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바느질하는 모델」 (발자크  『미지의 걸작』 삽화)  1927년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모델은 바느질을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주 멋진 초상화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이상하다. 사람의 형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다. 불규칙한 곡선과 직선이 실타래가 엉켜져 있듯이 그려져 있는데 얼핏 낙서처럼 보인다. (아니면 추상회화?) 평범한 자세를 취하는 모델에서 화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힘든걸까? 캔버스에 그려진 낙서는 창작을 위해 고민하는 화가의 심정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화가의 눈빛은 사뭇 진지하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그린 오노레 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수록된 삽화 중 하나이다. 판화 방식으로 제작된 삽화는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는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100여 점 정도 제작되었다. 삽화에 나오는 화가는 위대한 명작을 남기기 위해서 집요한 창작욕을 고집한 늙은 화가 프렌호퍼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무려 10년 동안이나 제작에 매달린다. 그는 다른 화가에 비해서 '완벽한 예술'을 지향한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예술'은 그림 속 모델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화가의 그림을 지적하는 프렌호퍼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서 여백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그렇지만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좋고, 여백의 감정이 정확히 지켜져 있네. 그러나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육체에 따뜻한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발자크  '미지의 걸작' 중에서, 『사라진느』 84~85쪽)

 

그러나 그 누구도 프렌호퍼의 '완벽한 예술'이 온전하게 표현된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가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프렌호퍼는 소문으로만 알려진 그 미지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한 걸작을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난 후에 공개하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그림 공개를 꺼리게 만든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소유물로 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면 아직 붓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아우라를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 독학 중인 젊은 니콜라 푸생(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를 발자크가 덜 알려진 화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은 대가의 걸작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프렌호퍼가 그렇게도 입이 닳도록 강조하던 완벽한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자신의 연인인 질레트를 모델로 한 그림을 제작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델을 소개해준 보상 차원으로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는 것이다. 푸생의 연인 질레트는 빼어난 외모를 지녔기에 아무리 고집이 센 프렌호퍼도 푸생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프렌호퍼는 미지의 걸작이 보관된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한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손에서 탄생된 수많은 작품들에 감탄했지만, 오히려 프렌호퍼는 그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그저 습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제 드디어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하게 모포로 가려져 있었다. 프렌호퍼는 처음으로 자신이 집요하게 매달렸던 미지의 걸작을 공개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있어야 할 캔버스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텅 비어 있는 캔버스라고 말했지만, 프렌호퍼는 완벽하고 생동감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그림이라고 우긴다. 푸생은 오랜 창작 과정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프렌호퍼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고 난 후, 프렌호퍼는 아틀리에에 있는 모든 그림들을 불태워버리고 자살을 하고 만다.

 

특이하게도 피카소는 발자크의 소설에 수록되는 삽화를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제작했다. 비록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여인의 모습이 아닌 낙서 같은 선만 그려 넣는 화가가 프렌호퍼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피카소는 삽화 이외에도 줄곧 '화가와 모델' 소재에 의한 그림을 많이 제작했다. 예술가에게 모델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모델은 위대한 작품을 낳게 만드는 어머니와 같다. 화가는 아름다운 모델의 모습을 캔버스에 영원히 담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화가의 길을 걷는 피카소 또한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도 프렌호퍼처럼 수많은 데생과 연작을 통해서 위대한 걸작을 하나 남기고 싶은 열망을 지녔을 것이다.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와 죽음을 통해 완벽한 예술에 대한 집착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프렌호퍼를 '악마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광기로 인해 자멸하는 실패한 화가로 묘사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데생에 나오는 젊게 그려진 프렌호퍼는 인간적인 화가의 모습이다. 비록 그가 그린 그림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낙서에 불과하지만, 젊은 프렌호퍼의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카소가 자신의 연인들인 프랑수아즈와 자클린 등의 모습을 수많은 그림과 데생, 판화로 남겼듯이 말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화가의 숙명, 즉 창작의 고통을 고독한 열정으로 부각시켰다. 회화를 보는 소설가와 화가의 시점에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피카소는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창작의 산고 끝에 나온 작품 하나가 냉담한 평가를 받는다면 화가 입장에서는 맥이 풀리고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실망하게 된다. 그러기에 수많은 습작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최종적인 작품이 완성된다. 작은 데생에서 습작을 거쳐 완성하는데 걸리는 세월이 족히 일 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화가 입장에서는 창작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도 예술에서 말하는 '깊이'에 사로잡혀 비관적인 최후를 맞는 화가가 등장한다. 화가는 만인이 극찬하는 자신의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 했던 한 평론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다가 대체 어떤 것이 깊이가 있는 그림인지 알 수가 없어 비관하다 목숨을 끊는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 평론가는 관점을 확 바꿔 그녀의 그림에서 깊이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와 닿는 순간이다. 우리는 때론 자신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기도 하고, 능력 밖의 일을 우연하게 성취하기도 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본인의 깜냥인 양, 어깨에 힘을 주고 객기를 부린다. 지적인 허영심과 교만에 취한 우리들에게 쥐스킨트는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쥐스킨트도 예술가를 바라보는 발자크의 시선과 유사하다. 프렌호퍼도 작품의 '깊이'를 아는 척 행동했으나 결국은 그것을 예술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셈이다. 쥐스킨트는 화가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술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평론가마저도 '깊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직업으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화가의 삶에서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예술가의 고독과 연민이 느껴진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죽음 뒤에 비로소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창작의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다가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은 이 말에 씁쓸하게 느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창작의 산고보다는 오랜 진통 끝에 나온 작품의 결과물만 기억하고 있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반 고흐의 작품은 처음에 제작될 당시에는 그 누구도 구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생전에 고흐는 수천 점이나 남긴 그림들 중에 단 한 점만 팔았을 정도로 실패한 화가에 불과했다. 동생 테오와 몇 몇 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설픈 수준의 그림으로만 생각했다. 끊임없이 불타오르게 만드는 창작 욕구는 고흐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화가로서의 자의식과 고집으로 버티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작품이 하나씩 완성될수록 고흐의 정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래서 외로운 고흐는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수밖에. 생전에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통에 겨워 외치는 고흐의 절규를 들어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림이 재벌을 위한 값비싼 상품이 된 요즘, 그림이 탄생되기까지 화가가 겪는 심정은 ‘0’이 무수히 많은 가격표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예술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 받는다. 이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에 ‘고통도 길다’라는 말도 추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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