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3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1001-293] 위대한 개츠비

 

 

 

 

 

 Scene #1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을 만난 적이 있나요?

 

겨울밤이 깊어간다. 피츠제럴드를 읽는다. 아니 개츠비를 만난다. 그는 초록색 빛으로 반짝이는 별이 되어 밤하늘에 떠 있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먼 우주의 한 공간에서 빛이 되어 있을 개츠비는 오늘도 희망을 간직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누군가의 간절한 열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느 날 기적처럼 소원을 이루어주는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짙푸른 어스름이 깔리는 고즈넉한 저녁 무렵에 아무런 이유 없이 파란만장했던 개츠비를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 놓은듯한 별이 묻어 있는 밤하늘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유독 초록색 빛을 발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매복해 있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내 손목을 잡고 뉴욕 웨스트에그에 위치한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에 있는 푸른 정원으로 나를 데려가곤 한다. “내가 개츠비야.” 백만장자라고 믿기 어려운 젊은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Scene #2 사랑밖에 모르는 남자

 

『위대한 개츠비』는 한 남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이다. 톰은 데이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톰은 머틀을 사랑한다. 머틀은 톰을 사랑한다. 윌슨은 머틀을 사랑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다. 작중 화자인 닉은 베이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투성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개츠비와 같이 한 사람만을 일편단심 바라보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꿈꾸는 그런 낭만적인 사랑도 존재한다. 저 안개 너머로 비치는 녹색 불을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맹목적인 사랑이다. 그녀를 얻기 위한 일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동등한 위치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데이지는 순수함을 잃고 향락과 허영에 빠진 여자가 되어버린다. 데이지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개츠비와 달리, 데이지는 그의 수많은 영국산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로 변했다. 개츠비도 깨닫는다. 돈으로 충만한 그녀의 목소리를. 그럼에도 개츠비는 데이지를 열망한다. 설사 변해버렸다고 해도 그녀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랑이 순수함을 잃는 순간 사람은 병들어 간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톰처럼, 윌슨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머틀처럼 말이다. 톰은 데이지의 허영을 비웃고, 머틀은 윌슨의 무능력함을 비웃는다. 톰과 머틀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 또한 병든 사랑이다. 머틀은 톰의 거대한 부를 사랑하며, 톰은 그러한 부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병든 사랑의 끝은 언제나 아프다. 사랑의 상실은 광기로 번져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되고 만다. 개츠비의 사랑을 질투한 톰은 개츠비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일조했다. 사랑은 사람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톰은 데이지를 뺏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향락에 빠져있는 뉴욕, 그러나 그 불빛이 모두 꺼지고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다.

 

 

 

 Scene #3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의 삶의 동력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곧 '사랑'이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가혹함으로 가득한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뻔해진다. 좌절하든지 혹은 비관하든지. 혹은 소설에 등장하는 톰이나 데이지처럼 그냥 주어진 대로, 되는 대로 살 수도 있다.

 

개츠비의 인생 자체는 좌절하든지 비관하든지 혹은 그냥 방관하더라도 될 정도로 힘들고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을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위해 이용하고 변화시키며 감내한다. 그리고 그 ‘희망’이 되는 게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희망’과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줄 아는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가 상상하고 꿈꾼 세상에 그녀가 없다면 그것은 미완성에 그치고 만다. 즉흥적으로 제 감정을 좇을 뿐인 부박한 여자 데이지가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개츠비는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라고 생각하듯 일방적인 집착. 누군가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희망’이나 ‘사랑’이란 어찌 보면 추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추상적’이라는 평가로 끝내버릴 수 없는 말들이다. 겉으로 보면 톰과 데이지가 누리는 물질풍요의 삶이나 개츠비가 벌이는 호화파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톰과 데이지의 생활은 그 물질이란 것에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질적이기는 하나 진정한 삶은 아닌 것들’이 시대의 대세를 형성하고, 그걸 삶의 목표로 여기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는 사람들은 육체를 물질로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진정한 삶’으로 채워져야 할 영혼과 마음을 가진 존재다. 육체를 채우는 물질을 넘어, 사랑과 희망에 목말라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과 희망으로 채우고자 했던 개츠비는 위대하다. 그나마도 데이지를 비롯한 더없이 속물 그 자체로만 살아갔던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의 일생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잡을 수 없는 모래알갱이처럼 허망하게 살다가 스러져 갈 뿐이었다.

 

누구의 인생인들 모두 끝난 후에 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지향점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이후 그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지고 감내하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삶의 행위다.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Scene #4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대저택의 불은 꺼지고,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사랑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처럼 개츠비를 찾을 것이고, 어디선가 개츠비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풀이 자라고, 파도가 출렁이고, 높이 뜬 달이 바다를 비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흔히들 희망에 가득 차면 행복하고, 낙담하면 불행할 거로 생각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꿈을 꾸는 사람은 몰락을 두려워하고, 절망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 후자가 절망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위대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투철한 의지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개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허망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 그의 영혼은 생전에 두 팔을 뻗어 하염없이 바라보던 부두 맨 끝에 조그맣게 반짝이는 초록 불빛이 되었다.

 

이것은 허무로 가득한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청춘에 향하는 무언의 외침이기도 하다. 허무를 딛고 일어서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나는 삶 전체를 관통하고 견인해가는 각자의 ‘초록 불빛’이 있다고 믿는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저 멀리 자신만을 위해 반짝이고 있는 불빛은 삶의 울퉁불퉁함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한 번 달음질하게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안개 너머 비치는 희미한 녹색 불빛을 의지한 채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었던 믿음. 누구나 그 위대함을 가슴에 품을 자격이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치는 오늘 밤에도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이 빛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사이언스북스

 

 

2013년이 마무리되어 가는 연말이 다가오자, 눈에 띄는 출판계의 화두라면 단언컨대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 『지구의 정복자』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이제는 진화생물학계의 원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신작 출간은 ‘왕의 귀환’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진화생문학 분야에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주류로 굳어졌다. 그러나 윌슨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이 이론이 치명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자 리처드 도킨스는 윌슨의 책을 집어 던져야 할 정도 수준으로 악평으로 맞설 정도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또 한 번 논쟁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윌슨은 책에서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학계 정설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인간이 지구를 정복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과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기적 유전자’이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 책이 선정도서로 선정된다면 오랜만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같이 읽어볼 생각이다.

 

 

 

 

 

 

 

 

 

 

 

 

 

 

 

 

 

 

* 『명작순례』 유홍준, 눌와

 

지금까지 3번 횟수로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활동하면서 예술 분야 책이 선정되기가 드문 편이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책이 지난 기수 때 선정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3권이다. 확실한 건 예술 분야 책이 선정된 적이 많지가 않았다. 인문, 과학 분야와 통합되어 있어서 매일 수없이 출간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 사회과학에 비해 선정되는 확률이 희박하다. 심지어 그 다음으로 선정 확률이 적은 과학 분야와 비교해도 밀린다.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가끔 추천도서 페이지에 구색 맞추기 용으로 한 권 포함시키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신간평가단 활동 기간에 개인적인 바람으로 예술 분야 도서가 선정된다면 이번에는 한국미술 분야 관련 도서가 되었으면 한다. 마침 출간된 책이 유홍준 교수의 『명작순례』다. 저자에 대한 이력과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상세한 책 소개는 생략하겠다. 조선시대 명작 49점을 중심으로 작품 100여 점을 소개하고 있다는데 한국미술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절대로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천양희  '뒤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에서 마음으로 -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 알려하지 말고 깨닫기
이외수 지음, 하창수 엮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도

상처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답습니다

 

(중략)

 

그래서

손 내밀어 당신의 상처 난 속에

담긴 아름다운 꿈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 손 덥석 잡아보고 싶습니다

 

- 김 산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중에서 -

 

 

 

 ♣ 벌거벗은 나무의 겨울나기  

 

 

 

 

 

Egon Schiele  Bare Tree behind a Fence」  1912

 

 

변신이란 저런 걸 두고 한 말일까. 몇 달 전만해도 녹음이 만연했던, 그 고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목이 되었다. 전신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겨울나기가 안쓰러운가 보다. 공원의 나무에서도 가로수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볏짚의 끝을 가지런히 모아 엮어서 밑동에 씌워 놓았다. 요사이는 마대를 따 씌운 모습도 더러 보인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보다 길이가 몇 곱 되는 쇠코잠방이라도 씌워준다면 겨울나기가 훨씬 넉넉할 것 같다.

 

나무는 스스로 치유 능력이 있다. 누군가가 무심코 가지를 꺾을 경우에도 원망이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아픔의 눈물인지 송진을 내 외부의 침략을 금세 차단하고 만다. 다시 보호 가지를 여러 개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이런 나무의 지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너는 나의 하수인이고 먹이사슬의 한 속에 지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축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무에게만 주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눈이 시리게 맑아야 할 우리의 마음에도 주저리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분진이 몇 겹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후송된 병사의 팔다리에 칭칭 감긴 붕대와 같이 상처 난 양심에도 여러 겹의 주저리를 감아주어야 한다. 언젠가 상처 부위에 새살이 내밀 것이다. 마치 연약한 순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 듯이.

 

 

 

 

 ♣ 고군분투했던 꿈꾸는 식물

 

 

 

 

 

 

Egon Schiele  Plum Tree (Autumn Tree with Fuchsias)」  1912

 

 

소설가 이외수는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 있는 벌거벗은 나무와 같다. 그는 글과 트위터를 통해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수많은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에게 주저리는 소통하는 대중이다. 허나, 나무에도 해충들이 다가오듯이 그를 음해하려고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나쁜 주저리들도 있지만. 

 

기인, 괴짜 등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에 대한 소문은 그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통 받고, 절망하고, 방황하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한편으로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인 기준의 반대편에 서서 그 견고함과 싸우며 버티고 살았던 무모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다.

 

그러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을 독자들 앞에서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을 통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키우며 희망을 위한 구원을 모색하고 있었다.

 

자기 삶을 철저히 사랑하고, 그렇기에 그만큼 학대했던 소설가 이외수는 건강한 육체와 나태한 정신이 부끄러워질 만큼 하얀 종잇장 같이 얇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순수! 그를 보자마자 떠올린 단어다. 인도나 티벳에 가는 초보 여행자들이 애당초 자기가 갖고 간 환상만을 보고 오듯이 이외수의 ‘기인 이미지’도 준비된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외수’라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외수지,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외수(李外秀)’도 아니다. 그의 어두웠던 삶을 반추해본다면 ‘이외수(李外樹)’라고 해야 어울린다. 그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자두나무(李) 군집을 거부하는 듯 멀리 떨어져 외롭게(外) 서 있는 가냘픈 나무(樹) 한 그루처럼 살았다.

 

젊은 시절 이외수와 함께 한 것들은 비듬, 이(泥), 얼룩, 배고픔, 창녀의 빈 방 따위였다. 몸이 성할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별 시답잖은 동포들한테까지도 동포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그의 20대부터 40대까지는 열등과의 싸움이었다. 세상이 원하는 보편적 기준인 가문, 학벌, 외모, 경제력 등 그는 어느 조건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열등감과 싸웠다. 가장 힘들었던 열등감은 가난이었다. 그래도 꿈은 있었다. 바로 영혼의 울림을 느껴질 수 있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는 것.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그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 강원도 정선 산골로 들어간다.

 

그에게 문학은 치열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데뷔작 『꿈꾸는 식물』을 발표했지만 그는 여전히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밖에 나가면 남편의 술 외상값 때문에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아이들은 주인집 아이들에게 기를 못 피고 살았다. 그는 가족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을 사기 위해 글을 썼다는 작가의 자의식은 그를 8년 동안 절필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혹독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스스로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교도소의 철문을 직접 주문 제작해 그의 집필실에 설치하고 감옥 속에서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최고의 열매 하나를 영글기 위해서 이외수는 일부러라도 스스로 상처를 줬다. 풍족하고 좋은 삶의 영양분을 마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야 하는 예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를 열고, ‘나’를 기꺼이 내주고, 나만을 위한 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Egon Schiele  「Autumn sun and trees」  1912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육안(肉眼)의 범주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안(靈眼)의 범주에까지 닿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움,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일이 예술이다. (19쪽)

 

이외수에게 좋은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나쁜 예술’은 ‘나뿐인 예술’일 것이다.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글을 쓰는 ‘나뿐인 예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적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으며 극단적인 삶을 살았지만, 오히려 어두컴컴한 과거는 그에게 ‘사랑’에 눈 뜨게 만들었다. 고독한 영혼을 변화시킬 정도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 ‘사랑’으로 소통하고, 치유하고, 구원하고 싶은 예술이 그의 꿈이었다. 이외수에게 예술은 자신처럼 상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던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모아 튼튼하게 만든 사랑의 그물이다.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외수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면 육안(肉眼)을 넘어 영안(靈眼)을 획득하는 경지가 돼야 한다. 영안을 가지고 보면 사랑의 본체를 깨닫고 볼 수 있다. 가슴 안에 아름다움을 심을 수 있는 영안과 심안에 눈을 뜬 사람이 된다면 사랑이 가득한 존재, 행복이 가득한 존재가 되고 이때의 사랑과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사랑을 아십니까', 괴짜 사부님

 

 

 

 

 

Egon Schiele  「Four Trees」  1917

 

 

겨울철에 자동차 운전을 하다 보면 차 유리에 성에가 많이 끼어 불편하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운전하는 데도 위험하다. 충분히 자동차를 예열해서 성에를 제거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다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자기를 객관화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 더욱 성실할 수밖에 없다. 바울로 사도는 “내가 자족하는 삶의 비밀을 터득했노라”고 했다. 신앙의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깊은 각성(覺醒), 깨달음이다.

 

이외수의 글도 그렇다. 자신의 아픔을 독자에게 에누리 없이 보여주고, 가식 없이 진솔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빗장이 스스로 열린다. 못난 사람이 후진 땅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었던 마음이 녹는다. 마음은 감성의 근본이 되고 이 마음을 중시하는 삶과 예술이야말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지름길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각성의 경지에 이른 그는 최근에 달의 지성체와 채널링을 통해 교신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원히 변치 않는 괴짜임에 틀림없다. 이젠 그를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비웃기보다 자신이 통째로 안아 버리려 하는 그는 이미 도(道)를 터득한 ‘사부님’이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자신처럼 마음의 눈을 뜬 영안을 가진 자를 만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을 만난다면 도인처럼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사랑을 아십니까'라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올거 같다. 김산의 시 구절처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꿈길을 같이 걷자고 덥썩 손을 내밀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씐 주저리를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주저리를 씌우려고 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주저리.

 

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체험할 수 있는 심적 수련의 과정을 무조건 따라하자는 건 아니다. 소양이 많이 부족한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사물 그리고 자연과 채널링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자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폭넓은 사랑을 하려면 아름다움을 자주 접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던지, 화초 가꾸기를 하면 꽃피고 열매가 맺는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 또 끊임없는 대화를 가져야 한다. 자연적인 것들과 대화도 하고, 자문자답을 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이외수는 대상과 자신과 합일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음’이라고 했다. 생각하지 말고 느끼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근원 속에는 사랑의 본성이 숨어 있다. 삶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눈을 뜨고 봐야 한다. 일상에 사랑이 합일된다면 행복 찾기는 어렵지 않다. ‘힐링’을 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 혼자 있는 고요한 날에, 마음의 문을 열고 밖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채널링하기 딱 좋은 시간일 테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2-1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통일부가 1950년 첫 귀순자가 나온 뒤부터 통계를 잡기 시작한 탈북자 수는 올해 (8월까지 기준으로) 2만 5560명이다.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자 증가 속도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반대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한국에 와놓고도 다시 한국을 등지는 탈북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남한 생활 적응이 여의치 않은 탓에 제3국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부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여러 복잡한 이유로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많은 탈북자가 남한을 떠나는지는 통일부는 정확한 통계를 하고 있지 않다. 탈북자단체들의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단체에 따라 추정 수치가 제각각이다. 최소 2000명에서 최대 4000명 정도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에 있는 탈북자 정보를 북측에 넘기거나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재입북자들이 북한 방송에 등장하는 횟수가 잦다는 점이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의 품에 안겼던 그들은 남한 사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한다. 체제의 이완 현상을 단속하는 동시에 탈북 현상을 막기 위한 북한 정부의 전략에 동원된다. 재입북을 시도하는 탈북자가 북한에 잘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간첩이 되거나, 간첩인 척 행동하든지 간에 북한의 전략은 남한 내 탈북 사회를 동요시킬 수 있다.

 

아마도 법대 교수는 이러한 탈북자들을 자유민주주의를 해치며 북한 정권에 붙는 행위를 하는 ‘배신자’로 규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규정하려는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 지나치게 과격했고, 명확하지 않았다. 북한에 탈출하여 주민들의 참혹한 생활상을 알려 북한 주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선의의 탈북자 집단을 고려하지 못한 경솔한 표현이다.

 

그리고 탈북자들에게 ‘사형’, ‘처형’은 북한 사회를 잊고 싶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이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뿐인 삶을 담보를 걸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탈출을 함께했던 지인이 불행하게도 북한 군인에 붙잡혀 강제 북송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거나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또 자신 때문에 그 곳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사가 불투명하다. 이렇듯, 탈북자에게 ‘사형’은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키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단어다. ‘배신자’들을 사형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재입북하는 탈북자가 없도록 관련 제도와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탈북자 문제도 이념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탈북자 인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이번 망언 논란처럼 탈북자에 대한 인식의 오해가 형성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 세워서 갈등과 논란을 조장하도록 감정의 불을 계속 지펴서는 안 된다. 꺼진 불을 다시 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 들어온 탈북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들이 인권과 안전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 되새겨 볼 시점이다. 재입북자로 인해서 ‘자유민주주의’보다는 국내 탈북자들의 인권이 파괴될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13-11-2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저런 망언을 할 수 있는지...ㅉ
저 사람 탈북자 신세 되봐야 정신 차리려나? 민망하다. 이땅의 지성은 다 죽었나 보다.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ㅠㅠ

cyrus 2013-12-03 20:23   좋아요 0 | URL
이 분 때문에 울학교 캠퍼스나 홈페이지 게시판이 조용할 날이 없어요. 학교 정문에서 규탄 시위도 하고 있고요...

2013-12-04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