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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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에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을까? 4년 전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인터넷을 접속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 난 컴퓨터는 내가 고등학생 때 구입한 것이라서 거의 4년째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능은 점점 떨어지고, 인터넷 접속 속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A/S를 통해 컴퓨터를 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컴퓨터를 수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쳐 써도 오래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컴퓨터 본체를 교체할 것을 권했다. 컴퓨터 본체는 오래 사용되고 나면 기계 내부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인간도 일을 하면 쉬는 시간이 있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장시간 사용하면 잠시 전원을 꺼서 본체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줘야 한다. 컴퓨터 한 번 켜면 기본 5시간 이상을 썼으니 컴퓨터 본체가 지칠 만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컴퓨터가 5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장 나는 경우가 많았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인터넷 서핑에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인데 컴퓨터의 수명은 왜 짧은 것일까? 컴퓨터 한 번 고장 나면 일단 가족으로부터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내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을 비교한다면 나는 훨씬 적은 편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도대체 이상하게 내 컴퓨터만 수명이 짧은 걸까.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리 담당자에게 컴퓨터 본체의 수명을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컴퓨터를 장시간 켜지 않고, 잠깐 전원을 꺼두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본체의 수명이 보통 5년이라고 했다. 하루에 컴퓨터를 5시간동안 켜는 것이나 그 이상 시간을 켜나 장시간동안 전원이 켜져 있으면 컴퓨터 본체의 사용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새 컴퓨터로 장만했고, 어느덧 4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오래 사용했다 싶으면 컴퓨터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컴퓨터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절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이 못된 습성을 고치지 못해서 지금의 컴퓨터 역시 상태가 영 시원찮다.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노쇠한 컴퓨터의 상태를 알면서도 험하게 다루고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5년 이상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오래 사용한 가전제품이라면 냉장고를 10년 넘어서 사용한 것이 고작이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컴퓨터는 하루 자고 나면 새로운 성능이 추가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출시되어서 고장이 나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통화 상태가 불량이거나 인터넷 접속 속도가 느려졌다 싶을 때 마침 최신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위약금 약정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돈을 지불해서 최신 스마트폰을 사고 만다.

 

<홈 퍼니싱스 데일리>라는 잡지가 가장 쉽게 고장이 나는 가전제품을 조사해서 목록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개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 실시한 조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가전제품이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화 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 세탁기
2. 냉장고
3. 빨래 건조기
4. 텔레비전
5. 건조 겸용 세탁기
6. 레인지와 오븐
7. 에어컨
8. 냉동고

 

 

인류의 수명이 원래 50세 이하였다가 시대가 좋아지고, 의학기술이 발달되면서 수명이 점점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8가지 가전제품도 초기에 보급되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나고, 쉽게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명도 길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구매한 제품을 10년 이상 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고장이 나서 바꿀 때가 되면 지금의 제품보다 성능이 좋은 제품들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아무리 제품을 조심히 사용한다한들 제품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만약에 제품의 수명이 많아진다면 제품을 만든 기업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 기업은 제품을 생산하여 끊임없이 수익을 내야한다. 상품을 많이 팔아야 이득을 얻는다. 제품이 오래가는 건전지처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려는 구매자의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다. 구매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이 위해서 기업은 신상을 알리는 광고를 만든다. 광고가 대중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홍보 수단이다. 

 

탈성장 이론가인 세르주 라투슈는 가전제품이 쉽게 고장이 나게 만드는 주범을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 구매자가 아닌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기업들이 상품을 설계할 때부터 일부러 수명을 줄이거나 결함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품의 교체 주기를 앞당겨 소비자들은 끝없이 상품을 다시 구매하게 된다.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고 일부러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다.

 

이미 ‘계획적 진부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물신만능주의 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일회용품, 식료품의 유통기한, 수명이 2~3년에 불과한 스마트폰은 대표적인 계획적 진부화의 산물이다. 우리는새 물건을 사고 '득템'했다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끊임없이 이전 물건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 물건을 사도록 하는 낭비사회의 일면일 뿐이다. 새 물건도 언젠가는 낡고 성능이 저하된 물건이 된다. 우리는 또 '신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서 사용하기보다는 무엇을 살지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라앉은 '상품'을 우러르며 소비자는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소비왕국의 탄생을 놓고 "소비가 사람들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재화를 계속 생산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태엽을 감아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이 땅의 소비자들은 밤낮으로 상품 소비에 나선다.

 

하지만 소비를 부추기는 계획적 진부화는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야기한다.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진 소비는 오염과 쓰레기를 낳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도 발생했다. 인간과 자연이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선 낭비사회를 경계하는 라투슈의 생각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생산 욕구와 새로운 상품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소비 욕구가 맞물려, 모든 상품은 사실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고 있다.
 
성장 중독에 빠진 낭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라투슈의 대안은 ‘탈성장’이다.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할수록 고치거나 재활용으로 대체해 성장 없는 번영과 검소한 풍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성장’이라고 해서 이미 길들여진 성장의 편리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 발자국 줄이기,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멀리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하는 대안은 이미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언급된 내용이라서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계획적 진부화’가 고착된 이 진부한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비 패턴이 계획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있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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