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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ㅣ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새해부터 대설(大雪)이 내렸다. 하루아침에 별천지(別天地)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설국(雪國)은 아름다움을 물씬 빚어냈다. 그래서 인지,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이태백(李太白)의 시가 절묘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무릉도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으로 불린다는 사전적인 정보 수준이었다. 그래서 무릉도원의 실체에 대해 시종(始終)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일찍이『논어』에서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곰곰이 반추해보면 즐기는 데 있어 앞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서신혜의『조선인의 유토피아』는 이런 지적 호기심에「몽유도원도」로 답하고 있다. 이 책은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라는 소책(小冊)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 또는 한 장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일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은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한국문화의 진면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는 어땠을까? 책을 펼치면 안견의「몽유도원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치면 안평대군의「몽유도원기」가 나온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桃源)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몽유도원기」을 보면 ‘골짜기에 들어서자 안이 넓게 트여 2~3리는 될 듯하였다. 사방으로 산이 벽처럼 둘러서 있는 가운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가깝고 먼 복숭아나무 숲에 햇살이 비치어 마치 노을이 지는 듯했다(…) 앞 내에 조각배만 물결을 따라 떠다닐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했다.’라고 하면서 도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 도원이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상징했던 것은 도연명의「도화원기」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몽유도원도」와「도화원기」에서 속세와 단절된 별세계 즉 무릉도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꾼 후 “내 몸은 궁궐에 매여 밤낮으로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 꿈에서 산림에 이를 수가 있었을까? 또 어떻게 하여 도원을 갈 수가 있었을까?”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반면에『도화원기」는 무릉이라는 사람이 길을 잃어 도원에 가서는 그곳 사람이 말하길 “선대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곳으로 온 후 다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과 교제가 끊겼지요.”라는 놀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무릉도원이 조선인의 마음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동천(洞天), 부산(釜山), 청학동(靑鶴洞), 판미동(板尾洞)이라는 지명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동천은 신선이 사는 땅으로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보고 조용한 공간을 말한다. 부산은 물자가 풍부하여 가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청학동은 푸른 학이 사는 곳이다. 무릉도원이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것과 달리 자기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곧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이 되고자 염원했던 것이다.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며「몽유도원도」의 세계를 두루 산책하며 감상(鑑賞)할 수 있었다. 옛 그림에 얽힌 다양한 시선과 상징하는 바를 보면서 덕분에 우리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는 오주석 선생의 따끔한 충고가 소중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진실은 더 말할 나위가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