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엮음, 강유원.최봉실 옮김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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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마이클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정의가 무뎌진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둘러싼 정의(定義)는 뭘까< 라는 호기심이 적지 않은 탓이다. 어느 정도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정의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문학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며 그 중심에 철학에 대한 무관심은 안타깝게도 오랜 관행이 되었다.


그래서『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를 읽으면서 당혹감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철학이 맨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정의란 무엇인가]는 화장(化粧)을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즉 ‘인터뷰에서 제기된 물음은 단순히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행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은 철학 분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를 관통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말처럼 “철학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들을 읽고 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옴베르트 에코, 존 롤스, 마이클 샌덜을 비롯하여 14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이 ‘사변적 형이상학’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치열하게 철학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가령,『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리처드 로티는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을 향하고 있다. 시적인 문화 혹은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이란 ‘종교나 형이상학에 공통적인 명령문이 사라져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시적인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을 신이나 실재의 본질에 책임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생활-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로 사유’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렉산더 네하마스는『삶의 방식』에서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란 삶에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안다는 것은 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네하마스는 삶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 있어 전기적 사건들은 그의 사유에 있어 최소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즉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기획이란 당신의 철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당신에게 아이가 몇 명인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편『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주장했다. 이는 ‘무지의 베일’ 뒤에 사람들이 처했을 때의 사유 실험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모든 것, 즉 부, 나이, 재능, 인종, 좋은 삶과 같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지식들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하이 맨스월드는 반대하고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을 빼앗는 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버드대 강의에 불러일으킨 마이클 샌덜은 이 책에서도 정의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는 ‘정부는 그 자체가 선’(good-in-itself)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존 롤스와 칸트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유권에 호의적이긴 하지만 사회가 있기 때문에 자기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자유주의는 ‘인간을 자신만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좋은 삶에 대한 경쟁적인 개념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밖에도 힐러리 퍼트넘의 ‘내재적 실재론’을 보면 몇몇 경험적 진술은 입증되지 못한다고 해도 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모든 사실 진술을 규정할 수 있는 단일한 어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적 실재론’이다. 그는 단일한 어휘 대신에 가치 판단, 사실 묘사, 언어적 관습은 모두가 ‘상호침투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윌러드 콰인은『말과 대상』에서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전개했다. 그는 ‘어떤 두 언어 사이를 번역하는 것에는 많은 방식이 있는데, 각각의 방식은 잠재적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와 합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인식이 ‘믿음의 그물’을 구성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철학하는 삶, 즉 학문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피터 웅어가 최악으로 치달은 아프리카 참사 같은 상황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형이상학에 대한 작업을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을 부활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좋은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존 듀이가『철학의 재구성』에서 말한 것처럼‘철학이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이 될 때’ 철학이 소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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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9-1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서
요즘 읽고 있는데... 아직은 철학이란게 저에는 그리 쉽게 와닿지 않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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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러한 까닭에는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변화, 인생의 매력, 인생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오블론스키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가 그의 생활방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그는 자기 집의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들이란 나사와 같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이 돌아간다고 변명했습니다. 더구나 그를 찾아온 레빈이 결혼했고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마치 지금 배가 부른데, 빵집 옆을 지나면서 빵을 훔치는 것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좋은 냄새를 풍기는 빵을 훔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블론스키의 갑자기 불어 닥친 사랑은 매력적이면서 외로운 여자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하지만 레빈은 아름다운 타락한 창조물인 파충류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오블론스키가 두 여자가 있는데 한 명은 자신의 권리만을 주상합니다. 그 권리란 그녀에게 도저히 줄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또 한 명은 모든 걸 희생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누구를 선택하는가를 따지면서 바로 여기에 끔직한 드라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레빈은『플라톤』의 향연의 두 가지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한쪽 사랑만 알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쪽 사랑만 압니다. 그리고 육체적 사랑만 아는 사람이 꼭 쓸데없이 드라마를 운운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랑에는 드라마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플라토닉한 사랑에도 드라마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덕군자로 불린 레빈은 이 세상의 모든 아가씨를 두 부류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온갖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어떠한 약점도 없고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여자입니다. 레빈에게 오블론스키의 처제였던 키티가 전부였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레빈이 키티와 결혼하려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브론스키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공작의 딸 키티에게 젊고 매력적인 장교인 브론스키는 좋은 남편감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공작부인이 말했던 야만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뚜렷한 직업도,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레빈이 야만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키티는 사랑을 선택하는 데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브론스키는 대단히 사교적이고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거북한 느낌이었습니다. 반면에 레빈을 생가할 때는 너무나 담백하고 깨끗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어떠한 위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브론스키와 함께 할 미래는 찬란하게 빛나는 행복한 전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빈과의 미래는 앞날이 안개처럼 흐릿해보였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그녀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결혼 상대자였던 브론스키는 가정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교계에서 만나는 아가씨들과 교제하면서 그는 황홀함만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결혼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아가씨들을 유혹하는 것이 그저 젊은이들 사이에 흔한 나쁜 행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키티의 작은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큰 불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빠 문제로 페테르부르크 철도역에서 안나 카레니니가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그들의 불길한 징조는 시작되었습니다. 무도회에서 그들이 보여준 운명적인 사랑을 보면서 그 순간 키티는 10년을 산다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안나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기차에서 브론스키를 우연한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객차에서 브론스키를 보면서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떨리던 억제할 수 없는 불꽃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핀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그녀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라는 고백을 듣기라도 한 듯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당신이 이 기차에 타고 있는 줄 몰랐어요, 어째서 모스크바로 떠나시나요?”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떠난다‘는 것을. 이러한 그의 사랑은 마중을 나온 그녀의 남편을 보면서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이 예리함은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할 수도 없어’라고 단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안나가 모스크바에 다녀온 뒤로 많이 변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브론스키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림자가 없는 사나이,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는 어떤 경우일까? 사나이가 그림자를 잃은 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무분별한 사랑 행동에 대해 그녀의 남편인 알렉섹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을 파고들다 보면 우리는 종종 그 속에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던 것을 발견하고 하지. 당신의 감정, 그건 당신의 양심 문제야.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 앞에서, 나 자신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의무를 일깨워 줄 의무가 있어 우리의 삶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 그리고 우리를 묶은 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야. 이 결합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오직 죄악뿐이지.” 안나는 이런 남편을 브론스키에게 인형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관청의 기계였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데 있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형이하학적인 반면에 남자들은 사랑으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만들고자 합니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사랑을 갈망하고자 하였지만 브론스키는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사회적인 출세로 옮겨갔습니다. 그럴스록 안나는 사교계에서 지옥에 놓인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나에게 수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안나는 ‘난 사랑을 원해 그런데 사랑이 없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거야’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는 브론스키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하면서 책망하는 것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심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안나는 당신이 그에게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모습 그대로 그를 온전히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그 사람의 미덕이나 명예를 증오했습니다. 그 사람이 착하고 훌륭한 사람일수록 자신은 그 사람의 손톱 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불행만이 앙상하게 가슴을 후볐습니다. 그 사람은 뭐랄까, 당신을 사랑하는 데도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마는 ‘심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질투하는 여성이 아니라 ‘심장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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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로널드 L. 넘버스 엮음, 김정은 옮김 / 뜨인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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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창포 해수욕장은 신비의 바닷길로 잘 알려져 잇다. 무창포 해수욕장과 석대도 사이의 바닷길이 썰물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성경』의「출애굽기」 14장에 따르면 무창포 바닷길은 ‘모세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은 더 이상 모세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성경』대신 과학자들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다. 즉 무창포 바닷길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며 결정적으로 달과 태양의 인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기적을 믿는 신학자들의 심경은 미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설명에 일리가 있음을 어느 정도는 자신들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神)을 버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로널드 L. 넘버스가 엮은『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있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통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에 내재된 통념(myth)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의 최대의 적은 종교라는 것이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창조론과 진화론의 첨예한 대립을 간접적으로 접해왔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코페르니쿠스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브루노가 순교자가 된 최초의 과학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른바 종교재판으로 자행된 희생자는 브루노만 뿐만 아니라 갈릴레이도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전복되고 만다. 그들이 과학자였다는 지엽적인 사실만으로 박해를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학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적 개념이 이단적이라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이 과학을 종교에서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17세기 근대과학자는 없었다. 그보다는 그들은 자연철학자였다. 자연철학이란 자연의 근본 원리, 일반적인 변화와 움직임, 그리고 신의 천지 창조 등을 다루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뉴턴은『프린키피아』「일반주해」에서 “완전한 존재라 하더라도 세상을 관장하지 않는다면 주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신을 ‘성스러운 시계공’이라고 하였다. 

데카르트에 의해 합리론이라는 흐름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자연철학을 답보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을 달리 기계론적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계론적 철학은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단순화시켰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과관계라는 기계론적 세계조차도 목적과 설계를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적 철학은 ‘모두 신이 물질을 창조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곧 피에르 가상디가 말한 ‘최종 원인’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최종 원인이라는 용어를 ‘창조에 드러나는 신의 의도’라는 의미로 재해석했다. 

한편으로 다윈의『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자연신학이 거대한 담론이었다. 자연신학은 신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증에는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이 있다. 전자는 완벽한 존재로서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필연적인 존재인 신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부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설계논증’이 논의 되었다. 설계논증의 특징은 적응과 관련된 유용성과 지적 설계였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은 ‘지적인 통제가 있었다는 증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간의 운명과 행동이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하는 신’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상의 규칙적인 조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을 말한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을 초월적 신의 창조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었다. 즉 세계는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바로 신이었다.

또한 스피노자의 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은 새삼스러웠다. 그는 종교의 최종 단계를 ‘우주의 질서에서 느끼는 종교적 감정’이라고 했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자연과 사고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경이로운 질서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화된 신’을 버릴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감정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에 대한 생각을 없애준다고’ 했다. 이유인즉 과학은 이해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믿음을 종교에 의존하고 , 종교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발견을 과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적인가 동지인가’라는 통념에 대해서 비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과학적인 생각이 일상화된 오늘날 ‘서구 문화를 세속화시켰다고?’ 라는 의문은 얼핏 당연해 보인다. 세속화란 과학지식이 초자연적 현상의 지배를 덜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걸어온 길을 당대의 현실과 함께 더듬어 보면 늘 반목했다는 것은 잘못된 통념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낡은 개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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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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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반복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한다면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손으로 잡으려고 애쓴다고 해도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있는 그대로 사는 현실에서 과거를 반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못다한 사랑을 지금에 와서는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이게 과연 진실일까요? 진실이라고 한다면 남들이 보면 고통이겠지만 자신만은 즐거운 고통이라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피츠 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개츠비가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민감한 개성을 가졌습니다. 개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성공적인 몸짓이거나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것에 불과한 맥빠진 감수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로 불린 까닭은 그의 ‘낭만적인 인간성’에 있습니다. 작가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일찍이 발견된 적이 없고 앞으로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개츠비는 아름답고 부유한 데이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래가 아무리 찬란하다고 해도 그는 무일푼의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던 그는 거짓 맹세를 하더라도 데이지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있지도 않는 수백만 달러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얼마든지 그녀를 충분히 보살펴 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불어넣어 주어습니다. 차라리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게까지 사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富)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에 감싸인 덕분에 그녀가 은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이 아닌 돈 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톰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5년을 악착같이 일을 한 후 개츠비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는 호화로운 주택에서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습니다. 억울했던 자신의 젊은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낯선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밤마다 자신의 집에서 ‘초록색 불빛’을 쳐다봤습니다. 그가 초록색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아주 우연 같았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초록색 불빛은 자신이 사랑했던 데이지가 사는 집에서 나오는 연민의 불빛이었습니다. 그는 데이지에게 부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집에서 데이지와 재회했습니다. 5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 행복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모든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열이나 순수함도 한 인간이 유령 같은 마음 속 깊숙이 품은 것은 어찌할 수 없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환상은 데이지가 톰에게 “난 결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유로운 몸이 되면 5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라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던 절박함이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과거는 어쩔 수 없잖아요. 저 사람(톰)을 한 번쯤은 사랑했단 말이에요…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요”라고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팠던 사람들이라면 개츠비가 바라봤던 ‘초록색 불빛’이 아릿할 것입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그래서 사랑을 반복할 수 있다는 개츠비의 낭만은 반짝이는 별과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놀랐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지치게 하여도 사랑은 고통보다 더 큰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경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 희망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희망이 때로는 저 너머로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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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8-3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극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개츠비의 사랑은 오우아님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열린책들 카페에 올렸던 베르테르 리뷰도 잘 읽었는데 개츠비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이벤트에 꼭 당첨되기를 바래요^^ㅋ
 
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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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이 살아있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을 충분히 의심해보면 그가 말한 생각은 진리(眞理)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만큼 탐구하고 싶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제거하고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만약 나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하는 과정이 ‘방법적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의심이 악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든지 의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을 연거푸 의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系譜學)’이다. 저자들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주목하는 이유는 근대성이라는 획기적인 사고(思考)의 전환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성의 특징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다원화(多元化)이며 나머지 하나는 상대화(相對化)이다. 다원화는 계몽주의의 전통인 세속화의 반대다. 쉽게 말하자면 다원화는 선택이며 세속화는 운명이다. 아르놀트 겔렌에 따르면 선택은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로 나뉜다. 전경이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인 반면에 배경은 선택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경에서 배경으로 된다면 ‘제도화’라고 하며 그 반대 현상이 ‘탈제도화’가 된다. 따라서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상대화는 절대화의 반대다. 알프레트 슈츠는 절대화를 ‘당연시 되는 세계’이며 이는 ‘내적 제도화의 결과’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 상호작용을 했을 때 상대화는 관용을 촉진시킨다. 한편 상대화는 ‘설득력 구조’를 가변적으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상대화가 변증법으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수많은 선택의 자유에서 도피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내가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선택했다. 그것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근대성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근대성을 ‘주관성의 귀환’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심화될수록 우려할 만한 상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니체는 “불신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세상에는 사실이 있고 확실은 사실을 찾아낸다면 객관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곧 ‘2차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에 대해 또 의심한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불가능해진다. 상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 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thing)은 사물로 보라”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인식론적 결합에 때문에 근본주의가 복원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본주의는 ‘반동적인 현상’이며 ‘현대적 현상’이다. 보수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는 전통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전통주의가 전통을 당연시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할 때 출현한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대응한다. 재정복이란 스페인이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기독교 국가로 돌아갈 때 쓰여던 용어였다. 그리고 하위문화는 ‘미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주의가 ‘의심을 과대화’는 것이라면 근본주의는 ‘의심의 과소화’에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입장을 살피면서 의심과 확실성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로베르트 무질이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톤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객관적으로 삶은 삼단논법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삶에서 낮은 톤을 없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만큼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심과 불확실성은 의심할 수 있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데 있다. 카스텔리오는 성서의「전도서」 3장 2절을 패러디하면서 “의심할 때가 있고 믿을 때가 있다. 알 때가 있고 모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름을 앎의 피할 수 없는 준비단계로 보았다. 그리고 의심도 믿음의 준비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의심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러한 주된 이유는 인지적으로는 불확실성한데 도덕적으로는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의심은 판단을 유보한다. 섣부른 결정이나 사전 결정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심이 의심받아야 할 때가 된다고 저자들은 충고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무한한 의심을 하게 된다면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의심에 대한 의심은 절망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나쁜 영향으로 절망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어 도덕적 확실성이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 존재를 다루는 분야를 ‘철학적 인류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제도의 필수성’을 말하고 있다. 가령, 교통 신호를 준수하는 것은 생물학적 행동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학습된 행동이며 제도적 행동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말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중용의 힘’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주의든 근본주의든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주의는 ‘공연한 의심’을 근본주의는 ‘맹목적인 믿음’을 남용하게 된다. 그러나 중용의 힘은 탁월하다. 지나친 믿음이나 의심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그래서 일까? 괴테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고 말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부조리한 진리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불행 그 자체다. 거꾸로 의심에 대한 옹호는 자유정신, 비판적인 지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전한 의심’이라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보편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의심은 휴머니즘에 근거한다고 저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여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하라고 했다. 즉 핵심적인 것은 양보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의 의견 충돌은 열린 태도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의심은 ‘의심과 믿음 사이의 중용을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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