택하고 먼 미래에는 사과 2개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태 역전은 ‘동태적으로 비일관된 선호 현상’으로 불리는데 저자에 따르면 경제학에서 벌어지는 행동주의 혁명을 이해하는 열쇠였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유인(誘因)은 ‘당근과 채찍’이다. 당근이 어떤 행동에 대한 조건부 보상이라고 한다면 채찍은 어떤 행동에 대한 조건부 처벌이다. 보상과 처벌은 경제적 유인의 기본 요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당근과 채찍은 더 이상 성공적인 유인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행동경제학에서는 ‘약속 실천 계약’이 최선의 유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의 차이는 선택의 유무에 있다. 당근과 채찍은 보상과 처벌에 따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약속 실천 계약은 억제력 때문에 미래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채찍을 설정하여 선택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약속 실천 계약이 가치 있는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과도한 가치폄하를 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갈등 회피자’다.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있어 그들은 ‘미루기’와 ‘미리 하기’라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약속 실천 계약은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목표로 유인하는 강력한 행동전략’이 된다. 이는 자신의 행동의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도 아주 유용하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정보와 유인’에 중점을 두었다면 행동경제학에서는 리처드 탈러가 말한 ‘선택설계’가 중점이 되었다. 전자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돈이 중요했다. 반면에 후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약속 실천 계약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3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3개의 문제란 어떤 것으로,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말한다. 첫 번째 어떤 것으로는 실질적으로 약속이 정확히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다.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너무 강한 채찍은 참여 제약을 부르기 때문에 채찍의 크기를 정할 때는 ‘중간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손실회피(loss aversion)’ 경향이 있는데 손실이 이익보다 2배나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50달러를 걸면 10퍼센트의 금연 가능성이 있고 200달러를 걸면 80퍼센트의 금연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금연 가능성의 확률이 ‘탄력적’이라고 한다면 돈을 많이 걸수록 돈이 절약되는 것이다. 그러나 판돈의 액수가 과하게 많아지면 금연 가능성의 확률은 ‘비탄력적’이 된다.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누구에게는 약속 실천 계약의 상대바이 누구여야 하는가에 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경쟁자이며 비판자다. 이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을 따라하게 하는 ‘또래 압력’과 ‘자기 협박’의 놀라운 효과를 알게 된다. 이러한 역반응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다. 즉 유인은 유인 대상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을 목적과는 반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채찍의 역반응을 살펴보면 어린이집들이 부모가 늦게 올 경우 벌금을 부과했을 때 오히려 부모들은 늦게 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효과적인 방법은 부모가 늦게 올 때마다 어린이집에서 가장 가난한 교사가 그 지각한 부모에게 돈을 주는 경우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인체계는 부모들에게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어떤 결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약속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좋은 당근이면 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나쁜 채찍이면 된다. 그러나 때로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한편 약속 실천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다잡기, 규칙적인 자기 감시, 자신에게 가장 현실적인 목표, 성공했다는 착각, 최적의 탄력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잘게 쪼개야 한다. 이른바 비둘기 프로젝트(Pigeon Project)로 불리는 스키너의 단계적 접근법은 ‘결국’(Eventually)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즉 동물들이 원하는 복잡한 행동을 ‘결국’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고개를 까닥거리는 간단한 동작을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점점 원하는 동작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약속 실천 계약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다. 약속 실천 계약의 문제점은 바로 자제력이다. 자제력이란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면 고갈되고 만다. 순진한 계약자들은 프랭클린이 말했듯이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다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줄이려다가 인터넷에 빠지는 경우다. 이는 ‘중독 전이’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제력 고갈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자율 규제 능력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기존의 당근과 채찍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 최선의 약속 실천 계약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앞으로는 행동경제학에 있어 최선의 약속 실천 계약이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갈등회피자가 아닌 ‘자기강박적 약속자’가 최고의 당근과 채찍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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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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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바슐라르,『몽상의 시학』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의『영웅의 서』를 읽는 동안 괴테가 땅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는 책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숨을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책처럼 숨을 쉰다? 만약 책이 나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의 까다로운 독서에 다가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책처럼 숨을 쉬는 것이 즐겁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온갖 글자들로 가득 찬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곧 ‘있어야 할 이야기’라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있어야 할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한다. 작가는『영웅의 서』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란 ‘이야기’라고 하면서 사뭇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기에서 말한 이야기는 글자들이 만들어낸 단순히 재미가 있다거나 없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때로는 정의, 때로는 승리, 때로는 성공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이 얼마나 부조리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버젓이 일어나곤 한다. 작가는 그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이야기에 살려 한 죄’라는 강렬한 욕망을 한껏 뿜어낸다고 했다.

『영웅의 서』에서는 놀랍게도 반 친구 두 명을 칼로 찌르고 도망간 완벽했던 오빠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 소녀 유리코가 나온다. 가족의 단란함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서져버려 가슴이 요동치던 유리코는 오빠의 방에서 책의 정령인 빨강 책, 아쥬로부터 오빠는 “너무나 빨리 그것에 씌고 말았어.”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쥬가 말한 그것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오빠가 그렇게 무서운 것을 저지른 것은 영웅이 오빠에게 들러붙어 나쁜 짓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아쥬는 영웅이 나쁘다고 했다. 정말로 영웅이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면 영웅에게 홀려버린 오빠에게 잘못은 없다는 게 유니코의 소녀다운 생각이었다. 유니코 말대로 오빠는 피해자이며 희생자다. 정말로 그럴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위험하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지 아픔이 느껴졌다. 더구나『영웅의 서』에서 완벽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히로키마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를 계기로 한 순간 잃어버린 것들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을 동안 알 수 없었던 것들이 터무니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얼마나 약하며 기쁨은 얼마나 쉽게 빼앗기는지, 그리고 사악한 힘은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로키를 변화하게 만든 사악함의 정체가 ‘영웅’이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여자 친구 미치루를 위해 히로키는 영웅다운 행동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히로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되었다. 히로키의 영웅다운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복수는 히로키에게 복수의 끝으로 되돌아 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영웅에 대한 갈망과 강박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영웅의 정체는 뭘까? 소설에 따르면 영웅의 양면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영웅의 씩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영웅의 초췌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모든 사물에는 앞과 뒤가 있듯 영웅에게도 빛과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이러한 빛과 그림자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한쪽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열정으로 말이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도 짙어진다.’ 그래서 영웅의 빛이 정의라고 한다면 영웅의 그림자인 불의가 서로 경쟁하면서 어느 순간 사람의 혼을 빼앗아버린다. 겉만 봐서는 히로키의 복수의 끝은 정의롭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불의라는 것이 없이는 발현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슬픔이라고 할까.

그런데『영웅의 서』는 앞서 말한 대로 초등학교 5학년 유리코의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유리코는 행방불명된 오빠를 걱정하는 모습은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리코는 여자이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는 않았다. 유리코에게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같은 용기가 있었으며 ‘이름 없는 땅’에서 기이한 책과 싸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오직 오빠를 구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다. 오빠는 영웅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황의(黃衣)를 입은 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고 있다. 바로 영웅의 사본인『엘름의 서』의 주문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리코는 오빠없는 세상은 불안하다고 하면서 ‘신비한 새로운 세계’(테두리)로 접어들었다. 이 테두리에서 유리코는 인간과 책이 싸우는 원인이 봉인된 영웅이 파옥(破獄)되었음을,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다시 ‘죄업의 대륜’을 타고 영웅을 봉인해야함을, 하지만 무명승으로 부터 결코 영웅은 봉인될 수 없음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영웅이 봉인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코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아른거렸다. 오빠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의를 입은 왕에게 매료된 ‘최후의 그릇’이기는 해도 유리코에게는 언제나 오빠였다.『엘름의 서』에 무슨 사연이 들어있는지 확실히 알 지 못했지만 오빠는 커다란 분노를 발산하고 싶었으며 이런 욕망이 영웅이라는 자신보다 더욱 큰 존재를 만나게 했다. 비록 테두리 영역에 사는 자들은 이름 없는 땅을 순환하는 이야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도 결코 유리코가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테두리에서 오빠는 없다. 오직 무명승 즉 ‘죄업을 진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명승에서도 미숙한 무명승인 오빠가 진짜 무명승이 되기 위해서 지금 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화는 ‘맑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이다.

누구나 히로키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영웅의 서』에 나오듯 영웅의 어두운 황의를 입은 왕에게 이끌리게 된다. 무명승이 될 수 있겠다는 두려운 마음에 가슴 아래께가 묵직했다. 무명승은 ‘하나이자 만, 만이자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아침에 한 아이가 아이를 죽이는 세계는, 저녁에 만 명의 군사가 살육을 하기 위해 내닫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하나의 정의가 만 개의 불의이며 만개의 불의가 하나의 정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하나 히로키의 복수심이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인지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된다고 했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잔 손택의 논리대로 한다면 히로키의 불행이 복수심을 낳았고 복수심이 영웅에게 홀려버린 것이다.

복수심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우리들 상식으로는 치료해야만 한다. 혹은 선은 강하고 악은 약하다는 흑백논리로 영웅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성세대의 판결’에 대해 『영웅의 서』로 기묘하게 저항했다. 기성세대의 판결을 따르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좀 더 편한 해결이며 굳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영웅의 서』는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오빠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과 ‘울어도 되지만, 절망해선 안 돼.’라는 메시지를 책의 정령들의 입을 빌려 어린 소녀 유리코에게 타이르듯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 뭔가 새로운 해결책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용서와 절망해서 안 돼, 라는 것은 나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 없는 세상에서도 우리들이 숨 쉬는 것은 다 아는 것들을 반복하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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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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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겠지만 말싸움만큼 시비(是非)를 나누기가 어려운 것은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보면 시비가 또 다른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시비의 결과가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를 되새기곤 한다. 정의는 불합리한 세상에 맞서는 쉽고 가벼운 방패다.

하지만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고자 한다면 단순한 방패만으로는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강의를 고스란히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저자는 정의에 대한 논쟁거리를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정의에 관한 주요 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정의는 ‘행복, 자유, 미덕’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행복에 있어 우리는 배고픈 돼지가 낫을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을까? 라는 오래된 질문을 만나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다. 행복에 있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했다. 하지만 최대 다수의 이면에는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그래서 밀은 이러한 순응적인 삶을 반박했다. 그는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했다.

다음으로 자유에 있어 과연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렇다고 한다. 가령,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부자는 강요받는다. 이것은 부자가 자신의 소유물을 쓸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경제적 불평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는 이를 반박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며 자율적 존재’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측면은 미덕(도덕)이다. 우리는 미덕을 통해 좀 더 깊이 왜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방향과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행복, 자유와 달리 미덕은 심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심판은 도덕적 추론을 어떻게 판단하는 문제다. 이 때 도덕적 딜레마는 도덕 원칙이 충돌하면서 생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정의로운 삶의 조건을 파악할 수 있다. 

아리스토델레스에 따르면 정의는 ‘텔로스(telos:목적)’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가령, 플루트를 분배할 때 최고의 플루트는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를 ‘의무’에서 찾고 있다. 칸트가 말한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도덕의 최고의 원칙이지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존 롤스는 ‘도덕적 임의성 배제 논리’를 펼쳤다. 그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면 그 경기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겉으로는 기회 균등이 긍정적으로 보장되는데도 불구하고 소득과 부가 불평등한 이유는 도덕적 임의의 현실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즉 능력에 상관없이 계층과 환경에 따라 기회가 전혀 균등하지 않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도덕적 임의성은 ‘도덕적 자격’에 대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즉 롤즈에 따르면 도덕적 자격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덜은 존 롤즈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 개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다. 즉 기존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목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 조상의 잘못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죄이지 내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은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와 달리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의 도덕적 요구를 받아들인다.『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매킨타이어가 인간을 자발적 존재가 아닌 ‘서사적 존재(이야기하는 존재)’로 보는 궁극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데 전체의 일부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하고 있다.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다. 이중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미덕이다. 정의의 실현이 곧 미덕이며 미덕은 곧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로스에 따르면 ‘최고의 삶’이며 저자에 따르면 ‘공동선(公同善)’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며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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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 2017-10-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고픈 돼지가 아니라 배부른돼지같아요
 
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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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사람은 정말로 행복할까?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버는데도 정작 돈과 행복은 아주 역설적이다. 남들보다 더 좋은 자동차나 집을 가지려는 경제적 부(富)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경제적부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아무런 만족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을 뿐이다. 이를 사회 심리학지인 도널드캠벨(Donald Cambell)은 ‘쾌락주의의 방아 찧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슈테판 클라인은『행복의 공식』에서 ‘삶에 대한 심리적 만족을 이루는 마법의 삼각형’을 흥미롭게 제시했다. 즉 시민의식, 사회적 균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다. 이 세 가지의 만족감이 마법의 삼각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길 ‘행복한 삶은 운명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언가를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삶의 운명에 있어 젊음은 무언가를 하기 좋은 시기다. 반면에 노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다반사다. 또한 젊음은 육체적으로 건강하지만 노년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단순히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육체적으로 질병에 걸리지 않는 상태를 구분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다. 세계보건기구(WHO) 창립자들은 ‘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행복한 상태’라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거나 노년인데도 활력이 넘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하면건강하고 불행하면 병약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젊음 혹은 노년이라는 숫자상의 나이에 있지 않다. 그 보다는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다. 조지 베일런트가『행복의 조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Ageing Well’이었다. 하버트대학교성인발달 연구소에서 ‘성공적인 노화’와 ‘인간의 행복’에 관한 통찰력에 선보인 조지 베일런트는『행복의 조건』에서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행복의 공식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향적 연구를 통해 ‘행복의 조건’을 두루 살펴보고 있다. 전향적 연구란 사람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청소년기부터 꾸준히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억력에 의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책의감수를 맡은 이시형은 저자의 연구에 깊이 공감하면서 ‘하루, 한 달, 일 년이 모여 이루는 인생이란 단순히 그 시간들의 합 이상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관문’이라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관문은 ‘긍정적 노화의정의’다. 긍정적 노화란 사랑하고 일하며 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배우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인의 여섯 가지 발달과업’을 수행해야만 한다. 즉,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며‘친밀감’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 안정’과  다음 세대를 배려하는‘생산성(generativity)’ 과업을 이뤄야 한다. 또한 과거의 전통을 물려주는 ‘의미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죽음 앞에서 ‘통합’ 해야 한다. 

다음 두 번째 관문은 ‘건강하게 나이 들기’다.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건강만큼이나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건강이 보다 중요하다.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7가지 요소는 비흡연 또는 젊은 시절에 담배를 끊음, 성숙한 방어기제, 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알맞은 체중, 안정적인 결혼생활, 운동, 교육년수 등이다. 그러나 7가지요소뿐만 아니라, 삶을 즐기는 놀이와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지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함을 얻기 위해 종교가 아닌 ‘영성’에 대한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가 모방적이며 외부적이라고 한다면 영성은 나의 능력, 희망,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관문은 ‘품위 있게 나이 드는 것’이다. 첫째,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몸이 아플 때면 의사를 찾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셋째,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율적으로 해결한다. 넷째, 유머감각을 지녔으며 삶을 즐길 줄 알았다. 다섯째,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알았고 다음 세대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여섯 째, 오랜 친구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찍이 키케로는『노년에 관하여』에서 노년에 관한 최선의 무기는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네. 미덕이란 인생의모든 시기를 통해 그것을 잘 가꾸게 되면 오랜 세월을 산 뒤에 놀라운 결실을 가져다준다네. 왜냐하면 미덕은 생의 마지막순간에도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훌륭하게 살았다는 의식과 훌륭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기억은 가장 즐거운 것이 되기 때문이네, 라고 했다. 그러면서 키케로는 노년의 한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다. 즉 누군가 맡은 바 임무를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죽음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노년에도 계속 해서 살 권리가 있다고 했다. 

정말로 노년에도 계속 살 권리가 있을까? 조지 베일런트는『행복의 조건』에서 긍정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인생 후반에 다다를수록 우리가 삶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유인즉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만들고 그 힘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행복을 회복하는 좋은 지혜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100세 이상 살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50세 이전의 삶’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거듭 주장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50세 이전의 삶을 잘 활용하는 방법만 알고 있다면 세네카가 말한 것처럼 ‘노년은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삶은 나약하고 벌거벗은 삶이 아니었다. 

이 책의 미덕은 부나 명예가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과학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라고 명쾌하게 깨닫게 해주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에 알맞은 생활 지침을 담고 있다. 행복이라는 크나큰 갈망을 더욱 사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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