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빼곡하게 쌓은 책 무더기 사이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할 때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특히 그 책이 대형서점에서도 팔지 않는 책이라면 더욱 뿌듯하다. 그럴 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볍게 느껴진다. 집에 도착하면 책에 오랫동안 묻어있는 테이프 자국과 먼지를 말끔히 제거한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부분은 사포 조각으로 긁어낸다.
내가 태어난 연도에 나왔거나 이미 그 전부터 나온 책의 종이는 변색되기 쉽다. 게다가 헌책방 내부 상 눅눅한 습기로 인해 종이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책을 보게 되면 내 방에 꽂혀 있는 책들은 과연 세월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뜬금없이 책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집에 보관된 책이라도 10년, 20년이 지날수록 책의 상태가 온전치 못할 것이다. 방의 습기 때문에 책을 햇볕에 건조시키면서 관리한다면 변색을 피할 수 있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책의 운명도 사람의 운명 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탄생, 성장, 성숙, 쇠퇴. 깔끔한 표지로 초판이 등장하고, 책의 반응이 높아지면 몇 부 더 찍어 낸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부수가 많고, 많이 팔린다. 그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반면 독자의 관심이 적은 책은 많이 찍어 봐야 10쇄를 넘기지만, 초판만 찍고 일찍 절판의 운명을 맞기도 한다. 무명 시절이 너무나도 긴 책 중에 갑작스러운 독자의 관심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인기는 한 순간이다. 책의 번역이 시원찮다거나 책이 대필이거나 표절로 만든 사실이 밝혀지면 절판될 수도 있다. 특히 책의 운명 주기 중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이라면 출판사의 부도다. 아무리 인기 좋은 스테디셀러라도 자신을 만들어 준 출판사가 망하면 더 이상 책을 찍어낼 수 없다. 그나마 책의 운명 주기는 인간의 운명 주기와 비교해서 큰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죽음을 맞는 순간 끝이지만, 절판본도 독자의 관심을 받게 되는 시점을 맞이하면 다시 살아난다. 새로운 출판사, 새로운 표지 또는 새로운 편집자를 만나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책 한 권이 오래 살고(스테디셀러), 일찍 죽는(절판) 과정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요인 중에 독자의 영향력과 출판사의 부도는 제일 크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독자의 관심이 없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절판되기 일쑤다. 출판사는 책의 번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자궁이 없으면 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진다.
자궁이 상실된, 몇 권 안 되는 절판본 초판 혹은 후손이 향하는 최후의 장소는 헌책방이다. 조금은 슬픈 표현이지만 헌책방은 책의 공동무덤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헌책방 마니아는 먼지와 세월 속에 죽어가는 책을 찾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절판본의 가치를 알고 있는 헌책방 마니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지 쌓인 책의 지층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가끔 절판본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몇 권 꽂혀 있기도 하다. 헌책방에 비해 발견 확률이 희박하지만 재고가 남을 때도 있다. 그 다음은 동네 서점.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경험상 동네 서점이 절판본이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단 동네 서점에서 헌책방에 책 찾듯이 하는 손님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형서점의 유통에 밀려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에 장사가 워낙 안 되다보니 서점이 문제집 파는 문구점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서점과 겸업하기도 한다. 초중고생들은 문제집만 구입하지 그 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살 일이 많지 않다. 책을 사려면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서점에 찾아갈 뿐이다. 문구점인데도 대형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팔긴 한다. 재고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나름 베스트셀러 책은 문구점에 가면 꽂혀 있다.
동네 서점과 문구점이 헌책방보다 절판본을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오늘 평소에 공부하던 독서실 근처에 위치한 문구점에서 절판본 몇 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운이 좋았다. 내가 사는 곳은 이제 동네 서점도 찾아보기 힘들다.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거나 문구점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나 독서실 주변에 문구점이 많은 편인데 지우개를 사야해서 점심시간에 문구점 한 곳으로 가게 됐다.
단지 지우개만 사려고 문구점에 들렀는데 그 곳은 다른 문구점에 비해서 건물 평수가 넓었다. 한 쪽에 문구물품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문제집이 천장까지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런데 문제집이 꽂혀 있는 책장 옆에는 유독 텅 빈 부분이 있었다. 거기는 문제집보다는 서점에서 파는 책들이 수십 권 정도 꽂혀 있었다. 여기 문구점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궁금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텅텅 비어있는 책장은 손님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무척 비좁은 곳에 위치했다. 발밑에 꽂혀 있는 책을 확인하기 위해서 쪼그려 앉아야했는데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래도 먼지가 잔뜩 쌓이기 쉬운 바닥에 놓인 헌책도 꼼꼼히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서 좁은 공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구점에 남아 있는 재고의 책들이 놀랍게도 출판된 지 좀 오래된 것들이었다. 여기 문구점에 오는 손님들도 구입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대다수였다. 스테디셀러 몇 권 있었지만 헌책방에 있는 책처럼 새까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책이 꽂혀 있는 책장 근처에 한 발짝이라도 온 옮긴 손님은 과연 몇 명 있었을까. 혹시 그곳에 손길을 남긴 사람이 아마도 내가 처음일 것이다. 먼지가 얼마나 심했으면 책을 뺏다 꽂는데 손이 시커멓게 변했다.
* 종이와 마찬가지로 책 표지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가 보다.
종이가 변색되는 것처럼 책등 또한 변색되어서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 곳을 한 10분 동안 찬찬히 살펴본 끝에 뜻밖의 책을 발견했다. 절판된 김훈의『자전거 여행 2』(생각의나무, 2004년 초판)과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 『호르두발』 『유성』『평범한 인생』(리브로, 1998년 초판)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누림, 1998년)이다.
동네 서점도 아닌 문구점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를 발견할 줄이야.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10년 전에 나온 상태로 말이다. 알라딘 중고샵에서 한정판 양장본으로 된 『자전거 여행』 1권을 구입한 지 4개월 만이다. 드디어 소중한 짝을 찾게 됐다.
카렐 차페크의 3부작 소설 중에 『호르두발』 『유성』(‘별똥별’로 이름이 고쳐서 나옴)만이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역자는 리브로판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이다. 아직 리브로판과 지만지판을 읽어보지 않아서 리브로판 내용을 그대로 옮겼는지 아니면 번역을 새롭게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3부작 중 마지막인 『평범한 인생』은 아직 복간되지 않았다. 이 책 또한 언젠가는 지만지에서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리브로판 3부작을 구입할까 고민했다. 당시 책을 구입 가능한 비용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3부작 중 두 권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세 권을 지를까 말까 스스로 따져봤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지우개 하나 사러 문구점에 들렀는데 책 때문에 30분 정도 걸렸다) 김훈과 차페크의 책, 총 4권만 구입하기로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는 범우사의 범우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누림출판사가 제일 먼저 나온 판본인데 역시 절판되었다. 그래서 굳이 누림판을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지우개 하나에 책 네 권을 문구점에서 구입했다. 문구점 주인은 책을 사는 내 모습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던데 내심 흐뭇했을 것이다. 문구점이 망할 때까지 절대로 팔리지 않을 책을 팔게 되었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밖에. 만약에 영영 못 판다면 일부는 헌책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결국 오늘은 나와 문구점 주인이 서로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동네 서점이나 문구점에 팔고 있는 책들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한 번 문구점에 가게 되면 책이 꽂혀 있는가 확인해야겠다. 또 다른 행운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