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은밀한 공간을 만들고 탐닉한다. 반면 예술의 공간은 공유와 공감의 영역을 넘나들며 감성을 표현한다.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이중적 양면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공간 안에서 사적인 자존심을 지키며 대중과의 공감을 꿈꾼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 작품으로서 표현돼 작업의 연장이자, 그 무대가 되기도 한다. 모네는 프랑스 지베르니에 위치한 저택을 구입해서 집과 정원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여겼다. 앤디 워홀은 월급 화가들을 고용해 ‘그림 공장’을 차렸다. 작업실의 이름도 ‘팩토리’(Factory)로 지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작업실로 유명하다. 베이컨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작업실 바닥에는 온통 쓰레기가 뒹굴고 곳곳에 쓰고 버린 붓과 물감이 어지럽게 널린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작업실 온 벽면이고 바닥이고 베이컨이 물감을 처발라놓아 놓은 흔적도 남아있다. 

 

화가의 작업실에는 엄청난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완성작뿐만 아니라 그리다 만 미완성의 그림들이 섞여 있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의 작업실처럼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걸작이 잠자고 있다. 프렌호퍼는 최고의 걸작을 남기지 못한 좌절감에 작업실에 잠들고 있는 그림들과 함께 스스로 소멸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작업실의 수명도 끝이다. 훌륭한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특별한 관리를 받을 수 있는 미술관로 향해 위대한 아름다움을 빛날 수 있지만, 반대로 무명화가의 작품은 대중의 시선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먼지와 함께 방치될 것이다. 작품이 영원히 오랫동안 보존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화가 사후의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화려한 색채에서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허술한 관리 때문에 물감색이 바래지고 심지어 그림 표면이 갈라져 파손될 우려가 있다.

 

 

 

 

 

 

 

 

 

 

 

 

 

 

이 화가도 자신이 죽고 나면 수많은 그림들이 쓸쓸하게 방치되고 망가질까봐 걱정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귀스타브 모로는 자신의 죽음보다 작품의 소멸에 예민했다. 그는 데생과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결국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화가는 죽어서 하나의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다.

 

귀스타브 모로는 살로메를 소재로 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살로메는 수많은 화가들이 많이 다루던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가 모로가 그린 살로메일 것이다. 의붓아버지 헤롯 왕 앞에서 요염하게 춤을 주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와 대면하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다양하게 묘사했다. 모로는 성서에서 보잘 것 없는 여인을 잔인하면서도 매혹적인 팜 파탈로 재탄생시켰다.

 

모로는 미술사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국내에서는 작품세계가 덜 알려져 있다. 모로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세기말 즈음에는 주관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정서, 현실을 초월하는 관념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는 상징주의 미술이 태동되었는데 이 때 모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인상주의 미술이 워낙에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상징주의 미술이 부각되는 위치가 협소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까지 포함하면 상징주의 미술을 소개하면 한 권 분량의 책이 나올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서양미술사의 한 부분으로만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징주의 미술을 심도 있게 소개한 책이 열화당 미술신서 55번째 시리즈인 에드워드 루시-스미드의 『상징주의 미술』이 유일한데 출간된 지 너무 오래되었고, 현재 절판이다. (알라딘으로 검색해도 서지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상징주의 미술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징주의 미술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의 전시논평이 적합하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의 의미를 하나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1. 관념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의 표현이어야 한다.
2. 상징주의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 관념을 형상화해야 한다.
3. 종합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들 형성과 표지(표지)를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4. 주관적이어야 한다. 대상은 결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인식된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5. 장식적이어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장식화는 종합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동시에 관념적인 예술이다. 

 

(에드워드 루시-스미드  『상징주의 미술』에서 인용)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에의 논평 핵심은 최고의 상징주의 화가를 모로가 아닌 폴 고갱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논평의 제목이 ‘회화에서의 상징주의-폴 고갱’이다. 논평이 발표된 연도인 1891년에 모로는 왕성하게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미술사가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고갱은 후기 인상주의이든 상징주의 미술이든 어느 한 쪽에 언급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고갱이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상징주의 미술은 태동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모로가 있었다. 모로가 고갱보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더라도 모로의 미술사적 위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로를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평가했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했던 사람은 소설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였다. 위스망스는 자신이 등단하는데 도움을 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거부하고, 심미적이고 신비스러운 측면이 강조되는 상징주의 문학으로 전향했다. 화가에 대한 위스망스의 존경어린 찬사는 자신의 작품 『거꾸로』제5장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데 제쎙트는 고독한 탐미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저택을 자신만의 인공낙원으로 만들어 생활을 한다. 그는 속세에 벗어나 고귀한 예술에 탐닉하는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가 모로였다.

 

“모든 예술가 중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그를 기나긴 열광과 황홀경에 빠져들게 만드는 한 예술가가 존재하였는데, 그는 바로 귀스타브 모로였다. 데 제쎙트는 이 화가가 그린 두 점의 걸작을 구입하여, 그중 한 작품 앞에서 몇 날 밤이고 몽상에 잠기곤 했다.” (위스망스  『거꾸로』 중에서, 92~93쪽)

 

소설의 제5장 절반은 모로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아마도 여기서 언급되는 모로의 그림 두 점은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와   「환영」일 것이다. 데 제쎙트는 살로메가 등장하는 모로의 그림을 세밀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원하던 ‘나른하고도 잔혹한 영상’이었다.

 

 

 

 

 

귀스타브 모로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1876년

 

"온갖 향기들이 내뿜는 퇴폐적인 냄새 속에서, 또한 이 교회당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살로메는 마치 명령을 내리듯 왼팔을 앞으로 쭉 뻗고 있었고 오른팔은 구부려 얼굴 높이로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든 채, 웅크리고 앉은 한 여인이 뜯고 있는 기타의 화음에 맞춰 발끝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파괴할 수 없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여신, 불멸의 히스테리의 여신, 자신의 살집을 뻣뻣하게 만들고 근육을 단단하게 하는 경직증에 의해 모든 여자 중에서 선택된 저주받은 미의 여신이 되었던 것이다.” (94, 96쪽)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끔찍한 두상은 짙은 보라색의 핏덩어리들이 턱수염의 끝 부분과 머리카락에 엉긴 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로지 살로메의 눈에만 보이는 이 두상은 그 음울한 시선으로, 마침내 자신의 원한을 갚은 데 대해 몽상하고 있는 헤로디아도, 야생 동물의 냄새에 적셔지고 방향성 수지로 뒤덮였으며 향과 몰약으로 훈증된 여인의 나신으로 인해 경악하여 무릎에 손을 얹고 약간 몸을 앞으로 수그린 채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헤롯 왕도 쳐다보지 않았다. 유화에 그려진 살로메보다는 위엄이 없고 덜 거만하지만 훨씬 더 관능적인 이 무희 앞에서 데 제쎙트는 늙은 왕과 마찬가지로 압도되고 완전히 지쳐서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99쪽)

 

위스망스 그리고 데 제쎙트는 모로의 그림에서 무기력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모로의 그림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눈과 마음을 현혹하게 만드는 아편이다. 살로메의 춤사위 속에 황홀경에 빠져 의지력을 마비된 헤롯 왕처럼 모로의 살로메 그림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시에 한순간에 무기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모로의 ‘무기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다. 자신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나그네를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를 처단하기 위해서 영웅 오이디푸스가 나섰다. 그런데 모로가 묘사한 스핑크스의 모습이 독특하다. 원래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끔찍스럽게 생긴 괴물이다. 그런데 머리는 여성이고, 몸은 아담한 고양이와 같다. 거기에 남자들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 가슴이 달려 있다. 여성스러운 스핑크스가 지금 오이디푸스의 가슴 근처까지 접근했다. ‘아침에 다리는 두 개’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내려는 장면 같지만, 오이디푸스와 스핑스크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스핑크스는 두 앞다리를 오이디푸스의 건장한 가슴에 얹고, 자신의 가슴을 그의 시선이 닿을 수 있게 앞으로 쭉 내민다. 예로부터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혈기왕성한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의 노골적인 유혹적인 자세가 당황했을 것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스핑스크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왼손에 창을 쥐고 있지만, 스핑크스의 유혹에 손과 온 몸은 경직된 듯하다. 메두사의 눈빛을 보면 돌이 되어 굳어버리듯이 스핑크스의 유혹적인 눈빛은 여색에 약하는 남성의 본능을 굳어버리게 만들어 영웅의 의지를 꺾게 만든다. 스핑크스도 살로메 못지않게 남성을 사로잡는 위험하고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장면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극세사 감수성’,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프루스트도 모로의 그림을 선호했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작업을 진정한 내면의 영혼을 지닌 시인의 작업과 동등하게 생각했다. 모로가 표현한 신비로운 세계는 곧 내면의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그것이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감명을 받는다. 위스망스가 모로의 작품세계를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이해했다면, 프루스트는 내면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프루스트는 살로메가 나오는 그림보다는 음유시인과 오르페우스가 나오는 그림을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1865년

 

“시인들은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진정한 영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끼던 유일하며 가장 내면에 있는 영혼은 간직되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묘지를 찾는 것처럼 뤽상부르에 순례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여인처럼 단순히 <오프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앞에 간다. 우리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 무엇, 생각의 색채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 눈, 바로 귀스타브 모로의 생각을 보게 된다.” (프루스트  ‘모로의 신비세계에 관한 노트’ 중에서, 『독서에 관하여』 163쪽)

 

모로는 신화, 종교, 역사 등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다루는 소재를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려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 의한 주관적인 관념과 인식을 묘사하는데 노력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 우리가 상징주의 미술을 어렵게 느껴지는 것처럼 모로 또한 관념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성작에 비해 데생과 미완성 습작이 많은 편이다.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대중의 호응과 명성을 기대하는 세속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제 데쎙트처럼 훗날 미술관이 된 파리의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혹시 모로도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처럼 미지의 걸작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생전에 최고의 걸작이라고 꼽을만한 그림이 많지 않아서 자신이 남긴 그림들의 운명이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로의 지나친 걱정과 달리 그도 나름 전성기를 누렸고 어느 정도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1892년에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로 채용되고, 그의 작업실은 공실적인 국립 미술관이 되었다.

 

모로의 작품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너무 관념적으로 치우친 소재와 그리다 만 듯한 색채와 형태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생전에 살롱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쇼펜하우어를 읽는 한 미술학도가 그린 그림’이라는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모로가 현실이 아닌 신화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상상의 세계를 묘사했기에 비평가들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느꼈던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처녀작 『메트로랜드』에서 영국 사람 데이브는 모로의 그림를 ‘자위행위자의 예술’이라고 폄하한다. ‘학문적인 상징주의’에다가 너무 세속적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학문을 연상시키는 상징주의 그림이 미술관에 전시된 사실에 괜히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림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걸작이라도 졸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위행위자’라고 비유한 데이브의 표현은 모로의 작품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발언으로 보인다. 모로는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상징주의 미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모로는 데 제쎙트처럼 스스로 환상적 예술에만 탐닉하여 열광하는 ‘예술적 자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몰두하고 갇혀버린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는 제자 양성에 적극적이었는데 놀랍게도 모로가 배출한 유명한 화가는 야수파를 대표하는 앙리 마티스 와 종교화로 유명한 조르주 루오가 있다.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 서로가 추구하던 화풍이 달랐지만 특히 루오는 스승으로서의 모로를 무척 존경했다. 모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퍼했으며 모로 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모로는 어떤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악마의 소곤거림이 들릴 수 있고, 또 다른 그림을 보면 어디선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그림을 보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려면 널리 알려진 대표작품만 봐서는 안 된다. 그 화가의 예술을 깊이 있게 알려면 데생, 습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보면 좋다.

 

혹시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지만, 미술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면 모로 미술관도 한 번 가봄직하다. 프루스트는 모로 미술관은 단순한 화가의 집이 아니라 그의 예술행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유되는 특별한 곳이라고 말했다. 소설가답지 않게 예술적인 감식이 뛰어난 프루스트다. 모로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참으로 궁금하게 만든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도중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모로 미술관에 꼭 들려보시길.(라고 쓰지만, 나도 모로 미술관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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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새겨진 음악을 해독해야 한다.” (클로드 드뷔시, 롤랑 마뉘엘  『음악의 기쁨 1』  14쪽)

 

감상자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서 같은 음악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누구의 무슨 음악'하면 '아! ~이다'라는 식으로 열정이나 뜨거운 뭔가가 느낄 수 있는 음악이 있다. 나는 자연 풍경하면 먼저 드뷔시의 음악이 떠오른다.

 

사실 드뷔시는 원래 화가를 꿈꿨다. ‘음악가 드뷔시’가 아닌 ‘화가 드뷔시’라는 이름이 어색해보이지만, 만약 그가 화가로 활동했다면 인상주의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열풍을 음악으로 옮겨온 드뷔시는 자연 풍경과 잘 어울리는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정해진 선이나 색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이나 화가가 느낀 분위기를 화폭에 담았다. 드뷔시의 음악도 정해진 화성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작곡가의 감각과 취향을 담아냈다.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환기’시키는 것이다.

 

기존 음악계의 화성법과 규칙적인 리듬에서 탈피하여 분위기와 순간적인 인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드뷔시는 우리 삶을 스쳐가는 수많은 영상과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순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인간 소녀 벨라와 뱀파이어 에드워드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 흘러나오는 선율은 드뷔시의 ‘달빛’이다. 피아노곡집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제3곡이다. 마치 부서져 내리는 듯한 달빛의 풍경을 단아한 악상과 인상주의적인 화음으로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선율이 아름답다. ‘달빛’은 피아노곡 버전과 관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이 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피아노곡이다. 몽환적인 밤의 분위기 속에 잔잔한 호수의 파문처럼 피아노의 선율에 따라 달빛의 요정이 수줍은 듯 춤을 추는 느낌이다.

 

 

               

 

 

드뷔시 '바다' 3악장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는 인상주의 회화풍의 관현악 음악처럼 느껴진다. '바다'를 듣고 있으면 마치 지금 내 눈앞에 거대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감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다. 무더운 여름날에 듣기 좋은 곡이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붓 삼아 초마다 바뀌는 바다의 색깔과 변화무쌍한 분위기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그렸다. 마치 눈앞에서 거대한 바다가 요동치는 듯하다. 그런데 ‘바다’가 탄생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실제로 드뷔시는 바다 풍경을 직접 보고 그 느낌을 선율로 옮긴 것이 아니다. 바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상상 속의 바다를 환상적인 색채감으로 나타냈다.

 

생전에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이 인상주의와 연관 짓는 평가에 대해서 냉담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단지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본인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화폭에 순수한 색을 즐겨 사용하듯이 음악에 각 악기가 지닌 음색을 최대한 순수하게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지극히 회화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드뷔시의 음악은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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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바느질하는 모델」 (발자크  『미지의 걸작』 삽화)  1927년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모델은 바느질을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주 멋진 초상화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이상하다. 사람의 형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다. 불규칙한 곡선과 직선이 실타래가 엉켜져 있듯이 그려져 있는데 얼핏 낙서처럼 보인다. (아니면 추상회화?) 평범한 자세를 취하는 모델에서 화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힘든걸까? 캔버스에 그려진 낙서는 창작을 위해 고민하는 화가의 심정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화가의 눈빛은 사뭇 진지하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그린 오노레 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수록된 삽화 중 하나이다. 판화 방식으로 제작된 삽화는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는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100여 점 정도 제작되었다. 삽화에 나오는 화가는 위대한 명작을 남기기 위해서 집요한 창작욕을 고집한 늙은 화가 프렌호퍼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무려 10년 동안이나 제작에 매달린다. 그는 다른 화가에 비해서 '완벽한 예술'을 지향한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예술'은 그림 속 모델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화가의 그림을 지적하는 프렌호퍼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서 여백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그렇지만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좋고, 여백의 감정이 정확히 지켜져 있네. 그러나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육체에 따뜻한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발자크  '미지의 걸작' 중에서, 『사라진느』 84~85쪽)

 

그러나 그 누구도 프렌호퍼의 '완벽한 예술'이 온전하게 표현된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가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프렌호퍼는 소문으로만 알려진 그 미지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한 걸작을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난 후에 공개하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그림 공개를 꺼리게 만든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소유물로 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면 아직 붓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아우라를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 독학 중인 젊은 니콜라 푸생(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를 발자크가 덜 알려진 화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은 대가의 걸작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프렌호퍼가 그렇게도 입이 닳도록 강조하던 완벽한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자신의 연인인 질레트를 모델로 한 그림을 제작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델을 소개해준 보상 차원으로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는 것이다. 푸생의 연인 질레트는 빼어난 외모를 지녔기에 아무리 고집이 센 프렌호퍼도 푸생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프렌호퍼는 미지의 걸작이 보관된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한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손에서 탄생된 수많은 작품들에 감탄했지만, 오히려 프렌호퍼는 그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그저 습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제 드디어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하게 모포로 가려져 있었다. 프렌호퍼는 처음으로 자신이 집요하게 매달렸던 미지의 걸작을 공개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있어야 할 캔버스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텅 비어 있는 캔버스라고 말했지만, 프렌호퍼는 완벽하고 생동감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그림이라고 우긴다. 푸생은 오랜 창작 과정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프렌호퍼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고 난 후, 프렌호퍼는 아틀리에에 있는 모든 그림들을 불태워버리고 자살을 하고 만다.

 

특이하게도 피카소는 발자크의 소설에 수록되는 삽화를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제작했다. 비록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여인의 모습이 아닌 낙서 같은 선만 그려 넣는 화가가 프렌호퍼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피카소는 삽화 이외에도 줄곧 '화가와 모델' 소재에 의한 그림을 많이 제작했다. 예술가에게 모델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모델은 위대한 작품을 낳게 만드는 어머니와 같다. 화가는 아름다운 모델의 모습을 캔버스에 영원히 담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화가의 길을 걷는 피카소 또한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도 프렌호퍼처럼 수많은 데생과 연작을 통해서 위대한 걸작을 하나 남기고 싶은 열망을 지녔을 것이다.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와 죽음을 통해 완벽한 예술에 대한 집착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프렌호퍼를 '악마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광기로 인해 자멸하는 실패한 화가로 묘사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데생에 나오는 젊게 그려진 프렌호퍼는 인간적인 화가의 모습이다. 비록 그가 그린 그림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낙서에 불과하지만, 젊은 프렌호퍼의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카소가 자신의 연인들인 프랑수아즈와 자클린 등의 모습을 수많은 그림과 데생, 판화로 남겼듯이 말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화가의 숙명, 즉 창작의 고통을 고독한 열정으로 부각시켰다. 회화를 보는 소설가와 화가의 시점에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피카소는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창작의 산고 끝에 나온 작품 하나가 냉담한 평가를 받는다면 화가 입장에서는 맥이 풀리고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실망하게 된다. 그러기에 수많은 습작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최종적인 작품이 완성된다. 작은 데생에서 습작을 거쳐 완성하는데 걸리는 세월이 족히 일 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화가 입장에서는 창작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도 예술에서 말하는 '깊이'에 사로잡혀 비관적인 최후를 맞는 화가가 등장한다. 화가는 만인이 극찬하는 자신의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 했던 한 평론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다가 대체 어떤 것이 깊이가 있는 그림인지 알 수가 없어 비관하다 목숨을 끊는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 평론가는 관점을 확 바꿔 그녀의 그림에서 깊이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와 닿는 순간이다. 우리는 때론 자신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기도 하고, 능력 밖의 일을 우연하게 성취하기도 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본인의 깜냥인 양, 어깨에 힘을 주고 객기를 부린다. 지적인 허영심과 교만에 취한 우리들에게 쥐스킨트는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쥐스킨트도 예술가를 바라보는 발자크의 시선과 유사하다. 프렌호퍼도 작품의 '깊이'를 아는 척 행동했으나 결국은 그것을 예술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셈이다. 쥐스킨트는 화가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술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평론가마저도 '깊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직업으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화가의 삶에서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예술가의 고독과 연민이 느껴진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죽음 뒤에 비로소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창작의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다가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은 이 말에 씁쓸하게 느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창작의 산고보다는 오랜 진통 끝에 나온 작품의 결과물만 기억하고 있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반 고흐의 작품은 처음에 제작될 당시에는 그 누구도 구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생전에 고흐는 수천 점이나 남긴 그림들 중에 단 한 점만 팔았을 정도로 실패한 화가에 불과했다. 동생 테오와 몇 몇 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설픈 수준의 그림으로만 생각했다. 끊임없이 불타오르게 만드는 창작 욕구는 고흐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화가로서의 자의식과 고집으로 버티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작품이 하나씩 완성될수록 고흐의 정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래서 외로운 고흐는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수밖에. 생전에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통에 겨워 외치는 고흐의 절규를 들어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림이 재벌을 위한 값비싼 상품이 된 요즘, 그림이 탄생되기까지 화가가 겪는 심정은 ‘0’이 무수히 많은 가격표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예술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 받는다. 이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에 ‘고통도 길다’라는 말도 추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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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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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에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을까? 4년 전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인터넷을 접속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 난 컴퓨터는 내가 고등학생 때 구입한 것이라서 거의 4년째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능은 점점 떨어지고, 인터넷 접속 속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A/S를 통해 컴퓨터를 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컴퓨터를 수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쳐 써도 오래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컴퓨터 본체를 교체할 것을 권했다. 컴퓨터 본체는 오래 사용되고 나면 기계 내부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인간도 일을 하면 쉬는 시간이 있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장시간 사용하면 잠시 전원을 꺼서 본체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줘야 한다. 컴퓨터 한 번 켜면 기본 5시간 이상을 썼으니 컴퓨터 본체가 지칠 만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컴퓨터가 5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장 나는 경우가 많았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인터넷 서핑에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인데 컴퓨터의 수명은 왜 짧은 것일까? 컴퓨터 한 번 고장 나면 일단 가족으로부터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내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을 비교한다면 나는 훨씬 적은 편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도대체 이상하게 내 컴퓨터만 수명이 짧은 걸까.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리 담당자에게 컴퓨터 본체의 수명을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컴퓨터를 장시간 켜지 않고, 잠깐 전원을 꺼두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본체의 수명이 보통 5년이라고 했다. 하루에 컴퓨터를 5시간동안 켜는 것이나 그 이상 시간을 켜나 장시간동안 전원이 켜져 있으면 컴퓨터 본체의 사용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새 컴퓨터로 장만했고, 어느덧 4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오래 사용했다 싶으면 컴퓨터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컴퓨터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절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이 못된 습성을 고치지 못해서 지금의 컴퓨터 역시 상태가 영 시원찮다.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노쇠한 컴퓨터의 상태를 알면서도 험하게 다루고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5년 이상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오래 사용한 가전제품이라면 냉장고를 10년 넘어서 사용한 것이 고작이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컴퓨터는 하루 자고 나면 새로운 성능이 추가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출시되어서 고장이 나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통화 상태가 불량이거나 인터넷 접속 속도가 느려졌다 싶을 때 마침 최신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위약금 약정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돈을 지불해서 최신 스마트폰을 사고 만다.

 

<홈 퍼니싱스 데일리>라는 잡지가 가장 쉽게 고장이 나는 가전제품을 조사해서 목록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개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 실시한 조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가전제품이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화 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 세탁기
2. 냉장고
3. 빨래 건조기
4. 텔레비전
5. 건조 겸용 세탁기
6. 레인지와 오븐
7. 에어컨
8. 냉동고

 

 

인류의 수명이 원래 50세 이하였다가 시대가 좋아지고, 의학기술이 발달되면서 수명이 점점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8가지 가전제품도 초기에 보급되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나고, 쉽게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명도 길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구매한 제품을 10년 이상 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고장이 나서 바꿀 때가 되면 지금의 제품보다 성능이 좋은 제품들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아무리 제품을 조심히 사용한다한들 제품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만약에 제품의 수명이 많아진다면 제품을 만든 기업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 기업은 제품을 생산하여 끊임없이 수익을 내야한다. 상품을 많이 팔아야 이득을 얻는다. 제품이 오래가는 건전지처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려는 구매자의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다. 구매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이 위해서 기업은 신상을 알리는 광고를 만든다. 광고가 대중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홍보 수단이다. 

 

탈성장 이론가인 세르주 라투슈는 가전제품이 쉽게 고장이 나게 만드는 주범을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 구매자가 아닌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기업들이 상품을 설계할 때부터 일부러 수명을 줄이거나 결함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품의 교체 주기를 앞당겨 소비자들은 끝없이 상품을 다시 구매하게 된다.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고 일부러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다.

 

이미 ‘계획적 진부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물신만능주의 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일회용품, 식료품의 유통기한, 수명이 2~3년에 불과한 스마트폰은 대표적인 계획적 진부화의 산물이다. 우리는새 물건을 사고 '득템'했다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끊임없이 이전 물건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 물건을 사도록 하는 낭비사회의 일면일 뿐이다. 새 물건도 언젠가는 낡고 성능이 저하된 물건이 된다. 우리는 또 '신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서 사용하기보다는 무엇을 살지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라앉은 '상품'을 우러르며 소비자는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소비왕국의 탄생을 놓고 "소비가 사람들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재화를 계속 생산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태엽을 감아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이 땅의 소비자들은 밤낮으로 상품 소비에 나선다.

 

하지만 소비를 부추기는 계획적 진부화는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야기한다.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진 소비는 오염과 쓰레기를 낳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도 발생했다. 인간과 자연이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선 낭비사회를 경계하는 라투슈의 생각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생산 욕구와 새로운 상품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소비 욕구가 맞물려, 모든 상품은 사실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고 있다.
 
성장 중독에 빠진 낭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라투슈의 대안은 ‘탈성장’이다.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할수록 고치거나 재활용으로 대체해 성장 없는 번영과 검소한 풍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성장’이라고 해서 이미 길들여진 성장의 편리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 발자국 줄이기,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멀리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하는 대안은 이미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언급된 내용이라서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계획적 진부화’가 고착된 이 진부한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비 패턴이 계획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있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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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음악가는 어떻게 고독해지는가

 

 

 

 

 

 

 

 

 

 

 

 

 

 

 

 

백아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그는 유독 친구인 종자기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어느 날 종자기를 곁에 두고 금을 연주하며 속으로는 높은 산을 생각하고 있는데, 음악을 듣고 있던 종자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태산처럼 높구나!" 이에 백아가 이번에는 넓은 강를 그리며 금을 타니 종자기가 "황하처럼 넓구나!" 라고 맞장구쳤다. 백아의 거문고 연주는 가장 높은 태산과 가장 넓은 황하에 비견될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종자기는 백아가 무엇을 노래할는지를 잘 알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진정으로 백아의 음악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그러나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아는 너무 슬프고 절망한 나머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리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으니, 더 이상 계속할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와 종지기의 아름답고 슬픈 우정을 의미한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내고 영혼을 읽어내는 사람,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믿음과 존중을 주는 그런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받으려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원초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일반인보다 욕구가 강할 것이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악보를 찢고 버려야 하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 끝에 만든 음악이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음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쇤베르크는 이런 에세이를 썼겠는가. ‘어떻게 사람은 고독해지는가’ 제목에서 쇤베르크의 심정이 느껴진다. 쇤베르크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형식으로 무조음악, 12조 기법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만들었다. 고전적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외면을 받아야했다. 자신의 음악을 환호해주지 않으니 고독해질 수밖에.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음악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연주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을 디스(diss)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Scene #2  콘트라베이스는 유일한 자존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베이스주자 역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음악가이다. 베이스는 외로운 악기다. 뒤에서 묵묵히 저음을 만들어 주는 게 주 역할이다. 현악기 가운데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한다. 높은 의자에 앉아야만 연주가 가능한 큰 덩치와 굵직한 저음으로 현악기가 가지는 여성스러운 이미지에 두드러진 남성성을 얹어놓은 콘트라베이스는 그런 특징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음질은 어둡고 분명치가 않지만 앙상블에서는 묵직한 하모니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음원이다. 음악연주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는커녕 관객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연주자의 기분은 어떨까.

 

콘트라베이스는 ‘우울’ 그 자체다. 어쩔 수 없이 베이스주자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분신인 베이스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경멸한다. 주인공은 자신과 악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안다. 무대 위에서는 스타의 들러리이며 무대 아래에서도 마찬가지 인생임을 모를 리 없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연주하지만 관객의 박수갈채에서는 늘 소외된다. 그늘에 가려진 그는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사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차리기엔 그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게다가 사라는 유명한 테너가수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 이제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모노드라마는 여기서 끝난다. 슈베르트가 제2 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넣어 저음부를 강화한 피아노5중주 ‘송어’ 1악장이 흐른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쓸쓸하게 퇴장하지만 슈베르트의 ‘송어’을 선곡함으로써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콘트라베이스와 함께했던 음악은 그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삶의 일부이다. 그는 아직 고독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한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는 실패한 음악가 아니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Scene #3  음악으로 삶의 고통을 치유하다  

 

 

 

 

 

 

 

 

 

 

 

 

 

 

 

 

 

쇤베르크와 콘트라베이스 주자보다 더 불운한 음악가 한 명을 소개해본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의 주인공 쿤이다. 어린 시절, 불행한 사고를 겪어 한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이 되고 만다. 게다가 처음으로 짝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고백을 해보지만 씁쓸하게 실패한다. 쿤은 온갖 상처와 배신을 겪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아했고, 음악으로 고독을 달랜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무명 작곡가였던 쿤은 우연히 당시 최고의 명가수 하인리히 무오트의 눈에 띄게 되어 촉망받는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음악 연주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러나 쿤은 이러한 삶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쿤에게 음악은 불행한 자신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더욱이 자신의 음악을 높이 평가해주는 무오트의 성격이 못마땅했다. 무오트는 말 그대로 음악을 직업 삼아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음악은 그저 단지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주고, 주변에 수많은 여자들을 오게 만드는 화려한 선율일 뿐이다. 음악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쿤의 예술과 상반되는 예술가이다. 그래도 쿤은 여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음악으로 인정을 받는 무오트를 부러워한다. 심지어 그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사실 무오트가 자신이 만든 가곡과 오페라를 부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무명 음악가로 활동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무오트는 쿤의 음악적 단점과 결함을 극복해줄 수 있고, 그의 음악을 인정해준 유일한 지음(知音)이다. 

 

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잊고 위안을 얻으려는 예술가형이라면 무오트는 음악으로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는 예술가였다. 여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고,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불 같이 화내는 성격이 인간으로서의 무오트에게 흠은 있었지만, 가수(음악가)로서의 무오트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무오트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불행한 운명은 계속 쿤의 발목을 잡기만 한다.

 

쿤은 소프라노를 담당하는 게르트루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노래는 게르트루트를 향한 세레나데가 될 수 없었다. 쿤이 만든 오페라를 무오트와 게르트루트가 남녀 주인공으로 배역을 맡아 함께 부르기로 한 것이다. 세레나데의 주인공이 엉뚱하게 무오트가 끼어든 셈이다. 결국 게르트루트는 무오트와 결혼을 하고 만다. 그녀는 성공의 정점에 오른 무오트와의 결혼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쿤은 또 한 번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미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고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쿤은 음악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잊고, 작곡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것이 강한 자’라는 말이 있듯이 고독과 고통을 오랫동안 음악으로 승화시킨 쿤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무오트와 게르트루트는 파혼을 맞게 되고, 첫 번째 결혼 생활의 실패에 크게 낙담한 무오트는 자살한다. 게르트루트가 떠나간 빈자리에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독과 외로움을 무오트는 견디지 못했다. 무오트는 애초에 외로움을 잘 타는 인물이다. 인기 가수로서의 삶 뒤에는 어두운 고독의 그림자가 늘 따라왔지만, 쿤을 제외한 무오트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쿤은 고독의 그림자를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고독한 삶을 위로해주는 음악의 힘을 인정하는 것은 곧 무오트 자신 또한 고독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국 무오트는 음악으로서 고독을 이겨내는 방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Scene #4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

 

외로움에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다. 인간은 홀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홀로 세상을 떠나간다. 외로움은 운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고독은 새로운 창조와 작품을 완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백아가 종자기에 세상을 떠난 후에 거문고 연주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친구의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우리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우정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의 극단적인 행동이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친구의 공백이 클수록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 또한 클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종자기가 과연 자신 때문에 거문고를 끊어버린 백아의 행동을 좋아할까.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라고 말하면서 재능 있는 친구의 행동에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진정한 지음이라면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위대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학자, 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오랜 고독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창조적 업적과 자기 성찰을 이루어 낸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은 고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 외로움은 새로운 창조와 자기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성찰이다. 외롭다고 슬퍼하지 말고 외로움은 즐겨야 한다. 특히 음악하는 사람들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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