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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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강의에 출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제가 두 학생에게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 spooks이란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통례적이고 본래적인 의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겁니다. 저는 spooks이란 단어가 이따금씩 흑인들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쩌면 한 오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제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중에서




“전기는 불입니까?”
어느 날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대교인 두 명의 율법학도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자 유대교 율법에서는 토요일(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학적인 현상인 전기와 불은 서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으키는 스파크 현상이 얼마든지 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전기는 불이다, 아니다? 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파인만은 “전기는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필립 로스는『휴먼 스테인』에서 “SPOOKS"가 일으키는 아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spooks라는 말이 당사자의 마음과 삐끗 어긋났습니다.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었는데 뜻밖의 말실수가 되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아 난처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놀람뿐이겠습니까? 살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을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말대로 ‘관습을 거스르는 대담함’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 변화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단독성이란 우리(we)가 아니라 나(i)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콜먼은 보통 이상의 남성입니다. 보통 이상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런 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테나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5주가 지나도록 출석하지 않는 2명의 학생에 대해 유령들(spooks)"이라고 한 마디 던졌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평범하게 툭 던진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명의 학생이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SPOOKS의 또 다른 의미인 검둥이가 ‘더러운 것, 나쁜 것’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종차별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콜먼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델핀 루 학장은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델핀 루는 콜먼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학장이었습니다. 전임 학장이었던 콜먼은 대학의 품질혁명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로 인해 후임 학장 델핀 루를 비롯한 교수들은 콜먼을 불신하는 반작용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콜먼이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SPOOKS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인종차별자라는 불명예를 덮었습니다. 말하자면 추한 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콜먼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주커먼에게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콜먼에게 주커먼은 남의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주커먼은 콜먼의 얼굴을 보면서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금 누르스름한 피부색의 심한 곱슬머리 유태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주커먼의 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작가말대로 콜먼은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호한 분위기 탓에 콜먼은 오랜 세월을 거짓 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콜먼이 자신의 운명을 백인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흑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의 인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콜먼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노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구멍이 한순간 뻥 터질 때가 있습니다. 노년의 교수 콜먼에게 불어 닥친 시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콜먼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는지, 어떻게 삶의 탈진현상(burnout)을 극복해나가는지 은근슬쩍 우리의 내면을 건드렸습니다. 삶의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콜먼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선과 편견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며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해 작가는 위험한 과거를 지닌 여자인 포니아를 등장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삼십사 년을 사는 동안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한 서른넷의 포니아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일흔 살의 콜먼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콜먼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대받고 문맹인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사랑의 실수 즉 섹스라는 가속페달을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들의 만족과 당당함을 위해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스릴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고 거창한 토론도 아니었습니다. 콜먼이 고백하듯 스릴같은 사랑은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에서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삶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작가는 인생에서 정말 난해한 변화가 생길 때는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몰라’라고 말할 때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사회에서 불행한 이유는 유럽 문학이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휴먼 스테인』을 읽으면서 인간의 오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닌 듯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민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실하고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의 모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텅 빈 감정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야만적 농담이라는 생각……이것이 필립 로스가 던지는 또 하나의 오점이었습니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고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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