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은밀한 공간을 만들고 탐닉한다. 반면 예술의 공간은 공유와 공감의 영역을 넘나들며 감성을 표현한다.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이중적 양면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공간 안에서 사적인 자존심을 지키며 대중과의 공감을 꿈꾼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 작품으로서 표현돼 작업의 연장이자, 그 무대가 되기도 한다. 모네는 프랑스 지베르니에 위치한 저택을 구입해서 집과 정원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여겼다. 앤디 워홀은 월급 화가들을 고용해 ‘그림 공장’을 차렸다. 작업실의 이름도 ‘팩토리’(Factory)로 지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작업실로 유명하다. 베이컨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작업실 바닥에는 온통 쓰레기가 뒹굴고 곳곳에 쓰고 버린 붓과 물감이 어지럽게 널린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작업실 온 벽면이고 바닥이고 베이컨이 물감을 처발라놓아 놓은 흔적도 남아있다.
화가의 작업실에는 엄청난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완성작뿐만 아니라 그리다 만 미완성의 그림들이 섞여 있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의 작업실처럼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걸작이 잠자고 있다. 프렌호퍼는 최고의 걸작을 남기지 못한 좌절감에 작업실에 잠들고 있는 그림들과 함께 스스로 소멸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작업실의 수명도 끝이다. 훌륭한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특별한 관리를 받을 수 있는 미술관로 향해 위대한 아름다움을 빛날 수 있지만, 반대로 무명화가의 작품은 대중의 시선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먼지와 함께 방치될 것이다. 작품이 영원히 오랫동안 보존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화가 사후의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화려한 색채에서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허술한 관리 때문에 물감색이 바래지고 심지어 그림 표면이 갈라져 파손될 우려가 있다.
이 화가도 자신이 죽고 나면 수많은 그림들이 쓸쓸하게 방치되고 망가질까봐 걱정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귀스타브 모로는 자신의 죽음보다 작품의 소멸에 예민했다. 그는 데생과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결국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화가는 죽어서 하나의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다.
귀스타브 모로는 살로메를 소재로 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살로메는 수많은 화가들이 많이 다루던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가 모로가 그린 살로메일 것이다. 의붓아버지 헤롯 왕 앞에서 요염하게 춤을 주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와 대면하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다양하게 묘사했다. 모로는 성서에서 보잘 것 없는 여인을 잔인하면서도 매혹적인 팜 파탈로 재탄생시켰다.
모로는 미술사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국내에서는 작품세계가 덜 알려져 있다. 모로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세기말 즈음에는 주관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정서, 현실을 초월하는 관념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는 상징주의 미술이 태동되었는데 이 때 모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인상주의 미술이 워낙에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상징주의 미술이 부각되는 위치가 협소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까지 포함하면 상징주의 미술을 소개하면 한 권 분량의 책이 나올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서양미술사의 한 부분으로만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징주의 미술을 심도 있게 소개한 책이 열화당 미술신서 55번째 시리즈인 에드워드 루시-스미드의 『상징주의 미술』이 유일한데 출간된 지 너무 오래되었고, 현재 절판이다. (알라딘으로 검색해도 서지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상징주의 미술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징주의 미술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의 전시논평이 적합하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의 의미를 하나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1. 관념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의 표현이어야 한다.
2. 상징주의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 관념을 형상화해야 한다.
3. 종합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들 형성과 표지(표지)를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4. 주관적이어야 한다. 대상은 결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인식된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5. 장식적이어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장식화는 종합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동시에 관념적인 예술이다.
(에드워드 루시-스미드 『상징주의 미술』에서 인용)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에의 논평 핵심은 최고의 상징주의 화가를 모로가 아닌 폴 고갱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논평의 제목이 ‘회화에서의 상징주의-폴 고갱’이다. 논평이 발표된 연도인 1891년에 모로는 왕성하게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미술사가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고갱은 후기 인상주의이든 상징주의 미술이든 어느 한 쪽에 언급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고갱이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상징주의 미술은 태동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모로가 있었다. 모로가 고갱보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더라도 모로의 미술사적 위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로를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평가했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했던 사람은 소설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였다. 위스망스는 자신이 등단하는데 도움을 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거부하고, 심미적이고 신비스러운 측면이 강조되는 상징주의 문학으로 전향했다. 화가에 대한 위스망스의 존경어린 찬사는 자신의 작품 『거꾸로』제5장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데 제쎙트는 고독한 탐미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저택을 자신만의 인공낙원으로 만들어 생활을 한다. 그는 속세에 벗어나 고귀한 예술에 탐닉하는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가 모로였다.
“모든 예술가 중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그를 기나긴 열광과 황홀경에 빠져들게 만드는 한 예술가가 존재하였는데, 그는 바로 귀스타브 모로였다. 데 제쎙트는 이 화가가 그린 두 점의 걸작을 구입하여, 그중 한 작품 앞에서 몇 날 밤이고 몽상에 잠기곤 했다.” (위스망스 『거꾸로』 중에서, 92~93쪽)
소설의 제5장 절반은 모로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아마도 여기서 언급되는 모로의 그림 두 점은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와 「환영」일 것이다. 데 제쎙트는 살로메가 등장하는 모로의 그림을 세밀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원하던 ‘나른하고도 잔혹한 영상’이었다.
귀스타브 모로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1876년
"온갖 향기들이 내뿜는 퇴폐적인 냄새 속에서, 또한 이 교회당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살로메는 마치 명령을 내리듯 왼팔을 앞으로 쭉 뻗고 있었고 오른팔은 구부려 얼굴 높이로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든 채, 웅크리고 앉은 한 여인이 뜯고 있는 기타의 화음에 맞춰 발끝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파괴할 수 없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여신, 불멸의 히스테리의 여신, 자신의 살집을 뻣뻣하게 만들고 근육을 단단하게 하는 경직증에 의해 모든 여자 중에서 선택된 저주받은 미의 여신이 되었던 것이다.” (94, 96쪽)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끔찍한 두상은 짙은 보라색의 핏덩어리들이 턱수염의 끝 부분과 머리카락에 엉긴 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로지 살로메의 눈에만 보이는 이 두상은 그 음울한 시선으로, 마침내 자신의 원한을 갚은 데 대해 몽상하고 있는 헤로디아도, 야생 동물의 냄새에 적셔지고 방향성 수지로 뒤덮였으며 향과 몰약으로 훈증된 여인의 나신으로 인해 경악하여 무릎에 손을 얹고 약간 몸을 앞으로 수그린 채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헤롯 왕도 쳐다보지 않았다. 유화에 그려진 살로메보다는 위엄이 없고 덜 거만하지만 훨씬 더 관능적인 이 무희 앞에서 데 제쎙트는 늙은 왕과 마찬가지로 압도되고 완전히 지쳐서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99쪽)
위스망스 그리고 데 제쎙트는 모로의 그림에서 무기력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모로의 그림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눈과 마음을 현혹하게 만드는 아편이다. 살로메의 춤사위 속에 황홀경에 빠져 의지력을 마비된 헤롯 왕처럼 모로의 살로메 그림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시에 한순간에 무기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모로의 ‘무기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다. 자신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나그네를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를 처단하기 위해서 영웅 오이디푸스가 나섰다. 그런데 모로가 묘사한 스핑크스의 모습이 독특하다. 원래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끔찍스럽게 생긴 괴물이다. 그런데 머리는 여성이고, 몸은 아담한 고양이와 같다. 거기에 남자들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 가슴이 달려 있다. 여성스러운 스핑크스가 지금 오이디푸스의 가슴 근처까지 접근했다. ‘아침에 다리는 두 개’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내려는 장면 같지만, 오이디푸스와 스핑스크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스핑크스는 두 앞다리를 오이디푸스의 건장한 가슴에 얹고, 자신의 가슴을 그의 시선이 닿을 수 있게 앞으로 쭉 내민다. 예로부터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혈기왕성한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의 노골적인 유혹적인 자세가 당황했을 것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스핑스크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왼손에 창을 쥐고 있지만, 스핑크스의 유혹에 손과 온 몸은 경직된 듯하다. 메두사의 눈빛을 보면 돌이 되어 굳어버리듯이 스핑크스의 유혹적인 눈빛은 여색에 약하는 남성의 본능을 굳어버리게 만들어 영웅의 의지를 꺾게 만든다. 스핑크스도 살로메 못지않게 남성을 사로잡는 위험하고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장면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극세사 감수성’,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프루스트도 모로의 그림을 선호했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작업을 진정한 내면의 영혼을 지닌 시인의 작업과 동등하게 생각했다. 모로가 표현한 신비로운 세계는 곧 내면의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그것이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감명을 받는다. 위스망스가 모로의 작품세계를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이해했다면, 프루스트는 내면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프루스트는 살로메가 나오는 그림보다는 음유시인과 오르페우스가 나오는 그림을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1865년
“시인들은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진정한 영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끼던 유일하며 가장 내면에 있는 영혼은 간직되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묘지를 찾는 것처럼 뤽상부르에 순례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여인처럼 단순히 <오프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앞에 간다. 우리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 무엇, 생각의 색채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 눈, 바로 귀스타브 모로의 생각을 보게 된다.” (프루스트 ‘모로의 신비세계에 관한 노트’ 중에서, 『독서에 관하여』 163쪽)
모로는 신화, 종교, 역사 등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다루는 소재를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려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 의한 주관적인 관념과 인식을 묘사하는데 노력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 우리가 상징주의 미술을 어렵게 느껴지는 것처럼 모로 또한 관념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성작에 비해 데생과 미완성 습작이 많은 편이다.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대중의 호응과 명성을 기대하는 세속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제 데쎙트처럼 훗날 미술관이 된 파리의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혹시 모로도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처럼 미지의 걸작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생전에 최고의 걸작이라고 꼽을만한 그림이 많지 않아서 자신이 남긴 그림들의 운명이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로의 지나친 걱정과 달리 그도 나름 전성기를 누렸고 어느 정도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1892년에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로 채용되고, 그의 작업실은 공실적인 국립 미술관이 되었다.
모로의 작품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너무 관념적으로 치우친 소재와 그리다 만 듯한 색채와 형태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생전에 살롱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쇼펜하우어를 읽는 한 미술학도가 그린 그림’이라는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모로가 현실이 아닌 신화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상상의 세계를 묘사했기에 비평가들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느꼈던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처녀작 『메트로랜드』에서 영국 사람 데이브는 모로의 그림를 ‘자위행위자의 예술’이라고 폄하한다. ‘학문적인 상징주의’에다가 너무 세속적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학문을 연상시키는 상징주의 그림이 미술관에 전시된 사실에 괜히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림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걸작이라도 졸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위행위자’라고 비유한 데이브의 표현은 모로의 작품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발언으로 보인다. 모로는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상징주의 미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모로는 데 제쎙트처럼 스스로 환상적 예술에만 탐닉하여 열광하는 ‘예술적 자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몰두하고 갇혀버린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제자 양성에 적극적이었는데 놀랍게도 모로가 배출한 유명한 화가는 야수파를 대표하는 앙리 마티스 와 종교화로 유명한 조르주 루오가 있다.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 서로가 추구하던 화풍이 달랐지만 특히 루오는 스승으로서의 모로를 무척 존경했다. 모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퍼했으며 모로 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모로는 어떤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악마의 소곤거림이 들릴 수 있고, 또 다른 그림을 보면 어디선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그림을 보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려면 널리 알려진 대표작품만 봐서는 안 된다. 그 화가의 예술을 깊이 있게 알려면 데생, 습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보면 좋다.
혹시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지만, 미술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면 모로 미술관도 한 번 가봄직하다. 프루스트는 모로 미술관은 단순한 화가의 집이 아니라 그의 예술행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유되는 특별한 곳이라고 말했다. 소설가답지 않게 예술적인 감식이 뛰어난 프루스트다. 모로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참으로 궁금하게 만든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도중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모로 미술관에 꼭 들려보시길.(라고 쓰지만, 나도 모로 미술관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