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들을 것, 볼 것, 읽을 것이 너무 많다.
2. 휴대폰을 꺼놓는 게 속 편하다.
3. 혼자 쇼핑하는 게 더 좋다.
4. 사람들과 오래 있었으면, 혼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5. 혼자 장시간 드라이빙하는 걸 즐긴다.
당신은 이 다섯 가지 유형 모두 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성적인 사람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연히 SNS에 보게 된 ‘내성적인 사람의 20가지 증거’라는 글에 5개만 추려봤다. (나머지 15가지 증거의 내용이 궁금한 분은 링크로 확인하면 된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53096)
여기 소개한 5개의 유형만 보면 전형적인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것을 좋아한다. ‘내성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용하고,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무조건 ‘내성적인 인간’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특히 4번 유형의 문항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내성적인 성격과 무관하다고 본다. 외성적인 사람도 가끔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외성적인 사람이 되도록 강요받고 살아왔다. 외성적인 성격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내성적인 자녀의 행동에 대해 걱정한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들은 학교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자칫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은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렸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외성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수잔 케인은 역설한다. 세상을 깜짝 놀랄 변화를 일으킨 사람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 많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화가 반 고흐, 간디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이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인생을 풍족하게 발전하기 위한 창조력으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형 은둔이 아닌 이상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다. 이제는 혼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가끔은 고독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는 안 될 정도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이 착각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혼동하면서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꽃은 피고 진다. 인간도 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죽는다. 결국 만물은 우주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고독하게 나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고독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흐름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홀로 있는 시간’ 중에서, 19쪽)
생전 법정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분이다. 산에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처럼 사람의 발길을 찾아볼 수 없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고독을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외로운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스님처럼 완전한 홀로살이에 적응하지 않는 이상 마음을 짓누르는 고독감의 힘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스님이 생각하는 고독한 삶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은둔과 고립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립은 출구가 없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도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57쪽)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을 향해 행동할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자기 관리’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살아있는 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지속적인 삶의 모습이다. 고독을 두려워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으로 시간을 때운다면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따라오는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내려면 햇빛이 없는 그늘에 가면 된다.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 모자라고 비어 있는 인생의 여백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고독은 절망적인 의미가 아닌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내적 조건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