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들을 것, 볼 것, 읽을 것이 너무 많다.

2. 휴대폰을 꺼놓는 게 속 편하다.

3. 혼자 쇼핑하는 게 더 좋다.

4. 사람들과 오래 있었으면, 혼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5. 혼자 장시간 드라이빙하는 걸 즐긴다.

 


당신은 이 다섯 가지 유형 모두 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성적인 사람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연히 SNS에 보게 된 ‘내성적인 사람의 20가지 증거’라는 글에 5개만 추려봤다. (나머지 15가지 증거의 내용이 궁금한 분은 링크로 확인하면 된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53096)

 

여기 소개한 5개의 유형만 보면 전형적인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것을 좋아한다. ‘내성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용하고,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무조건 ‘내성적인 인간’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특히 4번 유형의 문항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내성적인 성격과 무관하다고 본다. 외성적인 사람도 가끔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외성적인 사람이 되도록 강요받고 살아왔다. 외성적인 성격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내성적인 자녀의 행동에 대해 걱정한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들은 학교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자칫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은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렸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외성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수잔 케인은 역설한다. 세상을 깜짝 놀랄 변화를 일으킨 사람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 많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화가 반 고흐, 간디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이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인생을 풍족하게 발전하기 위한 창조력으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형 은둔이 아닌 이상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다. 이제는 혼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가끔은 고독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는 안 될 정도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이 착각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혼동하면서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꽃은 피고 진다. 인간도 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죽는다. 결국 만물은 우주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고독하게 나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고독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흐름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홀로 있는 시간’ 중에서, 19쪽)

 

 

생전 법정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분이다.  산에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처럼 사람의 발길을 찾아볼 수 없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고독을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외로운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스님처럼 완전한 홀로살이에 적응하지 않는 이상 마음을 짓누르는 고독감의 힘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스님이 생각하는 고독한 삶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은둔과 고립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립은 출구가 없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도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57쪽)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을 향해 행동할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자기 관리’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살아있는 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지속적인 삶의 모습이다. 고독을 두려워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으로 시간을 때운다면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따라오는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내려면 햇빛이 없는 그늘에 가면 된다.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 모자라고 비어 있는 인생의 여백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고독은 절망적인 의미가 아닌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내적 조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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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4-05-2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글 보니 갑자기 위로가...ㅎㅎ
완벽히 내성적 사람인데 외양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 받아 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이중적인 면들이 생기더라구요. 그것도 역시 고민거리 중에 하나죠.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 좋은 말이네요. 요새 드는 생각들과 많은 부분 일치해서 공감 버튼 꾹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4-05-24 0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맘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계시죠? ^^
저도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 이후로 주변 친구들 잘 만다는 덕분인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는 편이에요, 그래도 역시 혼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정말 좋아요. 사람이 매일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없어요.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안 외로우려면 고독을 피하지 말고 즐기는 것이 좋겠죠. 스마트폰 게임만 하고, 카톡한다고 해서 외로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달랠 수 있을 뿐입니다.

풀스가든 2014-07-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내성적 좀 심각하게 말하자면 폐쇄적인 성격인데요...
어두운것 보다는 밝은게 좋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각자 주어진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선과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불가항력 아닐까요
 

 

 

 

예전에 '중2병'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중2병이란 사춘기 청소년이 흔히 겪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자신은 남과 다를 뿐 아니라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행동을 한다. 청소년을 가리키는 '사춘기' 또는 '질풍노도'와 유사한 의미로도 볼 수 있으나 보통은 그들을 얕잡거나 비꼬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북한의 김정은도 '중2'이 무서워 남침을 못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심지어 중2는 그 누구도 다루기 힘들다는 '초딩'보다 무섭다고 한다.

 

건드리면 폭발할 듯 불안한 존재인 대한민국의 열다섯 살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중2병’이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의 굴레에 가두었다. 누구나 다 자신을 떠받들어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러한 말이 그들만의 유행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8~1599년경

 

 

남보다 우월하다고 자뻑에 빠지는 모습은 흡사 자기애적 병리 현상인 나르시시즘과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의 소년 나르키소스에 어원을 두고 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따르고 연모하는 이들에게 늘 냉담했으며 아무에게도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데, 지하 세계에서도 스틱스 강가에서 수면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르키소스를 화가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수면에 비친 환영을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갈구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세계에 침잠한 나머지 타인이나 외부 세계에 무관심하기까지 한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와서 예술가의 초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술가들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기질이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노년에 이르러 자화상에 매진한 데 대해서 일부 미술사가는 그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가 화가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 보다 초점을 맞추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 자신의 초상화에 다름 아니다. 중2병처럼 자기애가 심각한 정신 장애로 악화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0대의 불안한 심리를 ‘중2병’이라 부르지만 그 시기는 감정 과잉을 거쳐 감정 조절과 배려심을 배우는 자연스런 뇌 발달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서적인 변화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면 아이가 힘들어진다.

 

이미 많은 청소년의 사춘기가 어른들의 조급함으로 왜곡되고 있다. 시대와 어른을 닮아 청소년들도 점점 더 냉소적이고, 거칠어졌다.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사회로 내몰면서 아이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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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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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그 모든 불의들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며 적당히 자신만의 안락한 성채를 쌓는 이들이 있을 터다. 알면서도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다. 반대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분노는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 결과 생기는 정서이다. 자신보다 강자라 하더라도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두려움은 크게 줄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집단적 분노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에 분노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악한 자들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해가 지날수록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크게 한 건씩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과거에 세상을 향한 분노는 아무나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를 삭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유교적 사고가 만연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것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분노하면 ‘너나 잘하라’는 까칠한 답변을 듣기 마련이다. 분발 없는 분노란 그저 불온에 지나지 않는 시정잡배의 것이라 교육받았다.

 

‘너나 잘하라’는 말에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사람이 만든 제도이지, 한없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해 세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리지 않고 읽히는 분노란 자기 위안이나 만족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책은 분량이 짧아 단박에 읽을 수 있지만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묵직하다. 분노는 소중한 일이며 분노의 힘은 참여의 기회를 가져온다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를 보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다.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하릴없이 스마트폰 화면에만 시선이 향하는 요즘 젊은이에게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의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진 금권, 극빈층과 부유층,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 등을 세상을 위협하는 불의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분노하라고 외치는 프랑스 사회의 병폐들은 우리 사회의 병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도덕적 해이를 넘어 불법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관료제의 병폐가 그것이다. 또한 권력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일부 언론 등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분노가 전국 도처에서 들끓고 있다. 그의 호소가 먼 땅에 사는 한국 사회의 가슴을 데우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이상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 지 가장 중요한 화두를 적절한 시기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년째 되는 지금 이 순간도 에셀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분노가 필요할 시점이다.

 

현 정권과 유착된 일부 보수 언론이나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우리 사회의 분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좌파 세력의 선동질이라고 비난하고 평가 절하한다. 그들은 분노가 사회의 잠재된 폭력성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이나 그 질서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중에 대해 증오하고 적개심을 품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책 제목이 ‘분노하라’이지 ‘폭력하라’가 아니다. 분노는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는 변혁의 자세이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저항을 품은 분노, 생산적인 분노, 창조적인 분노이다. 따라서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체제다. 권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권력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자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평화롭게 저항하는 분노는 불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지지하고, 적극적인 투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 문제는 불쑥 우리 곁에 나타나고, 또 대중은 그 문제의 개선을 요구한다.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지식인층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좀 더 나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자신에게 당면한 개인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은 ‘나 혼자로 되겠어?’, ‘일단 나 하나 잘 살고 보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장래 걱정하느라 대학생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무원시험에 집중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보궐선거에 나가는 지역구 후보에 누가 나가고, 그들이 내건 공약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의 무능함을 이유로 정치에 냉소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속박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을 이렇게 강요하고 부추긴 세상 속에는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얼마든지 많다. 인권과 생태, 환경, 빈부 격차 문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의 문제 등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태, 환경 문제에 귀 기울이는 일 역시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사회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순간의 성난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비판과 함께 체계화된 절차를 거쳐 우리 생활을 침식하는 불의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목적지향적이어야 한다.

 

분노는 개인의 안위를 떠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냉소적인 자세로 내 것만 챙기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고통스럽게 인내하면서 무관심한 척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화내며 끼어들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학습돼 점점 무관심의 늪에 빠져 죽어간다. 그 사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쥐고 흔든다. 결국 그 부조리의 칼은 우리의 삶을 향할 것이고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현실을 보면 분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분노할 마음조차 억압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놓아버리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정의가 영영 사라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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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빼곡하게 쌓은 책 무더기 사이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할 때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특히 그 책이 대형서점에서도 팔지 않는 책이라면 더욱 뿌듯하다. 그럴 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볍게 느껴진다. 집에 도착하면 책에 오랫동안 묻어있는 테이프 자국과 먼지를 말끔히 제거한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부분은 사포 조각으로 긁어낸다.

 

내가 태어난 연도에 나왔거나 이미 그 전부터 나온 책의 종이는 변색되기 쉽다. 게다가 헌책방 내부 상 눅눅한 습기로 인해 종이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책을 보게 되면 내 방에 꽂혀 있는 책들은 과연 세월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뜬금없이 책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집에 보관된 책이라도 10년, 20년이 지날수록 책의 상태가 온전치 못할 것이다. 방의 습기 때문에 책을 햇볕에 건조시키면서 관리한다면 변색을 피할 수 있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책의 운명도 사람의 운명 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탄생, 성장, 성숙, 쇠퇴. 깔끔한 표지로 초판이 등장하고, 책의 반응이 높아지면 몇 부 더 찍어 낸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부수가 많고, 많이 팔린다. 그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반면 독자의 관심이 적은 책은 많이 찍어 봐야 10쇄를 넘기지만, 초판만 찍고 일찍 절판의 운명을 맞기도 한다. 무명 시절이 너무나도 긴 책 중에 갑작스러운 독자의 관심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인기는 한 순간이다. 책의 번역이 시원찮다거나 책이 대필이거나 표절로 만든 사실이 밝혀지면 절판될 수도 있다. 특히 책의 운명 주기 중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이라면 출판사의 부도다. 아무리 인기 좋은 스테디셀러라도 자신을 만들어 준 출판사가 망하면 더 이상 책을 찍어낼 수 없다. 그나마 책의 운명 주기는 인간의 운명 주기와 비교해서 큰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죽음을 맞는 순간 끝이지만, 절판본도 독자의 관심을 받게 되는 시점을 맞이하면 다시 살아난다. 새로운 출판사, 새로운 표지 또는 새로운 편집자를 만나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책 한 권이 오래 살고(스테디셀러), 일찍 죽는(절판) 과정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요인 중에 독자의 영향력과 출판사의 부도는 제일 크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독자의 관심이 없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절판되기 일쑤다. 출판사는 책의 번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자궁이 없으면 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진다.

 

자궁이 상실된, 몇 권 안 되는 절판본 초판 혹은 후손이 향하는 최후의 장소는 헌책방이다. 조금은 슬픈 표현이지만 헌책방은 책의 공동무덤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헌책방 마니아는 먼지와 세월 속에 죽어가는 책을 찾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절판본의 가치를 알고 있는 헌책방 마니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지 쌓인 책의 지층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가끔 절판본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몇 권 꽂혀 있기도 하다. 헌책방에 비해 발견 확률이 희박하지만 재고가 남을 때도 있다. 그 다음은 동네 서점.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경험상 동네 서점이 절판본이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단 동네 서점에서 헌책방에 책 찾듯이 하는 손님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형서점의 유통에 밀려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에 장사가 워낙 안 되다보니 서점이 문제집 파는 문구점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서점과 겸업하기도 한다. 초중고생들은 문제집만 구입하지 그 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살 일이 많지 않다. 책을 사려면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서점에 찾아갈 뿐이다. 문구점인데도 대형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팔긴 한다. 재고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나름 베스트셀러 책은 문구점에 가면 꽂혀 있다.

 

동네 서점과 문구점이 헌책방보다 절판본을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오늘 평소에 공부하던 독서실 근처에 위치한 문구점에서 절판본 몇 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운이 좋았다. 내가 사는 곳은 이제 동네 서점도 찾아보기 힘들다.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거나 문구점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나 독서실 주변에 문구점이 많은 편인데 지우개를 사야해서 점심시간에 문구점 한 곳으로 가게 됐다.

 

단지 지우개만 사려고 문구점에 들렀는데 그 곳은 다른 문구점에 비해서 건물 평수가 넓었다. 한 쪽에 문구물품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문제집이 천장까지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런데 문제집이 꽂혀 있는 책장 옆에는 유독 텅 빈 부분이 있었다. 거기는 문제집보다는 서점에서 파는 책들이 수십 권 정도 꽂혀 있었다. 여기 문구점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궁금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텅텅 비어있는 책장은 손님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무척 비좁은 곳에 위치했다. 발밑에 꽂혀 있는 책을 확인하기 위해서 쪼그려 앉아야했는데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래도 먼지가 잔뜩 쌓이기 쉬운 바닥에 놓인 헌책도 꼼꼼히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서 좁은 공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구점에 남아 있는 재고의 책들이 놀랍게도 출판된 지 좀 오래된 것들이었다. 여기 문구점에 오는 손님들도 구입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대다수였다. 스테디셀러 몇 권 있었지만 헌책방에 있는 책처럼 새까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책이 꽂혀 있는 책장 근처에 한 발짝이라도 온 옮긴 손님은 과연 몇 명 있었을까. 혹시 그곳에 손길을 남긴 사람이 아마도 내가 처음일 것이다. 먼지가 얼마나 심했으면 책을 뺏다 꽂는데 손이 시커멓게 변했다.

 

 

 

 

 

* 종이와 마찬가지로 책 표지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가 보다.

종이가 변색되는 것처럼 책등 또한 변색되어서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 곳을 한 10분 동안 찬찬히 살펴본 끝에 뜻밖의 책을 발견했다. 절판된 김훈의『자전거 여행 2』(생각의나무, 2004년 초판)과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 『호르두발』 『유성』『평범한 인생』(리브로, 1998년 초판)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누림, 1998년)이다.

 

 

 

 

 

 

 

 

 

 

 

 

 

 

 

 

동네 서점도 아닌 문구점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를 발견할 줄이야.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10년 전에 나온 상태로 말이다. 알라딘 중고샵에서 한정판 양장본으로 된 『자전거 여행』 1권을 구입한 지 4개월 만이다. 드디어 소중한 짝을 찾게 됐다.

 

 

 

 

 

 

 

 

 

 

 

 

 

 

 

 

 

 

 

 

 

 

 

 

 

 

 


카렐 차페크의 3부작 소설 중에 『호르두발』 『유성』(‘별똥별’로 이름이 고쳐서 나옴)만이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역자는 리브로판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이다. 아직 리브로판과 지만지판을 읽어보지 않아서 리브로판 내용을 그대로 옮겼는지 아니면 번역을 새롭게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3부작 중 마지막인 『평범한 인생』은 아직 복간되지 않았다. 이 책 또한 언젠가는 지만지에서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리브로판 3부작을 구입할까 고민했다. 당시 책을 구입 가능한 비용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3부작 중 두 권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세 권을 지를까 말까 스스로 따져봤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지우개 하나 사러 문구점에 들렀는데 책 때문에 30분 정도 걸렸다) 김훈과 차페크의 책, 총 4권만 구입하기로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는 범우사의 범우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누림출판사가 제일 먼저 나온 판본인데 역시 절판되었다. 그래서 굳이 누림판을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지우개 하나에 책 네 권을 문구점에서 구입했다. 문구점 주인은 책을 사는 내 모습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던데 내심 흐뭇했을 것이다. 문구점이 망할 때까지 절대로 팔리지 않을 책을 팔게 되었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밖에. 만약에 영영 못 판다면 일부는 헌책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결국 오늘은 나와 문구점 주인이 서로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동네 서점이나 문구점에 팔고 있는 책들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한 번 문구점에 가게 되면 책이 꽂혀 있는가 확인해야겠다. 또 다른 행운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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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3부작 득템 부럽네요! 요즘 뒤늦게 차페크에 꽂혀서 차페크 책을 다 구하고 싶은데, 지만지 책은 왠지 사기 싫고 ㅠㅠ (책값 쓸데없이 비싸고, 가끔 보니 축약본도 많고... -_-) 암튼 부럽습니다;

cyrus 2017-01-25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잠자냥님처럼 차페크의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었는데, 정작 3부작은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
 

 

 

 

 

 

 

 

 

 

 

 

 

 

 

 

1899년 미국의 실업가 프레더릭 테일러는 철판을 만드는 제철소를 대상으로 혁명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제철소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철소 노동자들이 42㎏짜리 선철 봉을 화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한 노동자 10명은 하루에 75t의 선철을 짊어졌다. 이는 이전 작업 수치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틀간의 면밀한 관찰 끝에 테일러는 일일 공정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 45t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업량의 세 배였다. 이를 토대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이 만들어졌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를 개발했다. 노동자들에게 하루 작업량을 제시하고 이를 초과한 사람에게는 성과급을 주고, 채우지 못한 사람은 해고한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전락한다. 더욱이 사람은 강철로봇이 아닌 이상 정해진 시간 내에 작업량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초과되어 하루 작업량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실직자가 되고 만다. 시간 준수를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과이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일을 해야만 하는 테일러리즘의 영향은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일러리즘은 우리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어린이용 테일러리즘,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방학 시간표를 만들었다. 컴퍼스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안에 피자 조각을 나누듯이 정성껏 방학 때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었다. 학원 다니기, 친구랑 놀기, 방학 과제물 하기, 책 읽기 등 평소 방학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정을 모조리 써넣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일정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잠자는 시간을 의미하는 ‘꿈나라’라는 큼지막하게 배치한다. 방학에는 늦잠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제일 기다리던 시간이 ‘꿈나라’로 갈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방학 시간표 일정 중에서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시간 또한 ‘꿈나라’로 갈 때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길고 짧은 꿈나라를 떠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원형 시간표를 손수 만들고, 예쁘게 정성껏 꾸미는 동안 시간을 절약하고, 정해진 일정대로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방학 시간표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는 스케줄러인 셈이다. 하지만 멋진 그림과 정성껏 공들여서 만든 방학 시간표는 벽을 장식하는 멋진 그림으로 남을 뿐이다. 방학 내내 책 읽고, 친구랑 놀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책 읽는 시간에 친구 만나러 다닐 수 있고, 친구랑 놀아야하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스케줄러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루 안에 실행하면 시간도 절약하는 동시에 알차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에 없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반복되고 익숙한 것을 싫어하는 우리 뇌의 방해 때문에 게을러질 수도 있다. 스케줄러대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스케줄러만 믿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엄격한 자기관리에 대단하게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도 든다.

 

만약에 테일러리즘 또는 방학 시간표처럼 죽을 때까지 반복되고 고정된 시간과 일상을 지키면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시간과 일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만든 시간표대로 사는 것이다.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삶을 기쁘게 팔을 벌려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내 일상을 마음대로 재단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남이 만든 시간표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다.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의 배경인 기원후 29세기의 세상은 시간과 계획에 철저히 종속당한 인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함 그 자체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 율법표’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 율법표. 벌써부터 느낌이 올 것이다. 기원후 29세기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밥 씹는 횟수까지도 ‘한 숟가락당 50번’으로 정해져 있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시간 율법표에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이런 쉣더퍽!)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하나인 듯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일을 끝낸다. 생활은 질서로 꽉 짜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가슴에 황금색 번호가 적힌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자먀찐의 소설 속 기원후 29세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번호’라고 부른다. 자신을 ‘개인’이 아닌 ‘단일제국’이라는 이름의 국가 전체를 이루는 벽돌 한 조각으로 여길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은 과거 구닥다리 시대의 낡은 언어에 불과하다. 시간 율법표를 어기면 ‘단일제국’을 통치하는 ‘은혜로운 분’의 벌이 기다린다. 시간을 지키는 특이한 취향이 테일러와 비슷하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테일러는 시간을 못 지키는 노동자에게 ‘You're Fired!(너는 해고야!)’라고 화끈하게 외치지만, 단일제국의 지배자이신 은혜로운 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반하는 국민에게 ‘You're Dead!(너는 뒈졌어!)’라고 단호하게 처벌한다.

 

쟈먀찐의 『우리들』은 완성된 지 4년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국인 소련 내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당했다. 『우리들』이 1920년대 소비에트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 섞인 풍자라는 이유로 자먀찐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혔다. 자먀진의 궁극적인 비판 대상이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에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의 대척점인 자본주의 또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의 표준화를 강조한 테일러리즘의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형태를 낳게 되었다.

 

자먀찐의 소설에 ‘테일러’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 율법표’는 테일러리즘의 원리를 그대로 일상생활에 적용시킨 실사판이다. 테일러리즘이 만들어 낸 암울한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단일제국 사람들에게 고대인(지금의 21세기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동떨어진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이 ‘은혜로운 분’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테일러다. 오랫동안 테일러리즘의 원리가 몸에 밴 단일제국 사람들은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테일러를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혹시 ‘은혜로운 분’이 20세기에 살다간 위대한 경영자로 평가받는 테일러의 후손이 아닐까?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 동일한 시간에 우리는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시작하고,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끝낸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져서, 수백만의 손을 가진 단일한 몸체처럼, 우리는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동일한 순간에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그리고 동일한 시간에 산보를 나가고, <테일러의 연습> 강당에 가고, 취침한다. (18쪽)

 

테일러란 인물은 고대인들 중 가장 우수한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물론 그는 자신의 방법을 삶 전체로, 매 걸음걸음마다로, 24의 체계를 1시부터 24시까지 통합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39쪽)

 

테일러리즘과 더불어서 현대식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로 문을 열게 만든 것이 바로 포디즘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화 대중화 시대를 시작한 헨리 포드에서 유래된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은 자본주의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드가 착안한 것은 노동자가 작업대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물이 이동하여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작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였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장인들, 즉 노동자들의 수공 조립품이었다. 포드는 이동 조립라인을 통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낮은 비용으로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활용되려면 작업자 한 사람마다 과업이 구분되도록 분업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테일러식 노동분업과 포드의 기계식 생산시스템의 절묘한 만남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중심축이 되었다.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포드 전후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포디즘 역시 테일러리즘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분업과 기술적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노동의 인간화 요구를 무시했기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집단적 저항의 표적이 되었다.

 

 

 

 

 

 

 

 

 

 

 

 

 

 

 

과학과 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서 인간성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런 세상은 더 잘 사는 세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된다. 쟈먀찐은 테일러리즘이 자유와 인간 고유의 가치(사랑)마저 잊히고 낡은 유물로 치부해버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포디즘이 등장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를 반어적으로 묘사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영문판에는 ‘A.F’란 표현이 나온다. ‘After Ford’를 줄인 것으로 (문예출판사 번역본에서는) ‘기원’이라고 번역했다. 포디즘이 등장한 이후를 의미하는 기원 632년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A.F’라는 용어 자체는 포드가 예수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을 웅변한다.

 

“포드 님의 은혜로 세상은 태평천하로소이다.” (57쪽)

 

‘A.D'를 ’A.F'로 알파벳 철자 하나를 바꾸어 포디즘이 지배한 섬뜩한 현실을 강조하고, 그런 현실에 적응, 아니 철저하게 순응하고 마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견습생 헨리 포스터는 헨리 포드를 연상케 한다. 결국 포스터가 멋지게 생각하는 ‘신세계’는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낳은 사회구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쟈먀찐의 디스토피아는 권력이 개인의 시간에 침투하여 전체주의의 틀로 옳아 매어 자유를 억압했다면,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쟈먀찐보다 지독한 철저한 계급사회다. 태아가 유리병 속의 기계적 환경에서 자라나고 날 때부터 적성과 지능,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정해진 계급에 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두 작가의 디스토피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하고 나보다 계급 높은 사람한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밖에 나가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사회다.

 

테일러와 포드의 유령은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기업은 ‘포스트 테일러리즘’ 또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괜찮은 이름으로 생산성을 확보하고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70~80년대에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는 이상 경제상정 모델로서 적합한 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에 길들여져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에 시간 관리는 효율적인 업무 향상과 성공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역량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항상 스케줄러를 들고 다니고 확인하는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사람일까. 그리고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년에 시청자의 고민을 소개하는 ‘안녕하세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직접 딸의 스케줄러를 만들고 강요(?)하는 사연을 본다면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이 무조건 훌륭한 인재상에 적합한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시간 관리를 철저히 지키는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꼭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우리나라는 70년대부터 경제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근면의 역량을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 중 하나가 ‘근면’이었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도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능력과 연관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우리가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겨울을 대비해 여름에 일하는 부지런한 개미가 되기를 원했고, 베짱이는 시간 개념도 없이 놀고, 먹기 만하는 게으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과연 『우리들』의 단일제국과 『멋진 신세계』는 상상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까. 글쎄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직접 미래를 결정하는 풍토와 두 개의 디스토피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좋은 명문고를 가기 위해서 하루에 학원 세, 네 개 정도 다닐 수 있도록 유명 학원가를 알아보는 부모. 아이는 부모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다. 학교 다음에 가야하는 곳이 학원 또는 독서실이다.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원에 가기 싫어도 안 가면 안 된다. 기특하게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준 부모를 생각해주는 것도 있지만, 학원 한 군데라도 가지 않았다가는 부모에게 꾸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간표를 만들 것이다. 다만 그 시간표 안에는 ‘친구들과 놀기’, ‘TV 보기’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유희의 시간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공간 대신에 ‘학원 가기’,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만 가득하고, ‘꿈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테일러는 규정된 일을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해고의 칼바람을 휘둘렀고, ‘은혜로운 자’는 시간을 지키지 못한 ‘번호’에게 죽음의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는 시간과 공부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 아닌 사랑의 매를 들고 있다. 자식이 잘 살아야 부모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는 없다. 알고 보면 디스토피아는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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