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미국의 실업가 프레더릭 테일러는 철판을 만드는 제철소를 대상으로 혁명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제철소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철소 노동자들이 42㎏짜리 선철 봉을 화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한 노동자 10명은 하루에 75t의 선철을 짊어졌다. 이는 이전 작업 수치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틀간의 면밀한 관찰 끝에 테일러는 일일 공정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 45t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업량의 세 배였다. 이를 토대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이 만들어졌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를 개발했다. 노동자들에게 하루 작업량을 제시하고 이를 초과한 사람에게는 성과급을 주고, 채우지 못한 사람은 해고한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전락한다. 더욱이 사람은 강철로봇이 아닌 이상 정해진 시간 내에 작업량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초과되어 하루 작업량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실직자가 되고 만다. 시간 준수를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과이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일을 해야만 하는 테일러리즘의 영향은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일러리즘은 우리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어린이용 테일러리즘,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방학 시간표를 만들었다. 컴퍼스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안에 피자 조각을 나누듯이 정성껏 방학 때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었다. 학원 다니기, 친구랑 놀기, 방학 과제물 하기, 책 읽기 등 평소 방학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정을 모조리 써넣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일정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잠자는 시간을 의미하는 ‘꿈나라’라는 큼지막하게 배치한다. 방학에는 늦잠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제일 기다리던 시간이 ‘꿈나라’로 갈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방학 시간표 일정 중에서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시간 또한 ‘꿈나라’로 갈 때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길고 짧은 꿈나라를 떠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원형 시간표를 손수 만들고, 예쁘게 정성껏 꾸미는 동안 시간을 절약하고, 정해진 일정대로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방학 시간표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는 스케줄러인 셈이다. 하지만 멋진 그림과 정성껏 공들여서 만든 방학 시간표는 벽을 장식하는 멋진 그림으로 남을 뿐이다. 방학 내내 책 읽고, 친구랑 놀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책 읽는 시간에 친구 만나러 다닐 수 있고, 친구랑 놀아야하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스케줄러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루 안에 실행하면 시간도 절약하는 동시에 알차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에 없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반복되고 익숙한 것을 싫어하는 우리 뇌의 방해 때문에 게을러질 수도 있다. 스케줄러대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스케줄러만 믿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엄격한 자기관리에 대단하게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도 든다.

 

만약에 테일러리즘 또는 방학 시간표처럼 죽을 때까지 반복되고 고정된 시간과 일상을 지키면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시간과 일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만든 시간표대로 사는 것이다.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삶을 기쁘게 팔을 벌려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내 일상을 마음대로 재단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남이 만든 시간표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다.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의 배경인 기원후 29세기의 세상은 시간과 계획에 철저히 종속당한 인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함 그 자체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 율법표’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 율법표. 벌써부터 느낌이 올 것이다. 기원후 29세기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밥 씹는 횟수까지도 ‘한 숟가락당 50번’으로 정해져 있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시간 율법표에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이런 쉣더퍽!)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하나인 듯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일을 끝낸다. 생활은 질서로 꽉 짜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가슴에 황금색 번호가 적힌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자먀찐의 소설 속 기원후 29세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번호’라고 부른다. 자신을 ‘개인’이 아닌 ‘단일제국’이라는 이름의 국가 전체를 이루는 벽돌 한 조각으로 여길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은 과거 구닥다리 시대의 낡은 언어에 불과하다. 시간 율법표를 어기면 ‘단일제국’을 통치하는 ‘은혜로운 분’의 벌이 기다린다. 시간을 지키는 특이한 취향이 테일러와 비슷하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테일러는 시간을 못 지키는 노동자에게 ‘You're Fired!(너는 해고야!)’라고 화끈하게 외치지만, 단일제국의 지배자이신 은혜로운 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반하는 국민에게 ‘You're Dead!(너는 뒈졌어!)’라고 단호하게 처벌한다.

 

쟈먀찐의 『우리들』은 완성된 지 4년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국인 소련 내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당했다. 『우리들』이 1920년대 소비에트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 섞인 풍자라는 이유로 자먀찐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혔다. 자먀진의 궁극적인 비판 대상이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에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의 대척점인 자본주의 또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의 표준화를 강조한 테일러리즘의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형태를 낳게 되었다.

 

자먀찐의 소설에 ‘테일러’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 율법표’는 테일러리즘의 원리를 그대로 일상생활에 적용시킨 실사판이다. 테일러리즘이 만들어 낸 암울한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단일제국 사람들에게 고대인(지금의 21세기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동떨어진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이 ‘은혜로운 분’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테일러다. 오랫동안 테일러리즘의 원리가 몸에 밴 단일제국 사람들은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테일러를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혹시 ‘은혜로운 분’이 20세기에 살다간 위대한 경영자로 평가받는 테일러의 후손이 아닐까?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 동일한 시간에 우리는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시작하고,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끝낸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져서, 수백만의 손을 가진 단일한 몸체처럼, 우리는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동일한 순간에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그리고 동일한 시간에 산보를 나가고, <테일러의 연습> 강당에 가고, 취침한다. (18쪽)

 

테일러란 인물은 고대인들 중 가장 우수한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물론 그는 자신의 방법을 삶 전체로, 매 걸음걸음마다로, 24의 체계를 1시부터 24시까지 통합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39쪽)

 

테일러리즘과 더불어서 현대식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로 문을 열게 만든 것이 바로 포디즘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화 대중화 시대를 시작한 헨리 포드에서 유래된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은 자본주의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드가 착안한 것은 노동자가 작업대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물이 이동하여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작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였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장인들, 즉 노동자들의 수공 조립품이었다. 포드는 이동 조립라인을 통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낮은 비용으로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활용되려면 작업자 한 사람마다 과업이 구분되도록 분업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테일러식 노동분업과 포드의 기계식 생산시스템의 절묘한 만남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중심축이 되었다.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포드 전후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포디즘 역시 테일러리즘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분업과 기술적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노동의 인간화 요구를 무시했기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집단적 저항의 표적이 되었다.

 

 

 

 

 

 

 

 

 

 

 

 

 

 

 

과학과 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서 인간성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런 세상은 더 잘 사는 세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된다. 쟈먀찐은 테일러리즘이 자유와 인간 고유의 가치(사랑)마저 잊히고 낡은 유물로 치부해버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포디즘이 등장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를 반어적으로 묘사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영문판에는 ‘A.F’란 표현이 나온다. ‘After Ford’를 줄인 것으로 (문예출판사 번역본에서는) ‘기원’이라고 번역했다. 포디즘이 등장한 이후를 의미하는 기원 632년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A.F’라는 용어 자체는 포드가 예수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을 웅변한다.

 

“포드 님의 은혜로 세상은 태평천하로소이다.” (57쪽)

 

‘A.D'를 ’A.F'로 알파벳 철자 하나를 바꾸어 포디즘이 지배한 섬뜩한 현실을 강조하고, 그런 현실에 적응, 아니 철저하게 순응하고 마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견습생 헨리 포스터는 헨리 포드를 연상케 한다. 결국 포스터가 멋지게 생각하는 ‘신세계’는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낳은 사회구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쟈먀찐의 디스토피아는 권력이 개인의 시간에 침투하여 전체주의의 틀로 옳아 매어 자유를 억압했다면,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쟈먀찐보다 지독한 철저한 계급사회다. 태아가 유리병 속의 기계적 환경에서 자라나고 날 때부터 적성과 지능,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정해진 계급에 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두 작가의 디스토피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하고 나보다 계급 높은 사람한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밖에 나가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사회다.

 

테일러와 포드의 유령은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기업은 ‘포스트 테일러리즘’ 또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괜찮은 이름으로 생산성을 확보하고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70~80년대에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는 이상 경제상정 모델로서 적합한 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에 길들여져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에 시간 관리는 효율적인 업무 향상과 성공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역량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항상 스케줄러를 들고 다니고 확인하는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사람일까. 그리고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년에 시청자의 고민을 소개하는 ‘안녕하세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직접 딸의 스케줄러를 만들고 강요(?)하는 사연을 본다면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이 무조건 훌륭한 인재상에 적합한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시간 관리를 철저히 지키는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꼭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우리나라는 70년대부터 경제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근면의 역량을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 중 하나가 ‘근면’이었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도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능력과 연관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우리가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겨울을 대비해 여름에 일하는 부지런한 개미가 되기를 원했고, 베짱이는 시간 개념도 없이 놀고, 먹기 만하는 게으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과연 『우리들』의 단일제국과 『멋진 신세계』는 상상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까. 글쎄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직접 미래를 결정하는 풍토와 두 개의 디스토피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좋은 명문고를 가기 위해서 하루에 학원 세, 네 개 정도 다닐 수 있도록 유명 학원가를 알아보는 부모. 아이는 부모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다. 학교 다음에 가야하는 곳이 학원 또는 독서실이다.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원에 가기 싫어도 안 가면 안 된다. 기특하게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준 부모를 생각해주는 것도 있지만, 학원 한 군데라도 가지 않았다가는 부모에게 꾸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간표를 만들 것이다. 다만 그 시간표 안에는 ‘친구들과 놀기’, ‘TV 보기’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유희의 시간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공간 대신에 ‘학원 가기’,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만 가득하고, ‘꿈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테일러는 규정된 일을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해고의 칼바람을 휘둘렀고, ‘은혜로운 자’는 시간을 지키지 못한 ‘번호’에게 죽음의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는 시간과 공부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 아닌 사랑의 매를 들고 있다. 자식이 잘 살아야 부모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는 없다. 알고 보면 디스토피아는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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