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보겠습니다"와 '해보겠습니다"의 차이
나는 전공이 행정학과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전공 강의만 듣지 않는다. 올해가 졸업반이라서 마지막 대학생활을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타과 전공과목 강의를 듣기로 결심했다. 그 중 듣는 타과 전공 중에 회화과 3학년 전공필수인 ‘현대미술론’을 공부하고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은 총 40여명. 그 중에 나를 포함한 남학생은 3명이다. 나머지 2명의 남학생은 회화과 소속이다. 나머지 여학생들 중에도 타과 전공이 있다. 실내디자인학과 소속 1명, 생명공학과 소속 1명이다. 과 특성상 여초 현상이 있는데다 타과 학생이 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 수업에서 유독 눈에 띈다. ‘현대미술론’을 가르치는 교수님 또한 여자인데 그렇다고 내가 외모가 출중해서 교수님 눈에 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학교 내에서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 예체능 계열, 그것도 회화과 전공 강의를 듣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나 같은 학생을 처음 봤을 것이다. ‘행정대학’이라는 소속의 분류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교수님의 눈에 확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차별화된 이미지로 굳어져서 좋은 점은 있지만 단점도 있다.
가끔 교수님은 내가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라서 그런지 미술적 기본지식 수준이 회화과 학생들보다 낮게 볼 때가 있다. 이래봬도 작년 학기에도 같은 회화과 전공과목이며 동일 교수님이 가르치던 ‘서양미술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름 미술사의 기본적인 흐름을 꿰뚫은 편이다. 잘난 사족 하나 덧붙이지자면 ‘서양미술사’ 수업은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고 공부해서 A+학점을 받기도 했다. 내 성격은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못한 또 다른 나의 재능을 은연중에 숨기면서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내 손으로 직접 양파껍질 하나하나 벗기듯이 말이다. 그럴 때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끼는 순간, 기분이 좋다. 하지만 너무 드러나지 않게 되면 이런 오해를 꾹 참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기본부터 내실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임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 미술에 대한 생각과 시야를 확장할 수 있어서 좋다. 예전에 책으로만 읽던 공부와는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과 그 기분이 차이가 있다. 회화과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화가로 활동하시는 분이라서 최신 현대미술의 트렌드(Trend)를 귀동냥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학습법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과제를 많이 내면서도 현대회화의 흐름에 맞는 주제를 낸다. ‘고전주의 양식을 A4 용지 5장 이상 쓰시오.’라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 대해서 논하시오,’와 같은 무리하게 미술론을 작성하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 특정 영화나 미술 관련 다큐 영상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쓰라거나 사물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 등을 쓰는 과제를 주로 낸다. ‘현대회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붓과 팔레트를 쥐는데 익숙한 회화과 학생들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론’ 담당 교수님이 과제 어렵기로 유명하다. 갑작스럽게 교수님이 과제 하나를 제출할 때마다 회화과 학생들이 울상과 탄식을 연발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최근에 또 교수님이 과제를 공시했는데 예전에 낸 것보다 한층 더 창의적인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대미술의 방식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해서 간단하게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또 이번 과제에 학생들의 발표까지 요구하셨다. 회화과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 완성해야 한다. 제작하면서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을 전공교수에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 과정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작품 노트’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에 교수님이 그 과제를 언급했을 때는 비 회화과 학생인 내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하기 위해 만든다는 취업 포트폴리오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작품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는가? 이번에는 붓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불리하게 된 셈이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에 갑자기 교수님이 나를 향해 말을 건다.
“cyrus은 비 회화과 학생이라서 이번 과제가 생소하겠지만 너한테도 미술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발표해 볼 생각은 있니?”
교수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발표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짧게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유보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교수님의 말. “그래, cyrus가 해보겠단다. 난 네가 발표할 줄 알았어.”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교수님은 발표를 하겠다는 의미의 “해보겠습니다.”라고 잘못 듣고 만 것이다. 본의 아니게 과제에 대한 부담을 떠안고 말았다. 과제 공지한 날 이틀 뒤에 수업이 있어서 작품을 구상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은 거의 하루뿐이었다. 다행히 그 ‘하루’가 강의 한 개도 없는 공강 요일이라서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편안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쉽게 풀렸다. 내가 미술 지식이 정말 문외한이었다면 하루 이상 구상하고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화가 한 명을 염두하고 있다는 것도 과제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마그리트를 위한 오마주(Hommage)
cyrus 「마그리트의 달걀」 2013년, 포토샵으로 제작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기법에 빌려서 '마그리트의 달걀'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데 구상에 공들인 시간이 많았을 뿐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밖에 안 들었다.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관계의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일탈의 사고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한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사물은 일반의 상식과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등장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이 결합되어 나타나거나, 사물이 그 고유의 성질을 상실한 채 묘사된다.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의 크기를 변형하여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가 나타난다. 본질적인 사물의 의미가 상실되어도 그의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내가 만든 그림을 보면 벌써 눈치 챘겠지만 그림의 배경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피레네의 성」에서 인용했다. 혹자는 이러한 방식을 패러디(parody), 짖궃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러디가 아니라 오마주(hommage)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패러디는 원전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이 안고 있는 의미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희화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오마주는 원작의 존경과 경의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hommage는 프랑스 어로 '존경' '감사', '경의'라는 뜻이다)
♣ 깨지지 일부 직전 달걀의 의미는?
그렇다면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달걀은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 보면 달걀에 깨진 흔적이 있다. 이제 막 부화할 조짐이 보이는 상태다. 깨지기 직전 상태의 달걀을 보자마자 '아프락사스'(Abraxas)가 연상되었다면 정말 대단한 미적 감성의 소유자라고 칭찬하고 싶다. 그림 속 달걀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를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투시)」 (1936년)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사실 알의 상징은 마그리트의 또 다른 작품들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그 중 아프락사스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그림이「천리안」이다. 새가 태어나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낡은 구세계(알)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아프락사스)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알의 상태, 즉 자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 있는 상태인 알(인간)에게 깨어 있는 결과로서의 새(자유, 생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 사람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인내해야 한다. 새는 아프라삭스라는 신을 향해 날아가듯 사람 역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상하고 있다. 저 커다란 알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미술이 되는 건 아니다
"뭐야, 이것도 그림이야?"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제로 한 번 만들어 본 장난스러운 합성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고 좋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현대미술은 붓을 잡고 대상을 똑같이 재현해서 그린 그림을 환영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재현의 그림은 피카소가 괴상한 형태의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마르셀 뒤샹이 전시회에 소변기를 출품한 그 순간부터 종말을 고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1917년 어느날 한 하드웨어 상점에서 구입한 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후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한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향방을 결정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변기 작품 ‘샘’은 여전히 현대미술이 얼마나 기괴하며 현학적인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귀히 여기는 것은 천재적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유일무일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 변기작품 ‘샘’처럼 기계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품인 변기를 선택한 후 예술가가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과연 그것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반기를 든 뒤샹에게 있어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적 사물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조그만 달걀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하게 된다. 비루한 내 합성사진 작품도 그렇다. 고정관념의 의미로 구분하려는 사고를 조금만 벗어난다면 또 하나의 미술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미술은 어렵지만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