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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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3] 테레즈 라캥

 

 

 

 

 

 

 Scene #1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이 부른 파멸

 

불륜과 살인.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 중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게 있을까.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휩싸인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 한마디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본성 깊은 곳에는 도덕과 양심 대신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만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참혹할 만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르짖던 19세기 후반에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작가 혼자서 감내하기엔 쉽지 않았을 터.

 

오늘날이야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언론과 평단은 “에밀 졸라는 마치 포르노그라피를 펼쳐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며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거셌는지 저자 스스로 2판 서문에 열한 페이지에 걸쳐 자신을 옹호하는 반박문을 실었을 정도.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해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고 맞섰다.

 

평단의 비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대목에선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줄거리와 상황 묘사가 파격적이다.

 

주인공은 의욕 없이 살아가던 여인 테레즈와 마초 느낌의 우락부락한 사내 로랑이다. 테레즈는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결혼하고 파리 뒷골목 잡화점 어둠 속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마주하고 속에 숨겨져 있던 욕망이 터져나온다. 욕망에 몸을 불태우던 테레즈와 로랑은 결국 카미유 살인을 공모하고 완전 범죄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결혼. 이젠 행복만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첫날 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카미유의 혼이 자리 잡는다. 기대했던 행복은 오간 데 없이 이제 그들 사이엔 공포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영혼을 보듬어줘야 할 결혼은 오히려 매일같이 영혼을 파괴하며 이어진다.

 

몸짓으로 절규하는 라캥 부인은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로랑의 존재로 대신 메운다. 로랑과 테레즈는 까미유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존재에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정욕은 연이어지는 암전 속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끝내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낸다.

 

 

 Scene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욕망의 에로티시즘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테레즈와 로랑의 불륜에서 느껴지는 욕망의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테레즈와 로랑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 고모에게 맡겨져 병약한 카미유와 함께 자란 탓에 원래 지니고 있던 야성적 기질을 억누른 채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러자 로랑을 만난 순간부터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억눌려진 야성적 욕망이 용솟음치게 된다. 때마침 로랑도 채울수록 허전한 자신의 쾌락의 부재를 해소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랑, 성욕, 쾌락과 고통, 살해욕, 죽음. 이 지극히 상반된 두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금기를 어긴 그들의 위험한 사랑은 결국 카미유를 살해하려는 무시무시한 감정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상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망을 순식간에 식게 만드는 공포의 감정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건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 공포심은 이미 세상에 존재치 않는 영혼을 그들 사이에 불러들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해간다. 육체적 폭력이 오히려 위안이 될 정도의 극한 괴로움. 그걸 끝내는 건 결국 죽음뿐이다. 에로티시즘이 불러들이는 죽음이다.

 

 

 

 Scene #3 공포와 절망의 삶, 잠시라도 잊게 해다오

 

중독성 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탈출에서 시작해서 감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테레즈와 로랑의 만남도 그렇다. 서로 욕망에 중독되어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망자 카미유가 만든 공포와 절망의 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5~1876년

 

한 달 동안은 테레즈도 로랑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카페 속에서 살았다. (중략) 그녀의 신경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방탕, 육체적 쾌락은 이미 망각을 가져다주는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입천장이 타버려 아무리 강한 술에도 무감각한 술주정꾼이 되었다. 음탕한 쾌락에도 무감각해져, 정부들에게서는 오직 권태와 피로를 얻을 뿐이었다. (337쪽)

 

위험한 사랑에 탐닉하게 만든 그들에게는 서로 ‘압생트’ 같은 존재이다. 압생트는 도취약물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악마의 술’이라 부른다. 값은 싸지만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했다. 드가의 그림에서처럼 남녀 노동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과 마음을 쉬는 시간이 곧 압생트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기 음용하면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와 근육마비 증상이 생기며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로랑은 쾌락을 간절히 요구하는 테레즈의 메마른 입술에, 테레즈는 로랑의 크고 건장한 체구에 뿜어져 나오는 짐승같은 욕정에 중독되었다.

 

살인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은 육체적 쾌락에 집착했다. 상대만 달랐을 뿐이지 테레즈와 로랑은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무언가 잊고 싶어서 압생트를 마시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마저도 자신들에게 죄어오는 공포에 벗어날 수 없었다. 테레즈와 로랑은 악몽일 거라고 믿어보지만 가위에 눌린 듯 깨어지지 않는다. 쾌락의 중독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현실을 망각할 수 있어 좋았던 한나절의 욕망은 점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잊고 싶은 건 현실이었는데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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