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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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한 예루살렘

 

인간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고 소원하며, 신을 향해 애절하게 울부짖는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가슴 아린 현실을 내 안의 그분만은 알아주길 간절히 원하면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유대교인이 되고, 불자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예루살렘은 가슴 아픈 역사와 분열의 중심인 동시에 구원과 희망의 성지다.

 

갈릴리에 살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죽기 전날 홀로 기도한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부활한 지 40일 만에 승천했다는 곳이 모두 감람산이다. 감람산 밑엔 유대인들이 최고 명당으로 꼽는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직접 문을 열 것이라고 믿는 성벽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성벽 위엔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한 성전산이 있다. 이곳엔 무슬림의 황금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아름다움의 척도 열 가지가 세상에 주어졌는데, 그중 아홉 가지를 예루살렘이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보다는 번득이는 총구가 먼저 눈에 띈다. 더욱 성스러워야 할 이곳은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하다. 평화가 너무도 간절하기에 예루살렘인 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평화는 멀고 저주는 가깝다. 예루살렘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선지자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종교와 신화가 서린 이런 도시를 누가 지배하느냐였다. 정복자는 피지배자들의 신전을 허물고, 그 폐허 위에 그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피지배자들은 허물어진 신전을 언젠가 다시 세우겠다고 맹세했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2천년 동안의 고난을 잊은 듯 보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고사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유대인과 아랍의 갈등이 지구상 최고의 ‘뜨거운 감자’라 하더라도 유대인과 기독교의 역사적 갈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수는 2천년 이래 유대인이 낳은 지상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만은 ‘지상 최악의 인물’이다. 예수에 대한 지구상 최고의 환호와 저주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직과 수평의 십자가처럼 예루살렘에서 상극을 연출하고 있다.

 

 


 Scene #2  군인으로 변한 종교인 

 

야만적인 전쟁 행위에 흔히 신성(神聖)을 부여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원시 부족들이 사냥이나 전투에 앞서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에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피 흘리며 죽이고 죽는 것을 무릅쓰도록 부추기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씻어주는 집단 최면 효과를 얻는 셈이다.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종교’로 인해 일어난 전쟁 역시 수없이 많다. 종교 간 대립으로 인한 전쟁,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등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전쟁 속에서 군인으로 변모한 종교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서유럽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11∼13세기 200년간 8차례에 걸쳐 감행한 십자군 성전(聖戰)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로 얼룩진 추악한 전쟁이다. 그 이면에 교황권 확대와 유럽인의 대외 팽창 욕구 등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역사의 흐름에서 십자군 전쟁이 끼친 긍정적 파급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신앙을 가장한 인간의 탐욕이 빚은 부끄러운 만행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이 자행했던 유대인 대학살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해 미국이 팔레스타인 땅 심장부에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했는데 이는 많은 무슬림의 가슴에 반미 감정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욱이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4차례의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웃 아랍 국가들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령하자 하마스, 헤즈볼라, 이슬람 지하드 같은 조직적인 무장저항단체가 생겨나 반 이스라엘 투쟁을 본격화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알 쿠즈’라 부른다. 앞으로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가 바로 알 쿠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선언할 당시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였으나, 1950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예루살렘 성지문제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이 ‘눈에는 눈’식의 보복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평화는 깨졌다’며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향해 펀치를 가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어린이 놀이터에 폭격을 가해 9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죽는 잔혹한 일이 발생했다.

 

 

 

 Scene #3  ‘예루살렘 열병’을 치료해줄 ‘좋은 종교’ 어디 없나?

 

요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공격 사태로 대체로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부정적이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팔레스타인이나 이슬람이 늘 피해자였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일방적인 피해자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도 일방적인 폭력의 가해자도 아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 모두가 종교에 의해 열병이 걸려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의 계시'란 이름 아래 종교적 욕망, 군사적 욕망이 더해져 타 민족과 종교집단을 괴롭혔다. 그들의 시각에서 타 종교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다.

 

니체는 "기독교는 피정복자와 피압박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권력자에 대한 감동이 늘 생생하게 살아난다"며 기독교 권력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가 정치 권력화 되면서 나타나는 병폐는 기독교뿐만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임하는 유대인들은 성스러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지금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알라신의 계시라는 이름하에 타 종교와 대립하고 또한 자신의 육체를 신에게 맡기는 인간폭탄 테러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열병은 지독하다. 병명은 ‘예루살렘 열병’. 그 종교의 열병은 곧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타자를 희생물로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인식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열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성스러움과 폭력이 양립하는 종교의 모순을 목격한 제임스 캐럴은 ‘좋은 종교’로 발전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종교’는 죽음 대신 삶을 찬미하고,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신이 이 땅에 임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는 구원이 아닌 계시에 관한 것이며 강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 사상에서 가장 문제점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다양성이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다. 흑백논리에 점철된 그들의 주장은 타 민족을 학살하거나 억압할 때 정당화 하는 논리로 사용됐다.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를 택한다. 종교는 전쟁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 주었다. 종교적 광기가 정치권력을 장악할 경우 예루살렘은 절대로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없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가 남긴 말은 ‘예루살렘 열병’의 환각 상태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종교’를 조롱하는 듯하다. 이들의 끝없는 전쟁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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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 모 방송국에서 남녀 각 연령별로 이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자 10~40대, 여자 10~30대가 가장 후회하는 일로 압도적으로 공부를 꼽았다. 70대에 이르러서도 남녀 모두 무엇 하나라도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가 그렇게도 하기 싫고, 놀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먹을수록 그때 하지 못했던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마음잡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업무와 잦은 회식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예전처럼 머리와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공부하면서 본 내용이 며칠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노안 때문에 책의 활자를 읽기가 어려워진다.

 

평소에 공부와 담을 쌓은 사람은 다시 손에 펜을 쥐고, 책을 펴서 글자를 뚫어지게 봐도 학습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대개 고등학생 때까지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공부하던 습관에 익숙하다. 대학생부터 공부 환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교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바늘구멍만큼 좁다는 취업의 문에 들어서기 위해 스펙이라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강의실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토익, 자격증 공부를 한다. 학교생활 절반을 강의실 또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20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부를 질리도록 한다. 10대는 입시 성적을 위해서, 20대 초중반은 취업을 위해서. 그러다가 30대에 직장을 얻게 되면 길고 길었던 공부 터널에서 탈출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어서도 공부는 멈출 수 없다. 고용과 노후에 불안을 느낀 직장인들이 안정된 전문직을 얻으려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취업에 장기간 실패하거나 취업을 했더라도 적응하지 못한 채 인생역전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셀러던트’가 등장했다. 그들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공부에 미치라고 권한다. 우리는 공부 권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공부 소리만 들어도 피곤하고 질린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평생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부 비법을 전수해 주는 등의 공부 관련 도서는 베스트셀러 코너의 단골손님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위에 게시된 사진의 책들은 한 출판사에서 발간된 시리즈물이 아닌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는 10대에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진다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좁은 취업의 문에서 불안해하는 '88만원 세대' 20대들을 위한 자기계발서인 '20대 공부에 미쳐라', 직장인들이 익혀두면 좋은 실용적인 공부 기술을 쉽게 정리해 놓은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도 포함됐다.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는 지식 사회와 고령화 사회의 추세에 따라 평생 학습의 관점에서 40세 이상 중년의 공부를 다뤘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무슨 일에 미친 사람처럼 끈질기게 집중하고 몰두해야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부도 재미있어서 미친 사람처럼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우리는 공부가 너무 즐거워서 미쳤다기보다는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렸다. 그동안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가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도 즐겁게 느껴진다면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 늦게라도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 시작해도 된다. 지난 주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소개된 82세 신문배달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80세가 넘는 고령인데다가 한쪽 손이 불편한 상태 속에서도 지난 35년을 한결같이 10시간동안 신문배달을 해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신문배달 일로 버는 월급 90만 원의 3분의 1 가량을 책 구매하는데 쓸 정도로 독서광이다. 할아버지가 구입하고 읽은 책만 해도 2000권 넘는다. 할아버지에게 신문 배달은 생계의 수단보다는 속죄의 과정이다. 술로 인해 멀어진 가족들과 이혼 후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금까지 신문배달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청춘을 낭비한 과거를 잊고 할아버지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데 그를 일으켜 세운 준 것이 책이었고,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만든 힘의 근원은 공부였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가난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지금도 혼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싫증이 난다. 내가 궁금했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10대부터 은퇴하는 40대까지 시험과 승진을 위해서 공부한다. 이러니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태도를 신체 활동으로 비유하자면, 쉬지도 못하고 계속 뜀박질하는 상태다.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몸은 지쳐간다. 특정 기간 안에 좋은 성적을 얻고, 승진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다. 무턱대고 너무나 많은 양을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해버린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너무나 급하게 공부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부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지식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오히려 공부를 쉬엄쉬엄 하는 것을 게으른 방법이며 능력을 발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공부는 깊은 호흡을 들어 마실 수 있는 상태처럼 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사이토 다카시는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할 것을 주문한다. 사이토는 10년 전 큰 병을 앓은 뒤 ‘공부’를 삶의 방향으로 삼게 됐다고 한다. 당시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중간에 예고도 없이 끝날 수 있음을 실감한 그는 후회 없이 충실하게 보냈다고 느꼈던 시간을 떠올려봤다. 좋은 책을 다 읽은 날, 공부 재미에 완벽히 몰입했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즐거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호흡이 길어지는 공부란 철학, 사학과 같은 인문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깊이 있게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공부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 중에서, 62쪽)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는 인생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일과 삶, 미래를 통찰하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매일 꾸준히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것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시작해야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래 공부할 수 있으며 평생 공부를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이 즐거움의 한 길임을 일러주고 있다. ‘진짜’ 공부는 일단 즐거워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배인 ‘가짜’ 공부와 관련된 안 좋은 기억과 습관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동안 우리의 뇌를 죄어온 잘못된 사슬을 풀지 못하면 영영 공부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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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4-08-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이 방송 봤는데~ 정신이 가난한 사람이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는데 공감했어요~ 책을 통해 진짜 공부를 하는 삶이 되고 싶은데..쉽지 않은 일이네요,,

cyrus 2014-08-14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방송 보면서 할아버지 말씀에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지금 저 또한 공부하는 삶을 지향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해봐야겠어요.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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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여름 밤의 고민 중 하나는 과중한 업무로 몸은 피곤한데 쉽게 잠들 수는 없는 불면증이 아닐까? 끝날 것 같지 않은 업무, 야근, 회식까지 잠을 못자고 침대에서 뒤척거린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공짜 보약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루 정도 수면이 부족한 일은 그렇다 쳐도, 수면이 부족한 날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을 너무 적게 자는 날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늦게 잘 때 야식을 먹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체학적으로 인체는 수면 부족에 의한 스트레스를 포만감으로 해소하려는 특징이 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 식욕을 증가시키는 호르몬 분비가 많아져 과식을 하게 된다. 평소에 늦은 밤에 족발, 치킨 등을 시켜 먹던 것이 이젠 습관으로 자리 잡아 잠자리에 들기 전 무언가 먹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다.

 

반대로 아침 식사는 줄어든다. 늦잠 자고 나서 일어나는 날에 아침 식사를 거를 때가 있다. 전날 밤 야식이 먹고 싶을 정도의 배고픔은 온데간데없고, 아침밥을 먹을수록 맛이 없게 느껴진다. 실제로 수면부족 집단과 충분한 수면을 취한 집단 간의 식사량을 비교한 실험에서 야식은 수면부족 집단이 수면을 취한 집단보다 더 많이 먹었지만, 아침 식사량은 적은 결과가 나타났다. 왜냐하면 수면유도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농도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도 높은 상태로 유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도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불쑥 찾아드는 공복감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식을 하게 되고 밤에는 야식을 찾게 된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건강상 악순환이 이어진다.

 

부족한 수면 시간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오히려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적절한 낮잠은 하루의 활력을 충전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잠깐의 낮잠은 스트레스를 낮추어 업무 효율을 높여 주고, 혈압을 낮추고 심장병을 예방해 주는 등의 이점이 많다.

 

서울시에서는 서울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이달부터 1시간 이내의 낮잠을 허용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 대신 법정근무시간(8시간)을 지키기 위해 낮잠을 잔만큼 추가근무를 해야 한다. 서울시의 ‘낮잠’ 허용에 대해서 여전히 갑론을박 의견이 분분하지만, 낮잠의 의학적 효능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한창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은 직장과 잦은 회식 때문에 수면이 부족하다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입시 학원으로 이어지는 빡빡한 공부 스케줄 때문에 잠자는 시간이 없다. 공부 혹은 인터넷에 날밤을 새우느라 저녁 수면시간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낮잠을 자게 하면 학습 능률이 높아진다. 심지어 기억력도 향상된다. 낮잠의 효과를 증명한 어떤 연구가는 어린이집에서 낮잠 시간을 빼는 커리큘럼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잠은 밤에만 잔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낮잠의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두뇌에 낮에도 쉴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점심 후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푹푹 감겨도 꾹꾹 참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직장인은 졸다가 업무에 태만한 사람으로 찍힐까봐 참는다. 학생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에 빠져드는 블랙홀 같은 무서운 시간대가 바로 바로 점심 후 수업시간이라는 것을.

 

세상은 어느새 낮잠 효용성을 인식하고 있고 낮잠을 허하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학교도 두 눈 쫑긋 모아 지켜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학업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에게 낮잠 시간을 허용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도서 참고내용 : '아이들에게는 낮잠도 수업시간!' (111~114쪽)

                        '잠 부족하면 탄수화물 당긴다!' (121~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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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8-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잠이 필요하단 생각에 공감을 하는데....학교에 침대가 있는것도 아니고 낮잠잔 시간만큼 늦게까지 공부한다면 참 거시기한단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4-08-13 19:57   좋아요 0 | URL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낮잠을 허용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은 낮잠 제도를 허용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카스피님 말씀처럼 학교가 학생들이 낮잠 잘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되니까요. 그냥 점심 먹고 나서 책상에 한 시간 정도 엎드려 자는 게 상책인 것 같습니다. ^^;;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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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학 열기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주위에서도 종종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걸 볼 수 있고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동네 어귀의 작은 서점이든 번화가의 대형 서림이든, 인문학 서가의 표정은 한결같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의 위기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위기란 산업혁명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인문학의 역할 부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늘날 인류사회가 당면한 병리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놀랍게도 현대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쉽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은 제프 딕슨이라는 사업가가 쓴 칼럼이다. 칼럼 제목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칼럼 구절처럼 우리는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다. 그동안 외면 받아온 인문학의 핵심가치, 즉 인간성과 생명사랑 정신의 회복을 통렬하게 깨우쳐 준다.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이라는 말은 중학생 시절 실업계, 혹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나 쓰는 말이었다. 인문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조차 도통 기억에 없다. 돈 안 되는 인문학 대신, 돈과 맞바꿀 수 있는 다른 학업에 열정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는 단체가 인문학 학습자들을 연령별로 분석했는데 4050세대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40대 이상의 높은 연령층이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으로 교양과 힐링에 대한 니즈가 가장 컸다. 인문학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이유에 몸과 마음의 치유를 강조한 ‘힐링’ 대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에 인문학을 주목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인간을 괴롭혔던 질병들은 의술의 발달로 두렵지 않은 병이 됐다. 절대 빈곤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아프다. 결핍감, 상실감,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커졌고, 막연한 우울과 분노 무기력에 시달린다. 가난했던 시절보다 행복이 더 멀어졌다고도 한다. 이 같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인문학을 활용한다.

 

인문학은 더 이상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학술용어와 이론을 걷어내어 남녀노소, 학력,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적 자산이다. 그동안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되어 위기론이 불러온 이유가 학술용어로 지나치게 전달을 어렵게 하며 고립을 자초했던 학자들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가치를 전달하는 학자들이 강연가, 저술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대중이 인문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소통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상의 이면을 살펴봐야 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길 원하는 ‘수요’가 많아질수록, 인문학 강연과 대중을 위한 인문학 서적으로 ‘공급’이 된다. 행복의 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지나치게 인문학 치료제에 의존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남용하면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오용될 우려가 있다. ‘행복’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그 본질이 너무 가벼워진 감이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저렴한 인문학이 등장한다.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 몇 권 써내면 인문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수박이 되기 위해서 줄이 그어진 호박처럼 무늬만 인문학을 내세우는 사람과 책이 많다.

 

 


 Scene #2  행복한 인간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요즘 인문학 서적 출판의 흐름을 보면, 공동 저자로 내는 것이 많아졌다. 여러 음악가의 노래를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인문학을 주제로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책으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인문학의 의미를 소개하고, 행복을 위한 인문학의 활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는 유교 연구가, 건축가, 천문학자, 심리학자, 기생충학자, 시인 등 17인의 명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작년부터 중앙일보가 기획한 동명제목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이들은 각자 행복의 의미를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는 인간의 모든 상처와 불행은 자기중심으로부터 비롯되며,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일단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강조하는 힐링을 반대한다. 그가 연구하는 유교와 동양철학은 인생의 고통을 위로하는 힐링의 학문이 아닌 직접 고통과 대면하는 능동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원인을 타인에게 탓하지 않고, 나를 본다. 즉, 고통스러운 증상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상황을 인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 이것이 곧 자기혁신이며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 생긴다.

 

 

 

 

 

세계 과학철학계의 석학 장하석 교수는 ‘쓰레기통’이 되라고 주문한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불행의 원인은 폐쇄성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을 포용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을 강조한다. 개방적인 쓰레기통은 단순히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는 ‘열림’의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열림’의 중요성은 건축가 김개천은 ‘살아 있는 집’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은 결국 다른 것을 품을 수 있고, 항상 자신을 상황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삶이다.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교수는 ‘아름다운 방황’을 강조한다. 새가 화려한 나방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단 먹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 증상을 외면하고 타인의 위로에만 의지하는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은 마음 속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위로’ 성분이 과다하게 들어간 ‘힐링’ 치료제를 찾기만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게 마련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행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답이 나왔다. 그가 인용한 <파우스트>의 구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행복한 인간도 한 상처받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집계한 순위에서도 우리나라는 거의 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해마다 자살율도 늘어난다.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이한 마음의 병은 단순히 유행하는 감기 정도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만성질환이다. 

 

 


 Scene #3  마음의 상처 부위에 붙인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여기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음의 병을 완전히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없음은 물론이며 행복하기 위한 삶의 정답은 없다고. 오히려 행복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단순히 좋은 일만 가득한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드는 슬픔과 절망을 무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행복 찾기’라는 공허한 질문에 몰두하고, 그 대답을 ‘힐링’ 치료제를 파는 전문가에게 찾으려고 한다. 즉, 정답 없는 질문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실 행복을 정의내리는 17인의 목소리도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독자들을 낫게 만드는 치료제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아름다운 방황’, 내적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긍정하는 ‘맷집’을 기르는 덕분에 갑작스럽게 재발하는 마음의 병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으면, 인문학에게 묻지 마라.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왜 행복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지가 생긴 마음의 상처 부위에 오랫동안 붙여 있는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조금 아플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마음의 상처 부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행복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어쩌면 당신이 찾으려는 행복은 저 멀리 인문학에 찾을 필요도 없이 당신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로 대표되는 17인의 이야기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지 행복한 삶을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다.

 

인문학 공부는 현재의 삶에 대해 의심을 하고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 여가 문화나 자기 계발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인문학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의 공부다. 인문학을 통해 얻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민낯을 보면서 그동안 애지중지해 온 인식과 잣대들이 많은 잣대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민낯이 사실은 그동안 찾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얼굴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질주 안에서도 천천히 호흡하고 여유 있게 걷는 내공은 공부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런 공부를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단기완성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복을 맛보는 흥겨운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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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출판협회라는 단체에서 ‘모범장서가’를 공모한다. 기간은 오는 29일까지다. 자격 조건으로 2천 권 이상 도서를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 자천 및 타천 모두 가능하다. 신청자 중에 총 5명을 선정한다. 모범장서가로 선정되면 10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을 받을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에 꽂혀 있는 책이 몇 권인지 세어봤다. 대충 눈으로 어림잡아 세어 봐도 천 권 이상은 되지 않았다. 내 방의 크기는 넓지 않다. 일단 천 권이 넘는 책이 소장될만한 공간은 아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 세트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족히 300~350권 정도 될 것 같다. 가끔 지금까지 구입한 책들이 몇 권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시간이 있으면 일일이 한 권 한 권 세어 보면서 엑셀로 정리하고 싶다. 이렇게 따로 정리하면 책 권 수를 확인도 하고 내가 어떤 분야의 책을 구입했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엄청 많이 사는 편이다. 여윳돈이 생기면 어떻게든 책 한 권은 꼭 산다. 작년에 알라딘 오프라인 매장이 대구에 생겼을 때부터 책 사는 횟수가 많아졌다. 항상 인터넷 주문은 알라딘에, 오프라인은 교보문고와 알라딘 대구점 그리고 헌책방을 애용한다. 인터넷 주문은 한 달에 많아야 세 번 구입한다. 땡스투 마일리지로 모은 적립금이 많지 않아서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사용한다. 구입 횟수로만 보면 적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주문하면 책 2권 이상 된다. 한창 마일리지가 많았을 때는 5만 원 이상, 5권 이상 구입한 적도 있다. 나름 최소 비용으로 책을 많이 사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알라딘 중고샵도 많이 이용한다.

 

오프라인 구입 횟수로는 요즘은 알라딘 매장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은 교보문고, 헌책방이다. 알라딘 매장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방문한다. 스마트폰으로 매일 알라딘 중고매장 어플을 확인한다. 알라딘 어플을 설치하면 각 지역별 중고매장으로 접속할 수 있다. 알라딘 중고매장 홈페이지도 있지만, 어플을 많이 사용한다. 손님이 판 책과 매장에 비치된 책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만약에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당장 매장으로 향한다. 이때만 되면 괜히 초조해진다. 다른 손님이 그 책을 구입할까봐 걱정한다. 특히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절판본일수록 불안감을 느낀다. 이상하게 알라딘 매장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평일인데도 차가 막히는 것 같고, 빨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매장으로 들어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지. 다른 손님이 내가 찜한 책을 구입한 사실을 알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너무 아쉬워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책을 구입한다. 이놈의 습관이 참 무섭다.

 

나는 책 사는 습관이 일종의 ‘벽’(癖)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잔뜩 사놓고 바로 읽지 않고 책장으로 꽂히는 나쁜 습관이 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언젠가는 꼭 읽는다. 요즘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구입하자마자 한 번에 완독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도 장서가가 되고 싶다. 그렇다고 책을 무조건 많이 사야 장서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는 책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 같다. 돈이 없어서 당장 못 사는 책은 언젠가는 꼭 산다. 고등학생 시절에 책을 많이 구입하지 못했을 때 도서관을 애용했다. 아니면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은 다 읽어야 책을 구입하지 못한 아쉬움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꼭 구입한다.

 

 

 

 

 

 

 

 

 

 

 

 

 

 

 

예전에 책 사는 습관이 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최근 살만 악타르의 『사물과 마음』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달라졌다. 사물을 소유하고 싶고, 거기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물건에 집착한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이 상실되면 무척 괴로워한다. 물건에 대한 탐닉은 수집벽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 ‘수집’과 ‘잡동사니’의 차이점을 소개한다. 단순히 물건을 모은다고 해서 수집에 가까운 행위로 보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수집으로 보일지 몰라도 상대방에게는 그저 잔뜩 널려 있는 잡동사니일 뿐이다.

 

살만 악타르가 분류한 '수집'과 '잡동사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수집품은 물건의 주인, 즉 수집가로부터 특별한 가치를 부여 받는다. 그래서 진정한 수집가는 양으로 따지지 않는다. 무작정 수집품을 사들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가치 있는 물건인지 신중하게 따져보는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 잡동사니를 모으는 것은 수집 행위와 반대다. 현재까진 필요 없는 물건인데 언젠가 필요해질 때를 대비해서 내다버리지 못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물건을 모아두기만 한다.

 

수집과 잡동사니를 모으는 행위에 차이점은 있지만, 잡동사니를 모으는 행위도 수집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 아무렇게나 모은 물건이지만 특별한 계기로 인해 수집가로 변모한다. 반대로 수집에 대한 열망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중독이 된다. 자신의 능력 및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채 특정 물건을 모으는 데 매달린다.  

 

살만 악타르가 말하는 수집가의 유형을 보면서 나는 아직 정상인(?) 수준의 책 수집가라는 걸 느꼈다. 책 한 번 사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 책 내용이 괜찮은지 목차를 포함해서 몇 페이지는 읽어본다. 비용도 고려한다. 손에 쥐고 있는 비용으로 몇 권의 책을 살지 꼼꼼하게 생각한다.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생각 없이 책을 사지 않는다. 또 구입해서 읽은 책은 서평으로 기록을 남긴다. 아무리 완독한 책이라도 서평을 남기지 않으면 다 읽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뭔가 기록을 남겨야 직성이 풀린다. 이왕 나름 읽을 만한 책을 골랐으면 이에 대한 감상쯤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서의 흔적은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다. 구입한 책에 관한 서평 쓰기가 습관이 되고 의무 활동으로 여긴다면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사는 나쁜 습관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회라서 그런지, 일반인 장서가를 만나기가 드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장서가는 대개 지식인, 작가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 장서가가 완전히 절멸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음지 속에 독서를 즐기면서 책을 수집하는 열정적인 애서광들이 숨 쉬면서 살고 있다. 가끔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나보다 뛰어난 애서가들을 만나게 된다. 장르문학 위주로 즐겨 읽고 책을 사는 애서가가 있는가 하면,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헌책방의 위치를 꿰뚫고 자주 방문하는 헌책방 애서가도 있다. 나는 독서 모임 덕분에 헌책방 애서가를 만나서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 분의 만남 덕분에 헌책방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범장서가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독서 문화 보급에 기여하는 장서가가 되고 싶다. 읽고 난 책에 대한 서평 작성은 책을 널리 알리는데 중요하다. 그렇다고 내 서평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내용이 어줍기만 하지만, 일단 책 자체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만으로 해도 서평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흘러가는 세월에 잊혀져가는 절판된 책에 대한 기록도 남기려고 한다. 비록 절판된 책의 서평은 더 이상 구입할 수 없기에 재출간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잘 내용이 좋아도 땡스투 적립금을 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읽을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서평 하나라도 없는 절판본도 있다. 절판의 운명에 처한 책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 조용히 서점에서 사라진 것도 있으며 출판사가 망해버리는 바람에 책 발행이 끊기기도 한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책을 발견하면 기록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런 책이 나중에 재출간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요즘 관심 가는 절판본이라면 법정 스님이 쓰신 책이다. 비록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자신이 남긴 모든 글과 책은 절대로 팔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책에 유독 집착이 강한 이 어리석은 중생은 스님의 기록이 이렇게 잊혀져가는 것이 아쉬워서 터무니없이 매긴 값비싼 가격이라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스님의 명문을 알리고 싶다.  

 

 

 

 

 

 

 

 

 

 

 

 

 

 

 

 

한스 보하타라는 독일의 서지학자가 말하길, 애서가는 자기 책의 주인이고 애서광은 자기 책의 노예다. 다만 책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해 절도 이상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가져도 무방하다고 본다. 20여 년 동안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훔친 2만 3600여권의 희귀본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세운 스티븐 블룸버그 같은 장서가는 되고 싶지 않다. 엄연히 말하는 그는 장서가라기보다는 도서절도범에 가깝다. 다시 구하기 힘든 책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열정을 과하면 책의 노예가 된다. 책의 주인은 소유의 집착을 깨끗이 버릴 줄 안다. 의외로 책 좋아하는 재벌가는 사후에 자신의 장서로 공공도서관을 만들어 개방하기도 한다.

 

 

 

 

 

 

 

 

 

 

 

 

 

 

 

 

 

 

 

책의 노예가 되는 순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어떻게 돌변하지 모른다. 어떻게든 책을 가지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잡동사니 유형은 그나마 정상적이다. 그러나 책을 사랑하는 나머지 미쳐버리면 강박증으로 변질된다. 플로베르의 단편소설 '애서광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갸코모는 자신이 소유한 책이 세상에서 유일함을 과시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 죽음을 택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갸코모는 경쟁자의 집에 불이 나자 화염 속에 뛰어들어 원하던 책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그 책이 자신의 집에서 발견돼 방화범으로 기소된다. 그의 변호사가 세상에서 유일한 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책을 구해 와 제시한다. 하지만 갸코모는 격분한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판장에게 자신이 불을 지르고 책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그 설득이 통해 갸코모는 사형대에 오른다.

 

사실 갸코모처럼 장서가나 애서가 입장에서는 나름 희귀한 가치가 있는 절판본이 복간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구입한 절판본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책인지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착각이다.

 

갸코모와 스티븐 블룸버그는 책에 미쳐버린 나쁜 사례다.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장서가 또는 애서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내가 책의 주인인지 아니면 책의 노예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나 자신을 스스로 정상적인 책 수집가, 애서가라고 분류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나 또한 그렇다. 사물에 향한 인간의 집착은 이성과 도덕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도 책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다. 그런 고귀한 광기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서 우리나라 사람들 책 좀 많이 읽기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나만의 욕심일까? 우리나라도 장서가, 애서가가 많아야 한다. 이제 우리도 독서문화와 함께 도서수집문화 혹은 장서문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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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14-08-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범장서가'에 응모해볼려고 집에 있는 책을 세어봤어요.
거실 벽 두 군데를 책장이 차지하고 있고, 빈 방 하나에도 책장이 있거든요.
아이들 책을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거실에 있는 제 책만 천 권 정도가 되더라고요.
2천권이 채 안되는 것 같아서 좀 아쉽기도 하네요. ^^

cyrus 2014-08-08 23:20   좋아요 0 | URL
천 권도 많은데요! Breeze님 ㅎㅎㅎ 모범장서가 공모는 올해가 처음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시행된 것 같은데, 내년에 한 번 도전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blanca 2014-08-0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 책을 엑셀로 정리하는 것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 저도 언젠가 하고 싶어요. 그러면 분야별로도 작가별로도 다 정렬이 가능할 텐데요. 저도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처분한다,는 원칙을 최근에 세워 책을 더이상 늘리지 않으려고요. 공간도 그렇고. 그래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님과 닮아 있어 참 반가운 페이퍼네요. cyrus님은 근사한 애서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cyrus 2014-08-08 23:2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분류별로 미리 정리하면 나중에 이사 갈 때 책장 배치할 때 편리해요. 블랑카님도 집에 책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블랑카님이 읽으신 책을 아이들도 읽는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