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