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보겠습니다"와 '해보겠습니다"의 차이

 

나는 전공이 행정학과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전공 강의만 듣지 않는다. 올해가 졸업반이라서 마지막 대학생활을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타과 전공과목 강의를 듣기로 결심했다. 그 중 듣는 타과 전공 중에 회화과 3학년 전공필수인 현대미술론을 공부하고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은 총 40여명. 그 중에 나를 포함한 남학생은 3명이다. 나머지 2명의 남학생은 회화과 소속이다. 나머지 여학생들 중에도 타과 전공이 있다. 실내디자인학과 소속 1, 생명공학과 소속 1명이다. 과 특성상 여초 현상이 있는데다 타과 학생이 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 수업에서 유독 눈에 띈다. ‘현대미술론을 가르치는 교수님 또한 여자인데 그렇다고 내가 외모가 출중해서 교수님 눈에 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학교 내에서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 예체능 계열, 그것도 회화과 전공 강의를 듣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나 같은 학생을 처음 봤을 것이다. ‘행정대학이라는 소속의 분류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교수님의 눈에 확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차별화된 이미지로 굳어져서 좋은 점은 있지만 단점도 있다.

 

가끔 교수님은 내가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라서 그런지 미술적 기본지식 수준이 회화과 학생들보다 낮게 볼 때가 있다. 이래봬도 작년 학기에도 같은 회화과 전공과목이며 동일 교수님이 가르치던 서양미술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름 미술사의 기본적인 흐름을 꿰뚫은 편이다. 잘난 사족 하나 덧붙이지자면 서양미술사수업은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고 공부해서 A+학점을 받기도 했다. 내 성격은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못한 또 다른 나의 재능을 은연중에 숨기면서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내 손으로 직접 양파껍질 하나하나 벗기듯이 말이다. 그럴 때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끼는 순간, 기분이 좋다. 하지만 너무 드러나지 않게 되면 이런 오해를 꾹 참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기본부터 내실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임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 미술에 대한 생각과 시야를 확장할 수 있어서 좋다. 예전에 책으로만 읽던 공부와는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과 그 기분이 차이가 있다. 회화과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화가로 활동하시는 분이라서 최신 현대미술의 트렌드(Trend)를 귀동냥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학습법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과제를 많이 내면서도 현대회화의 흐름에 맞는 주제를 낸다. ‘고전주의 양식을 A4 용지 5장 이상 쓰시오.’라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 대해서 논하시오,’와 같은 무리하게 미술론을 작성하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 특정 영화나 미술 관련 다큐 영상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쓰라거나 사물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 등을 쓰는 과제를 주로 낸다. ‘현대회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붓과 팔레트를 쥐는데 익숙한 회화과 학생들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론담당 교수님이 과제 어렵기로 유명하다. 갑작스럽게 교수님이 과제 하나를 제출할 때마다 회화과 학생들이 울상과 탄식을 연발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최근에 또 교수님이 과제를 공시했는데 예전에 낸 것보다 한층 더 창의적인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대미술의 방식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해서 간단하게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또 이번 과제에 학생들의 발표까지 요구하셨다. 회화과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 완성해야 한다. 제작하면서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을 전공교수에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 과정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작품 노트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에 교수님이 그 과제를 언급했을 때는 비 회화과 학생인 내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하기 위해 만든다는 취업 포트폴리오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작품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는가? 이번에는 붓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불리하게 된 셈이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에 갑자기 교수님이 나를 향해 말을 건다.

 

“cyrus은 비 회화과 학생이라서 이번 과제가 생소하겠지만 너한테도 미술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발표해 볼 생각은 있니?”

 

교수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발표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짧게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유보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교수님의 말. 그래, cyrus가 해보겠단다. 난 네가 발표할 줄 알았어.”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교수님은 발표를 하겠다는 의미의 해보겠습니다.”라고 잘못 듣고 만 것이다. 본의 아니게 과제에 대한 부담을 떠안고 말았다. 과제 공지한 날 이틀 뒤에 수업이 있어서 작품을 구상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은 거의 하루뿐이었다. 다행히 그 하루가 강의 한 개도 없는 공강 요일이라서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편안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쉽게 풀렸다. 내가 미술 지식이 정말 문외한이었다면 하루 이상 구상하고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화가 한 명을 염두하고 있다는 것도 과제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마그리트를 위한 오마주(Hommage)

 

 

 

 

cyrus  「마그리트의 달걀」 2013년, 포토샵으로 제작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기법에 빌려서 '마그리트의 달걀'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데 구상에 공들인 시간이 많았을 뿐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밖에 안 들었다.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관계의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일탈의 사고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한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사물은 일반의 상식과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등장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이 결합되어 나타나거나, 사물이 그 고유의 성질을 상실한 채 묘사된다.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의 크기를 변형하여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가 나타난다. 본질적인 사물의 의미가 상실되어도 그의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내가 만든 그림을 보면 벌써 눈치 챘겠지만 그림의 배경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피레네의 성」에서 인용했다. 혹자는 이러한 방식을 패러디(parody), 짖궃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러디가 아니라 오마주(hommage)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패러디는 원전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이 안고 있는 의미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희화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오마주는 원작의 존경과 경의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hommage는 프랑스 어로 '존경' '감사', '경의'라는 뜻이다)

 

 

 

♣ 깨지지 일부 직전 달걀의 의미는?

 

 

 

 

 

 

 

 

 

 

 

 

 

 

 

 

 

 

 

 

 

 

그렇다면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달걀은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 보면 달걀에 깨진 흔적이 있다. 이제 막 부화할 조짐이 보이는 상태다. 깨지기 직전 상태의 달걀을 보자마자 '아프락사스'(Abraxas)가 연상되었다면 정말 대단한 미적 감성의 소유자라고 칭찬하고 싶다. 그림 속 달걀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를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투시)」 (1936년)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사실 알의 상징은 마그리트의 또 다른 작품들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그 중 아프락사스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그림이「천리안」이다. 새가 태어나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낡은 구세계(알)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아프락사스)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알의 상태, 즉 자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 있는 상태인 알(인간)에게 깨어 있는 결과로서의 새(자유, 생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 사람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인내해야 한다. 새는 아프라삭스라는 신을 향해 날아가듯 사람 역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상하고 있다. 저 커다란 알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미술이 되는 건 아니다

 

 

 

 

 

 

 

 

 

 

 

 

 

 

 

 

 

 

"뭐야, 이것도 그림이야?"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제로 한 번 만들어 본 장난스러운 합성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고 좋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현대미술은 붓을 잡고 대상을 똑같이 재현해서 그린 그림을 환영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재현의 그림은 피카소가 괴상한 형태의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마르셀 뒤샹이 전시회에 소변기를 출품한 그 순간부터 종말을 고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1917년 어느날 한 하드웨어 상점에서 구입한 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후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한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향방을 결정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변기 작품 ‘샘’은 여전히 현대미술이 얼마나 기괴하며 현학적인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귀히 여기는 것은 천재적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유일무일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 변기작품 ‘샘’처럼 기계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품인 변기를 선택한 후 예술가가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과연 그것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반기를 든 뒤샹에게 있어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적 사물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조그만 달걀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하게 된다. 비루한 내 합성사진 작품도 그렇다. 고정관념의 의미로 구분하려는 사고를 조금만 벗어난다면 또 하나의 미술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미술은 어렵지만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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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개정판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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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묻지 않은 순수의 파문을 남긴 거문고 소년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34쪽)

 

오월이 되면 ‘영원한 거문고 소년’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생각난다. ‘밝고 맑고 순결’해야 할 오월의 세상은 찌뿌듯하지만 선생의 수필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밝고 맑고 순결’한 빛은 여전하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가 있다. 세상의 아찔한 속도에 질려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도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 속에 섞여 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내가 튀어나올 때도 있고, 그날이 그날 같은 건조한 일상에 지쳐 마음이 버석거릴 때도 있다. 그렇게 세상살이에 숨이 찰 때 찾게 되는 책이 바로 <인연>이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한창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읽고 나면 으르렁거리던 전쟁터 같은 마음이 깊은 호흡을 한 것처럼 편안해지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만 여섯 번, 책을 꺼내 든 것은 셀 수가 없다. 그때마다 선생의 글은 내게 휴식과 위안을 줬다.

 

선생의 수필은 맑은 시냇물 위로 퐁당퐁당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이다. 거문고 소년은 시냇물 근처를 지나가다가 그 곳 근처에 휴식을 취한다. 반질반질하면서도 납작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던져본다. 물에 잠기는 듯싶다가 허공으로 튕겨 오르고, 다시 수면을 스쳐 거듭 솟구친다. 사라지는 자취 사이로 은은하게 향기가 뿌려지듯 인생의 깊은 지혜와 성찰이 깔린다. 건너편 기슭에 닿듯 가슴 깊숙이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순수로 이루어진 파문(波紋)의 흔적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의 수면 위에 잔잔하게 남아 있다.

 

 

 

♣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어찌할 수 없나 보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37쪽)

 

사랑 감정에 무딘 시절엔 이 글이 그저 만남의 안타까움을 표현했거니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우리네 인연에 대해서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첫사랑은 이렇듯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인연이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무한한 인연과의 숙명적 관계 속에서 산다. 그 속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기쁨의 무게는 삶의 일부가 되고 인생이 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이별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다. 그 충격은 삶을 송두리째 부정할 만큼 크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사의 괴로움도 인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범인(凡人)들은 족탈불급이다. 좋든 싫든 어차피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할 처지라면 좋은 인연은 간직하는 체념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쉽지만 않다.

 

 

 

 

이승환의 노래 ‘당부’에 이런 가사가 있다.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 어찌할 수 없나 보오.” 딱 그 노랫말과 같은 심정이다. 나는 만남보다는 이별에 익숙하지 않다. 아는 사람이 잠시라도 내 곁을 떠날라 손 치면 가슴앓이를 시작하고 한 번 앓으면 오래 가는 편이다. 사별이 아닌 이별은 공간적인 헤어짐을 뜻한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옥죈다. 살아 있으나 한 장소에 머물지 못하는 답답함. 함께할 수 있음에도 아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음에도 대면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 누추하고 작은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추억과 성찰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었을 때, 딸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뜻한 시선과 그녀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딸과 함께 하는 흐뭇한 시간과 공간이 무척 부러웠다.

 

“나는 젊은 웃음소리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 없는 방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중략)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191~192쪽)

 

금아 선생의 글은 지나간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추억과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길지 않은 문장과 많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의 누추한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선생의 글쓰기에는 ‘수필’에서 몸소 밝힌 내용들이 그대로 체화되어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글 하나 하나가 잔잔하지만 깊은 맛을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중략)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18~19쪽)

 

<인연>에서 내가 가장 눈 여겨 바라보는 대목은 두 여성에 대한 선생의 각별한 마음이다. 선생의 어머니와 딸이다. <인연>은 크게 ‘종달새’, ‘서영이’, ‘피가지변’의 세 부분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째 '서영이' 편에 들어있다.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매우 낯익은 느낌이 났다.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선생이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 나와 벽장에 숨었다가 깜빡 잠들어 늦은 시각에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우는 장면은 어제 본 것처럼 기억에 삼삼하다.

 

선생은 나이 들어 어머니를 회상할 때에도 반드시 ‘엄마’로 표기한다. 너무 일찍 선생을 버리고 아버지 곁으로 영영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딸의 모습과 겹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수필 ‘엄마’에서 선생은 말한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가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99-100쪽)

 

선생의 엄마와 같은 여성으로 자라기를 바랐던 그 딸이 어린 시절부터 유치원을 거쳐 대학생이 된 이후 유학생이 될 때까지의 기록이 ‘서영이’ 편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선생의 글모음을 바라보면서 현대의 건조하고 삭막한 가족관계를 새삼 반추한다.

 

 

 

♣ ‘괜찮다, 괜찮다’라고 위로해주는 고마운 수필

 

 

<인연>에서 선생은 독자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강제하지 않으며, 강력한 어조로 주장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그냥 잔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선생의 지나온 날들과 사념과 경험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소박함과 진실함, 부드러움과 넉넉함,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는 노력, 바로 이런 덕목이 <인연>을 오늘날에도 늙지 않고 살아있는 수필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미덕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이것이 수필의 힘이 그런 게 아닐까? 속도에 지친 우리들을 뒤돌아보게 하고, 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라고 위로해 주고, 어딘가 숨어 있을 삶의 보석을 찾아주는 게 바로 수필이다. 생각날 때 읽게 되는 수필집 ‘인연’은 빛이 바랬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문장들은 세월이 갈수록 더 빛이 난다. 그래서 더욱 고마운 마음에 ‘영원한 거문고 소년’이 생각난다. 선생이 이 세상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끝으로 ‘인연’을 조용히 접은 그 날(5월 25일은 금아 선생의 생일이자 영면일) 이 열흘 남짓 정도 남았는데도 불현듯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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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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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635킬로그램의 의학적으로 치명적인 뚱보가 된 마흔 다섯 살의 사내가 20년 만에 침대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그와 그의 가족, 연인이 겪는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맬컴이 침대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언을 무력하면서도 집요하게 실천하는 과정을, 질투와 분노와 연민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생 ‘나’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635kg의 몸을 묘사하는 화자의 서술은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인간에서 거대한 식물로 변해버린 맬컴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의료장치와 마치 참전 간호사처럼 형의 몸 구석구석을 닦고 치료하고 보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이 읽고 있으면 후각마저 자극될 정도로 생생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침울하고 무기력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 사랑에 실패하고 죽을 때까지 형과 한 방에서 살 운명이라고 자포자기한 ‘나’, 탄광사고의 생존자로 그 기억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

 

특히 소설 속 맬컴의 모습은 흡사 피터맨을 연상시킨다. 침대에만 살다가 비대해진 피터팬. 피터팬은 자라지 않는 아이의 대명사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 세계로 편입되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이라 하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린아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없지만 몸은 어른이지 그의 행동은 어린아이와 같다. 집에 있으면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며 그가 누운 침대 자리 주변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변 대신 머리가 가발이 아닌지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순진무구한 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엄마 없이는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책임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감, 이런 부담감에서 벗어나 영원히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심리가 맬컴의 물컹물컹한 살덩어리에 압축되어 있다. 맬컴에게 '네버랜드'는 침대다.

 

무엇이 그를 ‘살찐 피터팬’이 되게 만들었을까? 아들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만이 원인이 아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그의 순순하고 연약한 성격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나’의 은사이기도 한 케이 선생님은 맬컴에게 나중에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맬컴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선생님이 한 말.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마!’(142쪽)

 

세상 심지어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루마저도 담을 쌓고 자신을 폐쇄적인 침대에 가둔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맬컴은 유년시절에 생긴 상처 때문에 고통을 성장하는 내내 자각했을 것이다. 맬컴의 몸에 생긴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의 약손마저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 말이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그에 따른 무력감이 뚱뚱한 사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는 것을 귀찮게 여기며 루의 사랑을 포기할 정도로 삶의 의욕은 상실되어 있다. 맬컴의 삶은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을 세워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정신적 힘의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인 것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은 어딘가에 숨어서 혼자만의 안락함을 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 침대로 가는 겁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죠. 어차피 당신도 이런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겠지만요.” (117쪽)

 

마음속에 내재된 상처가 곪을수록 인간의 본능은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만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내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맬컴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현실은 외면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맬컴, 아버지는 ‘자기만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연장이 가득한 다락방. 아이러니하게도 맬컴에 밀려 어머니와 짝사랑했던 루로부터의 애정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자 ‘나’ 역시 잠시 형처럼 생활하기도 한다. 소설 속 가족 이야기는 단순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쭉 따라 가다보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 채 숨기기기에 급급했던 우울 속의 나태함. 우리 마음 속에는 맬컴처럼 ‘살찐 피터팬’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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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당하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1928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올해 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키스하는 대회를 열었다던데 무려 50시간 25분 1초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간동안 키스를 한다면 입술이 부르트고 호흡이 가빠질텐데 흰색 천을 얼굴에 덮어 씌운 채 키스를 실제로 한다는 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천을 뒤집어쓴 채 입맞춤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서글프게도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 전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랑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로막는 것 또한 그 사랑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행복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작품 속 연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랑하지만 전부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 속 연인들처럼 우리는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 상태에 이르렀다. 편지 등 아날로그 방식에서부터 인터넷, SNS 메신저, 휴대전화 등 디지털 방식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 수단은 점점 발달해왔지만, 타자와의 소통은 의외로 더 불가지론에 빠지는 현실을 반영한 아이러니의 ‘천’인지 모른다. 그런 현실의 사랑을 마그리트는 달달해야 할 연인들의 키스를 삐딱하게 봤던 것이다.

 

 

 

 라디오 같은 찰나의 사랑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시인의 시적 화자 또한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줘 소통하길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전파-의미’가 돼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참된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3행을 보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찰나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애초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피우는 꽃 같이 순수한 것이지만, 이 시대는 사랑도 미국식 햄버거처럼 즉흥적이고 편리한 방향으로 진화되었나 보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 같은 편리한 사랑을 마그리트의 연인들과 겹쳐서 본다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은 기업체, 학교, 국가 등 거대한 조직에서 사원증,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문서로 소속감을 느끼라고 공식적 추궁을 받으면서 타자와의 접촉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서로를 길들이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공리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길들여진 척하다 쓸모없어지면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상대를 사물화·수단화한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프롬이 보는 산업화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고 봤다. 상품의 가치는 쓸모가 결정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쓸모가 있는가’다. 판단의 계량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결혼정보 회사다.

 

 

 

 

 

 

신랑, 신붓감의 학력과 직업, 연봉과 재산, 신체조건 등 이들의 기준이 대부분 숫자로 이뤄졌다. 결혼이 계량화되고 숫자화 되는 세태 속에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  결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공유가 없는 조건에 따른 육체적 결합이란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다. 숫자를 앞세운 혼인의 병폐는 가끔 신문 가십을 통해 접할 수 있다. 혼수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고 마는 부부를 볼 때 숫자에 얽매인 결혼의 비참한 말로를 보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사람이 숫자에 함몰될 때 소통에 의한 인간미는 사라지게 된다.


  

 

 타자의 윤리학

 

어떤 이는 속도숭배와 물질만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연과 교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인의 처지에서 시적 화자의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친화적 삶은 배부른 사치이거나 사회 부적응에 대한 도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 타자와의 참된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소통해보아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플라톤 이래 서양은 타자를 ‘어떤 이상(서양적 가치)’으로 융합하는 자기동일시였다고 일갈했다. ‘나/너, 서양/동양,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기독교/비기독교’ 등등의 이항대립 쌍을 상정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경향이었다는 지적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내 식대로만 타자를 자기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자의 단절과 차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좌초하고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배가 닻을 올린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중에서)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인을 대표적인 약자로 그린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게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 약자처럼 ‘나’가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와 연대의식의 강조다. 타자와 잘 만나는 동기는 ‘주고받기(give and take)’ 같은 공리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교환이 불가능한 ‘어떤 도덕’이다. 예컨대 물에 빠질 위험에 놓인 아기를 구하거나 기아 난민,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명예 등을 바라지 않고 그냥 윤리적 호소에 의해 타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고,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뿌리(근원)는 두 가지 관계(근원어)로 뻗어난다고 한다.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이다. ‘나-너’는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너)를 만나는 인격의 세계다. 주체와 주체가 서로 평등하게 만난다.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삶이 더 풍성해진다. 참된 만남이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쏟은 시간”이라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깨달음 같은 서로를 길들이는 참된 소통의 대화다. 현대인들 또한 여우를 만나기 전의 어린 왕자와 같지 않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으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는 요즘, 과거 참된 소통의 대화가 오고가는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 삶이 정말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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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기저기서 ‘융합의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놓곤 한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학문 분야들이 뭉치면서 내는 시너지 효과가 창의적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보니, 융합에 어울리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들도 다양하다.

 

하지만 통섭형 인재가 인문학과 과학의 지식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 인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Consilience(통섭)'를 처음으로 제시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을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를 넘나들며 인과 설명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통섭형 인재란 인문학, 과학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의 지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상 통섭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은 아니다 .이과와 문과로 나눠 가르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서로 저쪽은 몰라도 된다고 판단하는 이런 교육 체계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과-문과’, ‘과학-인문학’으로 만들어 낸 불신과 단절의 골은 너무나 깊어졌다. 이 골짜기를 매꾸지 않는 이상 통섭형, 융합형 인재는 단시간 내에 나오기가 힘들다.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불신과 몰이해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제기되었다.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리드 강연에서 C.P. 스노우은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다. 50여 년 전의 문제 제기는 그러나 21세기 첨단과학기술혁명을 맞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분업과 전문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는 오히려 영역 간의 단절과 고립을 가져올 수 있다. 원래, 학문이란 진리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 뿌리가 하나였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보통은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보편적 법칙이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체계적 지식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나 프랑스어의 ‘science’는 모두 어떤 사물을 안다는 라틴어 ‘scire'에서 연유된 말로 넓은 의미의 학(學)이나 학문(學問)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들면서 학문의 분화현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특히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스노우가 두 문화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단수로 사용되는 문화를 복수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지식인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극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국에서 반세기전에 제기했던 두 문화의 괴리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고등학교에서의 문과와 이과 문화는 이런 극단적인 ‘두 문화’의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학문 간의 단절현상이 더욱 심각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유사 인접학문들이 모여 있는 사회과학계만 보더라도 정치학자들은 경제를 모르고,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사회학이론조차 모른다. 이웃학문일지라도 학문과 학문 간에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낸다. 교수채용에서 학부·석사·박사의 동일성이 절대적인 요건이 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학문적인 폐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할 수 있다.

 

전공의 벽과 상관없이 널리 공유해야 할 고귀한 지적 유산이 많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제도나 교과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아까운 에너지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태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같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벽’을 실감하고, 무력과 좌절을 품게 돼 분열에 이어 혼란에 빠지는 등의 실체적 문제를 겪는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두 문화’는 나눔이 아니라 융화에서 오히려 더 각자의 진정한 본원성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데에 교육이 앞서야 한다.

 

 

 

이제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분야 간의 벽을 허물고 대화해야 한다. 과학계와 인문학계가 대화하고 과학과 사회가 대화해야 하며 정치와 예술이 함께 하고 문화와 기술이 함께 가야 한다. 문화의 힘은 공유에 있다. 함께 하지 않는 문화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걸림돌일 뿐이다. 스노우의 두 문화론이 진정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다.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야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들은 목적지를 소개한 책자를 보고, 간단한 외국말을 공부하는 등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많이 준비할수록 더욱 유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다양한 외국 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는 입맛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외국의 음식을 나름대로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나의 지식을 고집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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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2-20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힘은 공유다 라는 말 참 좋네요. 최근에 <두 문화>를 읽고 알라딘 리뷰와 페이퍼를 보고 있는데 좋은 글들이 많네요ㅎ

cyrus 2016-02-20 09:4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니까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네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2-20 10:25   좋아요 0 | URL
윽.. 저도 부끄러운 글들이 많은데 걱정이네요ㅎㅎ

cyrus 2016-02-20 10:30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글을 많이 남기려면 이런 상황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