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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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학 열기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주위에서도 종종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걸 볼 수 있고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동네 어귀의 작은 서점이든 번화가의 대형 서림이든, 인문학 서가의 표정은 한결같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의 위기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위기란 산업혁명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인문학의 역할 부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늘날 인류사회가 당면한 병리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놀랍게도 현대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쉽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은 제프 딕슨이라는 사업가가 쓴 칼럼이다. 칼럼 제목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칼럼 구절처럼 우리는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다. 그동안 외면 받아온 인문학의 핵심가치, 즉 인간성과 생명사랑 정신의 회복을 통렬하게 깨우쳐 준다.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이라는 말은 중학생 시절 실업계, 혹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나 쓰는 말이었다. 인문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조차 도통 기억에 없다. 돈 안 되는 인문학 대신, 돈과 맞바꿀 수 있는 다른 학업에 열정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는 단체가 인문학 학습자들을 연령별로 분석했는데 4050세대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40대 이상의 높은 연령층이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으로 교양과 힐링에 대한 니즈가 가장 컸다. 인문학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이유에 몸과 마음의 치유를 강조한 ‘힐링’ 대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에 인문학을 주목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인간을 괴롭혔던 질병들은 의술의 발달로 두렵지 않은 병이 됐다. 절대 빈곤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아프다. 결핍감, 상실감,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커졌고, 막연한 우울과 분노 무기력에 시달린다. 가난했던 시절보다 행복이 더 멀어졌다고도 한다. 이 같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인문학을 활용한다.

 

인문학은 더 이상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학술용어와 이론을 걷어내어 남녀노소, 학력,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적 자산이다. 그동안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되어 위기론이 불러온 이유가 학술용어로 지나치게 전달을 어렵게 하며 고립을 자초했던 학자들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가치를 전달하는 학자들이 강연가, 저술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대중이 인문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소통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상의 이면을 살펴봐야 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길 원하는 ‘수요’가 많아질수록, 인문학 강연과 대중을 위한 인문학 서적으로 ‘공급’이 된다. 행복의 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지나치게 인문학 치료제에 의존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남용하면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오용될 우려가 있다. ‘행복’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그 본질이 너무 가벼워진 감이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저렴한 인문학이 등장한다.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 몇 권 써내면 인문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수박이 되기 위해서 줄이 그어진 호박처럼 무늬만 인문학을 내세우는 사람과 책이 많다.

 

 


 Scene #2  행복한 인간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요즘 인문학 서적 출판의 흐름을 보면, 공동 저자로 내는 것이 많아졌다. 여러 음악가의 노래를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인문학을 주제로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책으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인문학의 의미를 소개하고, 행복을 위한 인문학의 활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는 유교 연구가, 건축가, 천문학자, 심리학자, 기생충학자, 시인 등 17인의 명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작년부터 중앙일보가 기획한 동명제목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이들은 각자 행복의 의미를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는 인간의 모든 상처와 불행은 자기중심으로부터 비롯되며,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일단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강조하는 힐링을 반대한다. 그가 연구하는 유교와 동양철학은 인생의 고통을 위로하는 힐링의 학문이 아닌 직접 고통과 대면하는 능동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원인을 타인에게 탓하지 않고, 나를 본다. 즉, 고통스러운 증상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상황을 인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 이것이 곧 자기혁신이며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 생긴다.

 

 

 

 

 

세계 과학철학계의 석학 장하석 교수는 ‘쓰레기통’이 되라고 주문한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불행의 원인은 폐쇄성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을 포용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을 강조한다. 개방적인 쓰레기통은 단순히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는 ‘열림’의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열림’의 중요성은 건축가 김개천은 ‘살아 있는 집’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은 결국 다른 것을 품을 수 있고, 항상 자신을 상황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삶이다.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교수는 ‘아름다운 방황’을 강조한다. 새가 화려한 나방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단 먹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 증상을 외면하고 타인의 위로에만 의지하는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은 마음 속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위로’ 성분이 과다하게 들어간 ‘힐링’ 치료제를 찾기만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게 마련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행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답이 나왔다. 그가 인용한 <파우스트>의 구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행복한 인간도 한 상처받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집계한 순위에서도 우리나라는 거의 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해마다 자살율도 늘어난다.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이한 마음의 병은 단순히 유행하는 감기 정도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만성질환이다. 

 

 


 Scene #3  마음의 상처 부위에 붙인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여기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음의 병을 완전히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없음은 물론이며 행복하기 위한 삶의 정답은 없다고. 오히려 행복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단순히 좋은 일만 가득한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드는 슬픔과 절망을 무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행복 찾기’라는 공허한 질문에 몰두하고, 그 대답을 ‘힐링’ 치료제를 파는 전문가에게 찾으려고 한다. 즉, 정답 없는 질문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실 행복을 정의내리는 17인의 목소리도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독자들을 낫게 만드는 치료제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아름다운 방황’, 내적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긍정하는 ‘맷집’을 기르는 덕분에 갑작스럽게 재발하는 마음의 병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으면, 인문학에게 묻지 마라.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왜 행복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지가 생긴 마음의 상처 부위에 오랫동안 붙여 있는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조금 아플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마음의 상처 부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행복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어쩌면 당신이 찾으려는 행복은 저 멀리 인문학에 찾을 필요도 없이 당신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로 대표되는 17인의 이야기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지 행복한 삶을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다.

 

인문학 공부는 현재의 삶에 대해 의심을 하고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 여가 문화나 자기 계발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인문학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의 공부다. 인문학을 통해 얻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민낯을 보면서 그동안 애지중지해 온 인식과 잣대들이 많은 잣대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민낯이 사실은 그동안 찾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얼굴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질주 안에서도 천천히 호흡하고 여유 있게 걷는 내공은 공부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런 공부를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단기완성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복을 맛보는 흥겨운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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