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협회라는 단체에서 ‘모범장서가’를 공모한다. 기간은 오는 29일까지다. 자격 조건으로 2천 권 이상 도서를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 자천 및 타천 모두 가능하다. 신청자 중에 총 5명을 선정한다. 모범장서가로 선정되면 10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을 받을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에 꽂혀 있는 책이 몇 권인지 세어봤다. 대충 눈으로 어림잡아 세어 봐도 천 권 이상은 되지 않았다. 내 방의 크기는 넓지 않다. 일단 천 권이 넘는 책이 소장될만한 공간은 아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 세트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족히 300~350권 정도 될 것 같다. 가끔 지금까지 구입한 책들이 몇 권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시간이 있으면 일일이 한 권 한 권 세어 보면서 엑셀로 정리하고 싶다. 이렇게 따로 정리하면 책 권 수를 확인도 하고 내가 어떤 분야의 책을 구입했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엄청 많이 사는 편이다. 여윳돈이 생기면 어떻게든 책 한 권은 꼭 산다. 작년에 알라딘 오프라인 매장이 대구에 생겼을 때부터 책 사는 횟수가 많아졌다. 항상 인터넷 주문은 알라딘에, 오프라인은 교보문고와 알라딘 대구점 그리고 헌책방을 애용한다. 인터넷 주문은 한 달에 많아야 세 번 구입한다. 땡스투 마일리지로 모은 적립금이 많지 않아서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사용한다. 구입 횟수로만 보면 적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주문하면 책 2권 이상 된다. 한창 마일리지가 많았을 때는 5만 원 이상, 5권 이상 구입한 적도 있다. 나름 최소 비용으로 책을 많이 사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알라딘 중고샵도 많이 이용한다.

 

오프라인 구입 횟수로는 요즘은 알라딘 매장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은 교보문고, 헌책방이다. 알라딘 매장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방문한다. 스마트폰으로 매일 알라딘 중고매장 어플을 확인한다. 알라딘 어플을 설치하면 각 지역별 중고매장으로 접속할 수 있다. 알라딘 중고매장 홈페이지도 있지만, 어플을 많이 사용한다. 손님이 판 책과 매장에 비치된 책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만약에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당장 매장으로 향한다. 이때만 되면 괜히 초조해진다. 다른 손님이 그 책을 구입할까봐 걱정한다. 특히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절판본일수록 불안감을 느낀다. 이상하게 알라딘 매장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평일인데도 차가 막히는 것 같고, 빨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매장으로 들어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지. 다른 손님이 내가 찜한 책을 구입한 사실을 알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너무 아쉬워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책을 구입한다. 이놈의 습관이 참 무섭다.

 

나는 책 사는 습관이 일종의 ‘벽’(癖)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잔뜩 사놓고 바로 읽지 않고 책장으로 꽂히는 나쁜 습관이 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언젠가는 꼭 읽는다. 요즘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구입하자마자 한 번에 완독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도 장서가가 되고 싶다. 그렇다고 책을 무조건 많이 사야 장서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는 책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 같다. 돈이 없어서 당장 못 사는 책은 언젠가는 꼭 산다. 고등학생 시절에 책을 많이 구입하지 못했을 때 도서관을 애용했다. 아니면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은 다 읽어야 책을 구입하지 못한 아쉬움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꼭 구입한다.

 

 

 

 

 

 

 

 

 

 

 

 

 

 

 

예전에 책 사는 습관이 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최근 살만 악타르의 『사물과 마음』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달라졌다. 사물을 소유하고 싶고, 거기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물건에 집착한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이 상실되면 무척 괴로워한다. 물건에 대한 탐닉은 수집벽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 ‘수집’과 ‘잡동사니’의 차이점을 소개한다. 단순히 물건을 모은다고 해서 수집에 가까운 행위로 보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수집으로 보일지 몰라도 상대방에게는 그저 잔뜩 널려 있는 잡동사니일 뿐이다.

 

살만 악타르가 분류한 '수집'과 '잡동사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수집품은 물건의 주인, 즉 수집가로부터 특별한 가치를 부여 받는다. 그래서 진정한 수집가는 양으로 따지지 않는다. 무작정 수집품을 사들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가치 있는 물건인지 신중하게 따져보는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 잡동사니를 모으는 것은 수집 행위와 반대다. 현재까진 필요 없는 물건인데 언젠가 필요해질 때를 대비해서 내다버리지 못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물건을 모아두기만 한다.

 

수집과 잡동사니를 모으는 행위에 차이점은 있지만, 잡동사니를 모으는 행위도 수집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 아무렇게나 모은 물건이지만 특별한 계기로 인해 수집가로 변모한다. 반대로 수집에 대한 열망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중독이 된다. 자신의 능력 및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채 특정 물건을 모으는 데 매달린다.  

 

살만 악타르가 말하는 수집가의 유형을 보면서 나는 아직 정상인(?) 수준의 책 수집가라는 걸 느꼈다. 책 한 번 사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 책 내용이 괜찮은지 목차를 포함해서 몇 페이지는 읽어본다. 비용도 고려한다. 손에 쥐고 있는 비용으로 몇 권의 책을 살지 꼼꼼하게 생각한다.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생각 없이 책을 사지 않는다. 또 구입해서 읽은 책은 서평으로 기록을 남긴다. 아무리 완독한 책이라도 서평을 남기지 않으면 다 읽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뭔가 기록을 남겨야 직성이 풀린다. 이왕 나름 읽을 만한 책을 골랐으면 이에 대한 감상쯤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서의 흔적은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다. 구입한 책에 관한 서평 쓰기가 습관이 되고 의무 활동으로 여긴다면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사는 나쁜 습관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회라서 그런지, 일반인 장서가를 만나기가 드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장서가는 대개 지식인, 작가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 장서가가 완전히 절멸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음지 속에 독서를 즐기면서 책을 수집하는 열정적인 애서광들이 숨 쉬면서 살고 있다. 가끔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나보다 뛰어난 애서가들을 만나게 된다. 장르문학 위주로 즐겨 읽고 책을 사는 애서가가 있는가 하면,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헌책방의 위치를 꿰뚫고 자주 방문하는 헌책방 애서가도 있다. 나는 독서 모임 덕분에 헌책방 애서가를 만나서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 분의 만남 덕분에 헌책방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범장서가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독서 문화 보급에 기여하는 장서가가 되고 싶다. 읽고 난 책에 대한 서평 작성은 책을 널리 알리는데 중요하다. 그렇다고 내 서평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내용이 어줍기만 하지만, 일단 책 자체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만으로 해도 서평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흘러가는 세월에 잊혀져가는 절판된 책에 대한 기록도 남기려고 한다. 비록 절판된 책의 서평은 더 이상 구입할 수 없기에 재출간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잘 내용이 좋아도 땡스투 적립금을 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읽을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서평 하나라도 없는 절판본도 있다. 절판의 운명에 처한 책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 조용히 서점에서 사라진 것도 있으며 출판사가 망해버리는 바람에 책 발행이 끊기기도 한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책을 발견하면 기록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런 책이 나중에 재출간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요즘 관심 가는 절판본이라면 법정 스님이 쓰신 책이다. 비록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자신이 남긴 모든 글과 책은 절대로 팔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책에 유독 집착이 강한 이 어리석은 중생은 스님의 기록이 이렇게 잊혀져가는 것이 아쉬워서 터무니없이 매긴 값비싼 가격이라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스님의 명문을 알리고 싶다.  

 

 

 

 

 

 

 

 

 

 

 

 

 

 

 

 

한스 보하타라는 독일의 서지학자가 말하길, 애서가는 자기 책의 주인이고 애서광은 자기 책의 노예다. 다만 책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해 절도 이상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가져도 무방하다고 본다. 20여 년 동안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훔친 2만 3600여권의 희귀본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세운 스티븐 블룸버그 같은 장서가는 되고 싶지 않다. 엄연히 말하는 그는 장서가라기보다는 도서절도범에 가깝다. 다시 구하기 힘든 책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열정을 과하면 책의 노예가 된다. 책의 주인은 소유의 집착을 깨끗이 버릴 줄 안다. 의외로 책 좋아하는 재벌가는 사후에 자신의 장서로 공공도서관을 만들어 개방하기도 한다.

 

 

 

 

 

 

 

 

 

 

 

 

 

 

 

 

 

 

 

책의 노예가 되는 순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어떻게 돌변하지 모른다. 어떻게든 책을 가지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잡동사니 유형은 그나마 정상적이다. 그러나 책을 사랑하는 나머지 미쳐버리면 강박증으로 변질된다. 플로베르의 단편소설 '애서광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갸코모는 자신이 소유한 책이 세상에서 유일함을 과시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 죽음을 택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갸코모는 경쟁자의 집에 불이 나자 화염 속에 뛰어들어 원하던 책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그 책이 자신의 집에서 발견돼 방화범으로 기소된다. 그의 변호사가 세상에서 유일한 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책을 구해 와 제시한다. 하지만 갸코모는 격분한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판장에게 자신이 불을 지르고 책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그 설득이 통해 갸코모는 사형대에 오른다.

 

사실 갸코모처럼 장서가나 애서가 입장에서는 나름 희귀한 가치가 있는 절판본이 복간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구입한 절판본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책인지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착각이다.

 

갸코모와 스티븐 블룸버그는 책에 미쳐버린 나쁜 사례다.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장서가 또는 애서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내가 책의 주인인지 아니면 책의 노예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나 자신을 스스로 정상적인 책 수집가, 애서가라고 분류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나 또한 그렇다. 사물에 향한 인간의 집착은 이성과 도덕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도 책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다. 그런 고귀한 광기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서 우리나라 사람들 책 좀 많이 읽기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나만의 욕심일까? 우리나라도 장서가, 애서가가 많아야 한다. 이제 우리도 독서문화와 함께 도서수집문화 혹은 장서문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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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14-08-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범장서가'에 응모해볼려고 집에 있는 책을 세어봤어요.
거실 벽 두 군데를 책장이 차지하고 있고, 빈 방 하나에도 책장이 있거든요.
아이들 책을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거실에 있는 제 책만 천 권 정도가 되더라고요.
2천권이 채 안되는 것 같아서 좀 아쉽기도 하네요. ^^

cyrus 2014-08-08 23:20   좋아요 0 | URL
천 권도 많은데요! Breeze님 ㅎㅎㅎ 모범장서가 공모는 올해가 처음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시행된 것 같은데, 내년에 한 번 도전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blanca 2014-08-0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 책을 엑셀로 정리하는 것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 저도 언젠가 하고 싶어요. 그러면 분야별로도 작가별로도 다 정렬이 가능할 텐데요. 저도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처분한다,는 원칙을 최근에 세워 책을 더이상 늘리지 않으려고요. 공간도 그렇고. 그래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님과 닮아 있어 참 반가운 페이퍼네요. cyrus님은 근사한 애서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cyrus 2014-08-08 23:2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분류별로 미리 정리하면 나중에 이사 갈 때 책장 배치할 때 편리해요. 블랑카님도 집에 책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블랑카님이 읽으신 책을 아이들도 읽는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
 
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1001-291] 심판

 

 

 

 

카프카의 『소송』은 줄거리가 비교적 간단하지만 그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난해하다. 주인공 요제프 K가 자신의 서른 살 생일 아침 돌연 죄명도 모른 채 낯모르는 사나이들에게 체포된다. 무언지도 모르는 소송 때문에 1년 동안 동분서주 고민하다가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밤 처형된다는 이야기다. 그 역시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답게 느닷없는 사건 속에 던져져 당황해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속을 맴돌다가 영문도 모르고 사라져간다.

 

K는 누군가의 무고라 짐작할 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 신부, 감독관, 변호사, 판사 모두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화가 티토렐리만이 그가 아무 죄도 없음을 확인해 주지만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피고를 도와주는 방법은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알려주어 피고가 헛된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확인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이 ‘우리 존재의 원상을 현실의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본질적인 해석은 논외로 하고 소설의 피상적인 얼개를 이루는 법의 세계만을 보자. 어떤 계기로든 복잡한 법의 구조에 얽혀 들어가 본 사람은 그 권위적인 미로의 세계에서 K와 같은 심정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무고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경우라면 그 괴로움과 답답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카뮈는 이 난해한 소설이 위대한 이유를 “모든 것을 제시하고 아무 것도 확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K는 자신의 무죄를 우리 독자들 앞에 제시하지만, 우리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우리도 어느새 K가 되어 무죄를 확증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도 끝내 찾을 수가 없게 되고, 요제프 K처럼 좌절하고 만다.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처형당하는, K의 황당한 최후는 카프카 본인 스스로 비유했던 ‘막다른 골목’에 마주치는 운명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소송』은 독자에게 영원히 ‘멘붕’을 선사해주는, 난해한 소설로 남게 되는 것일까? 과연 카프카를 읽은 독자는 그가 만들어 놓은 ‘막다른 골목’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도 『소송』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K를 거대한 관료주의에 희생된 현대인으로 보기도 하면,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감시인과 사형 집행인들을 나치스 친위대원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K는 나치스 친위대원들에 의해 강제로 체포되는 유대인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K를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독자와 카프카 관련 연구가들은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를 해석했다. 그러나 K가 무슨 죄목으로 소송에 휘말렸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 해석을 찾기가 보기 드문 편이다. 『소송』 읽기의 핵심은 바로 K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K가 진짜 죄가 없다면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미지의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 혹자는 K를 죽인 괴한을 범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런 해석을 염두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댄 애리얼리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청림출판)

 

일단, K가 정말 무죄인지 증명해야 한다. 과연 그는 억울한 누명에 희생된 불행한 인물일까? K는 정말 억울한 최후를 맞는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복잡한 소송에 인생이 꼬이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개 같은’ 죽음을 맞는다. 그뿐만 아니다. K의 죽음이 더욱 비극적이고 불행한 이유는 K 본인은 분명 죄를 저지르고 있음에도 죽을 때까지 ‘무죄’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이 빠져 들기 쉬운 ‘인지부하’(cognitive load)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이 갈 길 바쁜 K의 발목을 잡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K, 그는 대형은행 부장이다. 상당한 양의 은행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이 와중에 소송 문제가 방해된다. 잠시 은행 업무를 내려놓고 소송 진행에 집중하고 싶지만 휴가 신청할 여유가 없다. K는 고민한다. 은행 업무를 계속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이 말도 안 되는 소송 준비에 몰입할 것인가? 죄가 없는데 소송을 준비한다는 건 시간 낭비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소송 때문에 휴가를 낸 사실이 은행 내부에 알려지게 되면 결국 죄가 있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과 같다. 은행 동료들뿐만 아니라 그가 담당하는 고객들의 귀에까지 황당한 소송 사건이 알려지면 K는 더욱 난처하다.

 

오랜 고민 끝에 K는 휴가를 내지 않고도 소송에 대비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가 담당하는 고객 중 한 사람인 제조업자가 소송 준비에 도움 줄 수 있는 화가 티토렐리를 소개시켜줬기 때문이다. 제조업자의 은밀한 제안은 K에게 이득이다. 자신을 둘러싼 소송에 관한 소문이 은행 전체에 퍼지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K는 당장 화가를 만나기 위해서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는 변명을 둘러댄다. 자신과의 상담을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손님을 돌려보냈다.

 

K의 머리로는 몸이 고단할수록 업무가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자신의 무죄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싶은 ‘감정의 유혹’ 때문에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소송을 준비한다. 깊고 정교한 생각을 담당하는 뇌가 바쁘게 일하고 있을수록 인간은 감정의 이끌림에 저항하기가 어려진다는 게 '인지부하'의 핵심이다. 착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소소하게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높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지치고 고갈된 상황에 놓이면 덜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K는 변호사 훌트의 간병인 레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에로틱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레니가 소송을 해결하기 위한 조력자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K는 이들을 진정한 조력자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소송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해 뇌물과 매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행동들은 분명 자신은 죄가 없다고 떳떳하게 밝혔던 사람이 모두 저지른 것이다.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이득과 손실을 따져 부정행위를 할지 말지 결정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난 착하게 살아왔으니까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아'라며 자기 합리화에 빠져 속임수를 쓰게 된다. K도 마찬가지다. 무죄라고 주장했던 K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었다. “나는 죄가 없어!” 소송과 관여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K의 무죄 주장은 도덕적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되고 말았다. 그런 올가미가 얼굴에 씌운 K는  스스로 높은 도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졌다. 자신의 부정행위에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법정의 모든 발언 뒤에는, 그러니까 제 경우로 보면 체포와 오늘의 심리 배후에는 어떤 커다란 조직이 있습니다. 이 거대한 조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또 제 경우처럼 대개는 아무 성과도 없는 소송을 벌이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게 이처럼 무의미한데 어떻게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감시인들은 체포된 사람들의 소유물을 맡아두는 창고 이야기를 했는데, 전 그곳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이 애써 모은 재산이 도둑 같은 창고 직원들한테 도둑질당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67~68쪽, 발췌 요약)

 

 

소설 초반부에 첫 재판을 받을 때만 해도, K는 법조인의 부패와 무능함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무죄임을 정당하게 밝히려는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송 사건이 간단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장기화될수록 K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만 갔다. 게다가 자신의 무죄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든든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진짜 죄가 없는 K는 아이러니하게도 무고죄를 벗어나는 과정에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죄를 범하고 만다. 한순간에 K는 합법적 절차를 거부하는 죄를 저질렀다.

 

K는 소송 진행이 길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판결이 더욱 불리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기에 K는 자신이 결백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이 K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무죄를 인정하기를 바랐다. 법원의 판사가 아닌 엉뚱한 사람에게. 화가 티토렐리만이 유일하게 K의 무죄를 확신하지만 그것은 법적 효력이 없다. 그저 죄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 화가의 질문에 무기력한 K는 잠시 동안 자신을 죄어온 ‘소송’에서 벗어난 것처럼 기쁨을 느낀다.

 

 

“당신은 죄가 없나요?”
“네.”
K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정말 기뻤다. 특히 그것이 사적인 개인을 상대로 하는, 그러니까 어떠한 책임도 뒤따르지 않는 것이라서 더욱 기뻤다. 그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기쁨을 만끽하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는 완전히 결백해요.” (191~192쪽)

 

 

죄를 저지른 K가 처형당하는 것은 결국 인과응보에 가까운 예정된 결말일지도 모른다. K가 부당한 소송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진짜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저지른 사소한 부정행위들. 지금까지 K의 행동이 무고한 사람을 억압하고 무의미한 재판을 연 거대 관료 조직에 저항하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K는 거대 관료 조직에 희생된 무력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이 비판했던 관료 조직의 습성에 지배되어 스스로 파멸하는 존재이다. 성과 없고, 무의미한 소송에 집착할수록 K는 이미 범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완전 결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막히고 말았다. 그곳을 탈출하지 못한 채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도스또예프스끼“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카프카의 『소송』에서 나왔다. 부정행위를 하면서 스스로 선량하다고 착각하는 요제프 K. 그는 자신이 그런대로 착한 사람이라 믿으며 이 정도 속임수는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강도에게 빼앗긴 새 외투를 찾기 위해 밤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영혼처럼 법원 주위에 떠돌며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요제프 K의 영혼을 만나 볼 수 있다. 오늘도 K는 그곳에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완전히 결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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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무식한 대한민국,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이미지 출처: 머니투데이 (2014년 7월 25일)

 

오늘 아침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책 잘 안 읽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매년 한 번씩은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는지라 특별히 눈 여겨 보지 않았다. 그런데 헤드라인이 상당히 세다. ‘무식한 대한민국,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기사 내용의 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1인당 독서 라이프 사이클을 보면 어린 시절에는 평균 50권이 넘는 책을 읽지만, 청소년 시기로 접어들수록 읽는 책 권수가 줄어든다. 중학생은 평균 20여 권, 고등학생은 읽는 책 권수가 줄어든다. 평균 10권 이상도 못 넘는다. 나이가 들수록 독서량은 줄어든다. 책을 안 읽었다기보다 책을 못 읽었다고 봐야 무방하다. 초등학생 때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입시를 위한 수단적 독서일 뿐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오히려 학교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어른들은 책을 읽지 말라고 한다. 교과서 대신에 책을 들춰보는 학생들은 선생님 입장에서는 한심스럽다. 게다가 동급생들도 책 읽는 학생을 선호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가롭게 책을 읽을 여유가 어디 있냐고 말한다. 친구들에게 책만 읽는 학생은 찌질이가 된다.

 

이상하게 책을 거부하는 태도는 한때 지성의 산실 대학교에서도 이어진다.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서 각종 장학금 혜택과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보지만, 그때만을 위해서 잠깐 책 읽을 뿐, 그 이후로는 독서에 대한 열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 평소 안 읽던 책을 억지로 읽는다.

 

이제 좀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어서 오랜만에 서가에 꽂힌 소설책을 집어보지만, 취업에 대한 고민과 준비 때문인지 괜히 책 펼치기가 꺼려진다. 부모님은 소설책 읽는 자식이 불만스럽다. 소설 읽는 시간에 취업용 종합상식 교재나 더 보라고 꾸짖는다. 그리고 얼른 취업이나 하란다. 멀쩡하게 대학 4년제 나온 자식이 좋은 직장에 다닐 것이라 믿었던 부모는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만 읽는 자식이 걱정된다. 자식은 취업이 우선인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독서가 좋다. 그러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소설가 구보 씨처럼 부모 눈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책 읽고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취업이 언제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독서하는 것이 죄를 저지르는 것 같다. 취업 준비는 안 하고 책만 읽는 한량죄.

 

이것이 우리나라 국민 독서 라이프 사이클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우울한 내용이다. 반대로 미국, 영국, 독일 같은 독서 라이프 사이클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량이 많아진다. 우리나라 독서 실태를 지적하는 기사에는 꼭 독서 문화가 정착된 선진국과 늘 비교한다. 우리는 그 현실을 알면서도 책 안 읽는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Scene #2   무조건 책 읽기를 권하는 불편한 강요

      

우린 분명히 책에서 멀어지는 현상은 크게 염려한다. 책을 읽어야 깊이 이해하고 넓게 알게 된다. 책을 읽지 않고는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바람직한 인격 형성도 어렵다.

 

부모들이 우리 애들이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하소연을 참 많이 한다. 부모로선 걱정스럽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어린이가 책을 읽지 않는 풍토는 바로 어른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어린이만 탓한다.여기서 조금만 솔직하게 반성해 보자. 자기 자녀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는 부모들은 책을 읽는가? 많은 부모들이 그렇지 않다. 지금은 어느 가정이건 텔레비전이나 24시간 스마트폰 화면이 우리의 눈길을 잡는다. 더구나 이제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손발과 같은 존재가 됐다.

 

방학계획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독서다. 방학 때 아이가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강제로라도 책 읽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전집 수십 권을 한꺼번에 사주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책에 대한 흥미를 잃고 책 읽기를 지겨운 숙제로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없어진다. 독서능력을 검증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책을 제대로 읽어 본 경험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어쩌면 너무나 책을 읽지 않는사람들은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아니라 독서능력을 객관식 문제나 단답형 문제로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이 당연히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시험은 교육의 중요한 과정이자 절차이다. 하지만 시험만능주의는 교육을 망친다. 독서마저도 시험의 억압 속에 놓이게 된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원초적으로 증발되어 버리고 독서의 지겨움만 남게 된다. 시험이나 평가를 위한 의무 과정으로 청소년들에게 강요되는 독서, 생각만 해도 숨 막힌다.

 

독서만큼은 자유로운 경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 정말로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읽든지 말든지, 어떤 책을 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길 바란다.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부모가 추천도서 목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읽기를 권한다면 교육을 위할 뿐인지 진짜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부모 당신이 먼저 읽어라. 아이들이 읽으면 좋은 책인지 부모가 먼저 알고 읽는 것이 아이들의 독서 향상을 위한 기본적 첫걸음이 아닐까.

    

 

  Scene #3   독서에 대한 이상한 편견

 

나는 지금도 파릇파릇한 나이인데다가 미혼이다. 자식을 가진 부모 입장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고, 잘 모른다. 그래서 자식이 책 읽기를 원하는 일부 부모를 향해 다소 감정이 억양된 표현을 했다. 사실 아침에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면서 책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속상하고 무척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매번 독서가 좋다고 강조하는 어른들이 정작 아이들이 책 못 읽게 만드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이런 상황이 어이없게 느껴진다.

 

책 읽기를 강요하는 어른을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대한 우리나라 특유의 불편한 진실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유치원 다닐 때 부모님은 40권이 넘는 위인전집에 중학생 수준 정도면 읽을 수 있는 백과사전을 구입해줬다. 내가 읽고 싶어서 사달라고 졸라댄 것도 있지만, 이렇게나 많이 책을 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식이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한 어른으로 성장해주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절대적으로 컸다. 비록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나를 생각해서 책을 많이 사주셨다. 좋은 부모님 밑에 자라서 어린 시절에 같은 나이 또래들에 비해 책 읽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가끔 취업 준비가 늦어지는 자식을 걱정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책 읽는 것에 대해 일절 태클 걸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하면 책 구입은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학교는 책 읽는 나를 좀 특별하게 여긴 것 같다. 선생님도 그렇고, 일부 친구들도. 일단 교과서 내용과 관련 없는 서양 고전을 읽으면 선생님은 그런 제자의 모습에 대견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중고등학생이 읽기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의 책을 읽는 이유가 궁금해 한다. 그냥 읽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은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혹은 무림고수들이 출동하는 국내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는데 내가 괴테의 파우스트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같은 듣지도 보지 못한 책을 읽으니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독서 편력을 이해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문과생이 과학 도서를 읽는 것이다. 고등학생 2학년부터 자신이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문과, 이과로 나누어진다. 문과로 들어가게 되면 그렇게 지루해소 어려웠던 과학 과목과 영원히 이별한다. (! 수학은 빼고)

 

몇 몇 친구들은 농담으로 문과생이 무슨 배짱으로 어렵고 수식이 가득할 것 같은 과학 도서를 읽느냐고 말했다. 하긴 나도 과학 수업 시간이 되면 지루하고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과학 도서를 읽으면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과학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과학 시험에 대한 부담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책을 읽었기에 무척 수월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성적 잘 받으려고 과학 도서를 읽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상 우리나라는 독서에 대한 편견이 너무 많고 심한 것 같다. 입시교육 탓에 교과서나 문제집 대신에 책 읽는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문과생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 누군가는 꼭 이런 말을 한다. 과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과학 도서는 왜 읽는 거야? 네가 그런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번에 시집을 읽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를 왜 읽는 거죠? 재미있어요?” 이런 질문은 대게 시집이 재미있게 느껴져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재미없어 보이는 시집을 재미있게 읽는 내 모습이 신기해서 물어 본다.

 

일반적으로 책 읽는 사람들이라면 상대방에게 많이 받는 질문이 바로 지금 읽고 있는 책, 재미있어요?”라는 것이다. 재미있어서 책 읽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책 읽는 것은 아니다. 나름 유용한 목적이 있어서 책을 읽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독서를 재미만을 위한 취미라고 생각한다. 자기소개서에 취미에 독서를 기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데 잘못됐다고 본다. 일단 취미는 사전적 의미로 즐기기 위한 일또는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독서는 단지 즐기기 위한 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재미있어서, 즐기기 위해서 독서를 한다는 말 자체가 난센스다. 우리 사회가 책을 즐기도록 만든 적이 있던가.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책을 즐긴 기회가 있었는가. 평소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나름 고상한 취미를 강조해보려고 독서를 내세우는데, 그것은 꼴불견이다. 그래서 취미=독서라는 자기소개를 위한 겉치레 공식은 무의미하다. 취미로 무조건 독서라고 내세우는 것 또한 일종의 편견이라고 본다.

 

 

  Scene #4   여전히 가만히 앉아서 공부나 하라는 무식한 어른들

 

책은 공기처럼 나를 새롭게 하고 배의 돛처럼 나를 전진시킨다. 책을 읽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나 깊은 예술이나 종교도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벗 중에 가장 틀림없는 벗은 바로 책이다. 책을 자신의 삶에 도움 주는 벗이라고 여긴다면 독서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런 독서의 장점을 일상에 가까이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 특히 내 또래 젊은 친구들(‘88만원 세대삼포 세대라고 불리는 20) 책 멀리하는 악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의 미래 자식들이 걱정된다.

 

책을 잘 안 읽는 환경에 익숙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좋은 독서 교육을 시킬 리가 없다. 그저 자식 성공을 위해 억지로 흉내 내는데 급급하다. 그리고 독서 편견도 심해질 수도 있다. 자신들도 젊은 시절에 취업 준비하느라 고생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 자식들이 독서보다는 취업 준비에 몰두하기를 바란다. 독서를 멀리하는 악습관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독서량이 감소된다.

 

 

 

 

 

 

 

 

 

 

 

 

 

 

심리학자 매슬로의 이롬을 빌리자면, 우리나라는 교양을 통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회가 많지 않다. 단순한 생존 욕구를 넘어선 한국 사회는 높은 단계의 욕구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의식주처럼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결핍 상태가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욕구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인 만큼 책을 멀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점점 생리적 욕망안전에 대한 욕망충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욕망에 의해 커져나가는 사회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외면한다. 자아실현은 곧 자기 본성에 충실한 것이다. 독서를 통한 자아실현은 스스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욕망의 사회는 그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억압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면 어른들은 말한다. “가만히 있어라혹은 가만히 앉아서 공부나 해라.”

 

책은 좋은 삶을 살게 만드는 해답을 모은 문제 해답 모음집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삶을 이끌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본의 힘으로 먹고 사는 생리적 욕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런 인생의 나침반을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망가뜨렸다. 그들은 이라는 인생의 나침반을 사용할 줄 몰랐고, 특별한 사용 방법을 전수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는 책을 보라고 강요하다가 다 크면 책 보지 말라고 꾸짖는다. 어른이 하는 말을 믿고 우리는 어렸을 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책을 읽었다가 어른이 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도대체 우리는 언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입시제도 여건상 중고등학생 때 책을 즐겨 읽지 못했다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독서량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일단 20대는 체력이 좋은데다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책 읽을 시간도 충분하다. 늙으면 책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다. 노안이 찾아오면 평소에 잘 보이던 활자는 희매하게만 느껴지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늙을수록 공부를 시작하기가 힘든 것처럼 독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무식해지지 않으려면 최소한 대학생 때 책을 많이 두는 것이 좋다. 한 달에 열 권, 일 년에 백 권 정도 읽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독서의 중요성을 몸소 경험해봤으면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 대학이 전문적 바보(교수)가 단순한 바보(대학 졸업생)를 양산하고, 이들 바보 집단을 이끄는 바보 보스(관료)들이 교육정책을 주도한다고 지적했다. 유사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독서 실태에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바보 집단을 이끄는 바보 보스만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바보 미래 세대를 키우는 바보 부모도 등장한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량이 감소하는 라이프 사이클을 고치지 못한다면 진짜 무식한 관료, 부모가 많아질 수 있다.

 

내 주변에 벌써 결혼하고 자식을 둔 친구들이 생겨난다. 친구들 중에 독서와 담 쌓는 녀석들이 많다. 십 년이 지나면 친구 자식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만약에 친구가 아이들에게 책 읽으라고 잔소리하는 걸 보게 된다면 난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지 빨지 말고, 너나 책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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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7-2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이 기사를 모두 읽었는데 '증세'가 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을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나는 게 자연스런 이치인데, 그 많은 시간들을 '책 읽는 즐거움'도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나 서글픈 일이 아닌 듯싶어요.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빨리 추스려서 요즘 흔히들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쪽으로 빨리 방향을 틀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4-08-04 21:0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학생들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서 독서의 즐거움을 먼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ajahyhee 2014-08-1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저도 저 기사 보고 크게 공감한 기억이 있는데.. 독서의 수많은 장점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사는거 같습니다.
 
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수많은 표본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특정 집단의 특징을 뽑아 낼 수가 있다. 이같이 여러 정보를 한데 모아서 분류한 뒤 특정을 찾아내는 것을 통계라고 한다. 통계는 수량적 비교를 통해 사실을 관찰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빅 데이터도 기존 기업들이 활용하던 통계를 좀 더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빅 데이터는 데이터를 수집, 저장, 관리,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집합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다.

 

그동안 통계는 기존에 있던 특정 정보를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 취합하는데 그쳤지만, 최근 빅 데이터에 활용되는 정보는 접속기록, 위치정보, 센서 등의 다양하면서도 대량의 정보를 취합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취합하게 되면 각 변수들의 상관관계를 조사할 수 있고, 이전까지는 전혀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다. 기업들의 경영환경은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사업부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 빅 데이터로 예측한다. 또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야 할 때, 빅 데이터를 통해 얻어진 정보는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빅 데이터의 단점도 있다. 일단 빅 데이터 활용이 쉽지 않다. 기존에 잘해왔던 정형 데이터는 전체 데이터의 20%에 불과하며 나머지 80%는 기존에 잘 다루지 않았던 비정형 데이터이다. 각기 다른 비정형 데이터를 표준화 시킬 수 있는 활용법이 필요하다. 게다가 폭증하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빅 데이터가 정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빅 데이터 시대를 맞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가 새삼 떠올린다. 토플러는 미래에 예상되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그 속도를 점차 가속화함으로써 개인이나 집단의 적응이 한층 어려워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는 상상할 수 없이 너무 빠른 가속도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런 변화의 가속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또 인간은 이러한 미래에 어떻게 적응(또는 적응에 실패)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중한 정보의 부담(정보 과부하)이 인간 행동을 와해시킴으로써 정신 병리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처리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자고 일어날 때마다 2.5퀸틸리언(Quintillion, 조의 1만 배, 100경) 바이트나 되는 빅 데이터 속에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선택하고 수집할 수 있을까?

 

매일 빅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과거 데이터에만 집착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은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히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농부(수주대토, 守株待兎)와 같다.

 

 

 

 

옛날 송나라에 어느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쉬고 있었다. 농부가 보는 앞에서 토끼가 지나가다가 그만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뜻밖의 횡재를 한 농부는 죽은 토끼를 집어 들고 이렇게 생각했다.

 

“토끼가 이렇게 저절로 뛰어나와 나무에 부딪혀 죽는 줄 진작 알았다면 힘든 농사를 짓지 않았을 텐데.”

 

농부는 그 날부터 쟁기를 집어던지고 그루터기만 지켜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토끼가 뛰어오다 죽으려니 하고, 허구한 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근처에서 기다린다. 그 결과 토끼는 한 마리도 얻지 못하고 일 년 농사만 망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토끼를 잡으려 하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농부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믿고 미래를 예측했다.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힌 것을 목격했으니 다음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거라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면 빅 데이터 속 진짜배기 정보를 절대로 찾을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정보가 저절로 내 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 과거의 직관적 판단으로 무수히 많은 양의 빅 데이터를 다루기가 쉽지 않다. 어제 나온 빅 데이터는 며칠만 지나면 더 이상 쓸모없는 과거 정보로 전락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객관적 분석 기법과 예측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빅 데이터는 말 그대로 대용량 정보다. 데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데이터는 채팅을 한다든가,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형태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웹사이트 방문, 온라인 검색통계, 서버에 남겨지는 로그정보 등 각종 ‘흔적’ 역시 데이터가 된다. 과거엔 이렇게 생산되는 데이터들은 방치됐다. 쉽게 말해 의미 있는 ‘신호(signal)’가 아니라 단순히 ‘소음(noise)’에 불과했다. 소음을 제거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신호를 찾을 때다. 그 신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최근 주목받는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신호와 소음』은 빅 데이터 과부하 시대에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올바른 정보를 찾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일종 미래학 서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에 소개된 신호와 소음을 구별 못한 통계 오류 사례들은 단순히 통계학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보다는 미래 예측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왜 통계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자료에 접근하는 분석 기법이 적절치 못할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합리적 분석과 예측을 방해하는 지나친 자신감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정보만 귀 기울이고 알려고 한다. 그것을 맹신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신호를 외면해버리고 잘못된 예측을 하고 만다. 그리고 기존의 예측 기법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며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네이트 실버는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기 위한 분석 방법으로 ‘베이츠 정리’를 소개한다. 베이츠 정리는 사전 확률을 도출한 뒤 새 정보가 나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을 골라 적용해 사후 확률을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다. 즉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기존 예측을 잠시 제쳐두고 새로운 예측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통계학자는 정확한 예측을 도출하고 최소한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빅 데이터 시대로 진입할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변화 속도가 빠르다. 이 변화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거나 변화에 적응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전문가라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급속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나가려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세, 즉 미래가 현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새롭고도 민감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완전무결한 능력을 가질 수 없지만 정보 소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신호는 본인이 직접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신호는 저절로 당신의 손에 오지 않는다. ‘수주대토’의 농부처럼 자신의 직관만 믿었다간 엉뚱한 예측으로 인해 낭패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석 기법에 능통한다고 해서 뛰어난 통계학자가 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나친 자신감과 방심은 1%의 소음도 외면한다. 통계학자가 보지 못하는 1%의 소음이 세상을 변화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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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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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가끔 노력도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을까?” 요즘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최근에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부정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 넘버이다.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2009년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다. 김연아 선수, 비틀스, 빌 게이츠 등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도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스포츠 기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이 ‘1만 시간의 법칙’을 뒤집는 내용을 주장했다. 선천적 재능에 손을 들어줬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가 세기를 열광하게 만드는 축구 천재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한 노력보다는 특출한 ‘스포츠 유전자’(Sports Gene)를 가졌기 때문이다. 1만 시간 훈련을 해도 제2의 메시, 호날두가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노력과 실력의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스포츠, 예술 분야보다 공부 분야에서 재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만 시간, 아니 그 정도 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를 하면 성적이 향상될 거라는 기대는 한낱 희망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력이 가끔 배신하는 슬픈 진리는 틀리지 않다. 십년 전에 EBS에서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챙겨본 적이 있었다. 밥 아저씨라고 소개된 로스는 시종일관 인자한 눈빛과 미소, 그리고 단아한 말투, 가벼운 붓놀림만으로, 신기하게 30여분 넘는 짧은 시간에 눈이 휙 돌아갈 만한 멋들어진 풍경화를 그렸다. 그 때 밥 아저씨는 “간단하죠?”, “참 쉽죠?”를 연발하면서 그림 그리는 순서와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밥 아저씨처럼 따라하면 그와 같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밥 아저씨의 손에 탄생된 멋진 그림보다는 붓과 나이프의 손놀림이 더 예술적이었다. TV로 보면 쉽게 보이는 테크닉 같지만, 이제 막 붓을 쥐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장면일 뿐이다. 나름 밥 아저씨가 나오는 TV 브라운관에 집중하면서 따라해보지만, 아름다운 그림은커녕 괴상한 낙서를 그릴 뿐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하다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다. 이처럼 우리가 밥 아저씨의 덥수룩한 수염을 때릴 정도 수준에 이르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 좀 잘 찬다고 해서 상대방을 제치고 공을 패스할 수 있는 뛰어난 발재간을 가진 '월드 클래스' 수준의 메시가 누구나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공을 위해서는 약간의 재능과 특별한 기회, 주변 환경, 사회적 체제 등도 필요요건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이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하나를 더한다면 연습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와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Scene #2  글쓰기는 훈련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비록 스포츠, 공부에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실력 수준을 이해하고 있다면 다른 분야로 도전할 수 있지 않은가.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으면서 고집 부린다면 거기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분야가 노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재능이 2%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노력하면 충분히 성취 가능한 최고의 분야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도전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분야를 글쓰기로 꼽고 싶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쓰면 된다. 글쓰기 능력도 타고난 재능으로 가진 문필가도 있지만, 글 쓴 사람들 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천재는 많지 않다. 4살 때 벌써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켜기 시작했다는 음악 천재 모차르트나 1부터 50까지 숫자를 단번에 계산할 정도로 어렸을 때 암산에 능숙한 수학 천재 가우스는 있어도 이제 막 글을 떼기 시작한 어린 시절에 문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글 잘 쓴 문필 천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 예외가 있다면 고종석이 글쓰기 특강 중에 직접 언급한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있다. 그는 10살 때부터 시를 쓴, 재능이 많은 문필가에 속한다.

 

그러나 고종석은 글쓰기에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충분한 연습으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 글을 쓰고, 또 여러 번 써서 언어를 다를 줄 아는 감각을 익혀나간다. 사실 글쓰기 연습을 강조하는 고종석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전혀 새롭지가 않다. 글 좀 잘 쓴다는 명사들이나 글쓰기 테크닉을 알려주는 수많은 책에서도 글을 많이 쓸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즉 삼다(三多)를 강조했다. 삼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방법론이다. 많이 책을 읽고, 많이 글을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 글을 잘 쓰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

 

 

 

 Scene #3  배보다 배꼽이 커져버린 글쓰기 특강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여타 글쓰기 책처럼 글 쓰는 테크닉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교양과 지식도 소개한다. 특히 아름다운 모국어 즉, 한국어로 글을 써야하는 이유를 언어학의 기초 지식(시니피앙, 시니피에, 랑그, 파롤)을 언급하면서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글 쓰면서 흔히 잘못 쓰거나 혼동하기 쉬운 세밀한 문법을 지적한다. 접속부사를 빼면 문장에 힘이 생긴다. ‘적(的)’과 ‘의’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게 좋다. 복수 표현 ‘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자신이 권하는 ‘물고기 잡는 법’이 생겨난 이유와 그와 관련된 곁다리 지식까지 설명한다. 이렇다보니 그의 특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이다. 가끔 특강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옆길로 샌다. 알짜배기 테크닉을 원한 독자라면 지식이 버무린 글쓰기 특강이 자칫 지루하게 여길 수 있다. 작년 석 달 동안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된 특강 내용을 채록했기 때문에 고종석의 목소리가 울리는 특강 장소에 온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지만, 읽다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 발견된다. (고종석이 가르쳐준 테크닉을 어느 정도 숙지한 독자라면, 책 내용 속에 어색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배보다 배꼽이 큰 책이다. 특강 때 나온 내용을 전달하는데 책 한 권의 분량만으로도 부족했다. 결국 분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1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엿보인다. 아마도 이전에 나온 글쓰기 테크닉을 다룬 서적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Scene #4  테크닉 습득보다 중요한 건 글을 고치려는 의지

 

그러나 테크닉을 눈으로 읽고, 안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구양수의 삼다를 독자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이 책을 글 잘 쓰는 방법을 상당히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알려주는 교양서적 정도로 읽었다면 그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오독이다. 시간 낭비에 가까운 오독을 피하려면 실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전이 가장 중요하다.

 

고종석은 2002년에 자신이 쓴 『자유의 무늬』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서 첨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 본인이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해 잘못 썼음을 시인하고 직접 고치는 것이다. ‘셀프 첨삭’ 사례는 다른 글쓰기 테크닉을 소개하는 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첨삭은 말 그대로 문장 일부를 고쳐 쓰거나 새롭게 첨가하는 과정이다. 첨삭과 비슷한 의미로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퇴고’이다. 우리 사회는 글쓰기를 요구한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은 리포트로 우리를 괴롭혔고, 졸업하면서도 대학생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을 써야 한다. 취업하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며, 직장 생활에 적응될 무렵에 업무에 관한 보고서의 압박감을 겪는다. 글을 많이 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리포트, 논문, 자기소개서 등 첨삭해주는 전문가가 등장하고 있다. 전문가가 알려준 첨삭을 통해서 고친다면 이전보다 더 읽기 좋은 글로 변신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첨삭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글쓰기는 뛰어난 실력 향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내가 쓴 글을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함으로써 글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이 직접 읽고,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눈에는 완성된 글이 무척 잘 쓰고, 멋져 보일 터. 하지만 글쓰기 고수의 날카로운 눈은 작은 것이라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어색한 문장을 골라낸다.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예전에 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 보지 못했던 어색한 문장과 논리성이 결여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글을 고치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상태일수록 옥에 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퇴고 방식이다. 삼다 중의 다상량. 글쓴이는 퇴고하는데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퇴고는 말이야 쉽지, 의외로 실천하기 어려운 글쓰기 과정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퇴고는 글쓴이 입장에선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스스로 인정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이 쓴 글을 지적하면 대다수 글쓴이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 본인은 잘 쓴 글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이 문장이 어색하다, 고쳐라”라는 식으로 일일이 지적받는다면, 글 쓴 사람 입장에서 기가 한풀 꺾이는 일이다. 퇴고를 하기 위해서 여러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능력을 의심치 않는 자존심 센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퇴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귀찮더라도 글을 많이 쓰고, 많이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몇 번 고치느냐 횟수가 중요하지 않다. 퇴고도 글쓰기 훈련의 일환이면 노력의 자세다. 퇴고를 외면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아마추어나 다름없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글쓰기 훈련을 외면한다면

절대로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글쓰기도 후천적 노력으로 통해

재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과연 글쓰기 특강 2권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렇지만 2권에 있을 테크닉을 기대하는 것보다 1권에 있는 테크닉을 실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평소에 쓰고 싶은 글을 써보고, 또 고쳐 보라. 1만 시간이 아니어도 좋다. 거기에 들인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글 한 편 쓰는데 소모된 시간이 많거나 퇴고를 수십 번 이상, 아니 수백 번 했다고 해서 글쓰기에 재능이 붙었다고 자만하면 금물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운동해서 복근에 스펙을 완성됐더라도 운동을 멈춘다면 다시 원래 똥배로 돌아간다. 과거에 명성을 날리던 운동선수도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를 하게 된다. 글쓰기도 일종의 운동과 비슷하다.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고치고, 많이 생각하기. 글쓰기는 손과 머리로 하는 지적 운동이다. 몸꽝이 운동 열심히 하면 몸짱이 되는 것처럼 글꽝도 열심히 쓰면 글짱이 된다. 당신의 노력이 간절한 꿈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자신 없다고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직접 손에 펜을 들고 원고지에 부딪혀 봐야 한다. 그리고 못 쓰고 퇴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 분야에서만큼은 노력이 당신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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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2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7-2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인데
나는 고종석의 책을 많이 안 읽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좋아해서일까
아직은 좋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특히 그가 드는 여러 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
근데 다 읽고나면 나도 별 세 개 줄 수 있으려나?ㅎ
셀프 첨삭 좋은 말이긴 한데 내 글 고쳐 쓴다는 게 또 보통 고역이 아냐.
귀찮기도 하고. 그런데 또 눈에 띄면 창피한 마음에 얼른 고쳐 쓰긴 하지.
그런데 이 '적'이나 '의'를 뺀다는 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암튼 이 책을 읽고 있어설까? 요즘엔
문장 공부도 좀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넌 이 더운 날에도 좋은 책 많이 읽네.
부럽다. 건강 잘 챙겨.^^

cyrus 2014-07-24 22: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더운 날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다 고치고 반복하는 일이 고역이죠 ㅋㅋㅋ 사실 서평 대회나 이벤트에 응모하는 글을 쓸 때 첨삭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모 일간지에 칼럼이 운 좋게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퇴고를 엄청 많이 했어요. 글 한 편 완성시키고 그 다음날 읽어보면, 어색한 문장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ㅋㅋㅋ 누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날씨가 장난 아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