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마음으로 -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 알려하지 말고 깨닫기
이외수 지음, 하창수 엮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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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상처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답습니다

 

(중략)

 

그래서

손 내밀어 당신의 상처 난 속에

담긴 아름다운 꿈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 손 덥석 잡아보고 싶습니다

 

- 김 산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중에서 -

 

 

 

 ♣ 벌거벗은 나무의 겨울나기  

 

 

 

 

 

Egon Schiele  Bare Tree behind a Fence」  1912

 

 

변신이란 저런 걸 두고 한 말일까. 몇 달 전만해도 녹음이 만연했던, 그 고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목이 되었다. 전신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겨울나기가 안쓰러운가 보다. 공원의 나무에서도 가로수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볏짚의 끝을 가지런히 모아 엮어서 밑동에 씌워 놓았다. 요사이는 마대를 따 씌운 모습도 더러 보인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보다 길이가 몇 곱 되는 쇠코잠방이라도 씌워준다면 겨울나기가 훨씬 넉넉할 것 같다.

 

나무는 스스로 치유 능력이 있다. 누군가가 무심코 가지를 꺾을 경우에도 원망이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아픔의 눈물인지 송진을 내 외부의 침략을 금세 차단하고 만다. 다시 보호 가지를 여러 개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이런 나무의 지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너는 나의 하수인이고 먹이사슬의 한 속에 지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축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무에게만 주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눈이 시리게 맑아야 할 우리의 마음에도 주저리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분진이 몇 겹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후송된 병사의 팔다리에 칭칭 감긴 붕대와 같이 상처 난 양심에도 여러 겹의 주저리를 감아주어야 한다. 언젠가 상처 부위에 새살이 내밀 것이다. 마치 연약한 순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 듯이.

 

 

 

 

 ♣ 고군분투했던 꿈꾸는 식물

 

 

 

 

 

 

Egon Schiele  Plum Tree (Autumn Tree with Fuchsias)」  1912

 

 

소설가 이외수는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 있는 벌거벗은 나무와 같다. 그는 글과 트위터를 통해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수많은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에게 주저리는 소통하는 대중이다. 허나, 나무에도 해충들이 다가오듯이 그를 음해하려고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나쁜 주저리들도 있지만. 

 

기인, 괴짜 등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에 대한 소문은 그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통 받고, 절망하고, 방황하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한편으로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인 기준의 반대편에 서서 그 견고함과 싸우며 버티고 살았던 무모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다.

 

그러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을 독자들 앞에서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을 통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키우며 희망을 위한 구원을 모색하고 있었다.

 

자기 삶을 철저히 사랑하고, 그렇기에 그만큼 학대했던 소설가 이외수는 건강한 육체와 나태한 정신이 부끄러워질 만큼 하얀 종잇장 같이 얇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순수! 그를 보자마자 떠올린 단어다. 인도나 티벳에 가는 초보 여행자들이 애당초 자기가 갖고 간 환상만을 보고 오듯이 이외수의 ‘기인 이미지’도 준비된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외수’라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외수지,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외수(李外秀)’도 아니다. 그의 어두웠던 삶을 반추해본다면 ‘이외수(李外樹)’라고 해야 어울린다. 그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자두나무(李) 군집을 거부하는 듯 멀리 떨어져 외롭게(外) 서 있는 가냘픈 나무(樹) 한 그루처럼 살았다.

 

젊은 시절 이외수와 함께 한 것들은 비듬, 이(泥), 얼룩, 배고픔, 창녀의 빈 방 따위였다. 몸이 성할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별 시답잖은 동포들한테까지도 동포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그의 20대부터 40대까지는 열등과의 싸움이었다. 세상이 원하는 보편적 기준인 가문, 학벌, 외모, 경제력 등 그는 어느 조건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열등감과 싸웠다. 가장 힘들었던 열등감은 가난이었다. 그래도 꿈은 있었다. 바로 영혼의 울림을 느껴질 수 있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는 것.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그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 강원도 정선 산골로 들어간다.

 

그에게 문학은 치열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데뷔작 『꿈꾸는 식물』을 발표했지만 그는 여전히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밖에 나가면 남편의 술 외상값 때문에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아이들은 주인집 아이들에게 기를 못 피고 살았다. 그는 가족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을 사기 위해 글을 썼다는 작가의 자의식은 그를 8년 동안 절필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혹독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스스로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교도소의 철문을 직접 주문 제작해 그의 집필실에 설치하고 감옥 속에서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최고의 열매 하나를 영글기 위해서 이외수는 일부러라도 스스로 상처를 줬다. 풍족하고 좋은 삶의 영양분을 마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야 하는 예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를 열고, ‘나’를 기꺼이 내주고, 나만을 위한 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Egon Schiele  「Autumn sun and trees」  1912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육안(肉眼)의 범주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안(靈眼)의 범주에까지 닿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움,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일이 예술이다. (19쪽)

 

이외수에게 좋은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나쁜 예술’은 ‘나뿐인 예술’일 것이다.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글을 쓰는 ‘나뿐인 예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적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으며 극단적인 삶을 살았지만, 오히려 어두컴컴한 과거는 그에게 ‘사랑’에 눈 뜨게 만들었다. 고독한 영혼을 변화시킬 정도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 ‘사랑’으로 소통하고, 치유하고, 구원하고 싶은 예술이 그의 꿈이었다. 이외수에게 예술은 자신처럼 상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던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모아 튼튼하게 만든 사랑의 그물이다.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외수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면 육안(肉眼)을 넘어 영안(靈眼)을 획득하는 경지가 돼야 한다. 영안을 가지고 보면 사랑의 본체를 깨닫고 볼 수 있다. 가슴 안에 아름다움을 심을 수 있는 영안과 심안에 눈을 뜬 사람이 된다면 사랑이 가득한 존재, 행복이 가득한 존재가 되고 이때의 사랑과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사랑을 아십니까', 괴짜 사부님

 

 

 

 

 

Egon Schiele  「Four Trees」  1917

 

 

겨울철에 자동차 운전을 하다 보면 차 유리에 성에가 많이 끼어 불편하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운전하는 데도 위험하다. 충분히 자동차를 예열해서 성에를 제거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다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자기를 객관화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 더욱 성실할 수밖에 없다. 바울로 사도는 “내가 자족하는 삶의 비밀을 터득했노라”고 했다. 신앙의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깊은 각성(覺醒), 깨달음이다.

 

이외수의 글도 그렇다. 자신의 아픔을 독자에게 에누리 없이 보여주고, 가식 없이 진솔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빗장이 스스로 열린다. 못난 사람이 후진 땅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었던 마음이 녹는다. 마음은 감성의 근본이 되고 이 마음을 중시하는 삶과 예술이야말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지름길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각성의 경지에 이른 그는 최근에 달의 지성체와 채널링을 통해 교신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원히 변치 않는 괴짜임에 틀림없다. 이젠 그를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비웃기보다 자신이 통째로 안아 버리려 하는 그는 이미 도(道)를 터득한 ‘사부님’이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자신처럼 마음의 눈을 뜬 영안을 가진 자를 만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을 만난다면 도인처럼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사랑을 아십니까'라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올거 같다. 김산의 시 구절처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꿈길을 같이 걷자고 덥썩 손을 내밀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씐 주저리를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주저리를 씌우려고 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주저리.

 

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체험할 수 있는 심적 수련의 과정을 무조건 따라하자는 건 아니다. 소양이 많이 부족한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사물 그리고 자연과 채널링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자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폭넓은 사랑을 하려면 아름다움을 자주 접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던지, 화초 가꾸기를 하면 꽃피고 열매가 맺는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 또 끊임없는 대화를 가져야 한다. 자연적인 것들과 대화도 하고, 자문자답을 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이외수는 대상과 자신과 합일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음’이라고 했다. 생각하지 말고 느끼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근원 속에는 사랑의 본성이 숨어 있다. 삶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눈을 뜨고 봐야 한다. 일상에 사랑이 합일된다면 행복 찾기는 어렵지 않다. ‘힐링’을 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 혼자 있는 고요한 날에, 마음의 문을 열고 밖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채널링하기 딱 좋은 시간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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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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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