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몸은 평등하다 -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김효진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이 갈수록 슬슬 추워진다. 올해 겨울도 춥다고 한다. 추위에 약한 사람이 다 달라 실제 체감 온도는 온도계 온도만으로 짐작할 수 없다. 또 체감 온도는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을 체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세계에 위치한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머리만 생각해서는 불가능하며, 몸만 움직여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들의 동정을 마주해야 한다.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그려진다. 의존성은 장애인의 독립적 인격을 부정하는 근거로도 이어진다.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은 근본적으로 당연히 보장돼야 할 장애인의 권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에 따르면 다수성과 소수성은 양적 문제가 아니다. ‘다수’는 수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 척도를 가진 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을 받는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소수민족은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힘 있는 다수에 의해 ‘2등 시민’으로 강등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배제하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장애 여성’의 목소리는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애 여성’, ‘비장애인 여성’은 생소한 용어였다. 이 세상(이성애 중심 사회)에 여성과 남성이 있고, 마치 장애인이라는 무성(無性)적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장애인 안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오고 있었기에 장애 여성들의 경험과 차별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장애여성네트워크’는 장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장애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하는 인권 단체이다. 2009년에 ‘장애 여성 이야기가 있는 사진전-몸으로 말하기’를 개최하여 일상 속에서 포착한 장애 여성들의 모습이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0년과 2011년에는 페미니즘 저널 <일다>에 장애여성네트쿼크에서 활동한 다섯 명의 장애 여성들이 쓴 스무 편의 글이 연재되었다. 이 글들을 모은 책이 바로 2012년에 나온 《모든 몸은 평등하다》이다.

 

나온 지 꽤 됐지만 이대로 잊히기엔 아쉬운 책이다. 저널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서 낸 무성의한 책이 아니다.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정상인’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을 위한 책’이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을 아우르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다섯 명의 글쓴이들은 장애와 마주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여성들의 삶을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고자 (장애 남성, 비장애인) 독자들을 설득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장애 여성들의 삶과 인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설득하는 글쓴이들의 어조는 부드럽고, 유쾌하다.

 

비장애인들은 누구나 친숙한 것 앞에서는 편하고 낯선 것 앞에서는 불편하다. 그래서 장애 여성의 몸을 뒤틀리고 결함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낯선 것들 앞의 그 불편함을, 우리는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제의 감정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제의 심각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무관심과 편견이다. 특히 장애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무관심과 편견이 대부분의 비장애인과 장애 남성들의 잠재의식에 도사리고 있어 막막함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여성이라면 축복받아야 할 초경이 장애 여성에게는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도 골칫덩이가 된다. 연애, 결혼, 출산도 비장애인 여성이 갖는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건강 상태는 물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도 충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몇몇 비장애인 독자들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데 무슨 다른 장애 여성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걱정할 것이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장애 여성이지만 이 책을 통해 더 가까이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발랄하게 웃으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녀들은 비장애인, 혹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글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그녀들에게 몸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에 맞춘 몸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다. 장애 여성의 몸은 비극과 불행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아도 존재하는 몸들의 자기 확인은 유쾌하면서도 당당하다.

 

실제로 비장애인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이미지들에 익숙해서 장애인은 자신의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렇게 상상적 타자로 그려지고 ‘타자화’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거나 관계망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구성되게 된다. 도와주는 비장애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라는 방식의 관계로 재현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행복을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살고 있다. 장애인에게 느끼는 비장애인의 불편함은 ‘정상’, ‘표준’으로 정형화된 신체적으로 건강하면서 아름다운 몸과 비장애인의 몸에 대한 괴리감에서 생긴다. 타자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몸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 타자의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느끼고 해석하면 타자의 삶을 절대로 체감할 수 없다. 자기 것일 뿐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장애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만나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19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2018-11-2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장애인과 함께 수업하는 방식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꾸 피하면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고, 장애인 복지 정책 도입이나 장애인 권리 문제에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괴물은 부자연스러운 체형을 가진 존재이다. 보통 굉장한 힘과 잔인성을 가진 공포의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뱀이 뒤엉켜 있는 머리를 가진 메두사(Medusa)는 괴물이다. 스핑크스(Sphinx)는 사자의 몸뚱이에 상반신은 여자였다. 이 괴물은 어려운 질문을 인간에게 던진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간을 죽여 버린다. 고대 인도에서 신체적 기형은 신성한 존재로 이해했다. 아스테카(Azteca) 신화에 나오는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은 날개 달린 뱀의 모습을 한 창조주이다. 그는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지금 우리는 괴물을 어떻게 볼까? 물어보나 마나 인정하지 않는다. 괴물은 추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물을 정의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서 ‘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괴물’과 ‘기형’을 주제로 한 책을 지금 소개하는 건 최근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은 ‘기형’이라는 말을 대신할 단어를 찾는 것이다. 기형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기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번에 소개할 책들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 [품절] 게르트 호르스트 슈마허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1)

* 필리프 코마르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 2001)

* 아먼드 마리 르로이 《돌연변이》 (해나무, 2006)

* [절판] 마크 S. 브룸버그 《자연의 농담》 (알마, 2012)

* 스테판 오드기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 2012)

*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 2018)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돌연변이》 (해나무),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온갖 기형 증상을 보여준다. 결합쌍생아(샴쌍둥이), 거인증, 단안증(외눈증) 등 다양한 기형 증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살핀 뒤 현재 ‘기형학(Teratology)으로 밝혀낸 그 원인의 의미를 설명한다. 기형학이 등장하면서부터 기형은 ‘혐오의 대상’에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환점이 있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기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하는 프릭 쇼(freak show)는 20세기에 들어서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프릭 쇼의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장애인이다. 프릭 쇼를 홍보하는 매체는 그들을 ‘이국적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방인’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프릭 쇼의 장애인들은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난 서구인이었다.

 

프릭 쇼는 ‘비정상적인 신체’를 전시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무엇이 ‘정상적인 신체’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프릭 쇼를 즐기는 관객들은 ‘비정상’과 ‘정상’의 이분법 속에 강력하게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누가 괴물이며, 정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관객들은 충격과 호기심을 느낌과 동시에 무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가 ‘정상’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기형과 괴물을 작품의 소재로 즐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은 예술에서의 ‘기형’을 ‘가시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신호로 본다. 괴물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상징하는 대상이었고, 예술가는 그것을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아름다움’을 한층 더 부각한다. 괴물의 모습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관객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움’이란 ‘균형 잡힌 완벽한 신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에서는 ‘평균’ 개념으로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던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평균에 가까운 인간’을 ‘정상’으로 분류하여 이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기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비정상’으로 지목될 때, 그와 대척점의 구도에선 사람은 정상적인 존재가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사회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과 같다. 혐오는 신체적 차이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로 전환하며 이를 통해 차별과 배제를 구성한다.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는 한때 기형으로 분류된 간성(intersex), 동성애, 성도착 등도 언급한다. 지금은 동성애자를 ‘기형’의 한 범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비정상’으로 지목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모두 가졌다는 이유로 양성인을 ‘완벽한 인간’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상황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양성인은 기형적인 질환으로 간주하였다. 《자연의 농담》 (알마)은 기형을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기형적인 모든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보여준다. 《돌연변이》의 저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를 300개씩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유전적 변이로 인해 생긴 기형은 생물학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발생 과정에서 해당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기형의 원인을 무조건 유전적 요인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기형을 일으키는 유전질환은 유전자 이상과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사례가 대부분이다.

 

기형인 생명체들은 라틴어로 ‘자연의 농담(Iusus natura)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관점과 대비된다. 실수는 ‘잘못함’ 또는 ‘잘못됨’이라는 전제가 들어가 있다.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보는 사고방식은 그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될 ‘잘못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자연의 농담》에서는 기형 이외에 ‘이형(異形)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정상’을 뜻하는 ‘전형(全形)’과 반대되는 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형도 ‘자연의 일부’이며 오랜 진화의 결과인 ‘다양성’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타자의 생김새가 나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형’의 틀에 맞춰 ‘비정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기형 대신에 ‘이형’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물론, 단어를 바꿔서 사용한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차별적인 뉘앙스가 퇴색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형’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이형과 전형을 비교하려는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차이가 차별로 변질하고 다름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혐오는 일상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무섭다. 잘도 숨어버리는 이 혐오야말로 우리 현실에 잠복하여 시시때때로 섬뜩한 손톱을 내미는 현재형의 괴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8-11-1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놓은 책중에서 유일하게 읽은 책은 기형의 역사 하나뿐이네요^^;;;

cyrus 2018-11-20 19:58   좋아요 0 | URL
기형학을 처음 소개한 책일 겁니다. 이런 책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
메릴린 옐롬.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지음, 정지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의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이다.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다. 두 번째는 필리아(philia). 친구 간의 정신적인 사랑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가페(agape)이다. 성스럽고 은총에 가득 찬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리아는 ‘우정’, ‘동료애’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동등한 인격체들 간의 배려와 인정을 기초로 한 사랑이다. 따라서 필리아는 사회적 관계들을 떠받치는 유대감이다. 필리아는 오직 인간의 인격 안에서만 생길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정을 인간의 고귀한 감정이라고 예찬하면서도 ‘여성의 우정’을 애초에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은 여성을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여성이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잉태 과정에서 완벽한 생명체를 만드는 것은 남성이며 여성은 단지 그 생명체를 담아주는 그릇 역할만 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스 여성의 지위는 초라했다. 그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고, 정치적 결정권을 갖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여성은 집안에만 지내야 했고, 사람을 만나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고대 로마의 문필가 키케로(Cicero)『우정에 대하여』라는 글에 우정을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우정의 가치, 우정이 지켜야 할 원칙 등 우정과 관련된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 · 로마 남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우정을 논하고, 우정의 미덕을 공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식했다. 그동안 ‘남성 중심의 우정’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고, 외면되어 온 다양한 형태의 ‘여성의 우정’을 시대별로 소개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남성이 만든 우정의 정의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이다. 나는 이 번역본 제목을 아주 잘 정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는 남성 중심의 우정만을 다룬 『우정에 대하여』와 배치되는 반어법적 표현이다. 이 책은 여성과 여성,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우정까지 온전히 그려낸다. 각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대중의 인식에 따라 우정의 성격은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여성의 우정도 점점 주목받게 되었다.

 

여성들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소중하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15세기 이전에 살았던 여성들이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경험을 하지 않았거나 그러한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던 건 아니다.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중세의 수녀원은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배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여성 공동체’로서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수녀들의 우정 이외에 다른 계층 여성들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5세기 무렵에 유럽 상류층 여성들은 공적인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른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는 일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귀족 여성들을 중심으로 살롱 문화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당시 ‘사교 공간’이자 ‘문화 공간’의 역할을 했던 살롱에서는 귀족들이 모여 독서와 토론, 공연 등 여가 생활을 즐겼고, 예술이나 정치, 사회, 종교 등 각 분야의 문제를 논하며 새로운 문화 경향이나 사상을 꽃피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여성은 ‘우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고, 사회적 · 문화적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여성 중심 사교 모임과 살롱 문화의 등장은 여성들의 배움 자체가 금기시됐던 풍토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그러나 지식인 여성들이 일으키는 ‘여풍’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남성들은 여성 사교 모임을 경멸하는 뜻으로 ‘블루스타킹’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똑똑한 여자들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비하하는 말로도 쓰였다. 그러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남성들의 편견 섞인 차별과 비난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각을 이어받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우정’에 연대 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자매애(sisterhood)로 확장했다.

 

오늘날의 우정은 SNS를 통해 유지된다. 현대인들 대다수는 1인 가구이며 관계 맺는 일을 어려워한다.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집에 머무르면서 친구의 근황을 알 수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끈끈한 유대감을 몸소 느끼지 못한다. 또 온라인상에서 만난 친구와의 관계를 ‘친구 취소’나 ‘차단’ 기능만으로 끝낼 수 있다. 아마도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이 유행하면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정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는 건 좋다. 그렇지만 이 우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할수록 같은 예전의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 악마와 마녀의 이미지는 대부분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지옥을 연상하면 바로 떠오르는 악마만 해도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당장 상상이 된다. 그 이미지는 익명의 중세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편견 덕분에 형상화된 것이다. 악마와 마녀의 형상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악마와 마녀는 가끔 잘 생기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못생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 클로딘느 시게르 못생긴 여자의 역사(호밀밭, 2018)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중세 서양의 정신적인 기둥은 기독교였다. 중세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하와(Hawwāh)의 원죄를 근거로 당시 교회와 남성들은 유혹을 일삼는 여성을 악한 존재로 여겨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마녀는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생겨난 희생양이다.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마녀사냥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극심한 기아 등으로 더욱 확대된다. 전쟁의 실패로 인해 불만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권력을 가진 특권층은 사회적인 혼란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특히 노파나 혼자 사는 과부 등 힘없는 여성이 주로 희생양이 되었다.

    

 

 

 

 

 

 

 

 

 

 

 

 

 

 

* 페르난도 데 로하스 라 셀레스티나(을유문화사, 2010)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열린책들, 2009)

 

    

 

마녀로 그려지는 늙고 추한 노파의 모습에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감이 반영되어 있다. 늙고 추한 여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기피 대상이자 혐오의 대상이었다. 나이든 여성은 성애의 대상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했다. 중세에 나이든 여성은 미와 순결의 상징인 젊은 여성의 찬사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육체적 쇠락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의 작가와 화가들 사이에 유행하던 소재 중 하나가 뚜쟁이였다. 남녀의 은밀한 관계를 이어주는 뚜쟁이는 주로 나이가 많은 노파로 묘사됐다. 특히 라 셀레스티나(La Celestina)는 탐욕스럽고 고약한 늙은 뚜쟁이의 대명사가 됐다. 소설 속 전당포는 대부분 사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전당포를 경영하는 사람은 서민을 상대로 고리를 챙기는 악덕업자로 묘사된다.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죄와 벌에서도 살해된 전당포 주인인 노파는 악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 [품절] 피지올로구스 피지올로구스(미술문화, 1999)

* [품절] 피지올로구스 기독교 동물 상징 사전(지와사랑, 1999)

    

 

 

중세 사람들은 밤에 인적이 드문 숲을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숲에 악마와 마녀의 집회 장소인 사바트(sabbath)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숲에 사는 동물은 악마나 마녀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사람들은 모든 동물에게 상징적 의미를 붙였다.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는 동물의 속성과 성경 구절에 나오는 은유의 표현을 분석해 놓은 기독교 동물 상징 사전이다. 피지올로구스는 자연에 대한 박식한 자라는 뜻을 가진 저자의 이름이지만, 책의 제목으로도 알려지게 됐다. 기독교 윤리의 영향을 받은 문화에서 동물은 악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존재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

 

 

아마도 고양이는 마녀사냥의 광풍 속에서 여성 다음으로 가장 많이 희생된 존재일 것이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고양이는 이교도의 상징이자 악마의 앞잡이가 되었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에 따르면 중세에 기록된 마녀사냥 관련 문헌들은 마녀들이 고양이로 변신한다고 증언한다. 물론, 이 허구적인 증언을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다. 마녀사냥 문헌은 마녀로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피해자의 진술보다는 마녀 신고자의 (허언에 가까운)목격담과 마녀재판을 담당한 법조인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세 사람들은 이단적 존재가 된 고양이를 마녀들이 숭배한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무참히 살해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모의재판으로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사육제가 열렸다고 한다. 이 사육제는 부르주아 계급에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놀이 문화였다. 고양이 대학살을 처음으로 감행한 사람들은 파리의 가내 수공업자들이었다. 당시 파리의 가내 수공업은 부르주아에 속하는 장인과 프롤레타리아에 속하는 직인과 수습공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직인과 수습공들은 장인의 부인이 키우는 고양이만도 못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고양이가 먹지 않은 사료를 한 끼 식량으로 먹은 수습공들은 고양이보다 못한 자신들의 삶에 분노하여 길 고양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프롤레타리아 민중들의 저항 의식이 표출되는 축제 형태로 확산됐다.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르네상스, 2004)

* [품절]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들녘, 2004)

* [품절]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들녘, 2001)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까치, 1994)

    

 

 

고양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대부분은 과거에 악마와 마녀와 계약을 맺은 동물로 낙인찍혔다. 중세의 악마 연구자와 마녀 사냥꾼들은 악마와 마녀의 존재를 식별하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논리를 판화나 팸플릿 형태로 유포했다. 영국의 마녀 사냥꾼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1]<마녀의 발견>이라는 책을 써서 마녀를 식별하는 방법과 고문 방식 등을 상세히 정리했다. 그 책의 속표지에 동물의 모습으로 묘사된 악마들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마녀의 문화사(르네상스)고문의 역사(동녘)의 도판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한 동물들은 마녀가 부리는 잡귀들이다. 이들을 퍼밀리어(familiar)라고 부르는데, 고양이와 같은 마녀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동물들도 퍼밀리어에 속한다[2]. 악마 연구자들은 동물을 악마로 분류하여 이름을 붙였다.

 

 

 

 

 

 

 

 

 

 

 

 

 

 

 

<마녀의 발견> 속표지에 고양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동물들이 나온다. 그레이하운드, 코커스패니얼, 토끼, 족제비(정확히 말하면 긴털족제비의 일종인 웨일스족제비) 등이다. 개도 고양이와 함께 악마의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고양이는 비를, 개는 바람을 불러온다고 하여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raining cats and dogs)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3]. 토끼는 번식력이 좋아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졌지만, 악마 연구자들은 토끼의 번식력을 문란한 성행위와 연관 지어 해석하면서 토끼마저도 악마의 동물 범주에 포함시켰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불만이 있는 개인은 자신의 분노를 약자에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 사회에 빈번해지는 여성, 노인,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낯설지 않다. 증오와 혐오를 동반한 폭력의 기원은 마녀사냥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폭력은 그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우리의 일상사에 언제나 간여해왔고 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여러 집단이나 조직에서, 정치의 광장에서, 그리고 인터넷 바다에서 크고 작은 마녀사냥이 연일 벌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둔감할 따름이다. 아주 오래된 잔혹극은 그칠 줄 모른다.

   

      

 

 

 

[1] 매튜 홉킨스의 악행을 소개한 필자의 글. 영국의 마녀사냥꾼(2018111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437641)

 

[2]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 들녘, 2001, 307.

 

[3]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103.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캐모마일 2018-11-1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독했습니다.

cyrus 2018-11-14 17:50   좋아요 0 | URL
TMI스러운 글이라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캐모마일 2018-11-14 18:10   좋아요 0 | URL
포털사이트 기획글 읽는 거 같았어요. ˝숨겨진 악마의 문화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현 상황은 과연 자연스러운 전환기의 모습일까, 아니면 심각한 사회 해체의 과정일까? 어떤 때는 지나친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인간의 의식 구조보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사회가 급격히 변동하는 과정 속에는 어느 정도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가치 합의와 상호 신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행동을 예사롭게 여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전제되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사회 속에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회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의 부당한 요구나 권리 침해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시민의식이 형성되었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기주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 속에서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전념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부당한 행태를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의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개인주의의 성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사회공동체의 과제에 협력하지도, 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냉전은 끝났으며, 21세기에 인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후쿠야마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최종 종착지로 실현되면 역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멈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선택지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신이 《역사의 종말》을 썼을 때,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즉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지 않는 한 역사의 종말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앞으로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장기간 군림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희망을 받아들일 때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은 공산주의가 한물간 체제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정하기에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극단적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사회를 바라보며 이것을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인류로선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자유 시장경제의 장점만 부각하는 건 ‘희망 고문’일 뿐이다.

 

서평의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필자의 염려와 《역사의 종말》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한 이유는 유발 하라리《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약칭 ‘21가지 제언’)의 서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미리 하기 위해서였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혼미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는 책의 서문에 자유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12쪽)

 

 

이 책은 단순히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그저 그런 미래학적 예언서는 아니다. 저자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근대 세계로 향하면서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사람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됐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가 불변의 진리라든가, 완벽한 사상인 것처럼 믿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21가지 제언》의 부제를 빌려서 이 책의 주제를 단 한 줄로 표현하자면, ‘더 나은 자유주의 시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로 볼 수 있겠다. 하라리는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자유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부정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를 제안한 마르크스의 ‘처방’은 틀렸어도 그의 진단에 주목하듯이, 자유주의 역시 여러 모로 한계가 있어도 새롭게 고쳐 나갈 수 있다면 지금도 유효하다.

 

자유주의와 인류는 ‘기술적 도전’과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적 도전’은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알고리즘의 결정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며,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정치적 도전’이란 민족주의의 과잉과 종교 근본주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나는 국제적 분쟁이다. 민족주의자와 종교 근본주의자는 국가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나 핵전쟁 같은 복잡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통해서 해결하기 어렵다. 사회 분위기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만들어지는 가짜 뉴스와 (보이지 않는) 테러의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에 속절없이 갇힌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라리는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나에 대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라는 주체는 합리적이지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살면서 느끼는 나쁜 마음, 슬픈 마음 등 내면의 고통을 용감하게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관찰’하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관찰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환경이나 타인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하라리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제시한 21가지 제언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상식적인 ‘제안’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푸짐한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것처럼 늘어놓았는데,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종이’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21가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음식 가짓수는 많은데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식탁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내린 음식 '처방'은 구체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종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에 먹을 만했던 것은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서문이었다. 눈으로 먹고 난 뒤에 자유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 메뉴가 아쉽다. 먹을 게 별로 없는 마당에 마지막에 ‘명상’이라니. 책을 다 읽어도 다시 허기를 지게 만드는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11-13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루스 박사님 멋집니다. 짝짝짝!!

cyrus 2018-11-14 12:18   좋아요 0 | URL
계속 박사님 소리 들으니까 부담스럽네요.. ㅎㅎㅎ 그런데 ‘Sl루스’를 거꾸로 부르면 안 되겠어요. ‘스루IS’가 되는데, 이슬람 테러 집단 이름처럼 보이네요. ^^;;

2018-11-14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4 12: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ㅎㅎㅎㅎ 저자가 진중하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명상을 언급해서 김이 샜습니다.. ^^;;