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음악가는 어떻게 고독해지는가

 

 

 

 

 

 

 

 

 

 

 

 

 

 

 

 

백아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그는 유독 친구인 종자기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어느 날 종자기를 곁에 두고 금을 연주하며 속으로는 높은 산을 생각하고 있는데, 음악을 듣고 있던 종자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태산처럼 높구나!" 이에 백아가 이번에는 넓은 강를 그리며 금을 타니 종자기가 "황하처럼 넓구나!" 라고 맞장구쳤다. 백아의 거문고 연주는 가장 높은 태산과 가장 넓은 황하에 비견될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종자기는 백아가 무엇을 노래할는지를 잘 알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진정으로 백아의 음악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그러나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아는 너무 슬프고 절망한 나머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리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으니, 더 이상 계속할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와 종지기의 아름답고 슬픈 우정을 의미한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내고 영혼을 읽어내는 사람,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믿음과 존중을 주는 그런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받으려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원초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일반인보다 욕구가 강할 것이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악보를 찢고 버려야 하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 끝에 만든 음악이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음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쇤베르크는 이런 에세이를 썼겠는가. ‘어떻게 사람은 고독해지는가’ 제목에서 쇤베르크의 심정이 느껴진다. 쇤베르크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형식으로 무조음악, 12조 기법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만들었다. 고전적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외면을 받아야했다. 자신의 음악을 환호해주지 않으니 고독해질 수밖에.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음악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연주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을 디스(diss)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Scene #2  콘트라베이스는 유일한 자존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베이스주자 역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음악가이다. 베이스는 외로운 악기다. 뒤에서 묵묵히 저음을 만들어 주는 게 주 역할이다. 현악기 가운데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한다. 높은 의자에 앉아야만 연주가 가능한 큰 덩치와 굵직한 저음으로 현악기가 가지는 여성스러운 이미지에 두드러진 남성성을 얹어놓은 콘트라베이스는 그런 특징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음질은 어둡고 분명치가 않지만 앙상블에서는 묵직한 하모니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음원이다. 음악연주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는커녕 관객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연주자의 기분은 어떨까.

 

콘트라베이스는 ‘우울’ 그 자체다. 어쩔 수 없이 베이스주자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분신인 베이스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경멸한다. 주인공은 자신과 악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안다. 무대 위에서는 스타의 들러리이며 무대 아래에서도 마찬가지 인생임을 모를 리 없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연주하지만 관객의 박수갈채에서는 늘 소외된다. 그늘에 가려진 그는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사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차리기엔 그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게다가 사라는 유명한 테너가수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 이제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모노드라마는 여기서 끝난다. 슈베르트가 제2 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넣어 저음부를 강화한 피아노5중주 ‘송어’ 1악장이 흐른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쓸쓸하게 퇴장하지만 슈베르트의 ‘송어’을 선곡함으로써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콘트라베이스와 함께했던 음악은 그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삶의 일부이다. 그는 아직 고독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한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는 실패한 음악가 아니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Scene #3  음악으로 삶의 고통을 치유하다  

 

 

 

 

 

 

 

 

 

 

 

 

 

 

 

 

 

쇤베르크와 콘트라베이스 주자보다 더 불운한 음악가 한 명을 소개해본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의 주인공 쿤이다. 어린 시절, 불행한 사고를 겪어 한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이 되고 만다. 게다가 처음으로 짝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고백을 해보지만 씁쓸하게 실패한다. 쿤은 온갖 상처와 배신을 겪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아했고, 음악으로 고독을 달랜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무명 작곡가였던 쿤은 우연히 당시 최고의 명가수 하인리히 무오트의 눈에 띄게 되어 촉망받는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음악 연주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러나 쿤은 이러한 삶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쿤에게 음악은 불행한 자신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더욱이 자신의 음악을 높이 평가해주는 무오트의 성격이 못마땅했다. 무오트는 말 그대로 음악을 직업 삼아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음악은 그저 단지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주고, 주변에 수많은 여자들을 오게 만드는 화려한 선율일 뿐이다. 음악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쿤의 예술과 상반되는 예술가이다. 그래도 쿤은 여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음악으로 인정을 받는 무오트를 부러워한다. 심지어 그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사실 무오트가 자신이 만든 가곡과 오페라를 부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무명 음악가로 활동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무오트는 쿤의 음악적 단점과 결함을 극복해줄 수 있고, 그의 음악을 인정해준 유일한 지음(知音)이다. 

 

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잊고 위안을 얻으려는 예술가형이라면 무오트는 음악으로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는 예술가였다. 여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고,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불 같이 화내는 성격이 인간으로서의 무오트에게 흠은 있었지만, 가수(음악가)로서의 무오트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무오트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불행한 운명은 계속 쿤의 발목을 잡기만 한다.

 

쿤은 소프라노를 담당하는 게르트루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노래는 게르트루트를 향한 세레나데가 될 수 없었다. 쿤이 만든 오페라를 무오트와 게르트루트가 남녀 주인공으로 배역을 맡아 함께 부르기로 한 것이다. 세레나데의 주인공이 엉뚱하게 무오트가 끼어든 셈이다. 결국 게르트루트는 무오트와 결혼을 하고 만다. 그녀는 성공의 정점에 오른 무오트와의 결혼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쿤은 또 한 번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미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고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쿤은 음악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잊고, 작곡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것이 강한 자’라는 말이 있듯이 고독과 고통을 오랫동안 음악으로 승화시킨 쿤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무오트와 게르트루트는 파혼을 맞게 되고, 첫 번째 결혼 생활의 실패에 크게 낙담한 무오트는 자살한다. 게르트루트가 떠나간 빈자리에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독과 외로움을 무오트는 견디지 못했다. 무오트는 애초에 외로움을 잘 타는 인물이다. 인기 가수로서의 삶 뒤에는 어두운 고독의 그림자가 늘 따라왔지만, 쿤을 제외한 무오트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쿤은 고독의 그림자를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고독한 삶을 위로해주는 음악의 힘을 인정하는 것은 곧 무오트 자신 또한 고독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국 무오트는 음악으로서 고독을 이겨내는 방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Scene #4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

 

외로움에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다. 인간은 홀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홀로 세상을 떠나간다. 외로움은 운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고독은 새로운 창조와 작품을 완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백아가 종자기에 세상을 떠난 후에 거문고 연주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친구의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우리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우정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의 극단적인 행동이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친구의 공백이 클수록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 또한 클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종자기가 과연 자신 때문에 거문고를 끊어버린 백아의 행동을 좋아할까.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라고 말하면서 재능 있는 친구의 행동에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진정한 지음이라면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위대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학자, 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오랜 고독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창조적 업적과 자기 성찰을 이루어 낸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은 고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 외로움은 새로운 창조와 자기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성찰이다. 외롭다고 슬퍼하지 말고 외로움은 즐겨야 한다. 특히 음악하는 사람들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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