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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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빠르다. 벌써 5월 말이다. 젠장,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니. 매번 시간의 끝에 서있으면 허덕거린다. 시간은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아직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단하고 치열했던 지난날을 반추하고 나만의 영혼이 성숙되어야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투명한 유리벽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유리벽 밖으로 세상은 보이는데 정작 만져지지 않는 답답함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인생이 답답하고 지치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가보자. 화보집을 연상시키는 크기의 책으로 들어서는 순간, ‘유리벽’에 둘러싸인 인생살이에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벽 밖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좋은 비상구가 된다.

 

 

 

 

피에르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년

 

그러나 『영혼의 미술관』에 입장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이 두껍고 무거운 편이지만 여전히 ‘미술’이라는 단어가 어려워서 그 곳으로 들어가기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미술을 왜 어려워하는 걸까. 나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미술이 우리 삶에 밀착할 정도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똥인지 작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똥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피에르 만초니라는 예술가는 자신의 똥을 깡통으로 포장해서 ‘예술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제목은 ‘예술가의 똥’, 제목만 봐도 그의 예술적(?)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라는 단어가 없다면 그냥 똥이다. 미술작품이 될 수 없다.

 

현대미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오래전에 마르셀 뒤샹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화장실 변기에 사인만 한 채 미술관에 전시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관에 죽은 상어 시체를 보관해 13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렸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상징성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세상에 없는 예술가의 작품일수록 대중은 더욱 곤혹스럽다.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왜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는 걸까? 너무나 궁금해서 따지고 싶어도 예술가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다. 죽은 예술가는 말이 없다.

 

우리가 예술을 멀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비싸게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개인의 이해나 감성이 부족하다고해서 예술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예술가들을 위한 고결한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감상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사람들마다 각각 인식의 차이가 있겠으나 그림을 보고 감상하는데 있어 정답이란 없다고 본다.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머리로 예술가의 의도를 억지로 알아내려고 하면 예술이 어렵게 느껴진다. 예술가가 그림을 그린 이유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상징성 등을 알면 좋지만, 오히려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림을 보는 것과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와 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그림을 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그림을 읽는 것이고, 후자는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림을 읽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끌리는 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 낫다. 괜히 똑똑하게 보이려고 그림 앞에서 힘 줄 필요는 없다. 우선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 예술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방식에 연결점을 찾는 것도 좋다.

 

고단한 세월에 단단하게 뭉쳐진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는 예술의 역할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을 볼 때 자신만의 자유롭고 엉뚱한 시선도 괜찮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자아와 타자 등 이분법적 논리에 갇힌 ‘유리벽’을 파괴시킬 수만 있다면.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아름다운 그림은 우리를 더 감동시킨다. 아름다운 그림이 슬픔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림을 볼 때 그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질 때 예술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음미할 수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암초」  1825년경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서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쪽)

 

 

예술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삶의 조건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낭만주의적 의미로 숭고함을 지닌 작품들이 그러하다. 별이나 대양, 거대한 산맥이나 대륙의 단층을 묘사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암초」를 마주하면 삶의 좌절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라는 광대한 세상의 부분적인 과정임을 알게 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즐거운 공포에 휩싸이고 영원의 존재 양상에 비해 인간의 불행이란 게 얼마나 사소한지 느끼면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는다.

 

드 보통은 예술의 7가지 기능으로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을 분류한다. 『영혼의 미술관』의 전시실은 드 보통의 분류대로 7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나쁜 기억을 교정해 주고, 희망을 주며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닫게 해서 슬픔에 대한 내성을 키우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하며 자기 자신을 좀 더 이해하도록 이끌고,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마지막으로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이끌어준다. 전시 순서(목차)대로 보는 것보다는 마음 가는대로 평소 관심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도 좋다. 슬픔을 견디기 어렵다면 ‘슬픔’ 전시실에 가면 되고, 이번 기회에 자신을 성찰하고 싶다면 ‘자기 이해’ 전시실로 간다. 『영혼의 미술관』은 그저 그림을 보기 위한 엄숙한 곳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다.

 

‘균형 회복’이라는 이름이 붙인 전시실에 가면 삶에 허전한 부분을 채우고 보완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이 주는 균형감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질서를 다시금 확인하게 하며, 우리의 열정을 자극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심리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약점들을 보완해준다. 『영혼의 미술관』에 가면 반갑게도 한국의 백자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드 보통은 백자를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본다. 한국의 백자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타원형으로 이루어지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시선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봐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니콜로 피사노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1500~1501년경

 

그는 여기서도 ‘사랑’을 얘기한다. 전작에서도 ‘사랑’을 주제로 글을 쓴 만큼 ‘사랑’을 논하지 않는 드 보통은 그의 벗겨진 머리처럼 허전하다. 사랑.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리면 치명적인 상처로 변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랑에 쉽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두 단어로 이루어진 감정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허허벌판의 사막과 같다. 그 곳 한가운데에 서 있기만 하면 갈증이 생긴다. 사랑은 곧 우리 메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그래서 사랑을 느끼기 위한 우리의 호기심과 노력은 멈출 줄 모른다. 니콜로 피사노의 그림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는 그동안 살아가면서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려준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예술이 어렵다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예술을 찾게 된다. 우리 삶에서 사랑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결국 예술도 우리 삶에서 때려야 뗄 수 없다. 예술은 세상의 유리벽에 갇혀 훌쩍해진 영혼을 살찌우게 만든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역할을 한다.

 

이제 예술로서 우리가 잊고 있던, 잃어버린 삶의 일부를 찾아야 한다. 그림을 통해 치유와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숟가락 하나라도 품격 있는 것을 고르는 일부터 주거. 도로 등 환경을 개선하는 일까지,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상의 일들이다. 『영혼의 미술관』을 전체적으로 다 둘러봤다면 이런 문장이 적힌 출구로 나가면 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쪽)

 

과유불급이라고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술에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일상과 동떨어지게 된다면 ‘치유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고 만다. 예술 자체가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니다. 예술지상주의는 현실 지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예술이라는 벽에 갇히게 된다. 과연 드 보통의 생각대로 예술작품이 덜 필요해지는 세계가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만 가고, 지친 현대의 영혼들은 또다시 『영혼의 미술관』으로 찾으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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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편지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치지 못한 채 서랍 한쪽 구석에 보관된 편지도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부치는 편지도 있다. 편지라고 해서 꼭 편지지에 쓰라는 법은 없다. 가끔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할 때 하얀 속종이가 편지지가 되기도 한다.

 

감성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사랑하는 이성에게 주는 책에 편지를 쓰는 것은 무척 낭만적이다. 책을 받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때 책에 편지 쓰는 것은 좋지만,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책을 깨끗하게 읽고 보관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선물 받은 책에 누군가의 글씨체가 있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책 편지를 쓰기 전에 상대방이 책을 다루는 습성은 알고 있어야 한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차라리 속종이에 쓰는 것보다는 작은 엽서나 편지지에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 낫다. 

 

중요한 편지가 아닌 이상 오래 보관하기 힘들다.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정성껏 쓴 편지도 슬프게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책 편지는 책 속에 적힌 글이기 때문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은 없지만, 문제는 책이 오래 보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책은 헌책방에 팔 수 있다. 헌책방에 가면 속종이에 편지가 적힌 책을 가끔 발견한다. 책을 팔기 전에 편지를 확인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책 속에 적힌 편지를 기억 못한 채 팔 수 있다. 그리고 책 선물을 준 사람을 잊기 위해서 일부러 헌책방에 파는 것일 수도... 그래서 헌책방에 이런 책 편지를 보게 되면 꼼꼼하게 읽어본다. 편지 속에 숨겨진 사연이 무척 궁금하다. 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편지를 쓴 사람이,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사람이 누군지를.

 

만약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자신이 쓴 편지가 적힌 책을 발견하면 어떤 심정일까? 과거에 썼던 편지가 오랜만에 보게 되면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씁쓸할 것이다. 아무리 책을 보관하기 힘들고, 안 읽는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받은 책 선물을 쉽게 파는 것은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 될 수 있다. 작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홍준표 의원에게 선물했던 책이 헌책방이 발견돼 홍 의원이 사과한 적이 있었다. 그 문제의 책이 하필 도올 선생이 쓴 『동경대전』이었다. 속표지에 도올 선생의 친필 사인과 ‘홍준표 의원님께’라는 글씨가 있어서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책의 전 주인에 관한 기록이 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아무리 책의 내용이 좋아도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도올 선생의 책처럼 유명 인사의 사인이 있다거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을법한 유명 인사의 편지가 적혀 있다면 몰라도 남이 쓴 편지가 내가 읽어야 할 책에 있다는 것은 영 탐탁치가 않다.

 

나는 편지가 적힌 책이 보존 상태가 만족스러우면 사는 편이다. 원래 책을 사기 전에 편지가 적혀 있는지 확인하는데 가끔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도 책의 전 주인의 흔적이 있다고 해도 괜히 편지가 적힌 부분을 오려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책은 한 사람의 주인 곁에 오래 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헌책방에 전전하는 운명, 그 둘 중 하나이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책 편지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편지 속 내용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감성이 느껴지는 시적 문장은 빛난다. 왜 이런 좋은 내용의 편지가 적힌 책을 파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괜히 내가 그 편지를 쓴 무명인의 심정처럼 씁쓸하고 약간의 슬픈 감정도 느낀다.  내가 발견한 책 편지들은 사랑하는 이성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다. 

 

올해 초에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구입했는데 뜻밖에도 속표지에 짧지 않은 편지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승희’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보낸 편지다. 문장으로 봐서는 필체가 상당한 걸로 보인다. 글씨도 무척 잘 쓴다. 내용으로 봐서는 승희는 어느 남자에게 음악 CD를 선물로 줬다. 승희는 솔로 가수가 아닌 여성 그룹의 멤버이며 2004년에 정식 데뷔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남자는 이 책을 선물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는데 가수가 되어서 상경했을 것이다. 남자 입장에서는 그녀의 성공이 기쁘고 자랑스럽겠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삶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인가 보다’라는 문장에서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어느 남자의 슬픈 비극이 연상된다. 결국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사랑해’ 대신에 ‘행복해라’ 밖에 없다.


남성은 승희에게 고독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전한다.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이다. 고독과 행복은 함께 공존한다...?  이 편지 속 사연이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10년이 지난 책 편지는 지나간 추억이 되어 망각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걸 또 내가 영영 오랫동안 잊힐 뻔했던 망각의 감옥에서 구출한 것이다. 과연 승희는 어떤 가수였을까? 아마도 승희는 본명일 수도 있겠다.

 

지난주에 내가 자주 다니는 헌책방에서 책 편지가 있는 책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정현종 시인의 시집 『나는 별 아저씨』다. 이 시집이 출간된 지 꽤 오래됐고, 편지 또한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시집에 걸맞은 한 편의 시 같은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은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고, 좋아했다. 그래도 자신은 시를 잘 알지 못한다고 겸손의 표현을 썼다. 생일선물로 시집을 줬는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것을 권한다. 참으로 좋은 편지 내용이다. 문장 속에 삶의 여유가 살짝 묻어있다. 1993년에 편지를 쓴 사람은 지금도 어디선가 변함없이 시를 즐겨 읽고, 그 시간을 통해 여유를 느끼면서 잘 지내고 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이런 편지가 무척 고맙다. ‘객관적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가슴 속에도 많은 여유가 찾아들기를 바란다’ 남이 쓴 편지는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사람에게 삶에 힘을 불어넣는 좋은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시집에 있는 편지 덕분에 삶의 여유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1년 전에 쓴 편지가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읽게 되는 이 운명적인 만남. 이런 편지 한 통이 과거와 현재를 ‘감성적 공감’이라는 무언의 감정으로 연결될 때가 있다. 이래서 사는 게 참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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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2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어떻게 도올 선생은 자기 책이 헌책방에서 딱걸렸을까?ㅎ
이 페이퍼 승희라는 가수한테 딱 걸리는 거 아닐까?
이맛에 헌책방을 다니기도 하겠지?
그런데 바로 이점 때문에 책에 자기 서명이나 인삿말이 들어가는 게 조심스러워져.
책선물에 밋밋하게 그냥 주기도 뭐하고.
나도 요즘 헌책방에 책을 내다 팔곤하는데
저자 사인본은 차마 못 팔겠더라.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팔자니 그렇고, 안 팔자니 그렇고...
그래도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간직하고 있다만.ㅠ
그런데 진짜 저 준호라는 사람 글 잘 쓴다. ㅎ

cyrus 2014-05-28 22:43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가수 중에 '승희'라는 이름은 없는 것 같아요. 설마 이런 조용한 블로그를 보겠어요? ㅎㅎㅎ 저는 사인본은 절대로 팔지 않아요.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은 보통 책보다 가치가 높고, 특별하니까요. ^^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6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갖아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왕 또는 리더가 된다는 것은 시인 홍사용이 노래한 것처럼 영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 시간 속의 삶이라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는 것과 비유할 수도 있다. ‘눈물의 왕’은 설움이 넘치는 모든 땅의 왕이다.

 

 

 

 

 

 

 

 

 

 

 

 

 

 

 

 

여기 그림 속 왕도 지금 슬픔에 빠져 있다. 조르주 루오의 『늙은 왕』은 전혀 왕의 권위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늙은 왕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지만, 그 역시 견디기 힘든 슬픔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것이다.

 

루오는 순종과 고통, 죽음과 부활 같은 종교적 주제를 화폭에 담았다. 『늙은 왕』에서도 루오가 평소 다루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있듯이 왕에게 권력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된다. 리더는 고독하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왕을 감싸고 있는 깊은 물속 같은 어두운 청록색은 침통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자신의 턱 밑 가까이 오게 될 죽음의 공포가 두렵고 생각만 할수록 잠이 오지 않는다.

 

‘어머님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왕은 남모르게 소리 없이 혼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생리적 액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신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자신이 나약한 왕임을 심어주어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잃을 수 있다.

 

'눈물의 왕‘과 늙은 왕은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자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슬픔의 원인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왕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감상적인 지도자는 자칫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눈물을 먼저 흘리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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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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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인 1986년, 정부는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에 놓여 있는 목민심서가 눈길을 끈다’고 보도할 것.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기자들의 사진촬영에 대비해 이 책을 꼭 비치하도록 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비록 읽지는 않고 선전용으로 홍보효과를 노린 것일지라도 이 책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은 지방행정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담고 있다. 책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애민(愛民)정신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이다. 특히 관(官)이 몸을 낮추어 민생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했다.

 

옛말에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했다. 이 책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6가지 계율이 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고, 청탁을 물리치고, 철저히 절약하고, 즐겨 베풀라는 것이다. 다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곧은 마음과 곧추선 자세야 말로 행정을 하기에 앞서 목민관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심은 역시 민본주의이다.

 

이 책이 쓰인 1800년대 초반은 임진왜란 이후 군사력 증강에 국력을 기울인 결과 국가재정이 궁핍하던 때였다. 관리들은 뇌물 챙기기에 바빴다.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으나 조정은 나라 다스리는 일보다 당파싸움에 빠져 국가가 몰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사실 목민에 대한 정약용의 구상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할 때 임지에 따라가서 견문을 넓혔다. 그뿐 아니다. 자신도 한때는 암행어사와 수령으로서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생생히 목도한 터였다. 그래서 다산은 책의 서문(자서, 自序)에서 수령들의 부패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질타하고 있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5쪽)

 

다산이 살다 간 시대와 오늘의 현실은 무엇이 다른가. 혹시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200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꼽는다. 정책 대결이 아닌 정당 간의 지역 대결만 있고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속에서 우리의 정치의 시계는 멈춰 선 지 오래다. 매일 보도되는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을 만연시켰다. 아직도 이 나라는 부정과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직자들의 부패 사건은 무시로 터지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정치권을 보면서 새삼 다산 정약용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한 다산이 요즈음 전개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이를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다산이 암행어사와 부사 등의직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자신의 경험이어서인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의 처신은 다르지 않아 항상 청렴과 자기희생이 으뜸의 덕목으로 꼽힌다. 공직자의 몸가짐과 자기관리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산은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뇌물에 또는 사사로운 인연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후손에까지 불명예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그 중 율기(律己)편에 나오는 한 구절. ‘청렴은 수령의 본래 직무로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잘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관피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공직 개혁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시 열풍’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국가 경영에 참여하고 국민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봉사정신을 갖추지 않은 채, 소시민적 안락을 추구하고자 공직을 지망한다면 걱정스럽다. 공직자는 귀찮은 일도 기피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골치 아픈 경쟁도 벌여야 한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지망할 곳이 아니다.

 

공직자가 된 사람의 최고 욕심은 최고위 공직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일 것이다. 그런 큰 욕심을 접고 눈앞의 조그만 뇌물에 현혹돼 중도에 흠집이 나거나 낙마하고 만다면 큰 욕심을 채울 방법이 없게 되므로 진짜 큰 장사꾼만이 청렴한 공직자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격한 도덕성으로 무장되지 않은 공직자가 돈까지 가지려는 데서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옛사람들의 뜻이었다. 교체되고자 슬퍼한다면 수치스럽지 않은가?” (해관 6조 중에서, 328쪽)

 

그 밖에도 다산은 청렴한 선비의 부임길 행장은 이부자리와 속옷 외에 책 한 수레라고 했다. 또 퇴임 행장은 낡은 수레와 여윈 말에 토산품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고생한 노력 끝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생각하면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공직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이루었다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하는 초연함도 있어야 한다. ‘공복(公僕)’이라는 초심을 잃고,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면 ‘박봉(薄奉) 타령’을 늘어놓거나 ‘검은 돈’의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기 쉽다.

 

‘청렴’은 여전히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공부문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과 권한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의 인간됨과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청렴 다음으로 정약용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수양이다.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목민관의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목민관의 몸가짐이 바로 서야 올바른 행동이 나오k고 이를 아랫사람이 본받아 원칙과 기강이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청렴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지만, 그 무엇도 인물 검증의 잣대가 될 수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유권자의 이름으로 『목민심서』를 읽었는지 시험이라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악독하고 간사한 자는 모름지기 정당(政堂) 밖에다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전 6조 중에서, 147쪽)

 

만약에 다산의 시험에 통과된 공직자 중에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과오를 덮은 채 공직에 복귀하려는 사람이 많다. 과연 누가 그들을 믿고 선거에서 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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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군 입대 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입대를 하는 순간, 평생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 한창 혈기왕성한 사내들에게는 군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총각 딱지’를 뗀다. 집창촌에 가서 섹스로 욕구를 푼다.

 

집창촌은 ‘총각 딱지’를 떼려는 젊은 사내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들도 많이 찾는다. 집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섹스할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집창촌으로 향한다.

 

아내는 사랑해서 섹스를 할 수 있지만, 집창촌의 매춘부는 그저 섹스하기 위한 여자일 뿐이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매춘부는 영혼 없는 섹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매춘으로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쾌락의 감각은 일시적이다. 남자의 뇌는 자위를 한 후에 성적 흥분 상태가 가라앉으면 이성을 되찾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자타임’이라고 한다. 매춘부들도 처음에 돈을 많이 받고, 남자 손님들로 성욕을 풀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섹스를 하고 나면 후회감이 밀려올 것이다. 섹스로 인해 점점 더 망가져만 가는 몸. 늙으면 매춘을 할 수 없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차라리 몸을 파는 직업이 아니라 조금만 더 판단을 잘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매춘부도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남성들을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과연 이것을 ‘직업’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매춘부라고 해서 섹스에 굶주린 색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매춘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상품화시켜서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런
행위 때문에 남자들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노는 계집, 창>에서 집창촌에 간 중년 손님이 매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소란스럽게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다. 손님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거나 돈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춘부는 그들로부터 무시 받고,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험한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 유머 관련 페이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린 20대 남자의 글을 사진으로 캡처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자신의 사연을 올린 21살 남자는 영등포에 위치한 여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40대 아주머니와 섹스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비싼 돈에 걸맞지 않은 매춘 행위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화가 나서 자신보다 20살 많은, 거의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너 같은 창녀는 죽어야 된다’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남자의 멸시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어이가 없다. ‘빡촌(집창촌의 속어)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보통 눈물도 없지 않나요? 독해지지 않나요? 이 아줌마는 울면서 나가더라고요. 창녀도 직업 아닌가요? 서비스업 아닌가요? 그럼 손님한테 잘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잘못했으니 욕 먹는 건 당연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춘이 정당한 직업이고, 서비스업이라고 해야 될 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40대 아주머니가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좋지 않게 본다. 하지만 매춘, 그러니까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를 함부로 손찌검하고 욕설을 하는 21살 남자도 잘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에 공개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저 섹스로 욕구를 풀지 못한 화풀이를 매춘을 ‘직업’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은 나잇값 제대로 못한 철없는 행동이다.

 

이 남자는 매춘부를 그저 섹스를 하기 위한 상품으로만 보고 있다.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춘부는 눈물도 없고, 독하다고?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 손님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욕설을 듣는다면 제 아무리 섹스가 좋아서 매춘을 하는 여자라도 화가 나고, 마음에 상처받기 쉽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그저 섹스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들이 매춘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인식은 이중적인 생각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치 에두아르 마네가 파리의 매춘부을 연상시키는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을 때 욕설과 비난의 융단폭격이 쏟아진 것을 연상시키듯 매춘부를 ‘성적 상품’으로 격하시켜 멸시하는 모습은 위선적이다. 살롱의 신사들은 매춘부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마네의 그림이 격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고귀한 비너스가 벌거벗은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네가 활동했던 19세기 파리는 매춘이 성행했다. 마네의 그림에 분노한 신사들 중에 매춘을 안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밤이 되면 집창촌에서 자주 보던 매춘부의 누드를 살롱에서 마주하는 순간, 낮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다. 당시에 유행하는 누드화에서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성 모델’이고, 「올랭피아」는 그저 여성 모델이 아닌 매춘부였다. 올랭피아는 그림 속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올랭피아」의 모델은 실제로 매춘부가 아니다. 평소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섰으면 화가로 활동한 빅토린 뫼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매춘부는 ‘여자 아닌 여자’다. 마음이 연약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리고 밤만 되면 그녀를 탐하는 남자들은 매춘부를 보통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러서 안 되고, 그저 남자 손님의 정액을 받아야하는 상품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한 집안의 딸이거나 가장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기 때문에 매춘을 할 뿐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매춘부들의 말 못하는 마음을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잘 알고 있었다. 로트렉은 물랑 루즈의 사창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매춘부들의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마네가 매춘부처럼 누드를 그렸다면, 로트렉은 진짜 매춘부의 누드를 그렸다. 누드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일상 하나하나 그림으로 묘사했다.

 

 

 

 

로트렉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1897년

 

 

로트렉이 묘사한 매춘부의 모습은 반쯤 벌거벗고 있지만, 그렇게 야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힘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삶이 좋을리가 없다.

 

로트렉의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속 매춘부는 너무나 평범한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매춘부의 손엔 방금 벗은 듯한 블라우스가 들려져 있다. 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선 이 부분이 여자로서의 세월이 불과 얼마 안 남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핵심적 의미는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왼쪽에 그려진 흐트러진 침대가 그것이다. 이는 매춘부가 나이 들면 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사랑 받지 못함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이 그림은 매춘부를 모델로 했으나 로트렉은 시들어가는 여인의 육체의 덧없음을 그림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내려 애썼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매춘을 정당한 노동행위, 직업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해도 매춘부를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매춘부도 여자다. 섹스만 하는 장난감이 아니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여자. 여자 아닌 여자. 그녀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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