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면 이번 달 말에 MID출판사에서 정말 흥미로운 책이 출간된다. 아마도 그 책 제목에는 ‘젖가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성 독자라면 “어머나!”라고 살짝 얼굴이 붉어지면서 놀라고, 남자 독자는 벌써부터 어떤 내용이 있을지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다. 그러나 제목만 가지고 야한 내용이거나 여성 가슴을 크고 아름답게 돋보이기 위한 미용 관련 도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젖가슴을 음란한 시선이 아닌 과학, 특히 진화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익한(?) 과학도서다.

 

처음으로 출판사 프리뷰어(Previewer) 활동을 하게 되었다. 프리뷰어란 책이 최종 형태로 나오기 전 상태, 즉 가제본을 읽고 원고, 편집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독자를 의미한다. 내가 읽어야 할 가제본이 바로 ‘젖가슴’에 관한 책이다. 제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가제 또한 ‘젖가슴’이다.

 

읽어야 할 책이 수두룩한데 오늘 가제본을 택배로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아! 혹시 가제본 속에 ‘사진’이 있는지 궁금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특히 남자 독자라면 이 책 속에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제일 궁금했을 것이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동지들이여. 사진은 있다. 내가 받은 가제본은 흑백 사진으로 나왔는데 정식으로 출간될 때는 ‘올컬러’로 나온다. 기대하시라.

 

이 책 <젖가슴>은 사진만 좋은 건 아니다. 내용도 상당히 믿을 만하고, 남녀 독자 모두 알아두어야 할 가슴에 대한 최신 정보들이 가득하다. 일단 이 책의 주요 내용 중에 특히 눈여겨 볼 것이 바로 ‘모유’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유는 신생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이 가득한 최고 물질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믿었던 상식을 반박한다. 이 책의 저자는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이름의 여성 과학자인데 자신이 키운 자식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유럽에 자란 아이들이 영양소 가득한 모유가 아닌 ‘독’을 먹고 자랐다고 주장한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여성의 진화학적 용도와 그 과정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내세우는데, 젖가슴이 성적 기능을 위해서 진화했다는 남성 중심적 가설을 반박한다. 남성 중심적 가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데즈먼드 모리스가 있다.

 

사실 프리뷰어를 신청할 때부터 나는 무조건 선정될 것 같은 자신감에 가슴에 관한 책을 알아보고 읽기 시작했다. 엉큼한 마음으로 읽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말 가슴을 과학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공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젖가슴을 알기 위한 독서를 지적으로 돋보이려고 ‘공부’라는 단어를 써봤는데 어감이 이상하다. 젖가슴을 공부한다?)

 

 

 

 

 

 

 

 

 

 

 

 

 

 

 

 

그런데 ‘공부’의 의미로 독서를 시작한 것은 내 손을 가슴에 얹고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프리뷰어 선정 발표가 나기 전부터 데즈먼드 모리스의 <벌거벗은 여자>(휴먼앤북스, 2004년, 절판)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문예출판사, 2004년)를 읽기 시작했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은 현재 절판되는 바람에 전자북으로 구입해서 스마트폰에 설치된 ‘알라딘ebook' 앱으로 읽기 시작했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여성 가슴을 양육과 성, 두 가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러나 ‘가슴’을 설명하는 장을 끝까지 쭉 읽게 되면, 그의 주장은 어느새 양육이 아닌 성적 기능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리고 여성 가슴이 수유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점을 내세워 이를 진화 과정의 결함으로 본다. <젖가슴>의 저자 플로렌스 윌리엄스뿐만 아니라 일부 여성 독자들에게는 모리스의 주장이 여성의 양육 기능을 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젖가슴>의 1장에 모리스와 나탈리 앤지어의 책이 잠깐 언급된다. 혹시 <젖가슴>이 정식으로 출간될 때 두 저자의 책을 같이 읽어보면 여성 가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다.

 

이제 읽기 시작한 상태지만, 정말 <젖가슴>은 남녀 독자 모두 읽어봐야 할 책이다. 내가 프리뷰어라고 해서 출간 예정인 책을 벌써부터 대놓고 홍보한다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제본을 끝까지 읽어보고, 저자의 주장에 의문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서평에서 확실하게 언급할 것이다. 내 이견이 잘못되었으면 스스로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 출판사로부터 부탁받고 서평을 쓰는 것처럼 프리뷰어 활동에 관련된 글도 대충 쓰고 싶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을 읽다가 좋은 내용, 미흡한 내용이 있으면 서평을 통해 둘 다 균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독자들이 좋은 책을 선별하는데 도움이 된다. 너무 책의 장점만 부각시켜도, 그렇다고 악의적인 의도만 가지고 단점만 부각시켜도 좋지 않다. 전자는 홍보성 짙은 서평에 가깝고, 후자는 몰상식에 가까운 서평이다. 그만큼 서평 쓰기가 쉽지 않다. 서평이 일차적으로 책을 읽은 나 자신만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이 곳 알라딘과 같은 인터넷 서점에서 공개된다면 책에 관한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특수적인 목적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서평 쓰기가 많이 활성화되어야 독자들이 저절로 책을 찾으러 서점으로 향한다.

 

<젖가슴>이 정식 출간되면 책 앞면에 프리뷰어로 활동한 30명의 이름이 나온다고 한다. 그 중에 내 실명도 있다. 내 이름 석 자가 부끄럽지 않게 좋은 책을 만들고,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열혈 독자가 되도록 열심히 ‘젖가슴’을 공부하겠다. 으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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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14-09-0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젖가슴을 공부해야 하는 건가요? 선천적으로 학습되어 있는거 아니가?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공부하고 싶네요.

cyrus 2014-09-04 13: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멜기세덱님. 저도 여성 가슴 정말 좋아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성 가슴을 (남성들을 위한) 성적 기능으로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어보니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어요. 모유에 아기에게 좋은 성분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요. MID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게 되면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stella.K 2014-09-04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항상 널 보면 생각하는 거지만
아무래도 넌 출판 일을 업으로 하게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언제 또 프리뷰어까지..!ㅎ
난 가제본 별로라 프리뷰어는 좀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가제본이 저렇게 나오나 보지?
껍데기 누런 거 아니었나? 괜찮네...

여자 젖가슴 갖고 뭔 할 말이 많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남자고 학자라 할 말이 많은가 보군.
하여간 학자들은 별 것 다 연구해. 그지?ㅋㅋ



cyrus 2014-09-05 23:21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에 출판사 공식 페이지가 많아요. 인터넷 카페처럼 비슷하게 신간도서를 홍보하고 있어요. 페이스북 접속이 시간 낭비일 때가 많지만, 최고의 장점이라면 알라딘보다 빠른 신간도서를 미리 확인할 수 있어요. 가끔 이런 활동도 알리곤 하죠.

책 표지는 아직 정해진 건 아니에요. 지금 표지안이 세 개인데 그 중 하나랍니다. 뒷표지는 여백이고요. 참고로 저 책의 저자는 여자랍니다. 그래서 가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어요. ㅋㅋㅋㅋ

saint236 2014-09-0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감이 이상하기는 버자이너 문화사도 마찬가지지요.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습니다.^^ 가제본 판은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더라고요...

cyrus 2014-09-05 23:2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세인트님. 다음번에 그 책도 읽어봐야겠군요. ㅎㅎㅎ 사실 그 책도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뜨거웠던 햇빛의 열기가 가을비에 식혀가던 8월의 마지막 날. 국립중앙박물관 ‘오르세미술관 전’을 보러 가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을 찾았다. 두 달 전에 알라딘으로 오르세미술관 전 도록을 주문했는데 책 안에 전시회 입장권도 있었다. 성인의 경우, 입장권 가격 12000원이다. 박물관 현장에서 도록, 특히 대형을 구입하면 정가 25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나는 전시회 보러 가면 꼭 대형 도록 한 권을 구입하는 편이다. 서울을 왕래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지불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다행히 알라딘에서 대형 도록을 1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덤으로 도록을 구입하면 전시회 입장권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울에 가기 위한 비용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입장권으로 평일에만 사용하는 것인데 유효기간은 8월 29일까지였다. 몇 달 동안 시험 준비하고, 서울에 갈 여비를 마련할 상황이 아니라서 하마터면 도록을 구입해놓고 무료로 전시회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뻔했다. 그 유명한 오르세미술관의 그림들을 보지 못한다면 왠지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평일 입장권을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8월 29일 금요일에 서울에 가기로 결심했다.

 

오후 2시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는데 평일이라서 관람객이 많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한 것보다 전시회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전시회가 종료되는 기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평일인데도 시간을 내서 관람객들이 찾아 온 것 같다. 전시회 내부에도 그림을 찬찬히 보는 관람객들이 많아서 여유롭게 그림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에 대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은 작품들만 보고 얼른 전시회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달랑 전시회만 보고 다시 대구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깝다. 내가 서울에서 문화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비록 혼자지만 일단 서울에 오면 내가 최대한 즐겁게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생활을 하기 위해 미리 계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를 다 보고 나면 용산역 근처에 위치한 헌책방 뿌리서점에 갈 예정이었다.

 

뿌리서점이라면 헌책방마니아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헌책방의 성지(城地) 중 한 곳이다. 몇 년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뿌리서점을 알게 된 이후부터 언젠가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결심을 반복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뿌리서점에 가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400, 502번 버스를 타면 20분 내로 뿌리서점이 위치하고 있는 ‘용사의 집’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요즘 구글, 네이버 지도의 성능이 무척 좋아서 간단하게 ‘뿌리서점’을 검색하면 위치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만 봤던 뿌리서점 간판이 보였다. 간판 밑에 걸린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는 저 문구가 무척 반가웠다. 그동안 나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던가. 입구 앞에 나이기 지긋이 든 어르신 세 분이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헌책방에 자주 방문하는 손님인 줄 알았는데 그 중 한 분이 뿌리서점을 운영하는 주인 어르신이었다.

 

 

 

 

 

 

역시 지하 헌책방 내부로 통하는 계단에서부터 수많은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 속에 책이 거대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여기 헌책방에 있는 책들도 한때 주인의 손을 많이 타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인의 손길이 뚝 끊기는 순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오랫동안 잠든 화석(化石)이 되어버렸다. 헌책방에 찾는 손님은 헌책 화석이 가득한 지식의 지층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고고학자가 된다.

 

 

 

 

 

 

지식의 지층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는 상당히 비좁다. 바닥에 위치한 지층 밑을 관찰하기가 쉽지 않고, 서서 책 읽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헌책방 고고학자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용산역 주변에 퍼지는 시끌벅적한 속세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집중력이 생긴다. 그리고 주인 어르신이 직접 타서 건네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는다면 북카페가 부럽지 않다.

 

주인 어르신은 헌책방에 처음 방문한 젊은 손님이 신기했던가 보다. 커피를 주면서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어봤다. 대구에서 왔다고 말했다. 어르신은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사실에 무척 놀라워했다. 나는 평소에 헌책방 가는 것을 좋아해서 인터넷에서 뿌리서점의 명성을 알게 되어 여기 왔다고 하자 주인 어르신은 무척 쑥스러워했다. 그러자 옆에 책을 고르던,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손님이 “여기 뿌리서점을 모르면 간첩이야.”라고 치켜세웠다. 헌책방을 자주 찾는 손님들은 주인 어르신보다 뿌리서점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주인 어르신과 몇 분 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구에도 헌책방이 많이 있는지 물어봤다. 내가 예전에 비해 많지 않다고 대답하자 주인 어르신은 헌책방이 점점 사라져만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대구에 살아남은 헌책방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대구시청 주변, 남문시장, 대구역 굴다리 밑. 이 세 군데뿐이다. 대구에 헌책방이 생기게 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 좌판에서 헌책을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1970~1980년대 전성기를 지나 대형 서점, 온라인 서점 등의 등장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전성기 때만 해도 헌책방 150여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의 10여 곳 정도만 남아있다.

 

 

 

 

원래 헌책방에 책 고르면 많아야 세 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그 날 대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 때문에 책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었기에 책방 내부 하나하나 살펴봤고, 주인 어르신에게 직접 허락을 받고 사진으로 담았다. 시간이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책방 내부로 향하는 계단의 왼쪽 벽에 붙여 있는 故 장영희 교수의 글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다음에 여기 오게 되면 이 글을 꼭 읽어보리라.

 

 

 

 

 

 

 

뿌리서점에서 처음 고른 책은 콜린 윌슨의 <우주의 역사>(범우사) 1986년판, 2007년 국내에 사진전을 열리기도 했던 프랑스의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랑의 방>(마음산책, 2003년, 품절),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열린책들, 2001년, 절판)이다. 생각보다 책 상태가 좋았다.

 

콜린 윌슨은 예전 독서모임에서 만난 헌책방 마니아로부터 알게 된 저자다. 처녀작 <아웃사이더>로 무척 젊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고, 문학 이외에 미스터리, 살인 등 어두운 지식의 분야까지 섭렵하여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다가 작년 12월 5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우주의 역사>는 요즘에 나오는 이런 비슷한 분야의 도서와 비교하면 전혀 새롭지 않는 낡은 정보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요즘 콜린 윌슨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어서 <우주의 역사>가 아직 절판된 지 않은 게 신기하다. 읽다 보면 책 속에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머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집, 폴 오스터의 영화 시나리오는 이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책값을 계산하면서 주인 어르신은 책을 많이 읽는 내가 대통령(!)이 될 것 같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변변치 않은 서점을 찾아줘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했다.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만큼 리더십은 없지만, 독서 문화가 널리 알려져서 정착될 수 있도록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서점과 같은 헌책방이 절대로 사라져서 안 되며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이 지식의 보고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야 한다. 헌책방 속에 잠들어 있는 지식의 화석(化石)은 새로운 주인에 의해 만나는 순간, 책표지 속에 갇힌 지식이 활짝 열리면서 살아있는 화석(花石)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늘도 살아있는 화석(花石)을 찾기 위해 지식의 지층이 가득한 헌책방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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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9-0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는 대륙서점이라는 아름다운 헌책방도 있고,
경북대 뒷문에 합동서적도 있지요

cyrus 2014-09-03 23:1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함께살기님. 사실 뿌리서점 주인 어르신과 대화하면서 대륙서점, 합동서적을 언급했습니다. 이 두 곳은 제가 많이 들리는 헌책방이거든요. 함께살기님의 블로그에 있는 책방에 관한 글,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0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콜린 윌슨 아웃사이더는 제 애독서입니다.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앙리 바르뷔스 항목을 정독하는 편이죠.

2.폴 오스터에 관심이 많으시더니 절판본을 구했네요.

3.타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주 헌책방 골목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없어지기 시작해 2000년대 중반 경까지 집중적으로 없어졌습니다.그 후에도 나이 드신 주인들은 돌아가시기도 하고...제가 자주 가던 곳들도 없어진 곳이 몇 개 있죠.

cyrus 2014-09-04 12:39   좋아요 0 | URL
1. 그렇군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땐 내용이 어려웠어요.. ^^;;
2. 폴 오스터도 국내에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고,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다음으로 내세우는 작가라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3. 혹시 광주에 가볼만한 헌책방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2014-09-0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4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9-0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대통령 같이 생겼구나.ㅎㅎ
콜린 윌슨은 참 안 알려진 작가야. 그 명성에 비하면 말이지.
내가 10대 때 아웃사이더란 책을 범우사에서 샀는데
어려워서이기도 했지만 이 책을 과연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군. 출판사의 입담만으로는 잘 모르겠더라구.
주위에서 읽었다는 사람도 드물고.

뿌리서점이 유명한 줄은 알지만 강남역만 나가도 중고샵이 있으니
나 같은 귀차니스트는 일부러는 안 가게되는 것 같아.
중고샵은 싸게 매입해서 매입한 가격에 비하면 넘 비싸게
판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게 장사겠지만.
헌책방도 그럴까? ㅋ

cyrus 2014-09-05 23:29   좋아요 0 | URL
누님, 답글을 길게 썼는데 이상하게 입력이 안 되네요.. ^^;; 헌책방 가격은 주인 맘대로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헌책방이 어떻게 매입하고, 책에 가격을 매기는지 잘 몰라요. 헌책방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헌책방 주인이랑 친해지면 거래 방식을 꿰뚫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고 싶지 않아요. 괜히 가격 때문에 주인이랑 얼굴 붉히기 싫고, 제가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4-09-04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인시장에서 광주고등학교 가는 도로변에 헌책방들이 있는데 이제 10개도 안 남았죠.1킬로미터 정도 걸어가면서 들르면 됩니다.

요즘엔 알라딘헌책방과 아름다운 가게의 헌책방도 가끔 가는 편입니다.1000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을 구입하는 편이죠.찾아만 보면 그런 책들이 꽤 있어요.

cyrus 2014-09-05 23:30   좋아요 0 | URL
대구의 헌책방 수와 거의 같군요. 그래도 헌책방이 모여 있는 그 곳에 가보고 싶어요.

카스피 2014-09-2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서점에 다녀오셨군요.서울에도 헌책방이 많이 없어지는데 이곳은 아직까지 건재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헌책방따라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 대구에도 가봤는데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진것 같더군요^^;;;

cyrus 2014-09-25 17:11   좋아요 0 | URL
네, 대구도 서울만큼 헌책방이 몇 군데 많으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요. 가끔 책 읽다가 서울에 있는 헌책방 순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학생이였을 때 한 번 시도해볼 걸 그랬어요.. ㅠㅠ
 
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Scene #1  '다음 인간'은 미래를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스 신화의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카산드라.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느 날 태양과 예언의 신 아폴론의 구애를 받는다.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아폴론으로부터 예지력을 전해 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예지력을 받은 뒤에도 오리발을 내밀자, 화가 난 아폴론은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저주를 내린다.


이후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그리스 군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를 가져왔을 때, 카산드라는 “목마를 성안에 들여 놓으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녀의 예언대로 트로이는 결국 멸망했다. 카산드라는 “주목받지 못하는 비관적 예언자”라는 뜻으로 종종 쓰인다.


융 심리학을 주로 연구하는 심리학자 이나미의 『다음 인간』은 카산드라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한 비관적 미래 예측”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종속당해 욕망이 사라지고, 관계, 윤리, 가치관이 무녀 져버리는 미래의 인간상을 한 편의 가상 시나리오로 써내려갔다. 그 가상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다음 인간’, 바로 우리다. 그런데 책 속에 그려진 미래 속 우리 모습은 너무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사람보다 기계와 더 가까이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져 무감동과 타성에 젖는다. 이에 사이코패스가 등장하고, 관계는 해체되고 감정이 부족한 세대가 출현한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의존하면서 자란 A 세대(Apathy, 무감동)는 감정이 부족하다.


미래의 가족은 결혼으로 성립되어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전통적인 유형이 아니라 계약 형태로 만들어진다. 집단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위해 행복을 찾으려는 성향이 강할수록 젊은이들은 결혼 대신 1인 가족으로 산다. 자녀를 갖고 싶으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돈만 있으면 가짜 자녀라도 구입해서 같이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이야기들은 상상력이 가득한 SF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욕망. 인간, 관계가 사라져버린 미래 세상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Scene #2  기술의 미래가 아닌 인간의 미래를 바라보다


인간은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꾸준히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발전된 인간의 능력, 특히 두뇌의 기능을 활용해 새로운 기술을 하나하나씩 개발하고, 축적 및 통합해 발전시키는 등 현재의 많은 기술적인 발전을 이뤄 놓고 있다. 이렇게 발전된 기술의 결과물들은 높은 수준의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이제는 변한 세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종속되는 인간이 겪는 가치의 위기와 새로운 차원의 소외가 발생한다. 


체코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쳘학자 빌렘 플루셔는 인간은 새로운 세계 속에 방향을 잡기 위해 ‘기구(器具)’를 이용하지만, 바로 이 ‘기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가치판단과 일상의 삶 전체가 우리를 프로그램화하는 기구들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구’로 가장 대표할 수 있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SNS이다. 한 손으로 쉽게 조작 가능한 SNS라는 기구는 우리를 관계지향성 인간이 아닌 폐쇄적 인간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심리학이라는 망원경으로 기술의 미래가 아닌 인간의 미래를 내다봤다. 사실 그녀의 가상 시나리오대로 사회를 결속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가치와 관계의 의미가 점점 균열되는 조짐이 보인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결혼, 취직, 육아 담당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독신 생활을 원한다. SNS과 같은 가상공간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또 다른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이전 현실 세상에서 전혀 나올 수 없는 신종 범죄가 등장한다. ‘일베’(일간베스트)처럼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향한 인신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상대방의 SNS에 몰래 해킹하여 개인 정보를 빼낸다. 심지어 가상공간과 현실 세계를 혼동하게 되어, 범죄행위를 해도 이를 단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의 일종으로 착각하는 리셋 증후군에 걸린 사람이 늘어난다. 이들은 자신의 범죄행위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가상공간이 신종 사이코패스를 양산하고 있다.

 

 

 

 Scene #3  미래 예측서인 듯 미래 예측서 아닌 미래 예측서 같은 책  
 

심리학자가 바라보는 미래 모습은 기술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예측이 아닌 그 변화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일단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다. 정신과 의사의 가상 시나리오가 과연 언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정확하게 예측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급속한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인간의 심리를 각인시켜준 것만 해도 우리는 심리학자의 예측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의 가상 시나리오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미흡한 내용으로 비춰질 수 있다. 특히 미래학 전문가 입장에서는. 저자는 서문에서 기술 환경 변화에 주목하는 미래 예측이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무조건 기술 변화에만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기술 변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삶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다룬 심리적 측면에서의 미래 예측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저자는 자신이 아는 분야인 심리학을 강조하면서 『다음 인간』을 기존의 미래 예측서와 차별화를 두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변화에 관한 전제조건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가상 시나리오는 미래학자도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면 쓸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하다. 이렇듯 심리학자가 현재의 미래 예측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미래를 논한 서술 방식은 미래학 전문가 입장에서는 상당히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책에서 소개한 일부 가상 시나리오 중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 가까운 내용도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상상력의 정도가 너무 치우친 나머지, 좀 더 심도 있게 분석하지 못해 미흡한 부분도 있었다. 특히 계약 가족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73쪽) 저자는 계약 가족이 더 많아지면 가족 내 폭력이 줄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서 이 내용에 대해서 완전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약 가족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오히려 한 핏줄에서 태어난 가족이 아니기에 가족 내 폭력의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이를 악용한 특수 범죄가 일어난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돈독하게 정(情)을 나누는 관계의 의미가 사라지는 가상 시나리오의 전반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옥에 티다.   


이 책에서 모든 가상 시나리오가 전체적으로 비관적인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래 변화를 의해 형성될 수 있는 낙관적인 전망도 펼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여론에 관한 예측이다. 저자는 메이저 신문사들은 합병되고 개인 팟캐스트 방송이 늘어나면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109쪽) 다양한 의견의 목소리가 나오는 언론 생태계가 구축될 거라는 전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현실에 동떨어진 이상적인 내용에 가깝다. 수천 개의 개인 팟캐스트 방송 덕분에 우리는 거기서 소개되는 정보를 골라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정보가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언론 생태계가 구축되더라도 과연 신뢰성 높은 정보를 소개하는 콘텐츠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가 예측하는 이상적인 언론 생태계가 되기 위해서는 콘텐츠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언론은 대중을 호도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올바르게 전달하려는 역할을, 대중은 다양한 목소리 중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균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Scene #4  미래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 지키기


애초부터 저자가 기술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깊이 있는 분석으로 이루어진 미래 예측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의 범위가 국제정세와 관련된 내용으로 확장되는 바람에 저자의 전공이자 이 책의 강점으로 언급될 수 있는 심리학의 색깔이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서문에 융의 텔레올로지 이론과 적극적 상상 기법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할 뿐, 자세한 설명이 부족했다. 저자는 ‘심리학 망원경’으로 인간의 미래를 너무 들여다보다가 그만 자신이 애용하는 망원경에 대한 설명을 놓치고 말았다. 융 심리학에 생소한 독자 입장에서는 아쉽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심리학적 시각으로 부연 설명이 첨가되었으면 설득력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심리학과 미래학의 만남은 신선한 조합이었다.『다음 인간』은 과거와 현실에 갇힌 채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와 시선을 미래로 향하도록 분석하는 기회를 강조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때 우리 주변에 작동되는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현재의 자신을 지켜볼 것을 촉구한다. 비록 미래학자처럼 내일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것인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더 급속하게 변화될 미래의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마음이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한다면 미래를 보는 통찰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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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해도 한창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서 혈기왕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내딛는 발걸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나에게 서울은 지금도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가 한강철교를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재미있고 기억에 남을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나 혼자 들떠 있곤 했다. 지금까지 삶의 절반(파주에서 지낸 군 생활 제외)을 거의 대구에서 지냈으니 서울 촌놈인 건 확실하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4년 동안 서울 왕래를 최소 열 번 이상 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서울 촌놈 인상을 벗어내기가 힘들다. 누군가가 서울 촌놈 같다고 말해도 좋다. 서울 촌놈이 맞으니까. 오히려 영원히 멈추지 못하는 호기심은 진부하게 느껴지는 서울을 더욱 새롭게 보이도록 만든다.

 

 

서울 왕래하는 동안 가장 기억남은 일이라면 독서모임을 절대로 빠질 수 없다. 2010년 말에 펭귄클래식코리아 출판사를 알게 되어 출판사 공식 온라인 카페회원들 중심으로 펭귄클래식 시리즈 중 한 권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한 달에 둘째, 넷째 주 토요일마다 모임이 이루어졌는데 출판사에서 지원해준 책을 읽은 모임 회원은 그 날 모여서책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독서모임이 참석하는 회원은 서평을 의무적으로 써야 했다. 사정상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서평은 꼭 써야 했다. 5개월 혹은 6개월 동안 독서모임이 진행되었다. 그 기간에 진행된 독서모임은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1기’였다. 이 기간 동안 진행된 독서모임의 횟수는 10~12회인데 사실 학생 신분인 나로서는 모든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모임 초반기에는 자주 참석하다가 복학하면서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결석이 잦았다. 그리고 서울을 왕래할 경제적 비용이 부담되어 하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서평 쓰기는 미루지 않았다. 1기 독서모임 활동하는 동안 출판사에서 공짜로 받은 책을 무조건 읽었고, 서평은 꼭 작성했다. 절대로 단 한 권도 서평을 안 쓴 것이 없다.

 

 

2011년에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1기 활동이 마무리된 이후에 만남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달의 궁전’이라는 이름의 독서 커뮤니티였다. ‘달의 궁전’은 폴 오스터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재미있게도 나와 친분이 있는 독서모임 회원 중에는 폴 오스터 애독자가 꽤 있다. ‘달의 궁전’ 독서 커뮤니티를 이끄는 주인장 누님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폴 오스터 애독자다. 사실 원래 ‘달의 궁전’은 그냥 평범한 독서모임 커뮤니티라기보다는 폴 오스터 팬클럽 같은 마니아 성향의 독서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즉,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폴 오스터 사랑은 펭귄클래식 독서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모임이 진행되면 항상 지정도서에 대한 것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가끔 열띤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주제가 다른 작가나 그의 작품으로 바뀔 때가 있었다. 그 분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폴 오스터의 문학 세계를 열광적으로 설명할 때 신선하면서도 낯설었다. 왜냐하면 폴 오스터의 소설을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서모임이 끝나고 뒷풀이에서도 폴 오스터 예찬은 계속되었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어본 그 분들에게는 폴 오스터에 관한 대화 주제가 흥미로운 문학적 안주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학적 안주거리에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아니,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새로운 안주 메뉴가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나도 직접 호기심의 손을 내밀어 집어보지만, 그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일단 작품을 읽어야지 오스터라는 이 새로운 문학 메뉴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워낙 한 권이 아닌 두 세 권 이상 다독하는 무척 산만한 독서 습관 탓에 오스터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꼭 읽어볼 것이라고 다짐을 했건만, 아직 제대로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

 

 

‘달의 궁전’이 네이버 온라인 카페에 개설되었을 때 폴 오스터 광팬인 주인장 누님의 초대로 가입하게 됐는데, 거기서도 내가 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현재 ‘달의 궁전’은 폴 오스터 작품 읽기뿐만 아니라 원서읽기, 서평단, 기존의 독서모임 활동 등이 진행되고 있어서 오스터에서 비롯된 단절감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시기처럼 그 곳에서 왕성하게 온라인 활동을 하는 편은 아니다. ‘달의 궁전’ 독서모임에 참석한 것은 올해 딱 한 번뿐이다.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때부터 만난 분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과연 재회의 시간은 언제 찾아올까? 지금 현 상황으로서 봐서는 그 시간이 너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겁도 없이, 어찌 보면 무모해보일 수 있는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원래 ‘달의 궁전’에서 진행되는 서평단 활동을 블로그를 통해 알리기 위한 글을 쓰려고 했는다. 그런데 어떻게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기억의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던 예전 독서활동에 관한 추억을 꺼내 봤다. 그런데 지금까지 흘러 지나가버린 4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많은 세월이 아닌데도 내 기업의 서랍은 과거의 추억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가 너무 낡아버리고 망가져버렸다. 새삼 시간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크로노스의 위력이 느껴진다.

 

 

각설하고, 본론을 들어가자면 이번에 ‘달의 궁전’에서 진행하게 될 서평도서가 최근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펴낸 폴 오스터 인터뷰 모음집이다. 폴 오스터를 사랑하는 주인장 누님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이벤트가 생길 수가 없다. 정말 존경스럽다.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라면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달의 궁전’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면 서펑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아직까지 서평 활동을 신청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인간사랑 출판사가 지원한 책의 권수는 총 5권. 아마도 신청자 5명이 딱 나오게 되면 이벤트가 종료될 것 같다. 만약에 신청자가 그 이상일 경우에는 ‘달의 궁전’ 온, 오프라인 활동이 많은 분이 우선적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 5권이면 좀 부족한 개수이지만, 이런 기회 흔치 않다.

 

 

참고로 나는 이번 서평단에 지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폴 오스터는 멀고도 낯선 이름이다. 폴 오스타에 관심이 많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가 서평단으로 활동하는 것이 맞다. 주인장 누님의 뜨거운 열정 덕분인지 이제 정말로 오스터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폴 오스터라는 새로운 문학 메뉴에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일단 오스터 문학 코스 메뉴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오스터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쓴 작품 몇 권 읽고 난 뒤에 저랑 대화합시다. 그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꾸벅)

 

 

 

 

 

 

 

 

 

 

 

 

지금 내가 맛 볼 수 있는 오스터 코스 메뉴로는 <스퀴즈 플레이><우연의 음악><뉴욕 3부작><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신탁의 밤>, 총 5권이다. 진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지금까치 출간된 오스터의 일부 작품은 품절 또는 절판되고 말았다. <우연의 음악><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신탁의 밤>은 절판되었고, 특히 주인장 누님이 강력 추천하는, 오스터의 대표작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달의 궁전>마저도 이미 절판으로 영면했다.

 

 

열린책들 출판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독보적인 작가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그가 쓴 모든 책이 열린책들 출판사 한 곳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일기, 영화 시나리오까지 오스터가 쓴 작품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국내에 폴 오스터 마니아도 꽤 두텁게 형성되었고, 최근에도 그의 신간을 열린책들에서 단독으로 번역 출간하고 있기에 나머지 일부 작품이 품절,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그런데 오스터 마니아가 아닌 내가 왜 유감스럽게 생각 하냐고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랍스터, 아니 오스터라는 문학 코스 메뉴를 맛보려고 하는데 일부 메뉴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제발 <달의 궁전>만큼은 재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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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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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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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3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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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3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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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4 0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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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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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부처와 내기를 한다. 부처는 난공을 피우다 걸린 손오공에게 “  손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구름을 타고 수만리를 날아간 손오공은 구름 위 다섯 기둥에 ‘손오공 다녀감’이라고 쓴 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부처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여기서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 포털과 SNS에 올라오는 새로운 소식을 검색한다.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도 중요한 업무회의 시간에도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습관이다. ‘손안에 세상을 펼쳤다’며 흡족해하지만 실은 뉴스에 의해 가공, 편집된 손안의 세상에 갇힌 것이다. 뉴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가까이하자니 그 물량 공세 앞에 자칫 헤매기 쉽고, 떨어져 있자니 시대에 뒤처지지 않나 불안하다.

 

잠시라도 찾지 않으면 미친 듯이 초조해지는 뉴스에 대한 탐닉.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뉴스에 탐닉하는 이유를 불안과 공포를 꼽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와 불안, 동시에 엄청난 재난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괜찮다’는 상대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 뉴스에 몰입한다.

 

이 공포와 불안 아래에서는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곳이 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은 규율사회의 특징인 감시와 통제의 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간수는 중앙의 높은 곳에서 언제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한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되는 감시와 통제는 감옥뿐 아니라 병원, 군대 등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규율사회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가 바로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근대사회의 판옵티콘에서 보여준 시선이 정보로 대체된다. 정보를 독점한 국가권력이나 기업이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좀 더 비가시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신문은 신앙이 누리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 대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Scene #2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

 

우리는 단순히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의해 감시받는다. 뉴스티콘에서 뉴스는 피감시자가 된 대중을 볼 수 있지만, 대중은 뉴스 감시자를 볼 수 없다. 뉴스는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낸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에 겁먹고 동요하는 대중을 더욱 자극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뉴스 탐닉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뉴스는 일상을 통제한다. 아침뉴스로 일어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종합뉴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뉴스가 시작되는 정각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에 리모컨 컨트롤을 쥔다. 뉴스는 계시를 주고, 선악을 구분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라고 타이른다. 이 모든 의식을 거부한다면 ‘뉴스의 이단’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뉴스를 보지 않는 이단자는 시사 상식에 부족한 자로 낙인찍힌다. 뉴스를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른 기준은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판단한다. 즉, 뉴스를 보는 생활은 교육과정의 연장성이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 중앙일보의 기획 기사 '정치 수능' (2014년 7월 23일)

 

“우리는 태어나서 고작 18년 남짓 교실에 갇혀 보호받을 뿐, 나머지 l8년은 사실상 어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18쪽)

 

 

이렇듯, 오늘날의 뉴스는 투명한 감시자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감정을 통제한다. 뉴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려주며 그러면서 정치적ㆍ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대중은 뉴스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판단하며, 그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좌절한다. 바로 이것이 뉴스가 지닌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 그 자체에 무지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라는 보통의 말처럼 우리를 ‘감정 교육’시키려는 뉴스의 이면을 모른다. 언론은 특정한 뉴스들을 폭탄처럼 쏟아냄으로써 오히려 무관심을 선도한다. 정치뉴스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정치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 허탈해진다. 정치뉴스는 여야 정치인들이 왜 싸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야의 공방만 비춘다. 어쩌다 저런 비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잡혀가는 정치인의 모습만 비춘다. 결국 우리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만 생기게 한다.

 

민주 정치의 진정한 적은 흔히 보도 통제와 검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냉소다. 독재자라면 통제 대신 닥치는 대로 언론이 뉴스를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뉴스 기사와 이미지는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쉬」  1963년

 

“재난 뉴스는 불행한 사건을 다루는 뉴스 중에서도 주목도가 높고 대중적인 또 하나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재난 뉴스’ 중에서, 230쪽)

 

 

정치 뉴스에 시큰둥할수록 셀러브러티에 관한 다양한 소식에 집착한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연애 소식 등은 대중적 뉴스감이 되어 각종 포털 사이트 뉴스란에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 재난 뉴스의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지상파 종편 뉴스채널 등은 재난 쇼를 하듯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경쟁을 벌였다.

 

 


 Scene #3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자극적인 범죄 기사에 저절로 눈이 가고, 유명연예인의 열애 소식이나 폭행사건에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대중은 답답한 삶의 도피처로 뉴스티콘을 삼고 있다. 뉴스티콘에 갇힌 대중은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는 뉴스를 어떻게 올바르게 보는지 잘 모른다. 뉴스티콘에서 탈출하여 제대로 된 뉴스를 봐야 한다. 뉴스와 대중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세계와 나, 타자와 나의 만남을 이끄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생생한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동안 뉴스에 탐닉하는 바람에 정말 인간적인 뉴스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뉴스를 많이 접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뉴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정보의 조각이 모아 만들어진 뉴스에서 감춰져있는 세상의 의미를 끄집어 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뉴스를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가끔 스마트폰에 진동으로 울리면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멀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뉴스로부터 철저하게 도망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보통은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탱크를 몰고 습격하라고 말한다. 사회뿐만 아니라 대중의 감각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들어낸 불량하고 나쁜 뉴스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말 나쁜 뉴스가 너무나도 많다. 이런 나쁜 뉴스로부터 통제당하면서 생긴 세상에 관한 무관심, 분노로 쌓인 정신적 우울증을 치유하고기 위해서 우리의 신경중추를 자극해온 뉴스티콘을 향해 탱크를 몰아 무너뜨려야 한다. 뉴스티콘을 지배하는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뉴스티콘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견지해야 할 진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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