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들어 있다. 어릴 때부터 별에 관심이 많던 그는 도서관에서 사서에게 별(star)에 관한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참 후 사서는 한 권의 책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진 책은 클라크 케이블, 진 하로 등 당대 최고의 스타(star) 사진이 실린 책이었다. 하늘의 스타가 아닌 땅의 스타를 갖고 온 것이다.

 

밤에는 별이 빛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공해로 찌든 도시에서는 별이 안 보인다고 하지만 지금도 우리들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

 

별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별과 학문적인 의미의 별이 그것이다. 보통 밤하늘에 빛나는 것, 모두를 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일반적인(또는 넓은) 의미의 별이다.

 

그러나 밤하늘에 빛나는 것 모두 별은 아니다. 학문적인(또는 좁은) 의미의 별은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만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별이 다름 아닌 우리가 365일 대하는 태양이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5천만㎞ 떨어진 곳에 있는 별이다. 밤에는 희미하게, 낮에는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도록 빛나는 태양이지만 수십, 수백 광년 거리에 가져다 놓으면 그저 평범한 밤하늘의 별에 불과하다.

 

밤하늘에 빛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별이지만 아닌 것도 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밤하늘에서 상대적인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 항성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별이 있다. 바로 행성이다. 태양계에는 지구를 포함해 9개의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며, 지구에서 보면 마치 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 행성은 항성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 채 항성인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빛날 뿐이다.

 

‘별부스러기’라는 말이 있다. 사실 우주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이나 구리 등의 원소는 거의 없고, 대부분 수소와 헬륨뿐이다. 그렇다면 수소와 헬륨을 제외한 나머지 원소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철이나 구리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지는 곳은 단 한곳, 별 내부밖에는 없다.

 

별이 폭발하며 최후를 맞을 때, 별의 잔해들이 우주 공간에 뿌려진다. 그리고 이렇게 뿌려진 별부스러기는 다시 모여 태양을, 지구를, 그리고 사람을 만들었다. 즉 우리 몸은 별부스러기인 셈이다. 옛날부터 인간이 별을 보며, 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오늘밤에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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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유 없는 반항 : 리마스터링 - 아웃케이스 없음
니콜라스 레이 감독, 나탈리 우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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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3편의 영화만 남겼음에도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제임스 딘은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좌절하고 반항하는 청춘의 표상으로서. 그 같은 딘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 <이유 없는 반항>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지만 물론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즉 영화에서 딘이 보여주는 반항은 오로지 권위적이며 고루한 의식에 사로잡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공처가로서 어머니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밤늦게 귀가한 아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도 있다. 가부장의 권위를 상실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반항의 또 한 축이다. 그럴 것이 영화가 제작된 1950년대만 해도 미국에는 청교도적 관습에 의해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 가정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사 주고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10년쯤 뒤면 너도 다 알게 될 텐데….” “너를 위해 날마다 기도했는데….” 영화에서 고등학생 짐(제임스 딘 분)의 부모가 개탄하는 내용들이다. 부모로서는 아들에게 해줄 만큼 해 줬는데 뭐가 불만이어서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부모가 보기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수 있는 일인데, 그처럼 하찮은 것들에 인생을 거는 아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이유 없는 반항’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겁쟁이 소리를 듣느니 죽는 게 나으며, 10년 뒤가 아니라 당장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반항하는 것이다. 모두가 널 위해서라는 부모의 일방적 사랑마저도 아들에겐 속박일 뿐이다.

 

영화로서 각별한 기술적 우수성이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60년대의 청춘 반란을 선취하고 있는 예고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겨우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요절하고 만 제임스 딘은 스크린 위에서나 사회사적으로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딘이 분한 주인공 짐은 말수가 적고 섬세하며 내향적인 성격이다. 이를 보상이나 하려는 듯 때로 난폭해지는 수가 있다. 새로 온 전학생은 어디에서나 집단적 골탕 먹이기나 ‘왕따’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전학생인 그에게 불량학생의 우두머리가 싸움을 건다. 두 학생은 칼부림 대결을 하지만 마침 경관이 발견하고 이들을 제지한다. 그 결과 두 학생은 ‘간 크기 시합’을 하게 된다. 차를 몰고 벼랑을 향해 달리다가 차에서 뛰어내리는데 먼저 뛰어내린 쪽이 패배 판정을 받는 시합이다. 불량학생들의 언동이나 이 ‘간 크기 시합’은 그 박진감 때문에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결국 불량학생두목이 탈출에 실패해서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다 잊어버려도 이 장면만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광경을 목도한 나탈리 우드가 실신할 판국이어서 제임스 딘이 그녀를 잡아준다. 나탈리 우드는 불량학생 두목과 가까운 처지였다. 그날 밤 제임스 딘은 경찰에 자수하러 가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선도계원이 부재중이어서 그냥 나오다가 불량학생들의 눈에 띄고 이 때문에 경찰에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불량학생들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몰리어 제임스 딘과 나탈리 우드는 빈집으로 도망친다. 딘의 친구가 도움을 주기 위해 불량소년들에게 권총을 난사하고 세 학생은 한곳에 모여 있다. 공포 분위기의 하룻밤이 지나자 경찰이 주위를 에워싼다. 딘은 권총에서 탄환을 빼버리지만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이성을 잃은 그의 친구는 경찰에게 덤벼들다 사살되고 만다. 딘은 처음으로 자기를 이해해주는 부친의 품에 안기어 울음보를 터뜨린다.

 

문제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부모와 문제 가정이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수용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딘의 집안에서는 부친이 도무지 영이 서지 않는다. 앞치마를 두른 채 바닥에 꿇어앉아 떨어진 음식을 주워 담는 부친을 아들은 민망한 낯빛으로 바라본다. 모친은 조부와 늘 신경전이다. 집안에서 그의 심정이 편안할 리 없다. 한편 나탈리 우드 집안에서는 부친이 폭군이다. 부활절 파티에 참석했다가 늦게 들어왔다고 ‘더러운 바람둥이’라 딸을 몰아붙인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볼에 입맞춤을 하자 딸의 따귀를 갈겨 결국 가출하게 한다. 거기 등장하는 불량학생들은 더욱 문제 많은 집안의 자녀일 것이다.

 

고소공포증 소유자는 그랜드 캐니언 벼랑 끝에 서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사진만 보아도 아찔한 생각이 드는 법이다. 영화에 나오는 불량학생들의 섬뜩한 언동은 심약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 여린 영혼이 온전하게 성장하기는 어렵다. 사춘기의 위기를 다룬 이 영화는 <이유 없는 반항>이 그 뒤에 전개되는 ‘대의(大義) 있는 반란’의 선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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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3-26 11:42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얼마전에 ebs에서 이 영화 해 주더라고요. 나탈리 우드 참 예쁘죠. 저는 그 절벽신만 좀 보다 다 못 봤어요. 제대로 봤다면 아주 재미있었겠어요. 이러한 내용의 영화였군요!

cyrus 2014-03-26 12:01   좋아요 1 | URL
요즘 금요일 밤에 하는 EBS 고전영화극장을 즐겨 보고 있어요. 하필 그 시간대에 KBS 1TV에서 명화극장을 하는데 가끔 한 편만 선택해서 봐야하는 고민이 올 때가 있답니다. 지난 주에 명화극장에서는 '병 속에 담긴 편지'를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요즘 보기 힘든 제임스 딘의 영화를 보게 됐어요.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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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3] 테레즈 라캥

 

 

 

 

 

 

 Scene #1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이 부른 파멸

 

불륜과 살인.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 중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게 있을까.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휩싸인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 한마디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본성 깊은 곳에는 도덕과 양심 대신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만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참혹할 만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르짖던 19세기 후반에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작가 혼자서 감내하기엔 쉽지 않았을 터.

 

오늘날이야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언론과 평단은 “에밀 졸라는 마치 포르노그라피를 펼쳐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며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거셌는지 저자 스스로 2판 서문에 열한 페이지에 걸쳐 자신을 옹호하는 반박문을 실었을 정도.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해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고 맞섰다.

 

평단의 비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대목에선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줄거리와 상황 묘사가 파격적이다.

 

주인공은 의욕 없이 살아가던 여인 테레즈와 마초 느낌의 우락부락한 사내 로랑이다. 테레즈는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결혼하고 파리 뒷골목 잡화점 어둠 속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마주하고 속에 숨겨져 있던 욕망이 터져나온다. 욕망에 몸을 불태우던 테레즈와 로랑은 결국 카미유 살인을 공모하고 완전 범죄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결혼. 이젠 행복만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첫날 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카미유의 혼이 자리 잡는다. 기대했던 행복은 오간 데 없이 이제 그들 사이엔 공포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영혼을 보듬어줘야 할 결혼은 오히려 매일같이 영혼을 파괴하며 이어진다.

 

몸짓으로 절규하는 라캥 부인은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로랑의 존재로 대신 메운다. 로랑과 테레즈는 까미유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존재에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정욕은 연이어지는 암전 속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끝내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낸다.

 

 

 Scene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욕망의 에로티시즘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테레즈와 로랑의 불륜에서 느껴지는 욕망의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테레즈와 로랑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 고모에게 맡겨져 병약한 카미유와 함께 자란 탓에 원래 지니고 있던 야성적 기질을 억누른 채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러자 로랑을 만난 순간부터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억눌려진 야성적 욕망이 용솟음치게 된다. 때마침 로랑도 채울수록 허전한 자신의 쾌락의 부재를 해소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랑, 성욕, 쾌락과 고통, 살해욕, 죽음. 이 지극히 상반된 두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금기를 어긴 그들의 위험한 사랑은 결국 카미유를 살해하려는 무시무시한 감정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상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망을 순식간에 식게 만드는 공포의 감정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건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 공포심은 이미 세상에 존재치 않는 영혼을 그들 사이에 불러들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해간다. 육체적 폭력이 오히려 위안이 될 정도의 극한 괴로움. 그걸 끝내는 건 결국 죽음뿐이다. 에로티시즘이 불러들이는 죽음이다.

 

 

 

 Scene #3 공포와 절망의 삶, 잠시라도 잊게 해다오

 

중독성 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탈출에서 시작해서 감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테레즈와 로랑의 만남도 그렇다. 서로 욕망에 중독되어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망자 카미유가 만든 공포와 절망의 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5~1876년

 

한 달 동안은 테레즈도 로랑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카페 속에서 살았다. (중략) 그녀의 신경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방탕, 육체적 쾌락은 이미 망각을 가져다주는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입천장이 타버려 아무리 강한 술에도 무감각한 술주정꾼이 되었다. 음탕한 쾌락에도 무감각해져, 정부들에게서는 오직 권태와 피로를 얻을 뿐이었다. (337쪽)

 

위험한 사랑에 탐닉하게 만든 그들에게는 서로 ‘압생트’ 같은 존재이다. 압생트는 도취약물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악마의 술’이라 부른다. 값은 싸지만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했다. 드가의 그림에서처럼 남녀 노동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과 마음을 쉬는 시간이 곧 압생트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기 음용하면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와 근육마비 증상이 생기며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로랑은 쾌락을 간절히 요구하는 테레즈의 메마른 입술에, 테레즈는 로랑의 크고 건장한 체구에 뿜어져 나오는 짐승같은 욕정에 중독되었다.

 

살인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은 육체적 쾌락에 집착했다. 상대만 달랐을 뿐이지 테레즈와 로랑은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무언가 잊고 싶어서 압생트를 마시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마저도 자신들에게 죄어오는 공포에 벗어날 수 없었다. 테레즈와 로랑은 악몽일 거라고 믿어보지만 가위에 눌린 듯 깨어지지 않는다. 쾌락의 중독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현실을 망각할 수 있어 좋았던 한나절의 욕망은 점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잊고 싶은 건 현실이었는데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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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누구에게 예속되는 삶보다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유를 박탈당했을 때는 용감하게 이에 맞설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부당한 세상에 용감하게 붓으로 맞선 이가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화가 중 하나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였다. 그는 시사만화가로 출발했으니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미에는 오늘로 치면 만평에 해당하는 풍자적인 석판화를 무려 4000여 점 시사 잡지에 기고했는데, 지금 보아도 재미있고 촌철살인인 것들이 많다. 그의 작품들에는 탐욕스러운 정치가들, 비싼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폼 잡고 싶어 하는 소시민, 옆에 선 남성을 튕겨낼 정도로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부르주아 여성 등 다양한 인물군상이 풍자의 대상으로 등장하곤 한다.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1831년

 

 

그 중에서도 도미에가 즐겨 그린 것은 당시의 국왕 루이 필립이다. 필립을 희화화한 대표적인 풍자만화 작품이 『가르강튀아』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 나오는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로 그려진 인물은 바로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이다. 그림 오른쪽부터 보면 백성들이 힘겹게 모은 돈을 통에 넣고 있다. 이렇게 모아진 백성들의 재산을 국왕이 자신의 긴 혀를 통해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 그리고 필립의 의자 밑으로는 그의 배설물이 상장과 훈장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 그림 때문에 도미에는 감옥까지 갔다 왔다. 사실 루이 필립은 스스로가 혁명으로 왕위에 옹립된 만큼 처음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고 자신에 대한 풍자에도 관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미에의 풍자화만큼은 그를 격분케 했다는데, 그를 너무 뚱뚱하게 묘사한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도미에를 고발했고, 도미에는 6개월 징역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도미에는 끄떡없이 신랄한 시사만화를 계속해서 그렸다. 이는 당시 사회 지배 계급의 부정부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1830년 7월 혁명 이후 샤를 10세가 타도되어 왕좌에서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등극했으나 그 또한 자유주의 정책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귀족과 노동자 계층 간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1848년 2월에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루이 필립은 영국으로 망명했고 보통선거 제도가 도입돼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남성도 선거권을 가지게 됐다.

 

도미에의 풍자만화는 무지한 시민 계층들을 격분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해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시사만평은 권위를 조롱하며 결국 공권력을 움직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큰 기여했던 것이다. 만약 도미에와 같이 국왕의 행세를 공공연히 비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프랑스의 자유민주주의 시대는 늦게 열렸을 지도 모른다. 한 사회에 발전과 개혁이 있으려면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자유롭게 민중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환경에서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선진사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어야 한다. 현재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에 관해서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나 몰라라’하는 태도는 국가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수의 정치인들만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는 부패되기 십상이다.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힘쓰기는커녕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왜곡된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행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정치인들은 배려심을 기르고 관용을 베풀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세력들을 보호해야 하고 시민들은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낼 필요가 있다. 오노레가 풍자만화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여 사회적 개혁을 가져왔듯이 우리 모두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좀 더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때론 칭찬도 하고 비판도 하며 한 마음 한 뜻으로 공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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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김현미 지음 / 돌베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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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다문화사회의 허상


결혼이주이든 노동이주이든 국제 이주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도 더욱 개방되고 다양화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문화사회의 등장이다. 최근 대두된 다문화사회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다문화에 대한 요란한 구호가 많이 나오고 있음에도 한국문화의 입장에서 다른 문화를 보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서로 다른 문화, 도덕, 신념, 관습,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다문화사회를 이루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다문화 사회를 긍정하는 사람은 다문화사회가 단일문화사회였던 한국사회에 자비로운 혜택을 줄 거라고 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한국사회의 자산으로 보면서 문화적 차이를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편협한 자문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다문화사회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가령 다문화 배경을 지닌 애플의 스티브 잡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같은 인물을 한국이 낳을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다문화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애써 목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다문화사회가 사회통합을 위태롭게 하고 사회경제발전을 돕기는커녕 방해한다고 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적 차이를 사회 내부의 적(敵)으로 본다. 이주자들이 다문화사회에 살고 있을지라도 자신이 원래 속한 공동체성원이라는 감정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B국으로 이주한 A국인이 여전히 A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신을 B국 시민으로 보지 않으면서 B국 사회에 고립돼 살고 있다.

 

 

 

 Scene #2  그들이 집을 떠나게 만드는 세상  


유엔은 12개월 이상 특정 국가에 체류한 사람을 '이주자'라고 분류한다. 한국은 유엔의 분류에 따라 지난 20년 동안 외국인 이주자 유입이 가장 많이 증가한 나라 중 하나로, 현재 이주자 비율은 전체 국민의 3%에 달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주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다뤄진 적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한국은 이주자 송출국에서 이주자 유입국으로 변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은 정책적으로 제조업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했다. 당시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길 수 없거나 임금 상승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제조업체는 더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을 받아들인 것도 한국내 이주민이 증가한 큰 이유다. 가족중심인 한국은 언제부턴가 저출산과 인구고령화, 결혼시장의 성비 불균형 등으로 지속적인 가족 관계망 형성이 어려워졌다. 이처럼 인구학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한국사회가 이를 외부수혈로 대체하는 과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지난 2003년 무용수로 한국에 왔다가 성매매를 강요당한 러시아 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이주자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10년 동안 이주자들을 인터뷰하며 한국인의 '상식' 이나 '관습'에 익숙한 자신이 다른 상식과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해의 장을 만들어갔다고 토로한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이주자의 현실은 참담 그 자체다. 한국인 남편들은 베트남 부인 집에 송금하는 것을 결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잣대로 이용하거나 자신의 자원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아내의 배반행위로 본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에 대한 비용을 긴 노동시간, 열악한 근로환경, 폭력, 인간적인 배신감 등으로 치러야 하고,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글로벌 이산민처럼 떠돈다. 신자유주의가 지속되는 한 누구나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집을 떠나 이주자 신분이 될 수 있는 게 그들의 현실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주민 2세들은 한국에서의 지위를 인정하며 꿈을 조정해야 하는 슬픈 현실에 직면한다. 노동력 부족,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스스로 이주자를 필요로 하게 된 한국 사회는 이주자의 당연한 권리는 부정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Scene #3  우리로부터의 다문화주의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 


물론 외국인을 무조건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장기체류와 정착이 가져올 사회적 부담과 갈등을 강조하는 점이나 국익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외국인을 대하는 정책과 의식에는 자성할 점이 많다. 외국인을 노동시장 교란 주범이라거나 기초생활보호대상자라는 시각에서 과장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다. 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과 추방 그리고 범죄자 이미지가 외국인에 대한 적대 원인이 아닌가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 본질 문화와 가짜 문화라는 이중기준에 기초한 인종차별과 민족차별의 잣대와 같은 논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수직적 질서를 당연시해 왔다. 우리들에게 내재된 그런 사고방식과 행동들이 결혼이주자와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가족들을 배제하는 논리와 편견의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닌지 자성할 때다.


글로벌화는 필연적으로 다문화 시대를 초래한다. 다문화에는 서로 다른 언어, 기억, 가치, 관행 등의 존재와 그에 대한 저항이 혼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습, 편견, 무지가 뒤섞여 충돌과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주자를 한국 가족과 사회 내에 편입시키기 위해 빠른 동화를 통한 한국화라는 목적에 얽매이다 보니 다문화주의 논의는 ‘다문화 가족’ 정책으로 환원되었고 여전히 정체돼 있다. 이 같은 정책은 다문화 가족 전체를 취약계층과 동일시하면서 영구적인 주변부 계급으로 고착화하는 문화적 폭력까지 만들어냈다.


다문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상대방에 대한 동질성 강요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강조한다. 바람직한 다문화 정책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다문화주의'가 요구된다. 이주자 고유의 정서와 가치관에 관심을 기울이는 공존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주자가 기본 권리를 누리고 유지하는 것이 한국 국민의 권리를 뺏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출발선을 만들어 주고 같은 과정을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특혜’라고 말할 수 없다. 아직 다문화가정 자녀는 소수자이고 소수자를 돕는 일은 늘 더 많은 투자와 배려가 필요한 일이다. 이제 외국인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일상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대비하고 선택하는 방법에는 인간존중과 국민으로서의 외국인주민을 수용하고 배려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 독서모임 인터넷 카페 '달의 궁전'(http://cafe.naver.com/darlgung) 서평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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