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Medici) 가문을 거론하지 않고는 르네상스를 설명할 수 없다. 메디치 가문이 부를 바탕으로 한 권력으로 당시 피렌체(Firenze)의 입법 · 사법 · 행정을 장악했고, 교황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권력의 이면에는 엄청난 업적도 있었다. 그들의 사치와 예술 애호 열기가 인류문화의 황금기 르네상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지원은 대단했다. 그들의 지원으로 피렌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가 됐다.

 

 

 

 

 

 

 

 

 

 

 

 

 

 

 

 

 

 

 

* G. F. 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17)

* [절판] 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스토리》 (생각의나무, 2001)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본격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시대에 메디치 가문은 이미 자본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거대한 집단이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 업무와 무역을 통해 유럽 전역에서 가장 수익이 많은 가족 사업체로 발전한다. 《메디치 가문 이야기》(현대지성)와 절판된 《메디치 스토리》(생각의나무)는 권력의 정점을 이룬 메디치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메디치 가문은 숱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지만, 그 순간들을 돈과 계략으로 모면하면서 살아남았다. 황금빛이 날 것만 같은 피렌체라는 무대의 이면에 피비린내 나는 배신과 칼부림이 있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농촌 지역에서 이주해 온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메디치 가문은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막대한 액수의 결혼 지참금을 들고 온 신부와 결혼하면서 제법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흥 가문으로 성장했다. 작은 땅을 가진 일개 가문이 피렌체를 주름잡는 거대 세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결혼 지참금 제도에 있다.

 

 

 

 

 

 

 

 

 

 

 

 

 

 

 

 

 

 

 

* [절판]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책과함께, 2012)

* [절판] 홍성표 《서양 중세사회와 여성》 (느티나무, 1999)

 

 

 

왕족, 귀족 가문의 결혼은 지참금을 매개로 한 ‘재무 거래’였다. 지참금은 보통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의 아버지에게 직접 전달한다. 이때 시아버지는 지참금을 자식을 위해 사용하고 헛되이 탕진하지 않을 것은 물론 며느리가 사망하면 반환하겠다는 것을 문서로 약속했다. 즉 서양에서 결혼은 개인들의 애정 관계가 아닌 두 가문의 이해관계로 바라보았으며 가문 간의 계약 관계인 것이다.

 

고대시대부터 여성은 가축, 노예와 같이 남편의 재산목록의 하나에 불과했다.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아내는 자식을 낳는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했다. 《아내의 역사》(책과함께)는 시대별로 달라지는 아내의 정의와 사회적 지위를 들여다보고 있다. 과거에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 중세사회와 여성》(느티나무)은 중세 영국의 결혼지참금 제도가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밝힌다. 중세 영국의 결혼 지참금은 남편을 잃은 신부가 생계수단을 확보하는 데 유용한 재산이었고, 친아들에게도 상속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이 법률에 따라 재산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재산권의 저울은 남편 또는 친자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 미하르 데사이 《금융의 모험》 (부키, 2018)

 

 

그러나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하였고, 결혼 지참금 제도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크고 작은 전쟁과 흑사병 이후로 사망한 남성 인구가 늘어나면서 ‘좋은 신랑감’ 찾기가 어려워졌다. 귀한 아들을 둔 부모는 신부가 될 집안에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지참금을 요구했다. 딸을 둔 부모는 결혼하지 못한 딸의 앞날을 걱정했고,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했다. 결혼하지 못한 여성은 경제적 자립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한편, 신랑 측 집안은 자신들이 요구한 지참금을 받지 못할까 봐 염려했다.

 

이러한 결혼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해 1425년에 이탈리아 피렌체 정부는 ‘결혼 지참금 펀드’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딸의 출생과 거의 동시에 혼인 시기를 예상하여 일정 기간 적금 형태로 목돈을 모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 목돈은 정부가 관리했으며 딸의 혼인이 성사되면 목돈은 지참금이 되어 신랑 집안에게 지급했다. 그래서 딸을 둔 여러 가문들은 딸들의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한 금액의 돈을 정기적으로 저축했다고 한다. 《금융의 모험》(부키)에서는 결혼 지참금 펀드를 ‘금융 공학의 쾌거’라고 평가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 Strauss)는 근친상간 금기와 ‘여성의 교환’이 인류 사회의 기본 구조임을 밝혔다. 딸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족외혼을 통해 두 집안은 사돈 관계가 형성되고, 집단 간 동맹을 맺는 것이다. 가문끼리 연결된 사회는 점점 더 커지고 더 많은 연대를 이뤘으며 보다 강력해질 수 있다. 이렇듯 결혼 지참금 제도가 정착되면서 동질적 특징을 공유한 가문들끼리 결혼하면서 남성은 손쉽게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고, 여성은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채 지참금과 함께 남편의 재산으로 취급받았다. 결혼 지참금 제도는 금융기관 발전에 기여한 점이 있지만, 이 제도 덕분에 남성 중심의 권력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결혼은 남편이 아내의 합법적인 주인임을 인정받는 의식이었다.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2014)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여전히 결혼 지참금 제도가 남아 있다. 특히 인도의 결혼 지참금 제도는 여성 및 계급차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악습이다. 결혼 지참금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신부를 폭행하거나 불 태워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비인간적인 일이 야만적인 악습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일은 비정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한 과정이다. 그런데도 (남성)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들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여성의 경제적 종속과 희생에 무관심했다. 심지어 자본주의적 축적의 야만성을 지적한 마르크스(Marx)마저 여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외면했다. 자본주의는 자본 축적을 위해 여성을 이용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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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0-23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이름에 r 하나 빠졌네요 ㅎㅎ 저건 베버의 퍼스트 네임이죠?

결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을 마르크스랑 베버가 알게 되면 쌍방이 언짢아할 실수를 하셨네요^-^

cyrus 2018-10-23 19:25   좋아요 0 | URL
제가 봐도 여성 해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마르크스가 급진적(radical)인 인물이 아닌 것 같아서 일부러 ‘r’자를 뺏습니다....... 는 개소리고, 제가 실수로 이름을 잘못 적었어요... (데헷~ (・ω<))

2018-10-23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3 19:33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이 독신도 살기 힘든 시대에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요. 제가 사교성이 좋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이 없을 것 같아서 연애하고 싶다거나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1도 나지 않아요. 독신과 부부 생활에 각각 뚜렷한 장단점이 있으니 결혼이 좋다느니 독신이 좋다느니 하면서 비교하는 분위기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

stella.K 2018-10-23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올 여름에 영드 메디치를 보다가 말았다.
12부작인가 그렇던데 나름 영상은 좋은데
왜 그리 재미가 없던지 결국 보다...ㅠ
어느 나라든지 역사를 이루려면 꼭 피 없이는 안 되는 것 같아.
피 흘림이 없이 역사도 없는 거지.ㅠ

cyrus 2018-10-23 19:38   좋아요 0 | URL
저는 역사책은 잘 읽는데, 역사 드라마나 사극은 잘 안 봐요.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보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흥미가 느끼지 않으면 안 봐요. ^^;;
 
금융의 모험 -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하버드 경제 수업
미히르 데사이 지음, 김홍식 옮김 / 부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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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에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 신청을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 증시는 폭락했고 세계 증시 역시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리먼 브러더스의 성쇠는 파생금융시장 흥망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970년대부터 새로운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군림한 신자유주의는 파생금융시장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레버리지(leverage) 효과에 도취한 월 스트리트(Wall Street)는 온갖 새로운 파생금융상품을 시장에 선보였다. 최첨단 이론으로 중무장한 과학자들은 파생금융시장에 진출했고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금융상품을 만들었다. 금융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에 일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금융회사들은 자기자본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하여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나 사업을 벌여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성과로 월가의 최고경영자들과 직원들은 매년 연말 두둑한 상여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잔치는 2008년에 멈췄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것은 1929년 대공황 이후의 최악의 금융위기였다. 미국 정부는 자국 경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 매입에 나섰다. 위험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보너스 잔치를 즐겼던 금융회사들이 미국 정부에 손 벌리는 것에 대해 미국인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금융은 제대로 작동하면 성장촉진제지만, 반대의 경우 독이 돼 금융시장 전체와 세계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금융이 경제에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으로 작용해 위기를 부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금융위기가 끊이지 않는 데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실적을 찬양하기 바쁜 투자자들의 과신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금융에 대한 신뢰는 붕괴하고 부패가 늘어났다.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금융은 근심거리다. 대부분 사람들은 과도한 금융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금융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어떻게 하면 금융에 접근하는 관념들을 누구나 알기 쉽고 수긍할 수 있도록 보여 줄 수 있을까? 금융이 수행하는 미덕들을 깨달아 금융이 하는 일이 개선되도록 할 수 있을까? (22)

 

 

2015년 하버드경영대학원 졸업반 학생들을 위한 마지막 강의를 펼친 미히르 데사이(Mihir Desai)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 우리 삶에 쓸모 있는 금융의 가치를 전달하려고 했고, 그 결실이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원제는 금융의 지혜(The Wisdom of Finance)인데, 우리나라 번역본 제목은 금융의 모험으로 정해졌다. 이 책에는 금융과 삶의 문제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독자는 이 책에서 사람 냄새 나는 금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보험이야말로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전에 우리는 모두 보험 회사다라는 말도 남기기도 했다. 보험료 인상은 서민들의 주름살을 깊어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이 서민 지갑을 축내는 금융상품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보험은 기본적으로 우연성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보험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역할을 한다. 보험은 우리에게 불확실한 세상을 대처할 수 있는 경험과 지혜를 가르쳐준다.

 

앤서니 트롤럽(Anthony Trollope)의 소설 피니어스 핀에 나오는 바이올렛 에핑검(Violet Effingham)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효율적으로 리스크(lisk)를 관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까지 배우자가 될 만한 여러 선택지(option)를 확보한다. 에핑검의 선택지 확보 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옵션전략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문제가 생긴다. 선택지를 모으는 일에 치중하면 선택지를 행사할 기회를 놓친다.

 

데사이 교수는 금융업 종사자들의 능력 만능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우화를 재조명하면서 금융인들이 알아야 할 교훈을 강조한다. 운이 따른 실적을 개인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과신해선 안 되고,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금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융의 불안은 경기 침체를 일으키거나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켜 실업을 일으킨다. 분명 오늘날의 금융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금융이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해서 금융시장을 고소득자들을 위한 세계로 봐야 할까? 금융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사적인 활동일까? 데사이 교수는 금융을 사악한 것으로 취급하고 배격하는 태도는 생산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금융을 적대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지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융은 일부 고소득층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일상 속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가 될 것인가. 금융업만을 위한 이익이 아닌 금융이 필요하다. 정부와 우리 사회의 관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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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3 19:43   좋아요 1 | URL
요즘의 금융회사와 보험회사는 이 책에서 말하는 ‘금융의 인간성’과 아주 거리가 멀죠. TV를 켤 때마다 나오는 보험회사, 대출업체 광고가 싫어요.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리뷰에 미처 쓰지 못한 내용을 여기 페이퍼에 따로 쓰게 됐다. 책에 고쳐야 할 (사소한) 부분이 있어서 쓴 글이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데카르트는 『명상록』(Meditation, 1641) 전반에서 “이 신체는 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실제로 그의 철학에서 신체는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의지가 그 지배의 대상으로 고려하는, 시계와 다를 바 없는 일련의 물질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다.

 

(황성원 옮김, 207쪽)

 

 

《캘리번과 마녀》의 번역자는 두 명이다. 본문의 1~2장은 김민철 씨, 3~5장은 황성원 씨가 번역했다. 내가 인용한 문장은 3장에 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책세상, 2018)

* 르네 데카르트 《성찰》(문예출판사, 1997)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카르트(Descartes)가 쓴 저서 ‘Meditation’은 ‘명상록’보다는 ‘성찰’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 Meditation은 명상과 성찰,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의 원제는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다. 책은 여러 번 판이 바뀌면서 부제를 포함한 제목이 조금씩 변경되었지만,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라는 큰 제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철학자이다.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던 신의 존재 자체도 의심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부정한다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딱 하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게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 이렇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을 때까지 계속 의심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참된 자기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추구한 ‘성찰’이요, 철학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현대지성, 201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도서출판 숲, 2005)

 

 

 

 

 

 

 

 

 

 

 

 

 

 

 

 

 

* 에픽테토스 원작, 샤론 르벨 엮음 《새벽 3시》(싱긋, 2015)

* 에픽테토스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서광사, 2013)

 

 

 

‘명상록’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제는 ‘Tōn eis heauton diblia’, 우리말로 풀이하면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 된다. 이 황제는 내면적인 삶의 가치를 강조하고 마음을 닦음으로써 내면의 행복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는 스토아학파(Stoicism)의 영향을 받았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성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에픽테토스(Epictetos)이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로마 노예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헛된 생각을 버리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현실에 뜻을 맞추라는 것이다. 완벽한 신체, 재산, 신분, 명성 등은 내 능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 감정, 의지 등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내적인 삶에 있어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보살핌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다.

 

 

 

 

 

 

《캘리번과 마녀》 270쪽 왼쪽 상단에 작은 도판이 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인쇄된 『죽음의 춤』 시리즈 중 하나이다. ‘죽음의 춤’은 중세에 생겨난 죽음을 주제로 한 도상이다. 이 도상에서 죽음은 의인화된 해골의 모습으로 등장해 춤을 추면서 망자들을 데려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책 270쪽에 있는 도판 설명에 ‘영거(Hans Holbein the Younger)의 <죽음의 춤>’이라고 적혀 있다. <죽음의 춤>을 ‘영거’라는 화가가 그렸다는 뜻이 되는데, '영거(younger)'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한스 홀바인 디 영거’를 ‘영거’로 잘못 표기되는 바람에 엉뚱한 문장이 나왔다. 문장을 ‘한스 홀바인의 <죽음의 춤>’으로 고쳐야 한다.

 

‘The Younger’는 성(姓)과 이름이 같은 부자(父子)나 형제 중에 아랫사람을 가리킬 때, 그 사람의 이름 뒤에 쓴다. 영거의 반대말, 즉 아버지와 큰형의 이름 뒤에 붙는 단어는 ‘The Old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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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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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자료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을 발견했다. 내가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교양’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인가? 교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음, 이렇게 쓰고 보니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지 않는군) 비에리의 정의를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교양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지식일 수 있으며 사물 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 교양을 쌓기 위해선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 교양을 쌓는 행위의 근저에는 이런 물음, 즉 호기심이 놓여 있다. 따라서 호기심은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지적 열망에 불을 지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교양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독서’이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가 책을 좋아하며 많이 읽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책을 읽으면 참되고 바른 사람이 되는 길,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어려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 등 책을 통해 세상 살아가는 길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서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비에리는 책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데 급급한 독서만으로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 이거, 내 얘기잖아!) 교양인은 책을 읽으면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책을 읽은 후에 변화하는 존재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교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독서 이후에 생긴 인식과 행동 변화’가 아닐까 싶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큰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감동 없는 독서를 한 셈이다. 이러한 독서는 고독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교양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식은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가짜 지식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교양인은 나를 스스로 지킬 줄 알며 상대방을 지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교양의 힘은 남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교양의 힘이 남을 지배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되지 않으려면 다양성을 인지해야 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졌더라도 곧 그 마음을 거둘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적 과시를 통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상대를 무시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면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욕구를 채우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진솔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 또는 자아상에 대해서 잘 안다. 즉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인다면 ‘완벽하고 숙명적인 것’에 대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알고 있는 최신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이 되기 마련이다. 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결점을 숨기면서까지 살아갈 필요가 없다. 자기방어에 치중한 지적 욕구는 부질없는 욕구이다. 치열한 지적 탐구나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비에리의 말에 따르면 교양인은 새롭게 자신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쉼 없는 작업을 하는 존재이다. 그런 작업이 가능하게 하려면 호기심을 계속 살려야 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문학과 교양의 관계에 대한 비에리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에리는 독자에게 왜 문학이 교양 쌓는 일에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는 시,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이 자신과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학적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복합적인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마치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인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문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사회는 오로지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를 위해서만 경쟁하고 공부할 뿐, 이 두 가지가 결정된 다음에는 거의 자기 성숙의 모색을 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해 오면서 어렴풋이나마 교양의 중요성을 인식해 왔지만, 눈에 잡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얇은 분량의 책(100쪽이 채 되지 않은 아주 가벼운 분량이다)은 나의 허점을 아프게 찌른다. 앞서 비에리가 강조했듯이 교양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교양을 쌓겠다는 무리한 욕심을 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현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교양 쌓기의 시작이다.

 

 

 

 

 

※ Trivia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14쪽)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비에리가 이렇게 말한 의도가 궁금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이 명제가 오랫동안 식민지를 침략, 약탈하면서 구축한 서구 문명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게 만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왔다는 사실을 비에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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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19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문장에서 - 반대로 그런 사실을 알고 비에리가 말한 것처럼 저는 느꼈어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저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힘은 지배력을 갖게 되니까요.
앎을 찬양하되 지배는 하지 말라는... (아닌가요?)ㅋ

cyrus 2018-10-20 11:06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을 듣고 나서 제가 인용한 문장을 다시 읽어봤어요. 인용문 앞과 뒤에 있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지식의 힘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지식은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페크님 말씀대로 비에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의 악용된 사례를 지적하면서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언급하고 있고요. 제가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네요.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syo 2018-10-2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부에 들러서 이 책을 빌려왔는데, 지금 제가 손에 든 이 책이 사이러스님의 손길이 닿은 그 책인가요?? ㅎㅎㅎㅎㅎ

근데 이러니까 갑지기 분위기 스토커...

cyrus 2018-10-23 19:59   좋아요 0 | URL
책의 분량이 적어서 오늘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ㅎㅎㅎ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제쳐놓고 나서면 집안일이 잘 안 된다는 옛날 속담이다. 나아가 여성의 행실과 지위를 한계 지우는 말이기도 했다. 말 많은 여자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동서양이 공통이다. 서양에도 여성의 수다스러운 모습을 암탉의 우는 소리에 비유한 속담이 있다.

 

 

 

 

 

 

 

 

 

 

 

 

 

 

 

 

 

 

 

* 미네케 스히퍼 《세계 여성 속담 사전》 (북스코프, 2010)

* 새뮤얼 애덤스 드레이크 《신화와 미신 그 끝없는 이야기》 (책읽는귀족, 2017)

 

 

 ‘소녀들이 재잘대고 암탉이 시끄럽게 울어대면, 언제나 끝이 좋지 못하다.’

 ‘여자가 재잘대고 암탉이 우는 것은, 신에게도 남자에게도 좋지 못하다.’

 

(새뮤얼 애덤스 드레이크, 윤경미 옮김,

《신화와 미신 그 끝없는 이야기》, 74쪽)

 

 

 

《세계 여성 속담 사전》(북스코프, 2010)은 역사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여성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준다. 여성의 부정적인 면모는 속담의 단골 소재다. 속담의 기원이나 표현법은 달라도 여성에게 악마적 힘을 부여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런 속담을 만들고 발화하는 쪽은 주로 남성이다. 세계 여성 속담을 수집한 네덜란드의 문화연구가 미네케 스히퍼(Mineke Schipper)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그린 속담 속에 숨겨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열등감’에 주목한다.

 

중국에서는 여성의 수다를 조롱하는 의미를 가진 ‘여자는 7달만 지나도 8개 언어로 잡담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여성의 한계를 가정의 울타리에 묶어두려는 속담도 있다. 독일 속담인 ‘아내가 바지를 입는 곳에서는 악마가 집주인’은 바지를 입은 여성에 대한 구시대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19세기까지 여성의 복식은 치마 형태의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여성은 바지를 입기 시작했는데 이는 본래 남성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 섀너 코리 글, 체슬리 맥라렌 그림 《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 (아아세움, 2003)

* 제인 세인트 클레어 글, 마리아 크리스티나 로 카시오 그림 《여자는 왜 바지를 입으면 안 되나요?》 (스마일북스, 2014)

*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 (책세상, 2017)

 

 

 

과거 미국의 여성들은 허리를 꽉 조이게 하는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19세기 중반 여성 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는 이런 불편한 복장 풍속을 거부하고 드레스 안에 바지를 입었다. 당시 사람들은 남성의 전유물인 바지를 여자가 입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지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블루머’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 블루머의 확산을 도운 것이 바로 자전거였다. 자전거의 빠른 확산은 여성 의복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블루머는 자전거를 타는 여성에게는 편리하고 실용적인 복장이었지만, 곧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성이 바지를 입게 되면 남성과 차이가 없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테네시주에 속한 어느 지역에 여성의 블루머 착용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주1]. 블루머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은 ‘레즈비언’이라고 비난받았다[주2]. 바지가 여성의 일상복이 되기까지는 백여 년의 긴 투쟁이 필요했다. 여성들의 바지에는 성 억압에 맞선 여성들의 저항 의식이 녹아 들어있다. 참고로 올해는 아멜리아 블루머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 플로랑 켈리에 《제7대 죄악, 탐식》 (예경, 2011)

* 질리언 라일리 《미식의 역사》 (푸른지식, 2017)

 

 

 

가톨릭은 모든 죄의 근원을 ‘일곱 개의 죄악’으로 분류한다. 이 일곱 개의 죄악은 탐욕, 음란, 분노, 탐식, 오만, 시기, 태만이다. 탐식은 특히 성욕을 자극한다는 이유에서 죄의 근원으로 보았다. 필요 이상의 음식을 섭취할 경우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져 육체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한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저지른 죄악은 ‘탐식’이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상류층 가톨릭교도들은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풍성한 음식을 즐겼다. 《제7대 죄악, 탐식》 (예경, 2011)은 중세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탐식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그에 파생된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탐식 혹은 미식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여성의 미식 행위는 ‘음란한 탐식’으로 여겨졌다. 각종 그림에 묘사된 음식과 식문화를 들여다본 《미식의 역사》(푸른지식, 2017)에서는 ‘먹고 즐기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그려진 중세의 도시 괴담이 나온다. 13세기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세 여인’이라는 도시 괴담이 퍼지게 되었다. 이 괴담에 묘사한 세 명의 여인은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소리 높여 수다를 떠는 모습이다. 만찬을 즐긴 후에 세 여인은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들이 죽은 줄 알고 공동묘지에 묻으려고 했다. 다행히 세 여인은 잠에서 깨어났고 생매장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일어나자마자 음식과 술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이 도시 괴담은 ‘과식하면서 수다 떠는 여성’에 대판 편견을 확산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식가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은 여성을 미식과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다. 그에게 여성은 그저 ‘달콤한 맛만 즐기는 존재’였다.

 

문화의 세계 속에서 남성은 자유로운 주체였지만,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남성의 언어는 '독백'이다. 독백은 청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남성의 독백은 타자, 즉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유도한다. 진실과 무관한 남성의 독백이 비판 없이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상식이 아니라 편견이다.

 

 

 

 

[주1] [주2]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 책세상,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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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0-1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머라는 옷이 사람의 이름에서 온 거네요. 저는 색상이나 원단의 재질 같은 것을 떠올린 적도 있었어요.
cyrus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cyrus 2018-10-19 17:16   좋아요 1 | URL
저는 블루머가 사람 이름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블루머의 기원을 알게 됐어요. ^^;;

페크pek0501 2018-10-1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서 읽으면서 여성을 무시하거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나타낸 글을 발견하면 의아해지더군요. 그렇게 똑똑한- 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어서요.

cyrus 2018-10-20 11:15   좋아요 1 | URL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남자들 중에 여성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여성 혐오를 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하긴 지적으로 자뻑이 심한 남자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망언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잘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