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정호승

 

 

너는 나를 끌고

인천국제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비행기에 싣고

시나이반도 위를 신나게 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카이로공항에서 다시 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피라미드 안 좁은 통로를 헤매고 다니거나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슬픈 눈으로 들여다보거나

사막에서 하룻밤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다가

질질 나를 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평생 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갈 뿐

너는 너 혼자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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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7-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이러스님~~~~~ :)
(설마 도서관으로 여행을 가는 건 아니겠지?! ㅋㅋ)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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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높은 인사고과와 승진을 위해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분주히 움직이는 직장인들, 좋은 성적과 각종 스팩, 외국어와 컴퓨터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혈안이 된 학생들, 가사와 양육뿐만 아니라 집안 인테리어, 가족들 건강 챙기기, 자녀 학교 및 학원 데려다 주기 등 하루가 빠듯한 주부들.

 

이들은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하루 24시간을 시, 분 단위로 쪼개서 나눠 쓰는 워커홀릭들로 현대인의 자화상의 일면이다. 워커홀릭은 원래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중독자나 업무중독자를 가리키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 소홀한 직장인을 주로 지칭하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직업과 계층과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각자 맡은 바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심리적·육체적으로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삶, 합리적으로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삶이 건강과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시간계획표를 작성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보기도 하고 작심삼일로 실패하면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 희망고문을 통해 또다시 계획하고 활동한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의 구호로 가득한 피로사회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노곤한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외침 소리, 발걸음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가 가득한 요란한 사회다. ‘활동적인 삶이 지배하는 사회다.

 

 

 

 ♣ 가속화된 시간은 '금'이 아니라 '병'이다

 

이런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느낌은 시간의 가속화. 허둥지둥하며 살다 문득 뒤돌아보니 해 놓은 것 없이 세월만 갔더라, 하는 게 시간의 가속화다. 슬로푸드, 느림의 미학 그리고 힐링.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 모든 사회현상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돼온 활동적 삶을 절대화, 찬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노동이나 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모든 시간을 일로 치환시키며 여가시간도 일을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의미로 인식시킨다. 인간다운 향기가 사라지는 시간이 되고 만다. 신자유주의와 성과주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본주의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저자는 <시간의 향기>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번역된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복종하고 순응하는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이다. ‘할 수 있다가 지배하는 사회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적도 올릴 수 있고 취업도, 승진도 할 수 있으며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세상이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상태는 끊임없이 노동하게 하고, 활동하게 한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직장인이 적지 않으며 생활에 큰 지장이 없어도 야근과 특근을 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주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얼짱과 몸짱 스타를 보며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긍정하며 열심히 몸 관리를 한다.


노동 및 활동의 과잉, 긍정성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는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산을 최대화 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열망이 있다. 능력의 긍정성은 금지나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생산적이다. 성과주체는 이미 규율의 기술을 습득하고 당위의 명령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생산성의 수준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비판도 없이 따라가다 보니까 시스템의 압력이 굉장히 강해서 피로하게 된다. 그런 시스템, 사회가 문제인데 지금 한국은 개인이 문제라며 치유하라, 힐링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강제하는 성과사회의 부정성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의 증상은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 끝없는 자책과 자학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사회, 자기 자신을 착취함으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지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이 나타나며 이는 성과사회, 긍정의 과잉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시간의 향기>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구원이나 종말, 진보라는 서사적 긴장감도 없다원자화된 시간은 현재의 시간을 날아가는 시간의 끝자락으로 겨우 인식하게 한다.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뿐이다. 삶의 가속화는 삶의 양은 증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충만한 삶으로 채워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서  

 

천천히 가는 게 치유가 아니다. 시간의 위기는 가속도가 아니다. 병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천천히 하는 것보다 남에게 시간을 주는 게 해결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시간을 창조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야 한다. 마르셀이 부드럽게 적셔진 마들렌 조각을 한 숟갈의 차 속에 담아 입술에 가져갔을 때 온몸에 퍼진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처럼 말이다.

 

우리는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유속 한가운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깊은 주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처해 있다. 세상은 잠시도 IT기기를 벗어나서 생활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가정에서도 자라목이 돼서 24시간 인스턴트 정크 푸드와도 같은 정크정보들에 온통 주의를 빼앗기고 있다. 더 많은 정보와 콘텐츠가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멍한 무용지물의 시간이 생긴다.

 

새롭고 갑작스레 찾아온 문명의 사회구조로 인해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저자는 이것을 정보화 사회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라기 보다는 퇴화라고 여긴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보호하고 짝짓기 중에도 경계를 하는, 다양한 다중업무에 주의를 분배하느라 깊은 사색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하는데 지금은 다양한 과업, 정보소스와 그 처리과정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산만한 시대를 살게 되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며 기존의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뿐이다.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하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을 여행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780년 42일 동안 가택연금으로 자기 방을 여행하 <내방 여행>이란 책을 출간했다. ‘내 방 순례 같은 자발적 유배시간은 조용하지만 강한 혁명 같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향기를 머금고 사색이 가득한 시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잊혀진 시간이다. 우리 삶 고유의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삶의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이완이 가능한 사색적 삶의 원천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상을 여행처럼 사색하는 자발적 시간으로 우리 삶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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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오지 않은 새벽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이와 같은 짤막한 서문이 수록된 시집 <노동의 새벽>이 1980년대 중반 무렵 발간되면서, 박노해라는 이름은 당대의 문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에 비로소 '노동자에 의한 노동 현실을 노래한 시'가 등장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고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민중들의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의 형상'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노동자였던 박노해는 작품에서 몸소 체험했던 노동의 현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인간은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노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전태일이 살던 시절의 노동은 비인간적 삶 그 자체였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 박노해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중략)

  

늘어 처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이 시가 발표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 시인이 노래한 노동현실 역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가 절규하던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밤 깊은 어둠은 여전하다.

 

객관적 지표만이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박노해 시를 하나 더 인용하면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중략)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 나는 ET가 되어 /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 연장노동 도장을 찍”(‘손무덤’)어야 하는 게 바로 노동자의 삶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경제적 생활 조건은 그 기본 중 기본이며,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기본이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수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 여전히 어둡기만한 노동의 미래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지난 현재 노동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만큼 노동 문제에도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실업 문제는 그 중핵을 이룬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비정규직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대체로 30%인데 반해 우리나라처럼 50%를 넘어서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임에도 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과연 전태일 시대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발전해 온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선진화의 현주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점증하는 세계화 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미래는 우울하기 이를 데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적 이슈라는 점에서 노사관계를 넘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그 어떤 주체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불가피한 결과로만 인식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청년실업은 노동이 처한 또 하나의 우울한 미래다. 그동안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썩 신통치 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생각한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늘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임시직 고용으로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5210원

 

중소기업 근로자, 아르바이트생 시급(時給)의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이 내년 시간당 5210원으로 결정됐다. 1988년 최저임금이 처음 도입되고 27년 만에 처음으로 5000원을 넘어섰다. 올해보다 350원, 비율로 따지면 7.2% 인상됐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주 40시간, 월 209시간 기준 108만8890원이다. 올해 101만5740원보다 7만3150원 올랐다. 혜택은 주로 저임금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을 심의ㆍ의결한 최저임금위원회는 전체 근로자 1773만4000명 중 14.5%에 달하는 256만5000명이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저임금이 결정되기까지 노사 간 협상은 쉽지 않았다. 당초 재계는 동결을 요구한 반면 노동계는 이보다 훨씬 높은 5910원을 주장했다. 노사는 각각 50원을 올리고, 120원을 낮춘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법정 논의 시한인 지난달 27일까지도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결국 공익위원의 중재안 표결로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5년째 반복되는 모습이다.

어렵게 인상됐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저임금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야기한다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영세 사업자의 부담을 늘려 아르바이트 자리가 줄고 결국 일자리 총량이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임금 근로자의 생활 개선을 위해 인상된 최저임금이 되려 이들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최저임금 인상 결정이 어려운 경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만큼 최저임금 문제는 노사 양쪽에 미치는 영향을 주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임금의 최저 수준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소득의 양극화를 줄인다는 취지에서 결정한 것이다. 최저임금은 저임금근로자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3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중국도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40%로 높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3.3%로 1년 새 4.3% 포인트가 떨어졌다. 지난 대선에서도 최저임금은 화두였다. 국민 대부분이 2017~2018년 기준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50% 수준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정계, 기업 그리고 국민들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일 때다.
 

‘노동의 새벽’을 지나 ‘인간의 새벽’이 오는 그 날은 언제 찾아올까? 희망 없는 노동자들의 불안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처럼 ‘새벽’이 절실한 적은 없었다. 힘들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새벽’ 같은 희망이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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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0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참 웃긴 것 같아요.
1년에 한번씩 경영자와 노동자 대표가 만나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 말이예요.
늘 칼자루는 경영자에게 쥐어져 있고,
언제나 현실은 돈과 힘을 가진 자의 뜻대로 굴러가게 마련이죠.

그래도 5,000원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만족해야 할까요?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비정규직도 문제이고, 최저 임금도 문제이인데,
그 틀에만 묶여 있는 것도 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과 적은 임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그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대안도 필요하고,
아예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과 실천도 필요하죠.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의 저항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3-07-09 16:18   좋아요 0 | URL
은빛님 댓글을 읽으면서 제가 노동 문제와 현실에 대해서 많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매년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소식이 나오면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빛님 말씀처럼 진부한 관점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 때문에 여전히 만족할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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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연구와 사회적 활동을 같이해 나갈 수는 없을까? 그것은 과학자에게 독일까, 보약일까? 과학자에게 사회활동은 터부시된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도 인권·평화 운동에 뛰어든 순간, ‘순수한 과학자’라는 정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좁고 깊은’ 전문가의 길을 걷는 과학자에게 사회란 불순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과학자 닐 투록은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반대한다. 아니, 분노할 것이다. 투록은 자신의 위대한 ‘물리학’ 영웅 리처드 파인만마저도 책임 회피에 직면한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존 폰 노이만(헝가리계 미국인 수학자)이 나에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주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폰 노이만의 충고를 따라 강력한 사회적 무책임의 감각을 발달시켰다. 그러자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적극적인’ 무책임이 자라나도록 씨앗을 뿌린 사람은 폰 노이만이었다!"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에서 재인용, 22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투록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이를 통해, 예비 물리학자로서 부모님으로부터 얻은 한 가지 생각, 즉 ‘훌륭한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는 현재 페리미터 이론물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며, 프린스턴대학 물리학 교수와 케임브리지대학 수리물리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우주론의 기본적인 이론들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관측을 통해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티븐 호킹과 함께 인플레이션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호킹-투록 인스탠탄 솔루션’을 개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상상해온 우주, 상상조차 못했던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뉴턴, 패러데이, 플랑크, 디랙, 아인슈타인, 파인만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물리학부터 현대물리학까지 물리학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바라보고, 물리학의 발전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저자 자신의 물리학 연구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우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예술, 문학, 영화 등 인간 문화 전반과 연관 지어 설명을 함으로써 이 책을 단순히 과학 서적이 아닌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이 포함된 종합 교양서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 사회는 과학적 성과를 사용하는 데에 만족해왔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연구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연구 결과만 내는 것에 행복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자들은 성과에 대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실험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파인만도 참여했던 맨하탄 프로젝트의 산물인 원자폭탄이 대표적인 사례다. 핵물리학의 성과가 살상무기로 개발되어 무수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투록의 작업처럼 우리의 과학과 인간성을 서로 연결할 때가 왔다. 결국 과학도 사람이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정부의 주요 정책에도 과학이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다. 기후변화,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 국민은 과학에 대해 과거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나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만큼 과학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사회의 방향을 잡아주는 일이 절실하다.

 

저자는 물리학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과학에서 큰 발전이 있을 때마다 사회에도 크나큰 변혁이 있었다. 그 변혁의 중심엔 당연히 사회 곳곳에 서있는 과학자들이 있다. 보다 더 대중에게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과학자들과 그 들의 연구를 이해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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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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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음의 벽을 ‘섬’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사람들 저마다가 가진 '취향'이 그 섬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얼마나 자주 '내 취향'이라는 말을 내뱉는가. 내 타입, 내 스타일로도 말해지는 이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공해 진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것 저 것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훈일 뿐 자신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나이쯤이면 나와 공감대를 지닌 묶음에 들어가는 게 속 편해진다. 이제 그 밖의 세상은 굳이 어울릴 필요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여집합이 되고 만다. 꽤 여러 곳에 걸쳐져 있던 공통집합은 갈수록 줄어들어 어느새 작은 섬이 되고 만다.

 

 

 

 

 

<타인의 취향>에 떠 있는 섬들을 살펴보자. 성공한 사업가 카스텔로는 적당한 성공에 안주한 채 늘 먹을 것만 찾는 속물스런 구세대 남성의 전형이다. 이에 반해 그의 아내 앙젤리크는 전문가적인 취향과 품위를 지닌 중년여성임을 자부한다. 불균형, 그러나 뜻밖에도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저속한 취향은 고사하고 아예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일체의 취향조차도 가지지 못한 카스텔라가 그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맞춰주었으며, 아내 역시 오직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가정의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기괴해 보이는 부부의 평온은 카스텔라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취향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카스텔라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실제로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영화나 연극, 시, 음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나 이별, 심지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TV 드라마에서 스치듯 들리는 한 마디 대사로도 영혼을 뒤흔드는 경천지동의 균열은 시작될 수 있다. 조카가 등장하는 연극작품이 상연되는 극장에 가자는 아내의 청이 귀찮다. "지루한 연극을 왜본담". 그의 아내는 올케의 새집 단장을 도와주며 예쁜 인테리어를 싫어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쩜 저런 스타일을 고르지?" 연극배우 클라라는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로 만나게 된 카스텔로가 그냥 싫다. "대머리에 콧수염.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전혀 없고..." 카스텔로의 운전기사도 그의 보디가드도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거지?"하면서.

 

 

 

 

초반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적인 관계 이외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 사이에 사연이 생겨나는 건 카스텔로와 클라라가 만나면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 관객도 깜빡 속을 만큼 무의미하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영어회화 선생으로 면접을 받으러 온 클라라에게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카스텔로는 형식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두 사람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간 카스텔로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클라라를 보게 된다.

 

이제 카스텔로에게 그녀는 그냥 클라라가 아니라 특별한 클라라가 된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것이 된다는 의미다. 문화적인 것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카스텔로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연극을 보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쏟는 그의 정성은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단 한가지이유로 무참히 거부당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그를 밀어낸다.

 

비로 클라라에게 어설픈 영시로 사랑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가슴 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기도 하짐나, 그러는 가운데 차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새삼스레 느끼기 시작한다. 아직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그림을 구입하고, 내친 김에 공장에는 거대한 벽화를 주문한다. 유능한 부하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던 그가 직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고민하며, 벽화를 주문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텔라는 '변화'해간다.

 

 

 

 

하지만 앙젤리크는 남편의 이런 변화를 전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편은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저 자신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분명해서 타인의 입장이나 취향을 배려할 수 잇는 여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이들보다 우월함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취향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급한 것들이고, 이에 따라 세상은 자신의 일방적인 돌봄만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앙젤리크에게 남편은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한 마리 강아치처럼 대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소통의 오만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자초한다.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아내의 무감각함은 역설적으로 카스텔로를 '각성'하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수단'이나 '배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카스텔로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인형'으로 취급받는 삶을 살았던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단 한 점의 그림이 무참히 떼어진 후 결국 카스텔로가 아내를 떠나는 설정은 연극 <인형의 집>의 현대적인 범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처럼 싫던 그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객석을 쳐다보는 클라라. 놓쳐 버린 사랑으로 슬픔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커튼콜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영화 내내 냉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무대 맨 앞에서 카스텔로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취향만큼 견고하게 개인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어디 있을까. 소통의 원천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자기방어, 단지 그것이 취향인데 말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한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간 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 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이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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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8-01 01:00   좋아요 0 | URL
아! 이 멋진 글을 제가 왜 못보고 지나쳤을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취향은 서로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비롯하여 결혼 후 제가 좋아하게 된 영화들은 대부분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절대 닮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지요.
저는 여전히 액션과 공포물도 좋아하지만,
아내는 절대 때려부수는 영화나 피를 튀기는 영화를 보지 않거든요.

[룩엣미]도 보셨나요?
그 영화에 대한 평도 읽고 싶어지는데요.

cyrus 2013-08-02 00:08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저번 학기 때 현대미술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담당교수님이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강조하다는 취지에서 이 영화를 보여줬어요. 이 영화 말고도 미국 흑인 문제를 다룬 '타임 투 킬'도 보게 되었죠. '룩엣미'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시간 나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싶네요 ^^

감은빛 2013-08-06 02:08   좋아요 0 | URL
[룩엣미]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입니다.
[타인의 취향] 이후에 찍은 작품인데,
거의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강조한 시선과 관점에 대한 부분으로 보면
이 영화 역시 탁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취향]보다 [룩엣미]를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