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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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더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다시 시작된 삶

 

“어젯밤 11시 반쯤 서울 한강로 1가에서 만취 상태의 운전자가 몰던 갤로퍼가 마티즈 승용차 등 여섯 대와 추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스물세 살 이 모 씨가 온몸에 3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 0.35퍼센트의 만취상태였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학교를 가는 길에, 혹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흔하게 듣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뉴스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에 너무나 무딘 지도 모르겠다. 내성이 생길대로 생겨버린 걸까. 누군가의 자살 소식 앞에서도, 혹은 서울 이편에 살고 있는 한 남성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도 너무 쉽게 망각하는 우리.

 

불에 데어본 사람만이 불의 뜨거움을 감각적으로, 온 몸으로 알 수 있다. 불에 덴 사람을 지켜보는 타인은 그저 ‘뜨겁겠다’라는 위로의 말만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진심이라도. 결국은 불이 준 뜨거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제 앞에 나와 불의 잔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잔상은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고, 그 상처는 깊다.

 

‘대한민국 화상 1등’이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에게 의료진조차도 ‘살아도 사람 꼴이 아닐 것’이라며 비관적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는 7개월간의 입원과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 그리고 재활 치료를 이겨내고 코와 이마, 볼에서 새 살이 돋아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잿더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졌고 최근 다시 한 번 브라운관을 통해 당당히 대중 앞에 섰다. 그녀는 스스로 증거가 되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꽃다운 얼굴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긍정적인 의지임을.

 

 

 

 

 ♣ 그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

 

그녀의 입술에서는 ‘감사’라는 고백이 많이 나온다. ‘살아있어서 흰 눈도 보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고백의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위로받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위로가 아닌 반성을 하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황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놔두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절망한 사람의 끝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선 씨는 ‘절망은 사람을 죽이는 것’임을 스스로 배웠다.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절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 절망적인 순간들마다 그녀가 해온 일이다. 그것이 절망이 그녀를 죽이지 못하도록 지선 씨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평범한’ 오늘을 누리며, 오늘보다는 더 달짝지근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버려두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고통 속에서 절망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슬픔의 폭풍우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 있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외로움의 눈보라 속에서는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녀 또한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정말 어렵다’는 말보다 더 무게가 실린 ‘쉽지 않다’는 말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쉽지 않은 일일수록 더 많이 애써야 하기에 더 의미 있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행복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이런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가족들의 사랑이다. 가족들 또한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선 씨와 함께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강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힘든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선 씨의 책에서는 칙칙함이나 우울함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떤 정상인보다 밝고 명랑하다. 그녀는 책에서 자신과 같은 중 증장애인을 ‘VIP’라고 표현한다. 맞는 말이다. 장애인들은 우연치 않은 기회에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 가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선 씨는 죽음의 문턱과 편견의 문턱을 넘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녀의 책은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인생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차가운 마음, 세상을 향한 조소와 냉소로 가득 찬 우리.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문을 꽁꽁 닫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궂은 날씨든 좋은 날씨든 그것을 음미할 줄 아는 게 진짜임을 알게 하는 이 책은 책꽂이서 10년 20년 꽂아둘수록 깊이 있게 발효될 문장들이다.

 

 

 

 ♣ 고난을 사랑과 축복으로 여기는 특별한 사람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굴곡이 심한 나무일수록 당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과보다는 배가, 배보다는 감이, 감보다는 포도가 당이 높다. 나무가 자기 몸을 흉하게 하면서까지 굴곡을 만들어 당도 높은 과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굴곡진 인생이 값진 열매를 맺는 것 같다. 고통과 희생 없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당도 높은 과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굴곡진 인생의 지선 씨는 화상을 입은 후에 오히려 감사하다며, 베스트셀러를 썼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특별한 사람이란 남들과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일그러진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화상 사고를 경험하고 이겨내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러한 외모 덕분에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재활 상담학이라는 공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지선 씨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 이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뻐요’, ‘참 아름다워요’ 하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이는 그를 놀리는 것이 아니고 진정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결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련 속에서도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절망이나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이고 용기였다. 홀로 지내는 어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지내는 밝음이었다.

 

오늘은 미래를 향한 나의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오늘이다. 그녀는 인생을 덤으로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특유의 밝음과 사랑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다. 나는 염치없이 그녀의 은혜를 넙죽 받았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삶에 대한 감사를 붙드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향기를 품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를 직접 만난 일이 없지만 언젠가 그를 만나면 나도 정답게 인사하리라. ‘지선 씨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 준 모든 사람들도 더불어 사랑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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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9-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링캠프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모습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고통이기에 책으로는 보지 말아야겠다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무래도 한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어야겠습니다.

cyrus 2013-09-28 22:16   좋아요 0 | URL
원래 힐링캠프를 잘 안 보는데 지선씨가 나온다길래 저도 보게 됐어요. 여전히 명령하고 쾌활한 성격은 여전하더군요. ^^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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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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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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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인류 최초의 범죄

 

 

 

 

 

렘브란트 반 레인 「아담과 하와」 1638년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을 세웠다. 그곳에 두 나무를 심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의 나무였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그중에서 선악의 나무에 열린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뱀이 등장하고 사람을 유혹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하와가 먼저 선악의 나무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인류 최초의 부부는 이렇게 해서 힘든 노동과 고통, 죽음을 맛보게 된다.

 

아담을 미혹해 뱀의 말을 듣게 한 하와는 왜 금지된 선악의 열매를 먹었을까? 그것은 “죽지 않고 하나님같이 된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도 하느님처럼 되고 싶었다. 선악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뱀의 유혹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원불멸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인류 최초가 저지르는 범죄(?)의 한 순간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입에 대려는 하와를 제지하려고 한다. 아담은 손가락 하나를 하늘로 올리며 하느님의 명령을 하와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거짓말에 속아 하느님의 지시를 어겼을 뿐 아니라 아담도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다.

 

렘브란트는 최초의 범죄가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다. 뱀이 유혹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탐스러운 열매 앞에서 망설였으며 ‘정말 먹어도 될까’라며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순간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지시하신 말씀을 거역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Scene #2  우리 뇌에 살고 있는 나기만씨

 

인간의 감각기관은 현실을 왜곡 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들은 정보를 뇌가 ‘인식’하는 과정에선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을 행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는 “기만과 간파의 반복교차가 진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기만과 간파가 이루어지는 관계의 행위는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낙원에서 펼쳐진 ‘기만하려는 자’(뱀)과 ‘간파하려는 자’(아담)의 대결은 결국 ‘기만하려는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 대립의 판도를 바꾸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자기기만하는 자’(하와)였다.

 

기만과 자기기만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특히 남녀 간에도(!) 자주 발생한다. 조직 차원에서의 자기기만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다. 인간 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갈등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우리 뇌 안에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이성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나(자기)기만’씨가 있다.

 

우리 의식이 뇌에 전달된 정보를 왜곡하고 거짓 기억을 만들면서 부도덕한 행위조차 합리화하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뇌는 좋은 의식은 살리고 나쁜 생각은 지움으로써 더 행복해지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기만의 사고 회로는 무조건 상대방을 속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분을 좋게 하려는 방어적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공격적 본능의 방편으로도 사용된다. 지나친 자신감의 표현이나 과시적인 행동, 과잉통제 등이 그렇다. 단순히 거짓말하는 차원을 넘어 왜곡된 상황을 사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게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다. 기만이 발각되더라도 ‘나도 몰랐다’는 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Scene #3  자기기만의 위험성

 

하지만 기만의 유혹에 빠져버린 하와가 타락한 것처럼 자기기만이 주는 혜택은 일시적이지만 대가는 너무나 클 수 있다. 사실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얻는 혜택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자기기만을 한다거나 기만술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전략이 위험하다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상대방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막연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직언을 계속 무시하면 부정적인 것은 걸러지고 긍정적 내용만 경영층에게 전달되는 조직의 침묵만 아니었다면 1986년 챌린저호는 공중에서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6년 1월 28일 승무원 7명을 태운 미국의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폭발 확률에 대한 내부 견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낙관적 태도로 일관하던 중간 관리자들이 실무 연구원의 의견을 상부로 전달하지 않은 자기기만의 침묵으로 인해 참사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단 내의 자기기만을 그대로 방치하면 똑똑한 다수가 모였다고 해도 멍청하고 어리석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대통령이 특정 사안에 대한 무슨 말을 하면 참석한 각료는 물론 전문가들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 말에 토를 달기 어렵다. 회의에 앞서 많은 준비했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대통령 결정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아무리 말해 봤자 대통령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어쭙잖게 토를 달았다가 ‘뼈도 못 추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참석자 입을 얼어붙게 만든다. 문제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고 만다. 이러다 보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토론은 사라지고 일방적 훈시와 설교만 이어진다.

 

생존을 위한 공격적 기능의 자기기만 또한 문제가 있다. 동물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자신을 과대포장하다 보면 엉뚱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자신의 배를 부풀리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다른 개구리보다 몸집을 크게 만들기 위해 배를 크게 하다가 끝내 터져서 죽고 만다.

 

자신의 현재를 과시하기 위해서 과거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게 된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북한의 김씨 일가 우상화와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모습에서 집단적 기만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둘 다 공통적으로 자화자찬과 자기정당화를 위한 거짓 역사 서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거짓 역사 서사는 집단의 통일성을 이룩하는 데 쓸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북한 우상화 작업은 북한 내부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데 있으며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은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일본인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다. 자기 조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Scene #4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라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강조한다. 자기기만의 늪에 쉽게 빠질 수도 있지만 조그만 더 꼼꼼하게 자신의 편향을 알아차린다면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기기만 편향도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집단적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의 만남을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최악의 사고(思考)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 집단 내부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탁월한 결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집단적 자기기만 사고를 막으려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던 자유롭게 말하며 난상토론을 벌이는 브레인스토밍에서도 이런 역할이 중요하다. 바로 ‘데블스 에드버킷(Devil's advocate)’이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어야 한다. 우리 뇌 속에 숨어 살고 있는 ‘하이드’(Hide) 나기만 씨와 싸울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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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나랑 비슷한데...’

 

 

 

 

 

 

 

 

 

 

 

 

 

 

 

 

 

다음의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적용해보자.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위의 글이 자신의 성격과 어느정도 부합될까. 심리학자인 B.R. 포러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평가서가 자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점수를 매기라고 주문했다. 결과는 5점 만점에 4.26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답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평가서는 신문의 점성술 내용을 대강 짜맞춘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격특성을 자기만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경향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에서 유래했다. 혹은 성격 진단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포러의 이름을 따서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바넘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커스단을 이끌었던 유명한 곡예사다. 그는 서커스 도중에 관객을 아무나 불러내어 직업이나 성격 등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신통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이를테면 "당신은 활발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성적인 면도 가졌군요"라고 말해도 관객은 저절로 "어쩌면 그렇게 잘 맞힐까?"라고 감탄하기 마련이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 사주는 사주일 뿐

 

어제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 ‘사주점에 빠진 친구’가 등장했다. 점에 빠진 친구는 손금, 관상, 사주를 보느라 용돈을 다 썼고,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본 후 그곳에 적힌 내용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오늘의 운세에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할 것’이라고 나오면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늘은 차조심 할 것’ 이라는 운세를 보면 그날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유명한 점집의 복채를 준비하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운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방송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주변 사람 입장에서는 운세와 점을 그대로 믿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 심적으로 피곤하거나 친밀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사주 결과 때문에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파혼 소식을 전해왔다. 이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주를 봤는데, 서로 궁합이 안 맞더란다. 주변에도 사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일부는 아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 방송에 나온 ‘점에 빠진 친구’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도 흔히 정초에 본 사주에서 올해 운이 안 좋다며 크게 낙담하거나 자신감마저 잃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년월일시만 가지고 성격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나 소상하게 말할 수 있다니 신기하고 재밌긴 해도, 과연 어디까지 믿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혈액형별 성격도 보면 그럴 법한 성격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A형은 다정다감하고, B형은 바람둥이이라는 둥, O형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AB형은 사이코다? 필자는 B형이지만 지금까지 바람을 핀 적이 없었고, 독창적이지만 제멋대로라며 AB형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 지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혈액형별 성격이나 심리테스트, 오늘의 운세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격을 모호하게 풀어 놓는다. 그런 두루뭉술한 묘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혈액형 성격론은 이미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론으로 판명난지 오래다.

 

사람은 대개 부정적인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대체적으로 혈액형 성격론에서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는 부분은 부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요인에 더 신경을 쓰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은 혈액형 성격학에서 말하는 성격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람은 때론 소심하고 때론 활달하다.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다가도 쉽게 싫증을 내는 게 사람이다. 일관성이 있다가도 때론 제멋대로 이거나 변덕스럽다.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창조적이었다가 너무 개성이 넘쳐나기도 한다. 때론 얌전하다가도 광기를 갖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혈액형 성격론은 그 태생부터가 의심스럽다. 혈액형 성격론은 1880년대 독일에서는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발생 했다. 칼 란트슈타이너가 1901년 ABO식 혈액형을 만들었고 그 이후 연구한 결과 1910년대 아시아 인종은 B형이 많고, 유럽은 A형이나 O형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을 낮추고 백인을 높이기 위해 B형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유럽인과 같이 A평과 O형을 강조하면서 혈액형 성격론이 굳어진다. 그래서 B형 성격론은 적은 혈액형이므로 매우 편파적인 측면이 많다.

 

 

 

 

 ♣ 진짜 ‘나’를 알려는 자세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기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심리적 에너지 낭비를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점은 강점으로 키우려하는 반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평가 절하하는 부분은 약점으로 숨기려고 한다. 자기 스스로 속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을 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긍정적인 것만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전문적인 성격분석 서비스나, 인터넷에 나도는 여러 가지 성격 검사도 있지만, 주변 사람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서, 직장인은 동료를 통해서, 또한 친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성격을 아는 데 가장 큰 팁이 된다. 주변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자신을 아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자신을, 사람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사람들은 일이 잘되고 상황이 좋을 때보다는 힘들거나 난관에 부딪쳤을 때 원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좋고, 어려움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적절한 사회기술로 상황에 대처하지만 위기상황일 때는 기술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내비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퇴화한다. 또 자신을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눈과 귀를 닫고 자기가 아는 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 철학자는 오늘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다. 이에 심리학자 융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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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이 글을 읽으니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고, 평생을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몽테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가 말했던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싶더군요.

* * *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몽테뉴)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cyrus 2013-09-25 21:37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명언이 제 글과 잘 어울리면서 좋아요. 오렌님 덕분에 몽테뉴와 세네카의 좋은 명언 알아갑니다. ^^

김성환 2014-11-1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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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월한 서양 vs 열등한 동양

 

꽃과 여자의 옷에서 봄이 피어난다고 한다. 요즘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오가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있다. 짧은 치마에 살결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들이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여성의 미니스커트는 짧아지고, 립스틱 색깔은 짙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기가 어려우면 아무래도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액세서리를 구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요구가 증대한다고 한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는 우리의 사유나 관념이 자의적이고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관념체계의 깊은 틀은 근대화의 급속한 발전과 자본주의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물들어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했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슬로건 앞에 점점 동양 문화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점점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히게 됐다. 즉 ‘우월한 서양’ 대 ‘열등한 동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 관념체계 안에 당연한 지식으로 자리 잡은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사회구조적 재생산 과정을 단순히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기존의 왜곡되고 종속적인 문화 상황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만 치중했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는 뒷전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서양 중심 사고가 중심 담론이 됐다.

 

 

 

 ♣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이분법적 사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란 긍정적 이미지와 물질적, 제국주의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반면에 ‘동양적’인 것에 대해 이와 반대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나마 ‘명상적, 신비적’인 단어가 긍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의 편견과 왜곡된 동양 이미지가 바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너무나 오랫동안 종속된 결과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알지 못하는 타 문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문화적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서구의 동양 지배 프로젝트와 맞물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표상체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체계적인 ‘동양의 동양화’ 과정에 의해 동양의 이미지는 왜곡돼 왔기 때문에 사이드는 이제까지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동양, 형용사가 붙지 않은 동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각종 주의와 주장으로 포장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대신 동양을 말해왔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동양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들 스스로가 동양과 대치되는 위치에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기 때문이며, 실제 생활과 정신생활 양면에서 사실상 동양 밖에 있는 ‘그들의 외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는 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의식하고, 동양 문화를 비하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의 필요성보다는 욕구를 자극해 많이 판매함으로써 최대 수익을 얻음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부단히 창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동원되는 수단이 광고이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날마다 받아들이는 메시지의 한 형태다. 소비자가 받아들인 총 메시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의견, 호감, 불쾌감 등을 형성한다. 이런 상황을 기업들은 전통적인 콘셉트를 가지고 소비자들의 욕구를 발생시키기보다는 서양적인 무엇인가에 마케팅 전략을 찾고 있다.

 

서구 우월주의에 입각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서양의 차별적 이분법을 광고 속에서 찾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과 강화는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광고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광고 속에 불려 들어가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흐르는 회로’, 그러나 실제로는 광고에 의해서 ‘주의 깊게 준비된 회로(오리엔탈리즘)’를 통해 부재된 시의를 스스로가 채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광고에 의미를 부여하고 광고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 내 안에 서양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동양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거나 혹은 서구 문화에 영향을 지나치게 크게 받은 나머지, 오리엔탈리즘을 자기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언어, 행동, 사고방식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자신이 사고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가 더욱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정신의 왜곡을 가져오게 되며,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까지 초래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은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매년 유행하는 미니스커트가 거부감보다는 친근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은 아닐까. 한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기는 어렵다. 결혼식이나 환갑 같은 행사장에서나 잠시 보는 것이 우리 전통의상의 현실인 것이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당함을 표현한다’, ‘날씬한 다리로 칭찬받고 싶어서다’,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다’ 등은 여자들 의견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서구지향적인 의식이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의식 속에 열등한 동양과 우월한 서양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서양’, ‘열등한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서구인 시각으로 우리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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