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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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빠르다. 벌써 5월 말이다. 젠장,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니. 매번 시간의 끝에 서있으면 허덕거린다. 시간은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아직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단하고 치열했던 지난날을 반추하고 나만의 영혼이 성숙되어야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투명한 유리벽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유리벽 밖으로 세상은 보이는데 정작 만져지지 않는 답답함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인생이 답답하고 지치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가보자. 화보집을 연상시키는 크기의 책으로 들어서는 순간, ‘유리벽’에 둘러싸인 인생살이에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벽 밖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좋은 비상구가 된다.

 

 

 

 

피에르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년

 

그러나 『영혼의 미술관』에 입장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이 두껍고 무거운 편이지만 여전히 ‘미술’이라는 단어가 어려워서 그 곳으로 들어가기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미술을 왜 어려워하는 걸까. 나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미술이 우리 삶에 밀착할 정도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똥인지 작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똥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피에르 만초니라는 예술가는 자신의 똥을 깡통으로 포장해서 ‘예술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제목은 ‘예술가의 똥’, 제목만 봐도 그의 예술적(?)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라는 단어가 없다면 그냥 똥이다. 미술작품이 될 수 없다.

 

현대미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오래전에 마르셀 뒤샹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화장실 변기에 사인만 한 채 미술관에 전시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관에 죽은 상어 시체를 보관해 13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렸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상징성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세상에 없는 예술가의 작품일수록 대중은 더욱 곤혹스럽다.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왜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는 걸까? 너무나 궁금해서 따지고 싶어도 예술가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다. 죽은 예술가는 말이 없다.

 

우리가 예술을 멀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비싸게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개인의 이해나 감성이 부족하다고해서 예술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예술가들을 위한 고결한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감상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사람들마다 각각 인식의 차이가 있겠으나 그림을 보고 감상하는데 있어 정답이란 없다고 본다.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머리로 예술가의 의도를 억지로 알아내려고 하면 예술이 어렵게 느껴진다. 예술가가 그림을 그린 이유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상징성 등을 알면 좋지만, 오히려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림을 보는 것과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와 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그림을 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그림을 읽는 것이고, 후자는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림을 읽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끌리는 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 낫다. 괜히 똑똑하게 보이려고 그림 앞에서 힘 줄 필요는 없다. 우선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 예술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방식에 연결점을 찾는 것도 좋다.

 

고단한 세월에 단단하게 뭉쳐진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는 예술의 역할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을 볼 때 자신만의 자유롭고 엉뚱한 시선도 괜찮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자아와 타자 등 이분법적 논리에 갇힌 ‘유리벽’을 파괴시킬 수만 있다면.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아름다운 그림은 우리를 더 감동시킨다. 아름다운 그림이 슬픔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림을 볼 때 그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질 때 예술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음미할 수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암초」  1825년경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서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쪽)

 

 

예술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삶의 조건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낭만주의적 의미로 숭고함을 지닌 작품들이 그러하다. 별이나 대양, 거대한 산맥이나 대륙의 단층을 묘사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암초」를 마주하면 삶의 좌절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라는 광대한 세상의 부분적인 과정임을 알게 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즐거운 공포에 휩싸이고 영원의 존재 양상에 비해 인간의 불행이란 게 얼마나 사소한지 느끼면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는다.

 

드 보통은 예술의 7가지 기능으로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을 분류한다. 『영혼의 미술관』의 전시실은 드 보통의 분류대로 7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나쁜 기억을 교정해 주고, 희망을 주며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닫게 해서 슬픔에 대한 내성을 키우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하며 자기 자신을 좀 더 이해하도록 이끌고,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마지막으로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이끌어준다. 전시 순서(목차)대로 보는 것보다는 마음 가는대로 평소 관심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도 좋다. 슬픔을 견디기 어렵다면 ‘슬픔’ 전시실에 가면 되고, 이번 기회에 자신을 성찰하고 싶다면 ‘자기 이해’ 전시실로 간다. 『영혼의 미술관』은 그저 그림을 보기 위한 엄숙한 곳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다.

 

‘균형 회복’이라는 이름이 붙인 전시실에 가면 삶에 허전한 부분을 채우고 보완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이 주는 균형감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질서를 다시금 확인하게 하며, 우리의 열정을 자극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심리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약점들을 보완해준다. 『영혼의 미술관』에 가면 반갑게도 한국의 백자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드 보통은 백자를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본다. 한국의 백자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타원형으로 이루어지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시선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봐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니콜로 피사노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1500~1501년경

 

그는 여기서도 ‘사랑’을 얘기한다. 전작에서도 ‘사랑’을 주제로 글을 쓴 만큼 ‘사랑’을 논하지 않는 드 보통은 그의 벗겨진 머리처럼 허전하다. 사랑.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리면 치명적인 상처로 변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랑에 쉽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두 단어로 이루어진 감정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허허벌판의 사막과 같다. 그 곳 한가운데에 서 있기만 하면 갈증이 생긴다. 사랑은 곧 우리 메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그래서 사랑을 느끼기 위한 우리의 호기심과 노력은 멈출 줄 모른다. 니콜로 피사노의 그림 「목가시 : 다프니스와 클로에」 는 그동안 살아가면서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려준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예술이 어렵다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예술을 찾게 된다. 우리 삶에서 사랑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결국 예술도 우리 삶에서 때려야 뗄 수 없다. 예술은 세상의 유리벽에 갇혀 훌쩍해진 영혼을 살찌우게 만든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역할을 한다.

 

이제 예술로서 우리가 잊고 있던, 잃어버린 삶의 일부를 찾아야 한다. 그림을 통해 치유와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숟가락 하나라도 품격 있는 것을 고르는 일부터 주거. 도로 등 환경을 개선하는 일까지,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상의 일들이다. 『영혼의 미술관』을 전체적으로 다 둘러봤다면 이런 문장이 적힌 출구로 나가면 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쪽)

 

과유불급이라고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술에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일상과 동떨어지게 된다면 ‘치유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고 만다. 예술 자체가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니다. 예술지상주의는 현실 지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예술이라는 벽에 갇히게 된다. 과연 드 보통의 생각대로 예술작품이 덜 필요해지는 세계가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만 가고, 지친 현대의 영혼들은 또다시 『영혼의 미술관』으로 찾으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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