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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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리면, 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만 해. 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 갓을 씌워야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테네시 윌리엄스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중에서

 

 




세상을 살다보면 혼란스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일들이 전혀 뜻밖일 때 인생은 쉽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찰랑찰랑 했던 행복이 어느 순간 우리 몸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불행 때문입니다. 불행은 눈물을 빨아올리면서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합니다. 온 몸이 가벼워진 탓에 그만큼 비틀거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10분이면 갈 거리를 불행한 사람들은 몇 분 몇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에게 제일 좋은 치료는 무엇일까요? 테네시 윌리엄스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뉴올리언스 시의 극락이라는 곳’에 내린 이유는 친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극락에는 자신의 여동생 스텔라와 제부인 스탠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블랑시는 그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리라 여겼습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들이 남겨놓은 차용증서 때문에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밝히면서 친절하게 위로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극락은 빈민가였으며 여동생 부부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더구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여동생이 왜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탠리와 결혼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스탠리가 가지고 있는 추진력 때문일까요? 스텔라는 판매원에 불과한 스탠리가 나중에 출세할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탠리가 천재여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추진력 때문이었습니다. 

추진력? 블랑시는 못마땅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스탠리가 화약통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스탠리가 진짜 남자라고 한다면 신사다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신사는 인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술, 음악이라는 광채 덕분에 부드러운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는 짐승 같은 행동을 했으며 짐승 같은 본성을 지녔습니다. 그가 즐기는 포커 파티를 석기 시대에 살아남은 유인원들의 잔치라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스탠리에게 심장이 터질 듯 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습관에 대해서는 서로 참아줘야 하는데 그녀는 금세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녀는 여리면서도 매력적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환상이라는 보물을 간직한 그녀는 언젠가 백만 탄 왕자를 만나 부유한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녀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바람대로 미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미치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랑의 상처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둘 다 근심이 가득하고 심각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차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미치에게 말했던 마법 같은 말들이 스탠리를 통해서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그녀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했다고 용서를 빌지만 미치는 그녀의 거짓말에 놀아난 스스로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진실은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치의 변심을 두고 오히려 돼지 같다고 아주 현실적으로 미워합니다.

일찍이 카를 힐티는『행복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는 거을 얻게 된 것을 약속하며, 혐오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욕망에 속은 사람은 불행하지만, 참기 힘든 것과 마주친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태도이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책망하지 않는 것이 교양인, 완전하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취할 태도’라고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블랑시의 욕망은 불나방 같았습니다. 불나방에게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불나방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불빛은 매우 부자인 사람입니다. 그럴수록 불나방은 자신을 세련된 여자라는 환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했을 때 헤어지면 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불나방 같은 사랑은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결국 불나방의 사랑은 서로에게 낯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사랑이라는 욕망은 낯선 친절에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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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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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디트리히 슈바니트의『교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즉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 요컨대 교양은 정신의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식’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종종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식이라고는 없는 그들과 의사소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찰력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대 간의 불협화음은 치명적이다. 한마디로 교양은 무용지물이다. 교양을 단순한 앎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교양이라는 그럴듯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광주의『교양의 탄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 책은 교양인이 고전에 밝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경작(cultura)’에 대한 식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키케로가 말한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양의 토포스를 박하다식하게 두루 살피면서 우리들을 교양의 역사로 안내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양의 개념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인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서 풍부한 교양을 쌓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교양인의 고전적 초상은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데 바로 ‘파우스트’였다.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로마에 이르면 ‘후마니타스’였다. 파우스트와 후마니타스는 문자의 문화 대신 소리의 문화가 우세했던 시대의 교양인이었다. 그들은 아고라와 같은 광장에서 담론적, 사교적 교양인이었다. 이들의 차이점을 보면 파우스트가 관조적 교양인 반면에 후마니타스는 실천적 교양인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궁정 문화가 싹트면서 귀부인의 사교 문화가 발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랑 다메(귀부인)이다. “사랑은 12세기의 발명이다”라는 프랑스 샤를 세뇨보스의 말처럼 ‘기사와 귀부인의 만남이 낳은 여성에 대한 섬세한 마음가짐과 여성을 고귀한 존재로 받들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높인 궁정풍 사랑(armour courtois)'였다. 이러한 궁정풍 사랑은 16~17세기 살롱 문화를 낳았다. 살롱 문화에서 프랑스는 오네톰을, 영국은 젠틀맨이라는 사교적 교양인이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살롱문화가 발달한 시기의 유렵은 아카데미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백과전서적 교양인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18세기 과학 혁명을 통해 ‘유용성은 이제 신사 교양인의 세계에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전에 과학(science)은 ‘값싼 요리의 지식(세네카)’, ‘내가 이 반지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세익스피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이 주장했던 유용성이 학문의 중심이 되면서 과학은 전문적인 지식인, 전문적인 대학(大學)을 발전시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 교양지상주의에서 전문성으로 변화되어 온 교양인을 이해할 수있게 된다. 더불어 대학이 전문화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전문주의에 안타까움은 18세기『백과전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보편적 지식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에 드러났다.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대학의 전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아널드의 교양(liberal)’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널드는『교양과 무질서』에서 ‘교양이 생각하는 완성이란 개인이 고립되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 했다. 이러한 아널드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사회적인 교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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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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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주 우연히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세상을 하얗게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릴 때의 행복도 잠시, 길은 탁해지면서 미끄러워졌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안에서 느껴지는 네 바퀴의 통증은 어느 때보다 퍽퍽했다. 그래서 인지 사이사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습기에 젖은 듯했다.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DJ가 “타르티니의 G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했을 때 겨우 클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DJ가 그 곡의 부제가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을 때 정이현의『너는 모른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713년. 스물세 살의 젊은 작곡가 타르티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그의 영혼을 팔면 아름다운 음악을 주겠다는 것이다. 타르티니는 이 교환에 응해 제 영혼을 판다. 그러자 악마는 그가 처음 들어보는 놀랍도록 황홀한 선물을 연주한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기억을 되살려 받아 적은 음악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p 162) 

이 소설에서 타르티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열 한 살의 소녀 유지였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는 유지에게 ‘악마의 트릴’ 하나쯤 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너’가 모르는 진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유지는 <악마의 트릴>을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가 돌연 사라졌다. 유지가 사라지자 너의 가족들은 두드러져 보일만한 슬픔은 없었다. PC 방이나 친구 혹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과 같이 있을 거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서로 뒤섞여 나타났다. 비록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했던 ‘너’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유지는 ‘너’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유지에게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수록 ‘너’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의문이란 고요한 수면으로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돌멩이였다. 작가는 유지 실종 사건과 연루된 너의 가족들의 입장을 번갈아 추적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가족 내 문제’가 투명한 탓이었다. 유지가 피해자인 반면에 너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되는 투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아버지 김상호는 사업 밖에 모르며 무뚝뚝한 이기심으로 사는가, 어머니 진옥영은 굳이 친정을 핑계로 왜 중국으로 은밀히 가려고 했나, 이복언니 은성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며 매번 짧은 사랑에 집착하고 있나, 이복오빠 혜성은 가짜 등록금 영수증을 내밀며 어째서 의대생 노릇을 하고 있나, 등등 그것이다. 반면에 유지는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핑계로 하여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작 유지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는 너의 가족들의 황폐해진 삶을 따라가면서 상처뿐인 가족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지는 뭐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무심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라는 우울함이 가족의 화목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하려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동그라미는 너와 관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 둘레 밖으로 내쫓는다.’라고 했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안전한 동그라미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가족마저 맹목적인 사랑에 갇히면 마르틴 부버가『나와 너』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 상대방의 전체를 얻지 못하게 되며 상대방의 부분 밖에 더 보지 못할 때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맹목적 관계’를 리얼리티하게 포착하고 있다. 유지의 실종과 함께 너의 가족들의 아주 일상적인 암묵적 규칙이 서로 겹치면서 가족이라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가족은 서로의 정서적 공감을 향유하는 친구도 아니며, 사랑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연인도 아닌 ‘기습적으로 도착했던 생명’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식구’일수도 있다.

『너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종 궁금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반쪽이라고 한다면 외로운 가족의 현실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의 자화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면 말줄임표(…)이거나 물음표(…?)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이 정지된 슬픔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이 되는 반쪽 사랑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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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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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妹兄)과 매형(梅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집간 손위 누이의 남편을 매형(妹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긋남이 없다. 하지만 매형(梅兄)은 사뭇 다르다. 사람이 아닌 매화(梅) 앞에서 매형(梅兄)을 부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극적인 소리라고 여길 만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이 감동을 받고 사유하게 한다. 사람마다 그 표현법이 다르겠지만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를 보면서 몰아일체(沒我一體)했다. 그래서 매형(梅兄)이라고 불렀으며 그런 매형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퇴계 이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장이다. 좀 더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선비다. 선비는 조선시대 관료이며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유학(儒學)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선비는 유학의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해야 했다. 선비에게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선비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한 사체(四體)와 거리가 멀다. 즉 온몸으로 인식하고(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體驗), 온몸으로 실천(體行)하는 것이다.

김기현은『선비』에서 앞서 말한 온몸의 지식인이 다름 아닌 선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학문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임을 다시금 각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효경』에 나와 있듯 자아를 확립하여 진리와 도의를 행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날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진리와 도의는 선비의 표상이며 자존심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명에 집착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선비에 대한 편견에 지나지 않다.

이 책의 내용은「자연」,「인간」,「사회」,「죽음과 삶」이라는 네 부분을 주제로 하여 선비의 사상을 온몸으로 조명하고 있다. 첫째,「자연」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다른 개념은 생장쇠멸(生長衰滅)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존재론적이라면 후자는 기계적 개체주의적 사고다. 이것은 자연의 본성과 연결되는데 퇴계의 비유를 빌려보면 “마치 한 조각의 달이 강과 바다, 그리고 술잔 속에도 둘 비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의 사물들은 그 안에 자연의 섭리를 갖는 다는 점에서 원형이정은 보편자, 생장쇠멸은 개별자가 되는 까닭이다.

둘째,「인간」에서는『맹자』가 말한 대장부(大丈夫)를 다루고 있다. 대장부에게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위대한 힘이다. 이는 죽음의 위협에 맞서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 순교나 은둔이라는 소극적인 행적을 두고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맹자』의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외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사회」에 있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화해와 조화의 이념이 허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음양학에 있어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선음후(陽先陰後)처럼 인간관계도 상하(上下), 귀천(貴賤), 장유(長幼)라는 불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양학이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라고 했을 때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계산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생동하는 정(情)이라는 것이다.『주역전의』에 따르면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감 속에 형통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넷째,「죽음과 삶」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조광조를 비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육체의 감옥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저승으로 가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반면에 조광조의 죽음은 위대한 재생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도덕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저 씨앗을 각자 자기의 것으로 받아 키워 역시 자타의 삶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新生), 곧 시(始)의 뿌리가 될 종(終)’이었다.

오늘날 유교는 저자 말대로 ‘사람 잡아먹는 전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서구적인 문명이 화려해서 좋은 것이라면 유교적인 전통은 초라해서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유교의 형식주의와 번문욕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겉치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의 정신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 책에서 보듯 선비는 단순한 자아가 아니라 역사적 자아를 궁극적으로 실천했다. 선비는 매형(梅兄)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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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경제학 - 인간은 왜 이성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가
피터 우벨 지음, 김태훈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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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두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현금 1000만원. 다른 하나는 확률이 50%에 당첨금이 2500만원인 로또1장. 만약 꽝이 나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지만 당첨되면 25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현금을 선택한다. 그런데 기댓값에 따르면 비합리적이다. 합리적이라고 하면 기댓값으로 따져봐야 한다. 전자가 기댓값이 1000원이라고 한다면 로또는 1250만원이다. 즉 250만원 더 많다.

위와 같이 우리가 현금을 선택하는 것은 유망이론 때문이다. 경제학의 선택기준인 효용이론과 달리 심리적인 특징을 반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회피(risk aversion)이다. 이득에 있어 사람들의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선호는 확실한 이득을 선호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와 달리 위험추구(risk seeking) 성향도 있다. 이는 확실한 손실보다는 불확실한 손실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상식 밖의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피터 우벨은『욕망의 경제학』에서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은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적하였는데 케인스는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의 영향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이먼은 ‘완전 합리성’ 개념에 달리 ‘제한적 합리성’개념을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프로스텍트 이론(Prospect Theory)’을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비만의 원인을 ‘유전자가 아니라 자유시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는 자유시장에서 건강과 복지라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반면에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기를 다듬는 사람이나 맥주를 빚는 사람, 혹은 빵을 굽는 사람의 인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의 결과인 비만을 방지하는 데 있어 자유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비만은 비이성적인 미각 즉 자제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보모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비만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비만에 관련된 각종 사업에 세금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부드러운 개입주의다. 사람마다 비만에 대한 ‘탄력성’이 다르기 때문에 적지 않은 반발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다 효과적으로 비만을 방지하지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문화적 변화’다.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 습관의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 ‘이성적인 뇌’ 때문에 관심 밖이었던 행동 경제학이 말하는 ‘파충류의 뇌’를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었다. 파충류의 뇌는 곧 본능이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의 본능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1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2차적인 이유는 ‘문화가 정책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반대로 정책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만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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